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 황금의 땅 ㅡ4권 14 앙헬이 판초 자락을 펄럭이며 나왔다. "보스, 이곳에는 없습니다. 카레라 14번 도로의 끝 쪽에서 시외로 10킬로쯤 나가면 그곳에 한국인 묘소가 있답니다. "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가 몸을 돌렀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시내에 나갔던 브루노가 돌아와 있었다. "보스, 카스털로는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행사에도 참석하 는 일이 드물고, 그가 즐겨 하는 행사는 대통령궁에서 요인들만 모아 들고하는 궁중행사더군요." 그는 종이를 고영무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신문에서 베낀 것으로 대 통령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대통령궁에서만 생활한다면 궁으로 들낀어가야 할 것이나 그것은 불 가능한 일이다. 고영무는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칠례가 16번지에 메모리얼 빌딩이 있어, 8층 빌딩인데 1충에서 6층 까지는 국제무역의 사무실이고 7, 8층은 회의실로 되어 있지." 브루노가 눈을 끊택이며 그를 하라보았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 두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실제는 그것이 대통령의 비밀 사무실이야. 6충까지는 경호 실이 내외의 정보엄무를 하는 곳이고, 7, 8층은 대통령의 휴계실이지."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대통령은 한 달에 두 번씩 그곳에 들러서 일을 하는데, 주로 저녁에 왔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기 때문에 노출되지 않았지. 8층의 침실 에서 자고 가는거야." 대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더니 그를 에워딘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TV 스타인 세실리아양이 그때마다 들렸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어." 고영무가 주위의 사내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이제까지 15일 동안 지리도 익혔고 경비도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 내일부터는 메모리얼 빌딩이 목표다. " "보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브루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대통령의 동향 이나 궁의 위치를 조사해 오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짐 버클리는 궁과 정부청사 사이의 도로를 걸어서 다섯 번은 왕복했을 것이다.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고영무가 자르듯 말하자 모두들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시기는 지미 골드가 충고해 주었다. 도착하자마자 데모리얼 빌딩을 목표로 하는 것은 지리도 익숙지 못한데다 저쪽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 므로 얼마간의 시기를 두라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데모리얼 빌딩의 정보도 지미 골드로부터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의 출처까지는 알 필요 가 없었다. 고영무는 대원들이 겉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 기 팽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표가 확실하게 세워지게 되면 누구나 눈빛부터 달라지는 법이다. 그것은 고진호씨가 한 딸이었다. 가게에서 함 두 개를 사 봉지에 넣은 페드로는 거스름돈으로 받은 잔돈을 세면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머랫속으로 돈 계산을 하는 듯이 길거리 쪽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다시 다른 쪽을 바라보며 갸웃하고는 이내 머리를 끄덕이 고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봉투를 가승에 안고 길을 따라 걷다가 옆쪽 골목으로 들어싫다. 저녁 무렵이어서 행인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골목을 스쳐 지 나가는 사람들은 바쁜 듯 어깨를 부딫쳐도 제대로 사과의 말도 던지지 않았다. 페드로는 골목을 빠져 나가자마자 아래쪽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이 쪽은 빈민가여서 골목이 2충으로 된 곳이 많았다. 건물들이 땅을 깎아 지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페드로는 골목을 달려 골시 왼쪽으로 꺾어저 들어갔다. 아까부터 사 내 한 명이 미행하고 있었는데,그것이 메모리얼 빌딩 건너편의 환전 소였는지, 아니면 그 다음인지 분명하지는 않았다. 10분쯤 달리고 난 페드로는 숨을 헐떡이며 아파트의 윗부분이 바라 보이는 거리로 들어졌다. 인디오 아이들 두 명이 위통을 벗은 채 이쪽 으로 달려왔다가 그를 지나쳐 갔다. 