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하모니카를 보고 (2006년)
<이 극은 서복례라는 비전향 장기수가 실제 겪었던 실화라고 한다.>
막이 열리자 학을 접고 있는 할머니와 작고 초라한 침대가 보인다. 첫눈에도 황량하기만 하다. 뒤쪽에 위로 난 계단이 이곳이 지하실임을 말해 준다.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손자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처음 곡명은 동요 곡 ‘반달’ 이다. 동요 곡은 관객들을 회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빛이 엷어지며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손자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환청을 듣는다. 하모니카 소리는 빛의 농도와 함께 이 극의 단락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할머니의 환청 장면은 소름이 끼치도록 암울하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 긷는 소리, 광부로 끌려가는 남편이 타고 있는 연락선의 뱃고동소리, 고양이 발톱에 후벼 파인 갓난애의 울음소리, 벌겋게 단 인두로 생살을 달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할머니는 절규한다. 할머니의 환청은 그녀의 인생에서 비롯된 운명적인 비극의 내용들이다. 할머니의 이름은 서복례,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빨치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한다. 그녀에게 남편은 이념과 동일한 의미다.
손녀딸은 할머니의 이념적 분신이자 승계자이다. 운동권으로 5년의 감옥생활을 하고 출감했다. 극을 쓴 이는 손녀딸과의 대화를 통하여 할머니의 과거를 끌어낸다. 손녀딸에게 소방협회에서 모금한 천만 원이 곧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 될 것이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정신세계는 이미 파탄이 났음을 나타낸다. 그런데도 극의 마지막까지 할머니의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고 느끼게 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오히려 광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할머니의 딸이다. 딸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증오하며 패악을 부린다.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거칠고 악마스럽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어머니가 천정이 무너진다며 발작을 일으키면 청심환을 찾아 허둥대는 이중성을 보인다. 한 점 혈육의 애증(愛憎)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딸이 나타나 한바탕 퍼 붇고 사라지면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종이학을 접는 할머니는 현실을 초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중얼거리는 넋두리는 삶을 견디는 나날이 고통임을 드러낸다. “해도 길고, 밤도 길구나.” 종이학을 날리며 내뱉는 그녀에게는 ‘해가 긴 낮은 없고, 오로지 긴긴 밤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우주열차 소리를 환청으로 듣는다. 그녀의 혁명에 대한 이념은 도달할 수 없는 ‘별나라’라는 암시리라. 은하수로 가는 열차소리의 효과음은 관객의 고막을 찢어놓을 듯 갑작스럽고 크다. 전쟁터에서 울리는 폭탄소리와 닮았다. 할머니는 우주열차 행선지와 시간표를 외고 있다. 안드로메다로 가는 1101호 열차, 카시오페아로 가는 2202호 열차, 헤라클라스로 가는 3303호 열차다. 할머니는 열차를 초조히 기다리지만 순식간에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열차를 탈 수 없다. 우주열차소리는 이 극의 장을 가르는 도구로 사용된 듯하다. 할머니의 환청에서 은하수로 가는 열차소리는 이어도와 함께 인간의 이상이 도달할 수 없는 꿈에 불과함을 역설하고 있다. 할머니가 날리는 종이비행기는 그녀의 마음이 달려가는 이어도까지 날을 수 없다. 기껏 지하실의 바닥이 끝이다.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길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그러나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할머니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꿈꾸는 것”이라는 그녀의 독백은 채찍인 듯 아프다. 버젓한 현실에서도 많고 많은 꿈을 접어야 했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이 극에서 주인공 할머니는 세 번 죽는다. 이 연극의 각본을 이념의 각도에서 해석하는 포인트기도 하다. 비록 할머니의 입을 통하여 “나는 파블로프의 개였다” “볼세비키 혁명은 끝났다” “나는 혁명의 소모품이었다.” 고 회한에 차서 외치지만 그 소리는 이내 미미하고 하찮은 소리로 힘을 잃어버린다. 손녀딸의 입을 통하여 “혁명은 썩지 않는 영혼을 위한 투쟁”이라고 힘주어 외치게 함으로서 할머니의 말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첫 번째의 죽음은 이념의 반동자에 대한 사살이다. 특히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친동생이 누나의 전향을 두고 배신자라고 하는 부분이다. 할머니의 변명을 동생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가 동생의 말을 인정하며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다. 결코 본인 의사로 전향을 하지 않았음을 관객들에게 알리는 장면이다. ‘장기수란 외로운 섬이며, 개가 인간이 되기는 어려우나 인간이 개가 되기는 쉽더라’고 하며 개 같은 장기수의 삶을 고발한다. 동생이 부르는 혁명가는 선동적이며 혁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혁명의 전사인 동생은 누나를 배신자라며 사살한다. 할머니의 꿈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다.
두 번째의 죽음은 스스로 내리는 사형선고다. 전향한 자아와 전향하지 않고 아직도 감옥에 남아있는 자아가 충돌한다. 지하실의 나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통곡한다. 감옥에 남아있는 또 다른 자아가 외친다. “천만에, 너는 다시는 감옥으로 돌아올 수 없어. 넌 이미 전향을 한 그 순간에 죽은 거야.” 라고. 적어도 이 극에서는 이념을 버린 그 순간, 즉 ‘변절’이란 죽음과 동의어라는 주장이 깔려있다.
