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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현 시집 『빨간낮달』해설
다양하지만 한결같은 목소리의 힘
- 해설 : 시인 김옥전-
인간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세상과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이들에 관여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고전 시가의 경우에는 더 한층 - 깊은 산이나 바다에 틀어박혀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온전히 세상을 떠날 수 없다. 사회와 인간이라는 범주를 바꿔서 산이나 바다라는 세상을 만들고, 자연과 사물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들과 인연을 맺을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에 관여하고 이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언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자들이다. ‘시인은 혁명의 대변자이기도 하고, 역사의 목소리이기도 하며 신화적 존재이거나 실질적으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은 우리들이 밑줄을 그어가며 당당하게 ’시‘라고 내세울 각오가 되어 있는 그 신성 불가침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자’라고 말한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모든 영역에서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이가 시인이며, 남선현 시인은 이에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1. 옆으로 누운 세월을 바로 세우는 힘
남선현 시인의 시집 『빨간 낮달』에는 다양한 주제의 시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채롭고 삶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촉’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중 그의 시선이 아프게 머문 장소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맞닿은 곳이다. 「4월은」이 그렇고, 「노오란 리본 (귀환)」이 그렇다. 굳이 ‘참여시’라든지 ‘앙가주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4월은 민족의 수난과 상처로 얼룩져 있고 시인은 4월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고발하고 지적하며, 아픈 4월을 감싸 안고 치유하려 한다.
이 땅의 서러움
되새겨놓은 유채가
물결 이루면 슬픔의
언저리는 산이 되었다
칸칸이 찍은 동그라미
붉게 타올라 눈시울 적시고
핏빛은 어느새 연둣빛
햇살 품고 떠나려한다
생 살 찢어 갈라놓은
허리 휘어잡고 속으로
참아야 했기에 73년의
아픔은 자지러져 버린다.
끝자락에서서 위정자들의
꽃놀이도 감흥 없이 덤덤함은
눈물 속에 씻긴 사월이기에
아리게 떠나고 있다.
-「사월은」전문
유채꽃 반발한 제주의 4월은 흔히 신혼의 꿈과 봄 여행으로 사방 천지가 활짝 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는 70여 년 전 입은 커다란 상처가 옹이 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에서 유채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으로 치환된다. 산을 이룬 ‘슬픔’은 시인 혼자만이 느끼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민족의 슬픔이다. 시가 심미적 아름다움에서만 머물 수 없는 시점이기도 한 이 부분이 시인으로 하여금 ‘슬픔’이 ‘산’을 이루게 하였다고 보게 한다.
‘생 살 찢어 갈라놓은’사건을 견뎌야 했기에 ‘아픔은 자지러져 버’릴 정도로 진저리가 났던 사건, 그런데 가해자도 피해자도 우리 민족이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에 빠져야만 했던 사건을 겪으며 시인의 자의식은 민족의 집단의식을 대변하게 된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외면하려 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시인들은 자꾸만 꺼내고 후벼 파려 한다. 이렇게 아름답지 못한 비판적 시어들을 앞장세워 우리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슬픔을 꺼내놓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비판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묻혀있는 진실을 불러 끌어안는 추모이며 제사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위정자들의//꽃놀이도 감흥 없이 덤덤’하게 바라본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4월이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눈물 속에 씻’기고 정화되고 승화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소위 ‘위정자’로 불리는 이들은 시인이 비판하고 싶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꽃놀이’를 한다. 시인은 그 꽃 놀이판을 뒤엎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덤덤’하게만 바라본다. 이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내 민족이라는 데서 오는 깊은 슬픔이며 용서와 화해로 이들을 끌어안아야만 하는 사명의식 일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나마 상처를 꺼내고 되새기고 승화시켰기에 4월은 ‘눈물 속에 씻’길 수 있었고 구천을 맴돌던 한도 ‘아리게’나마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민족의 슬픔을 이렇게 위로하며 자신 또한 위로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삐딱한 시선이 없다. 설령 삐딱한 시선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시선 뒤에는 감싸 안음이 있다. 즉, 시인은 조롱이나 경멸 보다는 고양된 언어로 성숙하게 감정을 다스리려 한다.