페드로가 막 즘은 길을 돌아 아파트 입구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선생, 잠깐만."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페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멈줬다. 아까부터 따라오던 녀석이었다. 도대체 이놈이 어떻게 여기까 지 따라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선 늘라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 그러면서 사내는 웃으려고 입 끝을 올렸다. "년 누구냐!" 합 봉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오른손을 판초 속으로 조금씩 밀어 넣으면서 그가 물었다. 아직도 숨이 가쁘고 가습이 뛰고 있었는데 이놈은 그저 조용히 를김 만 통고 있을 뿐이다. "난 고영무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당신 보스를 말입니다. 틀리지 않 기를 바랍니다만." "그건 무슨 소리야? 고영무가 누구지" 이미 페드로의 오른손은 판초 밑의 권총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 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목숨을 걸고 당신에게 이야기하는겁니다, 선생. 난 어제도 당 신을 미행했는데 이 자리에서 당신을 놓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곳에 서 먼저 기다린겁니다. " 사내는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데스티조였다. 눈이 날카롭고 입 술이 얇아서 약삭빠른 인상이었으나 말투는 진실성이 있어 보였다. "난 미국의 연락을 받고 온겁니다, 선생, " 그가 다시 말했다. "도대체 무슨?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연락을 않기로 한 것도 압니다. 하지만 목표점 부근에서 기다리면 만날지도 모른다고 해서 일주일째 기다렸습니다. " 이만하면 카스틸로의 끄나풀은 아니라고 페드로는 믿었다. 그러나 아파트로 데려갈 수는 없다. 그는 이 사내를 믿은 책임을 혼자 지기로 마음먹었다. "좋소, 당신을·믿겠소. 그런데 왜 우리 보스를 찾으려는거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요?" "난 마약부 소속으로 이곳의 책임자인 앙드레라고 합니다. 나는 이 곳 시민입니다. 성당 앞에서 꽃가게를 하고 있지요. 』의 전갈이라고 하면 당신의 보스가 알겁니다. " "나에게 전할 수는 없소?" "안 됩니다. " 그리고 그는 싱긋 웃었다. "철저하시군요. 든든합니다. " 고영무는 앙드레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앙드레, 그럼 알폰소가 보고타로 3백 명을 보낸다는 말이오? 날 도 우라고?" 앙드레는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고는 머리를 저었 다. "본래 라파엘씨의 의도는 그런 것이었습니다만 본부의 생각은 다룹 니다. 이쪽은 라파엘측에 노출시키지 않고 본래의 작전을 하고 라파엘 측이 이쪽을 지원하도록 하는겁니다. " "그렇다면 우린 그들을 만날 필요가 없겠군. 우리와 비슷한 얼굴인 지 궁금했는데, " 브루노가 말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만 앙드레가 회미하게 웃 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연락은 제가 합니다. 이쪽에서 어떤 지원이 펼요한가만 말씀해 주 시면 그들에게 제가 연락을 하지요." "그건 도대제 왜 그렇소?" 짐 버클리가 물었다. "우리의 지원부대인데 우리가 직접 지시해야지, 안 그렇소?" "이쪽은 미국에서 오신 분들이죠. 저쪽은 콜름비아 현지에서 활동한 사람들이고.본부에서는 이쪽이 미국베서 왔다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 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본부에서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고영무는 그의 시선이 힐끗 자신을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파트로 들어서자 자신과의 단독 떤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것을 무시하고 모든 대원을 불러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대원들은 만족한 모양이었으나 앙드레의 본부 소리에 조금씩 저항 감을 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라파엘의 추증자들이었고 현지 의 동료들을 만나 함께 작전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고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앙드레, 미국이 내정간섭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은 모양이로 군. 어차피 우리는 우리만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지원이 있다면 더 말 할 것도 없지, 그렇게 합시다. " 고영무가 말을 맺자 앙드레가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내렸다. "그럼 우리의 연락 방법을 정해야 할 것 아님니까?" 브루노가 고영무와 앙드레를 번갈아 보면서 묻자 머리를 든 앙드레 가 선뜻 대 답했다. "그건 제가 정해 가지고 왔숩니다. " 앙드레가 돌아가고 나자 짐 버클리가 고영무에게 다가왔다. 