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아침부터 짐을 꾸리고 함안으로 출발했다. 고샅이 너무 좁아 집 앞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하고, 천정 높이나 낮아 장롱을 세우며 낑낑대고, 짐을 이곳저곳에 쑤셔 박아도 들어 갈 짐은 마당에 널려 있고. 마음이 심란해지고 이곳에 살수 있을까 답답해지기도 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대충 방바닥 걸레질만 하고 나니 해가 저문다.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니 저녁 일곱 시. 동네가 조용하다. 한참 네온사인이 번적이고, 저녁운동을 하는 사람, 퇴근하는 사람,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시끌벅적할 시간인데, 귀뚜리 우는 소리만 가득할 뿐 차 소리도 사람소리도 없다. 마당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별 이 가득하다. 가슴 속을 파고드는 공기가 너무 맑다. 집 뒤는 봉화산, 앞은 여항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마을 앞엔 서북산 별천 계곡물이 흐르는 이곳. 정말 내가 잘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짐을 풀러 놓고 보니 신발은 수십 짝인데 신발장이 없다. 아내는 읍내에 나가 하나 사오자고 한다. 사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짐이 너무 많아 이토록 이사하는데 고생했는데 또 사다니. 그래서 생각 난 것이 어제 고방을 정리하다 봐둔 널빤지들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싶어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해 신발 넣을 곳을 만들었다. 아파트에 이것을 놔두면 귀신 나올 집이라 할 건데, 시골집에 만들어 놓으니 안성맞춤이네.
늘 부족하고 없으면 살려고만 생각했지. 이젠 만들어 쓰자. 낡고 버린 것들을 이용해서 말이야. 버리면 없애려고 또 돈이 들지 않는가. 한 푼 더 벌려고 눈이 벌겋게 일을 하고, 남을 짓누르고 오르려 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많은 사람들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에서 헤맸구나하는 생각이다. ‘오늘 내가 가려는 길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행복의 길인 거다.’라고 생각하니 몸에서 새 기운이 불끈불끈 솟아난다. 오늘 밤을 자고나면 아팠던 몸과 마음이 가뿐해질 것 같다.
태풍으로 공장이 망가져 가려던 일터가 어긋났었는데, 오늘 그 공장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공장으로 나올 수 있냐고. 집을 옮기니 꼬였던 일도 술술 풀리는 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모든 것을 좋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생각하자. 맑고 밝은 생각은 일에서도 힘이 나게 한다. 어려운 일도 웃으며 헤쳐 나갈 수 있다. 웃으며 일을 할 때 힘도 들지 않고 아프지도 않는 법. 공장에도 가야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니 바쁘겠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이 있다. 이웃과 친해지는 것이다. 오늘 팥과 쌀을 아랫마을 친구의 도움으로 준비했는데, 내일은 떡을 만들어 동네에 돌려야겠다. 이곳에 계시는 어른들께 농사도 배우고 삶도 깨우쳐야지.
내가 가려는 길은 홀로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새소리나 들으며 사는 것은 아니다. ‘되살이’의 삶은 사람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삶이지 아닐까. 경쟁을 일삼는 사람살이가 아니라 서로 아픔과 슬픔을 기쁨과 노동을 나누는 삶일 거다. 사람만이 아니라 새나 짐승들과도 서로 나누며 도우는 함께 사는 세상일 것이고. 나무와 풀 그리고 흙과의 새로움 만남인 거다. 사람의 욕심으로 자연을 부수고, 자연은 사람에게 물난리나 산사태로 자신의 아픔을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지키고 더욱 기름지게 사람은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자연은 사람에게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터를 주는 함께 살아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지 아닐까. 자기만의 욕심을 챙기는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더 약았다고 말들도 하지만 난 다르게 믿고 싶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마을에 사람이 든다고 먼저 대문을 스스럼없이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직은 논을 일구고 밭을 갈고 있는 농촌이지 아닌가. 돈을 흔들며 땅밖에 모르고 살아 온 사람들을 유혹하는 ‘돈(?)사람’들이 덤비지만 않는다면 가장 솔직하고, 참된 삶을 살아가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고, 땅을 지키는 땀방울을 흘리며 살아가는 까닭일 거다.
