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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군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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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순종으로 많은 복을 받은
우리 가정
서석군 • 김인숙 가정
1 내 고향 봉정리, 2 통일교회 입교, 3 약혼 및 축복, 4 동원, 5 가정출발, 6 공적활동, 7 자녀교육, 8 훈독회와 성일 경배식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인숙. 절대순종과 동원 및 기적체험, 많은 상을 받은 것, 3대가 같이 살며 교회의 리더로서 일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축복가정 등
1. 내 고향 봉정리
나(김인숙)는 1959년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 봉정리 반송 부락 615번지에서 2남 4녀 중에서 장녀로서 탄생했다. 반송부락은 문정공파 광산 김씨 마을이고, 다른 성씨는 두 가구만 살고 있다. 아버지 김재만(1933년)과 어머니 윤순례(1938년생)는 법이 없이도 살 사람으로서 착하다고 칭송을 받았고, 그런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란 형제자매들도 착하게 성장하였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칭찬받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웠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우리 집은 마을 중간쯤에 있었는데, 마을 끝에 두레박 우물이 있었다. 수도(水道) 시설이 없던 때라서 새벽마다 물을 기르는 것이 큰 일과였다. 물동이에 물을 담고, 머리에 또아리를 하고 기우뚱거리며 집에 와서 큰물항아리에 담았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은 때라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게 되면 물을 긷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힘들게 물을 길러다 사용하였기에 물을 아껴서 사용하였다. 한번 쓴 물을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서 쓰곤 했다.
밥을 지을 때도 가마솥에 나무를 때서 밥을 지었다. 석유로 불을 켜는 곤로에 냄비를 얹고 반찬을 요리하였다. 가을이 되면 산에 가서 상수리나무나 소나무 잎을 모았다. 새끼줄 두 개를 바닥에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생솔나무 가지를 꺾어서 깔아서 잎들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잎들을 긁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다시 생솔나무가지로 덮어씌우고 새끼줄로 꽁꽁 묶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집마다 산에 가서 낙엽을 긁어모으다 보니 산은 민둥산으로 변했고, 낙엽을 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다행히 연탄이 도입되고, 가스가 연료로 사용되면서 차츰 숲은 울창하게 변하였다.
마을이 보성강 바로 옆에 있어서 여름에는 강에서 목욕을 하였다. 바닥에는 고동이 많아서 고동을 많이 잡아 솥에 넣고 된장을 풀고 삶았다. 탱자 나무가시로 고동 알맹이를 빼서 맛있게 먹었다. 강물이 맑아서 물위에 유리를 갖다 대면 바닥까지 훤하게 보여서 고동을 줍는 것이 재미도 있었다. 고동도 줍고 유희도 즐겼다. 공해라는 의식 자체도 없이 자연산 고동을 잡아서 먹었던 즐거움을 요즘은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아쉽다. 각종 문명 혜택으로 잘 살게 되었으나, 생명 유지의 근본인 물이 공해로 흐려진 현대 삶의 모순에 착잡한 심경이다. 빨리 본래의 청정한 자연 모습이 복귀되기를 바란다. 타락한 인간이 복귀되어야 자연도 착취의 대상에서 아름다움과 생명을 위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창조본연의 모습으로 복귀가 될 것이다. 인간치유와 만물 치유가 병행되어야 할 시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강물이 불어서 마을 입구까지 물이 밀고 들어왔다. 거센 강물에 돼지가 꿀꿀거리면서 떠내려가고, 각종 살림도구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구할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어른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대비하여 힘들게 키운 돼지가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주인의 심정은 터질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렵게 구한 세간살이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주인의 가슴에 절망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나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나약한 인간 실존의 모습을 체험하였다.