브루노 가 뒤를 따라와 그의 앞자리에 나란히 않았다. 짐이 입을 열었다. "보스, 우리는 보스가 명령한다면 당장에 죽으러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먼저 알아 두펀야 합니다. " "알고 있어, 짐." 고영무가 선뜻 머리를 들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짐과 브루노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난 너회들과는 달리 콜름비아 국민이 아니지. 그것은 인정한다. " "너희들과 다른 보상이 있어, 너회들은 새로운 정권과 자유겠지만 나는 그것이 아니야. 그건 너희들도 잘 알거야." "앙드레의 일로 이것을 분명히 하게 돼서 잘됐다. 나는 너회들을 이 끌고 카스틸로를 제거한다. 그것으로 너회들과 나와의 계약은 끝나는 거야," 브루노와 짐은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카스틸로를 제거하는 데 내가 필요할거야, 짐. 그리고 아직까지는 내가 너회들의 보스이고." "보스, 난 다릅니다. " 브루노가 불쑥 말했으므로 짐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영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난 일을 마치고 나서도 보스를 따라갑니다, 만일 받아 주신다면," "정권이 바뀌면 너회들은 자유와 함께 큰 영예를 얻게 돼." "내가 국민학생입니까? 내 아들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습니다:" "그럼 뭐냐?" "성공하면 보스, 나는 보스가 나눠 주는 수당을 받고 LA에서 다시 살겁니다. " 마침내 고영무가 빙그레 웃었고 그것을 본 브루노가 따라 웃었다. 짐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숙였다. "짐, 마약부에서 원하는 대로 우선 본래의 계획대로 집행한다. 지원 군은 필요할 때만 지원을 받기로 하고, 연락은 앙드레를 통하는 수밖 에 없어." "알겠습니다, 보스." "우린 마약부와 계약을 맺은거야, 이 시점에서 둥을 돌리면 안 돼." 짐이 다시 머리를 遣덕였다. 그를 바라보던 고영무가 문득 물었다. "짐, 너도 브루노와 함께 일 끝내고 돌아갈 작정이냐 짐이 머리를 들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저는 우선 카스틸로를 제거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그런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난 너희들을 모을 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집에 가져다 줄 생활 비를 나눠 주었다. 하지만 일이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말하지 않았지'.n 고영무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안에는 네댓 명의 대원들이 있었으나 이쪽을 의식한 탓인 지 응접실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최대광과 신용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말해 주면 너희들이 돈 때문에 싸우러 간다는 건시끄러운 일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회에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나는 28명의 대원에 게 수당을 나눠 줄 것이다. 죽은 자는 그의 가족에게 준다. 이것은 본 래부터의 내 생각이다. " 브루노와 짐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콜를비아에 남아 있을 대원에게도 주겠다. 브루노, 이것을 대원들 에게 알려 줘라." 브루노가 커다랄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통령궁의 대연회장은 3백 평이 넘는 규모였으나 내외 귀빈들로 가 득 차 있었다. 성장을 하고 부인을 동반한 장관과 장군, 학계와 종교계, 문화예술 계의 유명인사들은 모두 모여들었고 해외사절들도 빠짐없이 참석해 있었는데 오늘이 독립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휘황하게 번책이는 연회장에는 조금 전 카스털 로의 축사가 끝나고 댄스파티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회장 안쪽에 마련 된 악단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 나오자 얼굴에 웃음을 격운 카스털로 가 부인민 소피아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왔다. 소피아는 중년의 나이였으나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 었다. 혹갈색 눈과 갸름한 얼굴, 도톰한 입술은 아직도 사내들을 매혹 시킬 만했고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품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플로어로 나가 왈츠를 추기 시작하자 하나씩 둘씩 장관과 장 군, 외교사절들이 부인과 함께 플로어츠 나가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이 제 떠들썩한 소음과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벽 쪽에는 술과 안 주가 준비된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어서 그쪽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 다. 