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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반점, 국도극장, 정현뷔페, 경동시장이 붐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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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란교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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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개신교 바닥
다국적 회사인 나이키는 무엇을 파는 회사일까? 스포츠와 관련된 상품을 파는 회사일까? 그렇지 않다. 나이키가 파는 것은 나이키라는 브랜드이미지이다. 그래서 나이키는 여러 가지 광고 수단을 통해 브랜드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인지도가 높은 유명스포츠 스타들을 광고 모델로 사용하는 것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나이키의 전략이다. 나이키상표가 붙은 제품들은 제3세계국가에 국적을 두고 있는 공장들에서 값싼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이키는 그들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책임지고 있을까? 아니면 최대이윤을 누리기 위한 경영정책의 일환으로 값싼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참담한 것은 이와 같은 일들이 종교시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진입장벽이 높은 종교시장에서 일정한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서 수요자들에게 높은 인지도를 받으면 일명 잘 팔리는 상품이 된다. 새벽을 깨우리라고 외쳤던 김 아무개 목사는 이제 더 이상 피곤하게 새벽을 깨울 필요가 없어졌다. 구수한 입담과 청계천 달동네 청빈한 목사,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며 시국선언을 했던 실천하는 지성의 이미지를 잘 버무려서 잘 팔리는 브랜드대열에 합류한 그는 이제 그 이미지로 뉴라이트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귀족들과 보수정치권의 고상한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있다. 청량리에서 노숙자들을 상대로 국밥집을 하며 밥퍼 이미지를 구축한 최아무개 목사도 더 이상 국밥집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장 밑바닥 인생들의 대부라는 이미지로 쌓아놓은 대중적 인지도로 그는 평생을 우려먹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피곤하고 지저분한 노숙자들 속에서 부대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이 글을 쓸 당시 최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았다. 더 지켜볼 일이다.) 최목사같이 대중적 인지도는 없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숙자들이나 절망속에서 사회 부적응하고 있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하는 김홍술목사나 인터넷에서 만난 우도라는 필명의 목사도 있다. 김홍술목사는 교회와 사도신경같은 교리개혁을 외치다가 복음교단에서 출교당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교회의 재산을 사유재산처럼 전횡하고 왕권을 물려주듯이 담임목사직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선, 홍, 국 쓰리도들이 감리교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으며 조용기, 오정현, 곽선희, 장경동, 김성광, 전광훈같은 자들이 생업때문에 정보가 부족해서 신학정보들에 우매할 수밖에 없는 신앙대중들의 지지속에 제멋대로 설치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중소형 교회 목사들은 대형교회를 롤모델로 희망하고 있으며 환경이 열악한 미 자립교회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들은 이제 마케팅의 일환으로 학원이나 요식업자들이 하는 홍보방식을 모방하고 있다. 정규, 군, 소 신학대학들은 목사들이 포화상태인데도 자신들의 입지와 밥그릇 때문에 계속해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사회로 배출시키고 있다. 해외선교사들은 좀 더 수월하고 편한 나라와 지역으로 몰리고 있어 해외 선교사업의 중복투자와 낭비가 극심한 상태이다.