농촌 투신이니, 귀농이니, 생태 농업이니, 자연 속의 삶이니 하는 말도 옳고 좋지만, 먼저 땅을 일구는 농사꾼의 맘을, 농사꾼이 흘리는 땀의 속뜻을 깨닫지 못하면 모두다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2003. 9.26)
10.
아침에 일어나면 물병을 챙겨 집을 나선다. 벌써 집집마다 바쁘다. 불을 지피기도 하고, 마당을 쓸기도 하고. 일찍 잠들었던 마을은 새벽을 맞이한다. 참 오랜만에 아름다운 새벽을 본다. 밭에 심어둔 열무며 배추는 이슬을 머금어 더 싱싱해 보인다. 마을 앞 냇가에 내려가 얼굴과 머리를 씻는다. 손이 아릿해지고 머리가 얼얼하도록 차갑다. 소나무며 고마리, 달개비, 물봉선 같은 들꽃과 함께 걷고 있으면 온갖 시름이 사라진다. 약수터에서 병에 물을 담고 한 모금 들이키면 몸속의 더러움이 함께 씻게 내려가는 것 같다. 맨손 체조를 하고 동녘 봉화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해의 기운을 코로 빨아들여 뱃속에 채운다. 이렇게 좋은 것을 홀로 갖는 것이 미안 할 정도다.
집에 들어와 방을 쓸고 닦으면 아내는 아침을 준비한다. 겨리도 오늘부터 마을 아래 초등학교에 있는 어린이집을 가려고 부지런을 떤다. 일터는 집에서 팔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파수 농공단지에 있다. 공장 뒤는 산이고 앞에는 논이 있다. 일터에서 새로 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어제는 창원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주섬주섬 챙겨 마을 위 별천계곡에 자리를 폈다. 널찍한 돌 위로 계곡물은 시원스럽게 달린다. 겨리와 또래 친구들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바지에 물이 젖자, 바지를 아예 벗어던지고 빤스 바람으로 물놀이를 한다. 춥지도 않은지. 아내와 놀러 온 남숙씨는 산에 풀과 나무를 찾으러 올라가더니 생강나무 잎이랑 국화 꽃잎 그리고 여러 가지 풀들을 캐서 내려온다. 생강나무 잎이 몸에 좋아 밥을 싸서 먹겠다고 하고 국화꽃잎은 차를 끓여 마시면 백 살까지 살수 있다고.
아내는 우리 마을 뒷산에 으름나무가 많다는 소리를 윗집 할머니한테 듣고 오더니 내일은 할머니하고 으름을 따러 가기로 했단다. 할머니는 지금이 뱀이 많이 나오는 철이라 큰일 난다고 말렸나 보다. 그래도 으름 열매가 꼭 보고 싶다고 하자 할머니는, 임신한 새댁을 데리고 산에 갔다가 새댁이 독사에 물려 아이를 잃은 이야기를 하며 겁을 주더란다.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르자 내일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해줬다고 좋아서 싱글벙글 이다. 내겐 내일 으름 열매를 맛 뵈어 준다고 하고. 나도 솔직히 이상권님이 쓰신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를 읽고 무척 궁금하고 먹고 싶었는데 내일이 기다려진다. 엊그제는 고들빼기김치를 담겼다고 길섶에 핀 고들빼긴지 씀바귄지 다른 풀인지도 모르면서 따오더니 한다는 말이 독초는 아닐 거야란다. 이러다가 내 몸이 아내의 풀꽃의 실험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랫말 민엽이네 밭에서 딴 고구마순 김치는 맛있었지만 말이야. 재미를 단단히 붙인 모습이다.