에르난데스는 왈츠가 한 곡 끝나자 부인인 막달레나의 손을 끌고 플 로어를 벗어났다 카스틸로도 소피아와 함꼐 옆쪽에 마련된 자리로 가 고 있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에르난데스, 난 이만 들어갈테니까‥‥‥‥ 카스틸로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여기에 남아 있도록 해.도밍고가고생하고 있는데 기분이 흥 겨워지지가 않아." "네, 각하." 에르딘데스가 힐끗 카스틸로를 을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 기가 가셔 있었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연회장의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럼 난 들어간다. " 카스틸로는 몸을 돌려 소피아와 함께 옆쪽 문으로 사라졌다. 대통령이 나가자 연회장은 더욱 활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고 소란스 러워졌으나 에르난데스는 벽에 붙은 의자에 우두커니 論아 있었다. 도밍고는 지난 6개월 동안 정부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오르쿠에를 이 틀 전에 함락시켰다. 라파엘이 주력부대와 함께 뒤쪽의 밀림 속으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어줬든 오르쿠에는 해방시킨 것이다. 밀림에 들어가면 대규모의 군사작전은 어려워진다. 잡으려는 쪽이 나 물기는 쪽이나 부대를 작게 나누어 소모전을 치를 작정을 해야 하 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득이 있다면 이제 라파엘은 정권을 회복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반이 되는 지역과 주력을 모두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에르난데스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도밍고는 하루 에도 여러 번씩 카스델로와 통화를 하고 이틀에 한 번은 헬리를터를 타고 날아와 대통령궁에서 장시간 머물다가 간다. 에르난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막달레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저쪽 바에서 술 한잔 할테니까‥‥‥‥ 그가 취적거리며 옆쪽의 군상들 사이를 혜쳐 나가자 모두들 길을 비 켜 주면서 그에게 목례를 보냈다. 그들을 향해 옷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여 보인 에르난데스의 가슴이 부글부글 끊었다. 만일 오르쿠에에서 도팅고가 와 었었다면 이 연놈들 은 그놈에게 더 깊숙이 머리를 숙일 것이다. 이제 그놈은 명실상부한 제2인자인 것이다. 바로 다가간 에르난데스는 잔에 담아 놓은 샴페인을 들어 한 모금에 마셨다. "장군, 오랜만입니다. " 옆쪽에서 말을 거는사람이 있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몸을돌렸다. 미국 대사인 맨스필드였다. 그는 둥근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 고 있었다. "아, 맨스필드씨. 그렇군요,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서 만남니다. " 다시 술잔을 집은 에르난데스가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항상 바빠서 대사들과의 모임에는 자주 못 갔습니다. 미안합 니다. " "재미없는 모임이지요. 특히 대사들은 말입니다. 언제나'예의를 차 리면서 본부의 명령을 받아야 움직이니까요. 화장실에 갈 때만 째놓고 말입니다. " 에르난데스가 입술을 부풀리며 웃었다. "대사, 그럼 지금도 그렇소?" 맨스필드가 술잔을 입에 델 채 플로어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에르난 데스는 술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카스틸로는 미국 이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곧 연락을 드리지요." 소음 속에서 그가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에르 난데스는 몸을 돌렸다. 다시 한입에 샴페인을 털어넣었으나 이미 술기운은 달아나 있었고 속만 베스꺼됐다. 오늘은 거들을 너무 단단히 채운 것 같았다. 술잔을 내려놓던 그의 시선이 두 사람 건너 옆쪽에서 안주를 입에 넣는 사내 에게 멈준다. 한국 대사인 김상호였다. 그는 작년 말에 부임해 왔으므 로 아직 이곳 물정에 서투르다. "이보시오, 김대사. 샴페인 한잔 드시겠소?" 샴페인잔을 들며 말하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 단정한 얼굴이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녹록하지가 않다. 한 국 교민들의 집을 수색하는 것에 대해서 이놈은 외무부에 강력히 항의 를 해왔다.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계엄사령부까지 찾아와 한참 동안이나 떠들다 간 놈이다. 전직이 국회의원이어서 그런지 노는 것이 전문 외교관하고 다르다. "김대사, 이제 한국 교민이나 주재원에 대한 상황은 나아졌지요?" "네, 덕분에. 고맙습니다. " 그러나 얼굴은 전혀 고마운 표정이 아니다. 