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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36) 2023. 8. 16
기드론 시내를 건너라
삼하 15:13-23
<압살롬의 반역 준비와 실행>
5년 만에 아버지 다윗을 만나 관계를 회복하였지만, 압살롬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아버지 다윗을 향한 반항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게 됩니다. 그래서 4년에 걸쳐 철저히 반역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친위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왕자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병거와 말들과 50명의 호위병을 앞세워 어디를 갈 때든지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둘째, 다윗에 대한 ‘흑색선전’을 퍼뜨립니다.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 길가에서 서성이다가 왕에게 재판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로채, 그 사람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윗 왕은 그의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소위 ‘가짜뉴스’를 퍼뜨린 것입니다.
셋째,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훔칩니다. 자신은 정의로운 재판관이라고 선전하면서,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그들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인기를 얻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4년 만에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다윗에게 그술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의 말을 기뻐하며 승낙해 주었습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을 택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자, 다윗이 역시 그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2:1-4). 자기도 그곳에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배경에 있습니다. 다윗 왕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에 대해 서운함이 있는 헤브론 사람들을,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교활하면서도, 나름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인물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가 헤브론임을 알고, 그곳을 향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헤브론’으로 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200명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서 갔고, 다윗의 참모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데려갑니다. 반역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에 정탐꾼을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다윗>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13~14절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인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압살롬의 치밀함이 한몫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 암논을 죽일 때도 2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이번에도 4년 동안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압살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 다윗 왕의 우매함이 한몫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죽은 후, 압살롬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들으니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일어나 도망하자’, ‘빨리 가자’고 말합니다. 그저 도망가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당황하였다 하더라도 전혀 다윗답지 않은 반응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사입니다. 숱한 전쟁을 치렀고, 병법에도 능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이러한 다윗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저는 다윗의 말 속에서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았습니다.
첫째는, 압살롬의 치밀함과 잔인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절b “...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압살롬의 잔인한 성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신하들과 그들의 가족이 큰 위험에 처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다윗 입장에서는 누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누가 누구 편인지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이것이 가장 어려웠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일단, 몸을 피한 뒤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한데, 다윗은 예루살렘이 전쟁터가 되어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14절c “... 빨리 가자 두렵건 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단순한 성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도성(都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이 전화(戰火)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군의 상대가 되질 못 했습니다. 결국, 40일 만에 항복하고 맙니다. 그런데 전투에서 패배한 것도 이유가 있지만, 파리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함도 한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요? 파리에는 부서져서는 안 되는,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많은 유산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파리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믿고, 파리를 통째로 독일군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아오게 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윗이 쫓겨가는 중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삼하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후궁 열 명을 남겨두고>
그런데 다윗이 피신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합니다.
15~16절 “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신하들은 왕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들도 따르겠다며 충성을 다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데리고 가는데, 다만 후궁 열 명은 남겨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다윗이 지금은 도망가지만, 훗날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간다 할지라도 큰 위해를 받지 않을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아무리 잔인한 성품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의 후궁은 건드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 명의 후궁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것은 다윗의 큰 실수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온 후, 대낮에 이 열 명의 후궁들을 겁탈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다윗을 능가함을 과시하였습니다(16:22). 이 사건은 압살롬의 패역함이 잘 드러남과 동시에, 나단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12:11).
<벧메르학>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한 장소에서 멈춥니다.