애타는 기다림 아직도 떠도는 님들의 부딪힘
천칠십삼일 맹골수도 거친 파도 잠재우며
가슴으로 녹아내린 간절함 팽목항에 남겨두고
나비가 되어 노랗게 훨훨 날아
목포 신항 철망 사이로 나부끼고 있다
상처 안고 흐느끼는 절절함
가슴에 내린 비가 그리운 나비 되어
세월 삼킨 채 아직도 가족 품에 안기지 못한
아홉 명의 천사는 그렇게 오늘도 희뿌연
눈물 뿌리며 깊이 외치다 가슴에 내려 앉아
덩그런 쇳덩이에 묻혀 이 땅의 아픔을
몽땅 그리고 있다.
-「노오란 리본(귀환) - 2017.4.16 목포 신항에서- 일부」
우리의 역사에서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날도 공교롭게 4월이다. 제주 4.3사건도 4.19혁명도 4월에 일어났다. 시인 엘리엇이 말한 대로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닐 수 없다. 국민 모두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던 세월호 사건을 주제로 시인은 또 한 번의 제사를 올린다.
‘애타는 기다림’과 염원은 시인에 의해 ‘나비가 되어 노랗게 훨훨 날아’승화 된다. 절망을 정화해 희망으로 탄생시키는 힘이 시에 없다면 그것은 다만 사실을 기록하는 문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아픈 영혼을 위로하고 재회를 기원함으로 산자나 죽은 자 모두를 위로하는 힘이 있다. 때문에 남선현 시인에 의해 ‘나비’로 재탄생된 아픔은 이제 ‘훨훨 날아’갈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아픔도 정치적 모순도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을 믿는다.
이렇듯 시인은 4월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세상에 보여주고 위로한다. 누구의 눈치를 보려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위정자’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저항의식보다 ‘민중’들에 대한 위로와 연민의식이 앞장 서 있기 때문이다. ‘섯알오름 누워계신 4.3의 희생양께/머리 숙여 두 손 모아 영면을 기원’(「더푸섬」)하기도 바쁜데 눈치를 살필 시간이 시인에게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시인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앞세운 올곧은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2. 자연과 문명 사이에는 해학이 있다
시인의 시선은 사회와 역사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의 촉수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든 것을 지나치지 않으려는 듯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시인은 늘 고단한 이들일 게다. 시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자연’과 ‘문명’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중심적인 사고를 가져왔다. 사물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그것에 인격을 부여하고 심지어 자연이 인간을 좌우한다는 신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와 함께 찾아 온 물질문명의 편리함은 ‘자연’을 내몰고 ‘이기심’을 들어앉혔다. 어느새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앞세워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인간이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 이르렀다.
푸른 녹음이 산사를 시원케 하는 어느 날
정적을 깨는 울음소리 들려
소리 나는 곳 바라보니 절구통 물위에는
연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맑은 꽃잎엔 청개구리 한 마리
구도자의 자세로 두발 들어 합장 한다
저 녀석은 언제부터 제 자리 잃고
이곳에서 울음 터뜨리고 있을까
터전까지 황소개구리에
내어 줄 수밖에 없는 현실 아쉬워하듯
인기척 나면 저렇게 울고 있나 보다
누구의 삶터인데 누가 지킨 자연인데
겁 없이 찾아 든 이방인은 인간의 욕심 등에
업고 포악한 이빨 들어내 위용 자랑하고 있다
국적 없는 잡동꽃 뿜어낸 향기 독하게 자극하고
초라하게 내팽개쳐진 야생화는 끈덕지게 피어
조화롭게 자연의 모습 지키며 머금은 미소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청량한 풍경소리
개구리 존재마저 잊은 채
산사는 만물 구도하는 위세 부리고
찾아온 모두는 그렇게 개구리를 지나치고 있다.
-「개구리의 외침 4-11」 전문
시에서 시인은 ‘푸른 녹음이’ 깔린 어느 날 산사에 간다. 그곳에는 ‘연꽃’이 피어 있다. ‘연꽃’은 불교의 기본 사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이 즐겨 찾는 매개체가 되곤 한다. 그런데 남선현 시인은 이 ‘연꽃’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개구리’를 바라본다. ‘구도자의 자세로 두발 들어 합장 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시인은 울음의 원인을 물질 문명화 된 세상에서 찾는다.