1968년 9살에 문덕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 위치가 우리 동네에서 3km나 걸어가야 하였다. 어릴 적에는 꽤 먼 거리였다. 동갑내기가 남자 6명과 여자 6명이 함께 등하교를 하였다. 계절 따라서 피어나는 꽃, 벌, 나비, 종달새 소리, 아지랑이, 보리가 자라고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 모내기를 한 벼가 황금색깔로 무르익어가는 모습 등 자연변화를 온 몸으로 확인하면서 우리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집에 오면 배가 무척 고팠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려주실 때까지 참아야 하였다. 어쩌다 삶은 감자나 고구마가 있으면 좋아서 함박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가난한 상태를 박정희대통령이 구제한 리더십을 나는 존경한다. 공동체 지도자는 경제적 곤경과 과학적 무지와 영적 무지를 극복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무탈하게 학교를 잘 다녀서 상을 많이 받은 추억은 지금도 내게 감미롭다. 2학년과 6학년 학기말에는 정근상을 받았고. 졸업 후 보성 복내면에 있는 복내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제적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한 친구가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또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악착같이 공부시키려는 열정을 가진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였다.
부모님의 배려로 무사히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서 정근상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은 가난으로 인하여 생각조차 못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4년 동안 서울 중곡동에서 섬유 회사에 취직하였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환경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옷을 라인별로 재봉틀로 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2. 통일교회 입교
1975년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에, 같이 일하던 여자 직원이 길에서 전단지를 보았다고 하면서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여의도 광장 집회에 가자고 권유해서 6월 7일 에 참가하였다. 그 때만 해도 외국인을 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것이었다. 60개국에서 130만 여명이 참가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 나는 통일교회를 모르는 상태에서 여자 직원과 같이 행사에 갔다. 넓은 땅에 사람들의 수가 꽉 차서 앞으로 나아 갈수도 없었고, 뒤에 서서 참여했다.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는 태도가 부족했고, 원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으니, 참부모님의 말씀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참관자, 방관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계인류가 한데 모인 대형 집회라는 그 자체에 감탄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때부터 하늘은 나를 뜻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회사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어느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라는 노래가 들려오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늘은 죄악 혈통으로 불순해진 내 마음을 찬송가로 정화시켜 주셨다. 재림주님으로 강림하신 참부모님을 영접하기 이전에 나도 모르는 가운데 하늘은 나 자신을 정결하게 해주셨다.
성가 35장을 보면 그 당시의 내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주여 오소서, 더러운 죄가 가득 차 있는 내 맘에 주여 오소서. 불되신 주여 지금 오셔서 죄 태워 정결케 하옵소서. 주여 어서 오소서. 내 맘 속에 아멘!”
메시아는 죄인의 모습인 인간을 성령의 불길로 태워주시고 중생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주려고 오신다. 하늘은 여의도 집회를 통하여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서서히 진리의 서광이 내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하늘은 나를 통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하고자 육체적 고통을 주셨다.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서 퇴사하였다. 허리 고통으로 일을 빨리 처리하지 못하므로 인하여 그 다음단계의 작업으로 연결이 안 되었고, 나로 인하여 생산 능률이 저하되었다. 결국 내가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직장 생활 중에 부모님은 고흥으로 이사를 가셨기에 편지봉투에 적힌 새 주소를 보며 찾아 갔다. 서울을 벗어나서 시골로 향하는 나에게 슬픔이나 실망보다는 왠지 모를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통일교회 목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우리 가족 모두 가정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며칠 후에 3일 동안 부흥회가 있으니까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첫날은 의심이 생겨서 가지 못했고, 둘째 날에 갔다. 목사님은 ‘말세와 현세’ 란 제목으로 말씀하셨는데, 나는 교회를 다녀 보지 않은 입장이라서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셋째 날 부흥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통일교회 사모님이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나에게 “광주에 특별한 교육이 있으니 가보지 않겠니?”라고 제안하셨다.