이 극은 레드이념을 신념으로 갖고 있는 한 여자가 대한민국이란 공간에서 겪어야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보고서이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비극적 운명에 내몰려야 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제삼자로만 극을 바라볼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은 묵은 것이 아니라 언제든 큰 불로 타오를 수 있는 묵재 안에 감춰진 불씨라는 것을 이 극은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념의 중간자의 시선이 아니라 서복례라는 장기수의 관점에서 이념을 해석하는 것 같다.
경찰은 의붓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소녀에게 의붓아버지의 간을 꺼내 씹게 하는 엽기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할머니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인민군들은 혁명과 동지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의인으로 등장한다. 운전수로 살아가며 결혼도 하지 못한 늙은 손자는 연좌제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신원조회에 걸려 합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극의 시대배경이 96년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손자는 연좌제 때문에 시험에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 현재 나이가 56세인 사람은 가족 중에 두 사람의 처형자가 있었지만 ROTC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또 한 사람은 아버지가 부역자의 전력이 있는데도 암호병으로 군 생활을 한 사람도 있다. 법률로는 1980년에 연좌제가 폐지되었지만 그 이전(70년대 초반)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연좌제로부터 구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부역자, 보도연맹가입자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시달렸는가를 나는 잘 알고, 또 보아 온 사람이다. 이념을 무조건 악마시하는 것이 바른 태도가 아니듯이 폐기된 내용들을 다시 꺼내어 사실처럼 활용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본다. 비록 그것이 가정이나 환타지가 용인되는 연극이라 할지라도.
‘공산주의는 악마의 심령술 같은 것’이라고 독백하는 할머니는 곧바로 자기 인생의 최전성기는 삼백육십 다섯 개의 봉화불이 타 오를 때였다고 고백하는 모순을 보인다. 여기서의 봉화는 공산주의다. 인생의 의미와 삶의 가치는 자신이 전향을 하는 순간 사라졌으며 그 이후의 삶은 죽음과도 같다고 회한에 젖어 외친다. 운전 중 사고를 일으키고 지하실에 함께 기거하는 손자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백정의 피라도 핏줄은 거룩한 거”라고. 곱씹어 들을 소리다.
이 극의 최대의 꼭짓점은 할머니의 딸이 과거를 털어놓는 순간이다. 딸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만큼이나 딸에게 미움을 보냈던 관객들은 일순 “아, 그랬구나.” 라며 와르르 미운 감정이 사라짐을 느낀다. 대신 연민의 감정이 차오른다. 서복례는 딸이 열네 살일 때 빨치산이었던 남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복례는 장기수로 복역을 하고, 딸의 부양을 받는 처지에서도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고, 남편의 간을 씹은 딸을 용서하지 못한다. 엽기적인 비극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네 살의 소녀는 동굴에서 홀로 아이를 낳아 자신의 이빨로 탯줄을 자르고 아이는 버린다. 비극의 절정이다. 너무 비극적이라서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입은 할 말을 잃고, 귀는 차라리 막아버리고 싶었다.
딸로부터 엄청난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자신과 딸의 거리가 저승과 이승만큼이나 멀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하여 “넌 누구니? 낯설어서 친할 수가 없구나. 내가 원하는 사람, 되고자 했던 사람은 아니구나.” 뇌까리는 독백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깊고 깊은 외로움은 극을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전이된다. 할머니의 독백은 이어진다. 육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다.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어머니는 죽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지상에 남은 것은 악몽 뿐, 좁고 어두운 길, 길 아닌 길만 남았구나.” 절망으로 가득 찬 할머니의 음성은 음울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구나. 고단했던 삶이여, 안녕! 영원히 쉬거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거라. 80년의 지루한 세월이여 안녕!” 이라고 할머니는 스스로에게 이별을 고한다. 할머니는 판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글에서 손자에 대한 구명을 호소한다. 이 편지는 유서가 된다.
할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수많은 학이 날아오른다. 그녀가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는 뜻이다. 수많은 학이 날아오르는 이미지 연출과 함께, 나무 아래 서 있는 할머니의 실루엣이 앞으로 목을 수그린 모습으로 그녀가 자살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연출은 감탄을 하게 했다. 뒤이어 이어진 모녀의 대화는 학의 비상으로 느꼈던 감동을 반감시켰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모녀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라는 걸 죽은 할머니와 딸의 다정한 대화로 알려주려는 노력은 관객들에 대한 과도한 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손녀딸도 운동권의 신분으로 혼전 임신을 했다. 삼대에 걸친 혼전 임신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념은 사생아이며 비극은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암시시라. 분단된 나라의 백성이기에 그 비극을 목도해야 우리 또한 비극의 들러리라는 걸 메시지로 전하며 이 극은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두 시간동안 열연을 한 할머니 역을 맡은 구경영씨에게 찬사를 보내며 연출을 하신 전우수 선생님께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 드린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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