정말이지 심심할 틈이 없다. 마당에 나가면 고치고 만들어야 할 일감이 넘치고, 대문을 나서면 산이요 계곡이요 밭이니 어디 쉴 짬이 없도록 재미가 난다. 쉬는 날이면 돈을 쓰며 막히는 길에서 짜증을 내가며 누려야 했던 일들을 이제 내가 사는 마을에서 날마다 누릴 수 있으니 행복에 겹다. 시골에 가면 불편해서 어찌 사노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아파트에서 어찌 갇혀 사노하며 되묻고 싶다. 도시에서 누리는 문명이나 물질이 주는 편리함은 사람과 자연을 ‘죽이며 얻는 혜택’이라면 아직 돌담과 흙벽이 살아 있는 시골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함께 ‘살리는 풍요’가 넘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삶을 지키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일에 끌려 다니며 하는 성실이 아니라 내 손으로 생명을 살리는 삶을 가꾸려고 부지런해야 한다. 자연이 내게 주는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면 땅에 사람의 땀을 심어야 한다. 그래서 내 사는 마을은 새벽이 바쁘지 않은가. (2003. 9. 29)
11.
어젯밤 이장님이 술을 한잔 하시고 경운기를 털털털 타고 마을로 올라오시다 멈추신다. 회관 앞에 우리가 내다놓은 쓰레기봉투 때문이다. 마을에 쓰레기봉투를 사서 버리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왜 마을 회관 앞에 쓰레기를 버리는 거여.’하며 취하신 목소리로 경운기에 쓰레기봉투를 실어 우리 집 대문 앞에 던지신다. 이것은 군에서 파는 수거용 봉투라 설명을 해도 화가 풀리시지 않는지, ‘그럼 왜 회관 앞에 두는 거여. 집 앞에 둬야지.’하며 야단이시다. 아내는 쓰레기봉투는 회관 앞 나무에 두면 군에서 가져간다는 아랫마을 민엽이네 말을 듣고 갔다 둔 건데 우리 마을엔 그런 적이 없었나 보다. 아내가 집 앞에 두었다가 내일 군 위생과에 전화를 해서 가져가게 하겠다고 하자 이장님이 돌아서신다. 작은 일 하나라도 마을만의 질서가 있는데 우리는 당연히 그렇겠지 하며 지나친 것이 잘못인거다. 마을엔 법보다 앞서는 질서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몸에 익은 약속이 있기에 서로 대문을 열어놓고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약속을 벗어났을 때는 따돌림이다. 나무를 태우더라도 태우는 터가 있고, 때가 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바람이 불지 않을 때 같은. 아파트에서 대표자 회의 자리를 놓고 다툼을 하고 법을 앞세운다. 도시에선 사람의 마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이해관계를 가지고 집단을 이룬다. 물론 농촌에도 있을 거다. 하지만 농촌엔 법보다는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몸으로 익힌 약속을 다툴 때 앞세우는 거다. 그 약속은 공동체의 밑거름이 될 것이고.
오늘 아침 싸리비를 들고 고샅을 쓰는데, 윗집 아재가 지나가며, 그래 사람이 살지 않아 비질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젠 잘 되었네 하시며,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셨는지 내 몸을 생각해 주신다. 한참 고샅을 쓸다보니, 회관 앞에서도 비질하는 소리가 난다. 어젯밤 야단을 치신 이장님이시다. 인사를 하니 반갑게 맞아주신다. 술이 아직 덜 깨신 것 같다. 회관 앞 떨어진 잎들을 쓸어 모아 불을 지피시는 모습을 보니 어젯밤 우리 집 앞에 오신 까닭을 알 것 같다. 이방인이 찾아 들어 회관 앞에 쓰레기봉투를 놓아두니 맘이 상하신 거지. 그걸 돈을 주고 샀는지 말았는지, 그게 함안군에서 지정한 봉투인지 아니지는 중요하지 않으신 거다. 새벽부터 술도 덜 깼는데 빗자루를 들고 나온 이장님의 마음 앞에서는 말이야. 이젠 내 집 앞보다 회관 앞을 먼저 쓸어야겠다. 자기 농사도 바쁠 건데 마을 앞 회관을 먼저 치우는 우리 마을 이장님의 마음을 알려면.