부패한 종교업자들
목사들 중에도 치유 받지 못한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대인관계에서 미숙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 보호가 필요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따듯한 마음으로 이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가 아닌데도 방종한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목사로서의 자격에 문제가 있는 자이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그 두렵고 경외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강단에서 설교하고 선포하는 자가 그들이 목숨 걸고 사수하는 주일날, 얼굴을 함께 대하는 이웃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그 가정을 파탄시키고도 뻔뻔스럽게 반성조차 하지 않으며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목사라는 이름으로 신앙대중들을 향해 사랑을 설교하고 있으며, 오히려 개혁을 부르짖는 목사는 이단으로 몰아서 출교시키는 아이러니가 지금 진보라 자처하는 교단 내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러나 목사가 그 이웃의 아내를 범하는 것도 용인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고 개혁을 외치는 자는 내어 쫒아라.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민족자생이라 불리우는 이들 교단목사들은 어처구니없는 아전인수식의 교리해석으로 고대마피아나 조폭식의 연대감으로 뭉쳐서 서로서로를 덮어 주고 감싸주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돌봄은 과연 이러한 것인가? 오히려 스스로와 친구들을 진지한 자세로 평가하고 소중한 신앙대중과 이웃들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성찰적 지혜가 그리스도의 도를 알아가고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기독교를 외치고 있는 몇몇 비 제도권들도 과연 그들이 제도권을 비판할 만큼의 삶을 담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언설과 이론으로서 지껄여 대는 구호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하나의 미신일 뿐이다.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장소라는 대학에서 이런 미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길흉화복을 점치는 한국의 점이나 사주, 무속신앙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결과를 내포하고 있으며 불확실한 삶에 대한 상담과 위로의 역할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구에서도 한 사람의 필체를 보면 그의 성격이나 심리상태 미래를 어느 정도 점칠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는데 한국의 점이나 사주, 무속신앙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종교업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
이제 목사들은 자본과 대중과 시장이 작동하는 시스템에 눈뜨게 되었다. 예수니, 복음이니, 진리니, 하나님이라는 고리타분한 가치들보다 종교시장내의 대중의 기호와 속성이라는 심리적 코드의 궤적을 추적해 따라가서 대중적 인지도를 얻어내는 것이 그들에게 부와 영광과 명예와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그렇게까지 못하더라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보수는 대중의 불안한 심리와 성공과 안정이라는 신드롬에 영합해 예수와 그들 경전을 적당히 가공하고 포장해서 팔고 있으며, 중도보수는 이들 보수의 약점을 파고들어 대중의 헹가래질을 받고 싶어 한다. 진보는 이들 모두의 약점을 파고들며 개혁이미지를 팔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외치고 있는 포장을 걷어내고 속살을 들여다보면 황폐하고 미숙한 삶의 흔적들과 위로와 사랑과 인정을 갈망하는 상처받은 자아와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에고가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들이 서로를 분석하고 손가락질 해대며 자신도 모르게 쌓아 올린 것은 무엇일까? 진리를 싸고 있다가 벗어내 버린 껍질과 허물들이며 허무한 지식의 파편들뿐이다. 진리란 인생의 한 때 어쭙잖은 객기로 뛰어든 실천의 한 단면이나 언어와 사상의 겉멋에 찌든 현기증이 아니다. 크리스챤들이 그 실천과 언어와 사상의 외피 너머로 뛰어 들어가 사생결단을 내지 못한다면 그 실천과 문자와 언설들은 허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을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예수가 말한 진리의 핵심을 파고들지 못한 다수는 이미 종교서비스 업자들이 되어 세속이 주는 달콤한 유혹 속으로 자신을 해체해 버렸고 조금 덜 영악한 나머지들은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게 되었다. 진리를 바로 익혀 가르친다는 종교(宗敎)의 진정성을 놓아 버린 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날카로운 생존의 무게 그리고 그 무게를 지탱시켜주고 더 나아가서 각종 명예와 기득권까지 더해주며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지켜줄 도구와 그것을 뒷받침해줄 적절한 수의 우매한 대중의 헹가래질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게임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과거엔 권력과 결탁한 계급적 체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면 지금은 종교시장안 신앙인들에게 습관처럼 각인되어 그들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생활문화와 그들의 후광과 후원을 받아낼 수 있는 몇 가지 기교와 배경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전적으로는 대중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조용기식의 일그러진 카리스마나 장경동식의 익살과 아전인수, 김문훈이나 김진홍식의 구수한 입담과 달변 또는 카더라 통신과 연합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밥퍼식의 미담이 보수적인 색채의 시장 안에서 힘을 발휘한다면 중도나 진보의 색채를 띤 시장 안에서는 학벌이나 학위, 이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음에도 좀 더 고상한 이미지를 띠고 한국에서 팔리고 있는 정통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이나 각종 브랜드의 자유주의 진보신학 아류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검증할 수 있는 안목을 결여하여 결과적으로 이들에 부화뇌동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무지와 신앙대중이 불안하게 느끼는 실존적 삶의 자리가 이 모든 것들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부패를 가능케 하는 것들