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수련비를 주시면서 “친구도 사귈 겸해서 갔다 오라.”고 하셨다. 나는 남광주 교구에서 일주일 교육을 받았다. 알고 보니 통일교회 원리 교육 수련이었다. 원리 말씀 중에서도 타락론이 가장 은혜롭게 다가왔다. 왜 죄악이 관영(貫盈)한 인간 세상이 되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천비(天秘)로 전해져 온 것을 알게 되니까 기뻤고, 세상이 곧 선하게 변화될 것으로 믿었다. 수련생들이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남녀 단체 수련을 받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화기애애한 심정 가족 분위기를 체험하였다. 혈육의 식구보다도 더 깊은 정을 나눈 심정의 식구가 무엇인지를 진하게 체험하였다. 이는 영원히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흥 통일교회 목사님은 조본환 1800가정이셨고, 아버지와 같은 고향인 보성군 율어면 출생이어서 두 분은 친분 관계를 가지셨다. 그래서 자주 우리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러 오셨다. 부모님께서 통일교회 목회자를 외면하거나 반대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도 의인으로서 미리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계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 7월에 전남 교구에서 제99회 일주일 원리 수련을 받았고, 8월 1일에 고흥 통일교회에서 입교하였다. 그 해 가을에 목사님이 고흥군 마을마다 승공운동을 위해 순회를 하면서, 한마을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승공 강의를 하셨다. 나도 어깨에 승공연합 띠를 두르고 사모님과 다른 식구들과 함께 다녔다. 명단을 적고, 안내를 하고, 배를 타고 나로도 섬에 가서 목사님이 강의하실 때에도 봉사를 하였다. 마을 구석구석을 다 찾아다니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생활에 젖다보니 차츰 나의 신앙생활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젖은 나무라도 불에 자꾸 쪼이면 마침내 불이 화르르 타오르듯이, 둔한 내 심경에도 성령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는 새벽 기도회와 수요 예배에 참석했고, 일요 예배도 매주 빠지지 않았다. 원리강론을 자발적으로 공부했다. 교회에 머물면서 7일 금식을 하였다. 금식 3일째 때 엄마가 죽을 쑤어 오셨다. 엄마는 7일 금식의 의미를 잘 모르셔서 나에게 자꾸만 죽을 먹으라고 권유하였다. 자식이 굶고 있으니 엄마는 그저 안타까워하면서 내 입에 죽을 넣어주려고 하셨다. 나는 거절하기가 참 힘들었다. 엄마는 혀를 차면서 포기하셨다.
마침내 7일째가 되었다. 7일째 낮에는 교회 밭에서 풀도 뽑으면서 거뜬하게 금식을 마쳤다. 대개 금식을 하면 육신이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금식 기간 중에도 전혀 육신이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금식을 마치고 죽을 먹는데, 하늘부모님께서 인류에게 너무도 귀한 만물을 주셨다는 것을 느끼며 감사한 마음이 충만하였다.
금식 중에 육신의 배는 고팠지만 나의 영인체는 밝게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육적 양식보다도 영적 양식이 더 귀한 것임을 실감하였다. 그 때에 나는 나의 신앙생활의 근력(根力)을 확립하였고,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앙 성장에는 육신의 고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사탄이 주관하는 몸을 쳐서 주관하게 해야 한다.”(《말씀선집》 제39권, 199쪽)는 참부모님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담고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안락한 삶보다 가능한 고통스럽고 힘든 뜻길 일에 자진하여 참여하고 있다.
21일 수련회에도 참여하였다. 1981년 1월 8~28일까지 수택리 중앙수련소에서 이요한 목사님으로부터 특별한 심정훈련을 받았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말씀과 심정이 내 가슴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비로소 나에게 정리되고 안정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약혼 및 축복
1981년 5월 선화예술학교에서 통일교회 식구들의 전국 체전이 있었는데, 고흥 목사님 부부께서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 중곡동에 있는 선화예술학교에 가서 운동회를 참석했다. 운동회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구리 중앙수련소에 가자고 해서 함께 갔다. 구리 중앙수련소에서는 2차 6000가정 약혼을 하고 있었다. 약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나에게 들어가서 참석하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 때만해도 축복의 축(祝) 자도 모르고,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에 약혼 장소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참부모님을 뵈었다. 가슴이 설레는 시간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지금 남편과 매칭을 해 주셨다. 그런데 남편이 나를 싫다고 해서 나는 약혼 장소에 다시 들어가지 않고 고흥으로 내려왔다. 1982년 10월초에 6000가정 3차 약혼이 구리 중앙수련소에서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며칠 동안 축복에 대한 말씀을 쭉 하시고 나서 약혼 매칭을 하셨다. 처음에 매칭된 사람들은 잘 순종하였으나, 나중에는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는 “그럼 너희들이 맞추어서 들어 와 봐.”라고 말씀하셨다. 고흥 목사님과 구례 목사님께서 나와 남편에게 “작년에 이미 참아버님께서 매칭을 해 주셨으니까 둘이 함께 들어가 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둘이 참부모님 앞으로 갔더니, 나에게 “이 남자하고 결혼 할래?” 하고 물으셨다. 나는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더니 “괜찮다. 나가 봐.” 라고 하셨다. 우리는 참부모님께 경배를 하고 나왔다. 남편은 “이렇게 두 번 만난 것도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같이 축복을 받읍시다.”라고 말하면서 약혼에 순종하였다.