‘저 녀석’으로 지칭 된 개구리는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시인은 개구리 울음의 원인을 ‘황소개구리’로 대유된 ‘문명’의 횡포에서 찾는다. 터전을 잃어버린 토종, 전통의 것들이 외래의 것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현대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이방인’을 원망하고 야속해 한다. 이 시에서는 ‘개구리’와 ‘황소개구리’의 대칭뿐만 아니라 ‘잡동꽃’과 ‘야생화’로도 대칭된다. ‘자연’과 ‘문명’이라는 대립구조 속에 표현된 두 이미지의 대립은 우리의 이기심이 정신적 가치를 버리고 물질적 가치를 쫓는 탐욕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욱 슬픈 것은 우리가 파괴한 ‘자연’에 의해 우리가 끝내 파괴 될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만물을 구도하는 위세’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산사’를 찾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자신들의 미래인 ‘개구리’의 울음을 듣고 있지만 그조차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집에 돌아온
몽돌아재가 씩씩거리고 있다
워머 환장 하것능거 어떤 상열이것들이
저그 산허리 습진 곳 하늘하늘 안개피면
무작에 이쁜디 왠 작것들이 뭉개부럿당가
에말이요 영감 인자 그만하씨오
포도시 낫어 온 빙 도지것쏘
연신 아짐이 아재건강 염려하며
말리고 계시다 한마디 거든다.
그랑께 말이여 맬갑시 길 낸다고
또 어쩌자고 바랑개빈가 뭔가
떠와죽것는디 때양 거시기 한다고
글고 쩌그 쩌쪽엔 뚝막아 농사짓것다고
해놓고 뱅장 맨들어 앵앵거리고
그 뭐어다냐 묵고살것다고 그랑것이여
근디 저라고 뭉개농께
장맛비에 방천나서 꼬치밭 뭉개불고
고살 꼬랑 넘쳐서 옴싹 떠내려가고
바람길 열어 주던 봉오리를
및날미칠을 문질러 흔적도 없이
맨들고 이것이 뭔 조환지 몰것네
뭉개부럿당께 어따 팔짝 뛰것당께
이것을 그랑것이 누구 짓거리랑가
났어 서 왔는디 이꼴본께 없던 빙도 도지것네
아따 참말로 아따 참말로
아재 열불이 떵떵거리는 땅을 부글거리게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전문
시인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대립적 구도를 풍자와 해학적으로 풀어가기도 한다. ‘저그 산허리 습진 곳 하늘하늘 안개피면/무작에 이쁜디 왠 작것들이 뭉개부럿당가’ 라며 산을 뭉개버린 ‘문명’의 횡포를 비판한다. 특히 ‘상열것들’이라든지 ‘작것들’이라는 욕을 적나라하게 사용하면서도 사투리를 활용해 은근슬쩍 웃고 넘길 수 있도록 한 장치는 재미를 더한다.
풍자와 해학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조롱하는데 자주 쓰는 기법이다. 이 기법을 활용할 때 또 흔히 나타나는 것이 ‘사투리’이다. 시인은 전라도 출신 이라는 장점을 이용하여 전라도 특유의 찰진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한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능청스러움과 사실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시점일 것이다.
하지만 ‘길’을 만들고 ‘바람개비’를 세우고 ‘뱅장’을 만드는 행위들이 ‘묵고살것다고’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뭉개불고’ ‘흔적도 없이//맨들고’ 하는 행위가 ‘뭔 조환지’몰라 ‘환장’할 수밖에 없다고만 표현한다.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그것으로 파괴되는 세상에 대한 비극적이면서 역설적인 상황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환장’할 노릇인 시인의 아픔은 겨우 ‘났어 서 왔는’ 병을 또 도지게 만든다.
시인의 능청스러움과 위트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큰골에도 빈독골에도/따라 다니며 구~구/귀가 따갑다 팔십일이냐/이구 십팔이더냐 슬프게 들린/울음소리가 평화롭지 않다’ (「구~구」)에서 보듯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울음 소리를 ‘구~구’라고 두 번 지칭하여 ‘팔십일’을 만들기도 하고 ‘구,구’를 ‘이구’로 표현하여 ‘십팔’이라는 비속어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동음이의어와 유사한 단어의 반복을 통한 언어의 유희로써 풍자와 해학에 대표적으로 쓰이는 기법이다. 이를 이용해 시인은 ‘개발’이라는 폭력으로 희생되는 ‘흙’이라는 자연을 안타까워하면서 ‘팔십일든 십팔이든 평화여 오’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한꾸네 달고왔다 휩쓸고 가면
농알농알 구르는 모래알 사이엔
청소부와 의사 사이에 내가있다
알든 모르든 지가 좋아 맨발로
살살거린 모래 밟다보면
그곳엔 콩알콩알 빗대는 죽음이 있다
개발 게발이냐 계발이더냐
토막난 파괴 피바람 되어
구름떼 몰고 와 검게 삼키고 있다
얼그렁설그렁 한꾸네 살잖께
썸벅썸벅 파고드는 나는 곪다
못해 고약한 냄새만 뿌리고 있으니
혼자 있으니 후련가 기막힌가.~?