그런데 목사들이나 기독종교관련 종사자들의 추잡한 섹스관련 스캔들이나 이권과 자리 , 정치적 알력관계들을 둘러싼 숱한 비리와 행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또한 이들 부도덕의 장본인들이 별다른 제제를 받지 않고도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신앙인들이 고고한 용서의 미덕을 언제든지 생활화할 수 있을 만큼 내공이 깊어져서 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용서의 관행은 쌍수를 들어 지지하며 기뻐해야 겠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본다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가 한국인들의 생활문화안에서 종교적 전통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일정한 수요가 항상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정성이 없더라도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제도권의 논리와 권위를 수용한다면 제도권의 후광이 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이며,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 활동이라는 것이 수행과 실천보다는 기복적이고 제의적인 생활습관 형태가 다수이기 때문에 성공과 번영과 안정이라는 코드 속에 포용이라는 가면을 쓰고 묵인되는 것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카르텔을 형성한 목사들이 스스로도 자신의 종교적 성실성이 너무나 불완전하고 자신들도 언제 도덕의 파산자로서 피고의 자리에 서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된 사안이 아니라면 서로서로 덮어 주고 감싸주는 보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교리와 관련된 부분은 자신들의 존립과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니 이를 악물고 대처하지만 부도덕한 비리들에 대해서는 용서와 관용이라는 미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덮어서 자신들을 보호하는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신학세계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신이 설자리가 없게 된 것은 신앙대중들에게만 쉬쉬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순진한 몇몇 목사들을 제외하고 판도라의 상자안을 들여다보아 숨겨진 내막의 진상과 돌아가는 판에 대해서 감을 잡게된 영악한 다수의 목사들에게 그들을 제어해줄 윤리, 도덕적인 제어장치나 경외하고 두려워 해야 할 신은 철지난 시트콤에 불과하게 됐다.
과거에는 왜곡된 교리와 급박한 생존의 위기 속에서 일탈을 저질렀다면 이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들을 길들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금하고 있는 죄들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영리하게 수습해 갈 수 있는 기교와 분위기의 아우라를 이들은 잘 진화시켜 나갔다. 또한 그들이 보는 성서는 적당히 버무린다면 그들의 비리들을 얼마든지 비호해줄 수 있는 기가 막힌 자원들을 무궁무진하게 담지하고 있다. 오히려 자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순진한 아모스과의 목소리들은 이단과 배교라는 편리한 수단으로 무마시켜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미 기독교 최후 보루가 되어야할 신학교들마저 학문적 순수함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추잡한 비리와 자리와 세력을 둘러싼 정치적 알력싸움의 난장판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와 학문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희소한 스데반들은 그곳을 떠나간 지 오래되었고 자신의 터전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집요하고 악착같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다구니들만이 그 폐허위에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보니 민족자생이니, 새로운 기독교니 하는 브랜드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는 근본주의자들 보다는 유연하지만 제도권들이 보여주는 현장목회는 근본주의와 다를 것이 없고 비 제도권들은 기독교신앙의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는 내공과 신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어떤 면에서는 보수신앙인들보다 더 추잡하고 오히려 그들의 열린 신앙관은 자신들의 자유분방한 생활태도에 대한 솜씨 좋은 변명으로 작용할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이 말만 무성하고 요란한 그들만의 잔치를 향해 무서운 부메랑이 이미 기독교 밖에서 서서히 무르익어 점점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온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몇몇들도 이것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안적 고민이라는 것도 자신의 입지와 기득권을 침해받는다면 몸을 사리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풀어내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저 마다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의 주머니는 치열하게 챙기고 있는 상황에서 실타래는 더욱 엉키고 그 끝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한국의 기독교는 세상에 대해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며 그것은 오래 누적되어 근래에 드러나 현상이 아니라 기독교가 방향을 잃고 문자 주의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아주 오래전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짧은 기간 내에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자화자찬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내에 급속히 부패할 수 있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가슴속에 억눌린 것을 토해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하여 기독교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대가 실체를 제대로 진단해 보라는 것이다. 