4. 동원
1982년 11월 24일, 6000가정 부인 동원령이 내렸다. 동원자에게는 세 가지 준수사항이 주어졌다. 첫째, 협회원리 시험을 합격해야 한다. 둘째, 월 1인 전도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셋째, 공동생활을 하며 전도와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충북 보은 교회로 임지 발령을 받았고, 임지 대원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였다.
2명이 짝이 되어 3팀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쌀을 조금씩 받는 성미 사업을 해서 노인 경로잔치를 해 드렸다. 그리고 들에 나가서 대원들이 함께 나물을 캐서 반찬을 만들어 먹은 일도 있었다. 대원들이 함께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곰곰이 생각 하다가 포장마차를 하면 좋겠다 해서 임지에서 활동 하고 있는 저의 남편에게 도와 달라고 해서 남편이 왔다. 남편이 리어카에다 포장마차를 3일 걸려서 만들어 주었다. 낮에는 전도 활동을 하고 저녁에 2명이 포장마차를 끌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놓고 오뎅. 떡볶이 등을 파는데 남자들이 술은 안파느냐고 시비를 걸고 해서 그때만 해도 대원들이 아가씨들이라 무섭고 두렵고 해서 3일을 하고 포장마차를 접었다. 남편이 애써 만들어 주었는데 남편에게 미안했다.
한 달 중에서 10일은 만물복귀를 하여 생활비를 교회에 내었고, 20일은 두명이 짝이 되어 임지에서 참부모님을 알리며 활동을 하였다. 대원들이 기동대 편성을 하여서 충북에 있는 전체 교회를 20일씩 순회하며 부흥회를 하였다. 국제 기동대와 430가정 기동대와 6000가정 기동대원은 32명 이렇게 3팀이 함께 활동 했다. 21개월 전도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7차 사업대원으로 4개월동안 활동했다. 임지대원들이 청파동 구협회 본부에서 숙식하며 날마다 떡, 엿, 양말, 수세미 등을 가지고 나가 만물복귀를 하여 120만원을 협회에 납입하고 임지를 수료했다. 그 때 회사에서 보리로 만든 맥콜 음료를 만들었고, 우리 7차 사업대원들이 고속도로 상행 하행 휴게소에 2명씩 조를 짜서 맥콜 시음을 권유하며 홍보 활동을 했다. 나도 강원도 고속도로에 휴게소에서 대원 1명과 함께 숙식하며 맥콜 시음 홍보 활동을 했다. 1983년 5월 7일자로 제83737호 수료증을 받을 때에는 “하늘 앞에 적지만 충효의 도리를 다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서석군(남편)은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409번지에서 아버지(서기조)와 어머니(김옥) 슬하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73년 3월 1일에 이동한 목사님이 구례교회에 시무 하고 계실 때 전도가 되었다. 좀 다혈적인 기질을 가진 남편은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은혜를 입어서 양손목 위에 불이 붙은 초를 올려놓고 참부모님께 일편단심의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양손목에 흉터가 남아 있다. 총각 때는 아침마다 교회 앞에 길을 매일 쓸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청소부라고 생각하였다. 그처럼 뜻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구례 통일교회 개척은 송홍식 목사님에 의해서였다. 처음의 교회 위치를 정확히 기억 하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깝다. 두 번째 교회는 구례읍 북국민학교 앞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핍박이 심했다고 들었다. 간전면에 장로님 두분과 식구들이 볏짚으로 지붕에 올릴 이엉을 만들어서 리어카로 싣고 와서 교회 지붕 위에 올렸다고 한다. 황인태 목사님이 시무할 때에 최윤기(777가정. 문효진님 장인), 김중열(430가정, 통일그룹 전이사장)을 비롯하여 식구들이 많이 전도 되었다.