비질을 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마침 앞집 할머니가 버섯을 막 따서 들고 오시다가 나를 부르신다. 젊은 사람들 이런 것 좋아할 텐데 먹으라며 한웅큼 내 손에 안겨주신다. 손에 닿는 느낌도 장에서 사온 것과 다르다. 그 싱싱함과 포근함은 아마 할머니의 사랑이 베여 있기 때문일 거다. 늘 마을에 와서 드린 것도 없고 한 일도 없는데 챙겨 주신다. 아이들이 보이면 과일도 주시고. 아내는 요즘 장에를 가지 않아 반찬이 마땅하지 않아 남의 눈이 미치지 않는 풀을 찾아 헤매던 참에 내가 버섯을 들고 가니 너무 좋아한다. 계란에 부쳐 아침 반찬으로 먹으니, 말로 나타 낼 수 없는 맛이 입 안에 감돈다. 어떤 고기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맛이다.
겨리도 요즘 생활이 자리 잡아 간다. 어제는 ‘어린이집이 어떻트노?’ 하며 물으니, ‘중간이야’ 하더니, 오늘은 중간보다 조금 더 좋단다. 진영에서 부산으로 엄마랑 오갈 때는 늦잠을 자고, 잠자리 드는 시간도 들쑥날쑥하고 늘 피곤해 있었는데, 이사를 와서는 일찍 일어나고, 해가 져 저녁을 먹고 나면 테레비 볼 생각도-물론 안테나가 없어 보지도 못하지만- 없이 잠을 잔다. 어린이집을 다녀와서도 방에서 꼼지락되지도 않고, 아랫말 민엽이랑 골목을 맘껏 뛰놀며 논다. 엄마 아빠도 찾지 않고. 나나 아내도 마을에 차들이 다니지 않으니 걱정도 되지 않고. 우리보다 한해 먼저 들어와 아랫마을에 자리 잡은 민엽이에게 ‘창원에서 여기로 이사 오니 좋니?’하며 물으니, 아주 신나는 목소리로 ‘네, 좋아요.’ 하던데, 조만간 겨리도 그러지 않을까. 아내는 배추를 담그고 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마을과 이웃은 만난 나는 행복하다. 살면서 행복을 이리 자주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2003. 9.30)
12.
문득 십 년이나 이십 년 뒤의 우리 마을을 생각해 본다. 마을 이장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젊은이들이 사라진 농촌. 여기도 논은 많이 있지만 주인이 객지로 떠난 곳이 많단다. 남아 있는 이들이 소작을 하며 한마지기에 닷 말씩 땅 임자에게 쌀을 주며. 하지만 땅값은 무지기로 오른 모양이다. 재벌기업에서 이곳에다 경남랜드라는 놀이 시설을 짓는다는 계획이 서자 땅값이 올랐던 거다. 도시 사람들의 투기 바람이 덩달아 불어든 거다. 하지만 환경단체와 마을 청년회의 싸움으로 다행히 놀이 시설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단다. 놀이 시설이 들어선다는 말에 땅값이 열배나 올랐지만 계획이 사라지자 투기한 사람들은 큰 손해를 보았단다. 그러나 오른 땅값은 내려가지를 않는다. 헐값에 손해 보며 파느니 지니고 있겠다는 거지. 자연히 임자 없는 땅만 늘어난 거다.
지금은 농사짓는 사람이 있어 자연 훼손을 막았지만 앞으로 십 년 뒤는 알 수가 없다.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라진다면. 이제 땅은 객지로 떠난 자식들이나 객지 사람이 투기를 하려고 사둔 땅일 건데, 자연을 망가뜨리려는 세력이 들이 닥친다면 누가 막을 건가. 물론 우리 마을만의 문제는 아닐 꺼다.