에르난데스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문득 맨스필드가 지나치면 서 한 말이 떠올랐다. 산토스에게 계단 위에서 기다리라고 이른 다음 고영무는 돌더미가 이곳저곳 쌓인 밋밋한 능선을 걸어 올라갔다. 좌우에는 오래 된 석조 십자가와 제단들이 불규칙하게 세워져 있었 는데 곳곳에는 파혜쳐진 흔적도 보였다. 옛 무템이었고 앞쪽의 새로 조성된 묘지도 이장된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잘 다듬어진 흔 적이 보이는 묘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쳤 다. 오른쪽 언덕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은 이제 막 땅에 묻힌 사람을 위한 의식일 것이다. 좌우의 묘지를 살펴 가며 곁던 고영무는 이윽고 눈에 익숙한 이름들 을 찾아내었다. 킴 프란시스코, 안 마리아, 최 아막리오 둥의 이름은 한 국의 이름을 가지고 이민와서 살다가 하는 수 없이 이곳 이름을 붙이 고 죽은 사람들이다. 주위에서 매일 마주치고 거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영철, 옥순으로 발 음하기 어려운 본이름으로 불리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이곳 이름을 붙인 가장 큰 이유의 하나인 것이다. 걸음을 늦춘 고영무는 좌측의 묘비명을 하나씩 臺어 나갔다. 점심시 간이 훨씬 지난 오후 4곡경이어서 한낮의 비스듬한 및살이 묘비에 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능선을 넘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나무 냄새 같기도 하고 야채를 절인 템새 같기도 한 묘지 특유의 공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붙한 죽음을 보 아 온 셈이었다. 일년 동안 자신의 손에 죽어간 사람도 하나둘이 아니 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강남의 피살을 신호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무템들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좌측의 안쪽 능선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국 이름이 적힌 묘비만핼도 5, 60개는 되어 보였는데 이민 2세대도 묻혀 가고 있는 시기였다. 묘비를 들어 가던 고영무의 시선이 옮겨지다가 한순간에 멈추었다. 바로 앞쪽 3미터쯤 떨어진 묘비 옆에 김영지가 정물처럼 서 있었던 것 이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이 윽고 먼저 입을 뗀 것은 고영무였다. "나는 김강남씨를 죽이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는 이쪽저쪽의 묘비판에 부딪친 때문인지 조금 울렸다. 그러나 김영지는 듣지 못한 듯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 고만 있었다. "물론 당신 아버님도 마찬가지야. 그럴 의도가 없었어." 고염무는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김강 남과 호세 김의 묘비를 찾아내었다. 그녀의 뒤쪽에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김영지를 지나 그들의 묘비 앞에 제각기 꽃을 놓고 고영무는 절을 했다. 호세 김의 묘 앞에서 절을 마친 고영무는 일어나 묘비를 바라보 았다. 아직도 정으로 다듬은 자국이 생생한 대리석 묘비가 주변의 분위기 와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고영무의 가습을 더욱 가라않혔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고영무가 몸을 돌리자 이미 김영지는 보이 지 않았다.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사무실 앞을 지나는데 민기철이 나왔다. "영지야,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그는 호세 김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켰으므로 소매를 두 번즘 걷은데다가 바지는 자신의 것을 입어서 반코트를 걸친 것 같은 모습이다. "저기, 친구집에요." 얼떨결에 틱과 손을 한꺼번에 들어 시내 쪽을 가리켰는데 민기철은 그것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왔다. " 나란히 집 쪽을 향해 걸으며 민기철이 말했다. "어머니는 별고 없으시단다. 외삼촌은 오히려 너를 걱정하시더라." "주문은 많은데 일손이 모자라서 직원을 몇 명 써야됐다. " "제가 내일부터 일할게요, 아저씨." 민기철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눈을 커다랑게 치켜 뜨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잠시 주춤거리던 민기철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잘 생각했다, 영지야. 이젠 네 생활을 찾아야지. 아버지도 기뻐하실 게다. " "네가 매일 나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불안해서 사람을 시켜 네 뒤를 따라가 보게 했지." "어이구. 이젠 내가 살겠구나." 민기철이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영지의 마음도 가벼 워졌다. 