-「한꾸네 살잖께 -엽낭게」 전문
이 시에서는 ‘농알농알’ 이라든지 ‘살살’거린다 또는 ‘콩알콩알’ ‘썸벅썸벅’ ‘얼그렁설그렁’등의 울림소리와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부여함으로써 경쾌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시가 주는 미적 즐거움에는 골계미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골계미는 단순한 즐거움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연민이라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를 능청스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
시에 등장하는 ‘한꾸네’는 여수의 ‘한꾼에’라는 지명인 듯하다. 전남이 고향인 화자는 전남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향토적이고 전통적인 즐거움을 더해준다. 관광객이 돌아간 ‘한꾸네’ 모래사장일까. ‘한꾸네 달고왔다 휩쓸고 가면’ 허전한 모래밭 ‘청소부와 의사 사이에 내가있다’고 표현한다.
한 여름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의 무리가 지나간 뒤 쓸쓸한 모래밭, 그러나 정말 쓸쓸한 건 사람이 아니다. 소제목에서 지목한 ‘염낭게’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사람들의 맛난 별미가 되어 껍데기만 남은 채 버려진다. ‘청소부와 의사’라고 한 것을 보면 모래밭을 지나가던 누군가는 발바닥에 해산물 껍데기가 박혔을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일 것이며 시인은 ‘콩알콩알 빗대는 죽음’을 발견한다.
또한 시인의 시선은 자연의 파괴자로 문명을 지목한다. ‘개발 게발이냐 계발이더냐’라는 행을 보면 동음이의어, 유사한 발음 등 유희적 언어를 가볍게 사용했지만 ‘개발’이라는 문명화가 ‘게발’이라는 자연을 파괴한 가해자임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상의 전개가 작고 개인적인 것에서 크고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는 부분이다. 시인은 ‘곪다/못해 고약한 냄새만 뿌리고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면서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후련한가 기막힌가?“
3. 추억과 사랑의 현상학
저녁부터 지끈거리던 이가 탈이 났다.
뜬눈으로 새운 밤
번개치고 천둥으로 들쑤셔 놓으면
뒤틀림은 신음과 한 숨 뿐이다
이튿날 치과에 들려 접수 하려는데
흰 비닐봉지 몇 개 놓여있다
합죽이가 된 봉지 주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오래 전에 아련하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흥얼거림
고통을 참기위해 주문 외듯
밤새 서성이며 파리해진 입술 앙당물고
가슴에 맺힌 침묵 소리죽여 쏟아내며
오물거리던 모습 어른어른 겹치고 있다.
욱신거린 놈 비틀어 뽑고 죽여 약솜 물고
계산하며 봉지를 자세히 보니
그것은 틀니였다 임플란트 할 돈 없으면
틀니로 하라며 설명 하는 간호사 곁엔
백발성성한 아짐 망설이며 얼매나 살것다고
아프지나 않게 약이나 지어주랑께 잉
처방전 들고 걷기도 힘겨워 느릿느릿 약국
향하는 뒤 모습 바라보는데
희끄무렇게 멀어지는 그곳 엔
뻐짝 다가온 내 모습 타인처럼 스친다.