17절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벧메르학’이라는 곳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예루살렘 외곽 끝에 있는 궁전이며, 문자적으로 ‘먼 집’이란 뜻입니다. 개역 개정에서는 지명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마지막에 머물 수 있는 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간 점검>
급하게 나오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한숨을 돌린 다윗은 ‘벧메르학’에서 누가 함께 나왔는지 점검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종의 분열 형식으로 점검을 하였는데,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8절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먼저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다음으로 지나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이방 민족임에도 다윗을 섬기기 위해 온 용병들(외인부대)이었습니다.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이 다윗 왕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렛 사람은 크레타섬(그리스와 터키 중간에 있는 섬, 지중해와 에게해 사이, 훗날 디도가 목회, 제주도 4배) 출신의 이민자들입니다. 블렛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특히 블레셋의 지방 도시인 가드에서 온 가드 사람 육백 명이 다윗과 함께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본국에서 내쳐져 다윗에게로 피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을 품어주어 자신의 호위 병사로 받아주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어려움에 부닥쳤음에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의 일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 혁명군에 포위되었을 때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프랑스군이 아닌 ‘스위스 용병’이었습니다. 혁명군은 스위스 용병들에게 퇴각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왕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스위스 용병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를 담당하는 전통의 배경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히틀러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재산을 스위스 은행으로 보냈습니다. 나치 정부는 이것을 알고 간첩을 보내 정보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스위스는 새 은행법을 만들어서 정보를 누설하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수만 명의 은행원이 예외 없이 신용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스위스 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들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조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속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겨 다른 민족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리고 더욱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잇대의 충성>
그런데 가드 사람 600명이 지나가는 가운데, 다윗은 특별한 한 사람을 지목하여 말합니다.
19~20절 “그때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다윗은 가드 사람 ‘잇대’란 인물을 발견합니다. 그는 ‘쫓겨난 나그네’입니다. 아마도 정치적인 망명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장수로써 많은 가족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에게로 망명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과거 다윗이 수하들을 이끌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한 것과 유사합니다(삼상27:2).
그런데 문제는 그가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0절 ‘너는 어제 왔고’). '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트몰'은 반드시 문자적으로 ‘어제’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까운 과거 곧 ‘얼마 전’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그동안도 고생하면서 다윗에게 왔을 텐데, 자신을 따라가면 또다시 고생길이 될 테니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라고 합니까?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19)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누구일까요? 예, 자칭 왕이라 주장하는 ‘압살롬’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타국의 내란에 휩쓸려 위험을 자초하지 말고, 새로 권력을 얻어 강성해지고 있는 압살롬에게 가담해 안전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대왕다운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안위(자기 코가 석자)보다 도리어 타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다윗이 비록 말년에 와서 여러 실수를 하고는 있지만, 과연 큰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배려에 잇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1~22절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다윗의 말에 잇대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잇대가 블레셋의 우상 종교를 버리고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改宗)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런 잇대의 맹세는 마치 룻의 맹세(룻 1:16-17)를 떠오르게 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시어머니가 죽어 묻히는 곳에 자신도 같이 묻히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습니다.
사실 잇대의 충성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자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식솔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치에서 ‘정처 없이 유리하는’ 사람을 따르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잇대가 다윗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전부터 다윗의 신앙, 인격과 진실함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손해가 되고, 고생길이 되겠지만 다윗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의 충성심에 감동한 다윗은 그와 함께 온 수행자들과 가족들을 먼저 ‘기드론 시내’(23)를 건너가게 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서, 강우량이 많은 겨울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메말라 있는 간헐천(間歇泉)입니다. 잇대의 일행을 먼저 건너게 한 것은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었던 다윗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훗날 압살롬의 반역이 제압된 뒤,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깁니다.
삼하 18:2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 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 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지금 말로 하면 3군 참모총장 가운데 한 자리를 맡겼다는 말입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라>
이제 마지막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3절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인원 점검을 마치고 모두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먼저 건넜다는 것입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시내입니다. 압살롬의 추격이 개시되면 불과 몇 분 안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얼마나 다급한 상황입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백성들이 다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건넜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자기의 안위보다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실수하기는 했지만, 다윗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윗의 왕위가 다시 회복될 것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 강을 건너면 ‘광야 길’이라는 것입니다.
울면서 건넜습니다.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앞으로의 당할 고난을 잘 알고 건넜기 때문입니다(“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광야 길’입니다. ‘광야 길’은 여리고에 이르는 험한 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다윗 왕은 이 길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삼하17:24)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중 천사를 만났을 때 그 땅에 붙인 이름(창32: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냐?, 압살롬이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이고, 압살롬은 반역자입니다. 어느 편에 설지는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지 않고 돌아가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반역자 압살롬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윗을 선택했지만, 그 결과는 ‘광야 길’입니다.
<맺는 말씀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앞에도 늘 두 가지 길(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을 선택한 백성들이 다윗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넜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이 비록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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