이곳에 유원지가 생기고 길가에 러브호텔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이젠 내가 지키고 겨리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논쟁을 하려는 철학이 아닌 삶의 철학. 편리함이나 풍요의 이름 아래 파괴를 일삼으며 먹고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땅을 살리고 나무를 살려 사람을 살리는 그래서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 줄 것인가를 되짚어 봐야 한다. 이미 물질문명은 쓰레기 분리수거로 땅을 살리고 공기를 살릴 수는 없다. 정수기를 쓴다고, 산책로를 만든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거다. 그것도 사람의 욕심이다. 깨끗한 물을 먹으려고 정수기를 쓰려면 정수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환경이 망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정수기를 버리려면 그것도 그만큼의 자연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일 거다. 언젠가는 과학과 물질문명, 기술의 발달로도 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다. 물이 없을 수도, 흙이 나무를 심을 수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니까. 지금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이상기후가 일어나는 것은 맛보기일 거다. 태풍의 홍수가 져도 요즘 같지는 않았다고 어른들은 말을 하신다. 내 기억도 마찬가지다. 태풍 매미로 마산의 매립지 주변에서 침수로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 갔는데, 결국 귀한 목숨을 사람의 욕심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닌가. 땅을 더 차지하려고 바다를 메우고, 하늘 가까이 아파트에 빌딩을 짓고, 땅 밑으로 지하 이 삼층을 더 판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 것 아닌가 말이야.
살리는 문명은 땅을 값지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땅을 일구는 사람을 제일로 삼을 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자연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끝없는 사람의 욕심은 더 쉽게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 하기에 충돌이 생긴다. 이 충돌을 막는 길은 파괴의 주범인 사람의 손과 맘에 달린 거다. 이기려고 하지 말고, 지키고 가꾸려고 하면 쉽게 끝이 날 싸움이 아닐까. 공장을 없애고, 아파트를 부수자는 생각은 아니다. 줄어들다 못해 멸종을 앞둔 농촌. 바로 이 땅에 지금보다는 많은 사람이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산이라도, 논이라도, 밭이나마 지키자는 거다. 유원지도 많으니 이젠 그만 개발해도 되지 않는가. 골프장도 이제 그만 만들자고. 부족하면 외국 골프 여행이 더 싸다는데 이미 만들어 논 것을 좀 쓰라고. 돈 쓰고 싶어 환장한 분들은. 이제 인구도 줄어 든다는데 아파트 더 짓지 말고, 있는 아파트 재개발에 재개발하며 몇 배로 투기들 하면 되잖아. 공장도 우리나라 노동자 맘에 들지 않아 외국에 짓는다는데 이젠 빈 공장들, 분양도 되지 않은 공단들 쓰면 되잖아. 은행돈 끌어들여 공장 짓는다고 뒤로 챙기며 나중에 부도 내 불쌍한 노동자들 만들지 말고. 뒷돈 챙긴 은행들에 공적 자금이라며 서민들 돈 그만 앗아가고. 모든 게 몇몇의 욕심에 눈먼 이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후손들에게 물려 줄 땅덩어리 엉망진찬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정말 좋겠네. (2003.10. 1)
첫댓글 찬찬히 읽어본 내 눈에 아련함이 배어난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곳에 아름다운 고향이 있듯이 그대와 부인에게 경외를 표하오 그대와 부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일거라 생각하오 생전에 그곳에서 밥한그릇 먹었으면 하오.
형님, 늘 기다리고 있으니 들러주세요.
앗. 저 지난 주에 부여에 갔다가 으름 따왔어요. 산바나나 같은 거라고...껍데기가 딱딱하더라고요. 벽에 걸으려고 힘들게 따왔는데 말썽꾸러기 두 아이들이 온통 부서놓았네요..
오빠네의 이사를 접하고 나니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 없는 많은 마음이 오가네요. 눈물나게 아름답기도하고 가보고도 싶고 한편으론 걱정도 되고 또 한편으로 부럽기도 해요............ 몸 건강히 가족모두 행복하시길 언제나 기원할께요....
이사한 이야기며 그 뒷얘기가 눈에 선합니다. 벌써 촌노가 다 되어 가는 오돌 시인의 정신을 위하여 서울 사는 인서점 아저씨가 정매를 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