-「간극(間隙)」전문
시인의 시는 까칠하고 깐깐하다. 하지만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아니 그보다 원래 시인은 매우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특히 시「간극」에서 보이는 현상학적 구조는 화자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형식이다. 이야기 식으로 너스레를 떨어나가는 설정 속에 사랑이 있고 추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이 시 역시 이가 아파 치과에 간 시인은 ‘합죽이’가 된 어르신들을 만난다.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시인이 ‘어머니의 흥얼거림’을 추억해 내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인의 어머니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아픈 이를 ‘앙다물고’ 고통을 견딘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시의 1연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뜬눈으로 새운 밤/ 번개치고 천둥으로 들쑤셔 놓’는 고통임을 시인은 미리 고백한다. 그 고통을 ‘어머니’들은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얼매나 살것다고/아프지나 않게 약이나’ 처방받아 약국으로 향하는 대상의 모습에서 고통을 참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미래의 자신을 상상한다. 인생이 유한하기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가오는 늙음. 빗겨갈 수 없는 그것이 어색하고 ‘타인’을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애들이 머물다간 방에 온기 남아 이불 젖히고
그 자리에 누워 방안 가득 피워 놓은 해묵은 꽃
한 아름 품에 안고 향기에 취해 잠을 청해본다
명절 보따리 풀어놓고 따사로운 햇살에
지난날을 버물어 전부치고 나이를 끓여
한입 가득 넣고 얼음 같은 몸을 녹이던
녀석들 마음이 온몸에 퍼져 등짝이 넉넉하다.
며칠지난 골목엔 들고양이 울음 뿐
떠난 자리 시려와 스산함 깨우고
그마저 시끄러운지 컹컹대는 앞집 살살이가
아이들 웃음처럼 왈왈거린다.
어른거린 꽃들이 바람에 날려
가슴팍에 내려앉아 햇빛 저미고
애써 미소지어보지만 흩어진 잎들
마음 안에 갇혀 다음 명절 손꼽고 있다.
이내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 매구소리
달빛 한 송이 끌어안고 하얗게 내려앉아
토닥토닥 부럼 깨물던 녀석들 이름 부르며
액운 쫓듯 사방 휘저어 선잠 감추고 있다
- 「부럼」전문
「간극」이 ‘어머니’를 추억하며 ‘늙음’에 대한 감회를 표현한 시라면 이 시는 ‘아이들’로 표현된 지식들 또는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애들’은 이미 가고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자리에 누워’ 그 사랑스러운 이들을 떠올린다. 더욱이 ‘지난날을 버물어 전부치고 나이를 끓여’ 낸다는 알레고리는 그리움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 왁자하게 머물다가 떠난 자리엔 ‘고양이’와 ‘삽살이’가 남아 있고 시인은 ‘떠난 자리가 시려’온다. 그러나 아버지이거나 할아버지일 시인은 ‘애써 미소 지어’ 그리움을 달래고 ‘다음 명절을 손꼽’는다. 그리움이 가지시 않는지 시인은 ‘선잠’을 토닥이면서 ‘부럼 깨물던 녀석들 이름을 부르며’밤을 지새운다.
어떤 그리움보다 더 아름답고 강렬한 그리움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에 대한, 그 자식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서야 이렇게 눈물 나는 시가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때문에 시인에게서는 직설적이고 깐깐한 시선 뒷면에 배경처럼 자리 잡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는가보다.
시인이 추억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도 특정한 곳이 아니라 모든 곳이다. ‘글벗’이며 ‘친구’며 ‘연인’이 그렇고 (「유월을 맞으며」)고덕에서 만난 여인에 대한 ‘아름답고 애잔하다’는 표현이 그렇다.(「고덕에는」) 그의 시를 관통하는 소소한 추억들과 이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들은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재미있게 묘사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남선현 시인의 시집 『빨간 낮달』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깐깐한 시선이 있는가 하면 전통적이며 해학적인 언어들을 이용한 자연과 문명에 대한 묘사가 있고 사랑과 추억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낭만적인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토록 다양한 목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관통하는 한가지의 줄기가 있었다. 그것은 시인이 대상을 바라보는 한결같은 시선 즉 ‘애정’이었다.
그의 시는 서정시이지만 단순한 서정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학과 풍자가 어우러진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이 숨어있는가 하면 아픈 것들을 감싸 안고 위로하려는 태도가 있다. 한편 그가 자주 다녔던 것으로 추측되는 ‘바다’와 ‘길’들을 통해 가깝거나 먼 주변의 대상들에게 갖는 연민 또한 눈 여겨 볼만 하다.
끝까지 이야기식의 어조를 유지하면서 감정에 몰입하는 것을 배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픔이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세월동안 시 쓰기를 통해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하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양하지만 한결같은 목소리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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