1975년 9월 26일에 A타입 교회 헌당 예배를 드렸다. 성전 32평에 총 272평이었다. 교회 건물을 지어 놓고 마루바닥에서 예배를 드릴 때 12대 박정현 목사님께서 “성전에 의자가 있어야 된다.”라고 했는데, 인사이동이 되어서 실현되지 않았다. 후임으로 송인갑(1800가정) 목사님이 오셔서 청년들이 축복을 받으면 객지로 나가므로 축복 받기 전에 만들자 해서 부랴부랴 얼마씩 돈을 내서 모은게 60만원이였다. 남편이 목수이고 집에서 목공소를 하므로 남편이 주축이 되어 성전용 긴 의자를 설계를 하고 나무를 사다가 2개월을 목공소에서 말렸다. 조금 더 말려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교회 청년들이 함께 힘을 모아 15일 동안 숙식을 같이 하면서 긴 의자 18개를 제작하였다. 남편이 기계에 맞추어 자르고 나무를 밀어서 못을 박는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 당시 사진이 있어서 볼 때마다 감격스럽다. 리어카에 의자 3개씩 싣고 앞에서 한사람이 끌고, 뒤에서 두명이 밀고, 한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뒤에서 따라가는 사진이다. 여러번 왔다 갔다 하며 의자를 교회 마당으로 옮겼다. 종이를 깔고 천막을 치고 의자에 니스를 칠했다. 남편은 그 사진을 보면 그때 일 하던 것이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남편의 남동생 서일권과 목공소에서 일 배우는 청년과 남편이 이렇게 8명이 함께 긴의자를 만들었다. 전국 A타입 교회 중에서 최초로 의자를 만들었다. 남편이 통일 마크가 들어간 성탁도 만들어 성전 앞에 놓았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청년들이 많아서 재미있었다. 그래서 6000가정축복식에 16가정이 참여했다.
남편은 교회 지붕의 페인트가 벗겨지면 6~7년마다 다시 칠하였다. 지붕이 뾰쪽하고 높아서 업자들도 못 한다며 포기하였다. 한번은 우리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추석을 맞이하여 구례교회에 들렸더니 페인트를 사 놓고 교회 지붕 칠을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 부랴부랴 사다리를 세 개 잇고, 단단하게 줄로 묶어서 그 사다리를 지붕에 걸치고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호스를 연결해서 뿌리는 페인트 기구를 사용하여 두 번씩 칠을 했다. 지붕이 경사가 심하고 높아서 위험부담이 크지만 남편은 하늘을 위하는 일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다. 나는 그런 일을 하는 남편이 멋있어 보였고, 도우면서 함께 기쁨을 공유하였다.
1982년 10월 14일 6000가정 축복을 받은 후 부부가 다 임지를 나가라는 명을 받았다. 남편은 그때 가구점과 목공소를 하고 있었고 사업이 잘 되었다. 남편은 하늘의 임지 명령을 받아서 출가하는 것을 따라야 할지,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할지를 두고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임지를 나가야지요.” 라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목공소 일을 미련 없이 중단하였다. 시작 한지 3년이 되어서 이제 막 사업이 잘 되려는 분위기라서 일거리도 많아지는 상황이었다. 구례 화엄사 사찰에서 1억이 넘는 일거리도 들어왔는데 취소시켰고, 목공소와 가구점을 운영하던 목공 기계와 나무들을 빨리 처분하려고 큰 손해를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 팔았다. 멀쩡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정리를 하고 가방을 챙기니까 시어머님께서는 크게 우셨다. 남편은 당당하게 임지인 서울 잠실 동원 교회로 갔다.
내가 동원 기간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참부모님의 승공강연 순회에 동참한 것이다. 1983년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