내가 경험해보건대 한국의 일반 기독교신앙대중들은 종교적인 진정성과 열망이 높다. 그리고 옳게 이끌어줄 수 있는 안목있는 종교인과 씨스템만 있다면 그들의 순수한 열망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수 있으며, 피와 투쟁을 부르는 숙청의 드라마가 아니라 사회를 올바르게 개혁해내는 힘으로도 흘러갈 수도 있고 특별한 환경운동을 하지 않고도 자연과의 아름다운 공존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겨자씨가 그대의 내면의 밭에 심어져 싹이 트고 올곧은 나무로 자라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쓰레기요, 배설물에 불과하다. 예수가 말하지 않는가? “너희는 소금이다.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으면 어디에 쓰겠는가? 길에 버려지기 밖에 더하겠는가?” 일상에 대한 관찰을 통한 예수의 이와 같은 통찰은 무서우리 만치 날카로운 것이다. 그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저 사람들 앞에서 아는 체하며 현학을 거들먹거리는 양아치질이나 선한 양떼들을 등쳐먹는 생업의 수단밖에 더 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중국 조사선의 이단아 임제도 모든 조사와 부처의 가르침을 똥을 닦는 휴지라고 거침없는 표현을 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도 자신이 배우고 익혀왔던 사유의 결과물들을 배설물이라 하지 않는가? 기독교내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세력들도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의 정수를 바로 알아 스스로 체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약점의 한 터럭이 그들을 진창안으로 끌어들여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달려갈 길을 죽도록 다 달려갔으나 마지막 순간 천국 문 앞에서 버려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왜 벌어 지는가? 이것은 이들의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온갖 비리와 패악 질을 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나에게 그들을 비난할 어떤 권리나 자격이 있는가? 그들을 비난한다면 내가 그들보다 높고 고귀하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나야말로 가증스런 에고에 물든 위선자가 될 것이다. 인간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들이 그렇듯 이분법의 산물이다. 생물체는 아주 먼 과거에 개체 이분법으로서 개체로 깨어났다. 이렇게 개체로 깨어나는 작용이 개체 이분법이다. 깨어난 개체는 그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락을 쓰는데 이것이 가치 이분법이다. 가치 이분법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자연선택, 적응, 진화, 유전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겠다. 개체는 자연의 날카로운 칼날이 들이대는 과제를 풀어낼 능력이 없다면 자연의 선택에서 제외된다. 적응한 개체는 진화되어 자신의 대까지 쌓아놓은 여러 가지 적응전략인 유전자 풀들을 다음 세대로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개체의 고유성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겨 놓기 위하여....
그러나 불교의 차원에서 본다면 개체란 허상이요, 무명이다. 개체란 무명의 탄생이요. 그 무명은 계속되는 업을 만들어 대대로 상속해 간다. 유전자 풀이란 이와 같은 무명의 계속되는 상속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실상을 바로 깨달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개체는 이 허상 속에 살아남기 위하여 무명이 시키는 대로 작용해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대로 깨치지 못한 목사들이 그럴 듯한 모습으로 출발해서 후에 허수를 두게 되는 것은 무명과 이분법의 작용을 벗어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이분법의 욕망의 노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결국은 내적 이분법의 프로그래밍에 끌려가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실상을 통찰하고 거기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 세상과 크리스챤, 그대의 실체를 꿰뚫어 하나님이 이미 이끌어 가고 있고 이미 임해 있는 하늘나라를 누리고 살라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지 않는가!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설물이 되어 뒤로 버려지지만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은 너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는 온전히 꿰뚫고 있다. 인간의 모든 추악함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크리스챤들이여! 관찰해보라!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가? 사람들의 마음의 한 자락, 한 자락이 움직여 온갖 조화를 부려 죄도 짓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하고 사랑한다고 부르짖다가 저주를 퍼붓기도하고 평화를 외치다가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챙겨가라고 하는 것이 예수와 고타마와 마하비라와 소크라테스와 선사들과 수운선생의 가르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