집 안으로 들어선 김영지는 응접실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외삼 촌은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가고 한참을 기다리자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외삼촌의 목소리였다. "외삼촌, 저예요. 영지예요." "아, 영지냐? 그래, 별일 없지?" "네, 저는 괜찰아요. 어머니는 어떠세요?" "여전하다. 그래, 넌 언제 서울에 올테냐?" 김영지는 숨을 들이쉬었다. "외삼촌, 저 이제 여기 있겠어요." "아니, 그곳에? 영지야." 외삼촌은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마 콜름비아의 내전이 격 렬해져 있다는 것은 전세계가 알고 있을 것이다. "외삼촌, 제가 비행기표를 보내 드릴테니까 어머니를 보내 주시지 않겠어요? LA에서 갈아 타시기만 하면 되는데, 누구 LA에 가시는 분 한테 부탁해서." "안 된다. " 외삼촌의 말소리가 냉랭해졌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안 이상 네 어머니는 보낼 수 없다. 너도 이계 그곳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와라." "외삼촌." 김영지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민기철이 응접실로 들어왔다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어깨출 굽 힌 모습으로 돌아 나갔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외삼촌. 그리고 이곳은 제 고향이에요. 비록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지만 " 김영지는 말을 그치고 침을 삼켰다. "네 어머니는 폐인‥‥‥ 아니다, 네 어머니까지 그렇게 만든 곳이 다." 외삼촌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너회들을 잃기 싫어서 그런다, 영지야.너나 네 어머니는 지금 가족이 필요해. 돌아오너라." "저는 돌아왔어요, 외삼촌." 김영지는 응접실 안을 돌아보았다. 콜룹비아에 돌아온 지 보름이 넘 었지만 집 안의 가구를 이렇게 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 슴에 와닿는 느낌도 처음이다. 20여년 동안 낯익은 가구들이었으나 새 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게 편 동기가 무엇인지도 알 고 있었다. "저는 이곳에서 가족을 잃었지만." 김영지는 아릿입술을 깨물고 말을 멈딘다. 외삼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이곳에 오셔야 나아지시리라고 믿어요. 그건 확실해요, 외삼촌." 그는 김영지의 끈질긴 고집에 지쳤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외삼촌, 어머니를 낫게 해드리고 다시 한국에 갈게요." 김영지가 다시 말했다. "이곳은 어머니나 저의 고향이에요, 외삼촌." "네 어머니에게 물어 보겠다. " 마침내 그가 한숨 소리처럼 말을 및었다. "네 어머니가 승낙한다면 보내 주마." 말을 멈춘 어머니가 승낙과 거절을 몸짓으로 표현할 리는 없다. 오 직 침묵으로 일관하는 어머니의 반응을 외삼촌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몰랐다. "외삼촌." 김영지가 초조하게 불렀으나 외삼촌은 다음에 연락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박주경은 눈을 부릅떠 앞쪽을 바라보았다. 예 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상대방은 너무 당당했다. 놈의 말소리가 다시 수화기를 타고 흘러 나왔다. "따라서 나는 박회장이 요구조건을 수락할 것으로 믿습니다. 요즘 신혼이라 이것저것 바쁘시겠지만 이 일이 잘못되면 회사고 쥐고 순식 간에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아실데니까." "이것 보시오." 박주경이 말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30억을 가져갔소. 그런데 또 2脚억이라니. 그런 큰 돈도 없 으려니와 당신에게 죄를 지은 것도 없소, 나는." 학주경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자르듯이 말했다. "난 경찰에 신고할데니까 그 서류를 뿌리든지 신문에 내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난 죄가 있다면 차라리 세금을 내든가 벌을 받겠소." "그러셔도 좋습니다, 박회장. 과연 결단력이 강하십니다. 그럼 그렇 게 합시다. 내일 아침부터 나는 일간지에 5단통으로 당신의 비자금에 대한 규모와 사용처를 광고로 내겠소. 물론 내 돈으로. 매일매일 낼 것 이니까, 그럼." 전화가 끊기자 한동안 수화기를 쥐고 있던 박주경은 전화기를 부셔 버릴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자성이 놈에게 모든 서류를 넘겼음에 틀림없었는데 과연 어디까 지 깊숙하게 자료를 수집해 놓았는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자영은 그의 분신과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거의 밤마다 살을 刃었고 아버지민 박재룡회장을 도태시키는 계획까지 잠자리에서 상의했던 사 이였으니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일까지 수집해 놓았을 수도 있다. < 계 속>
[이원호] 황금의 땅 ㅡ4권 15 박주경은 인터폰을 눌렸다. "네, 회장님 ." 비서실의 수행비서인 이한일의 목소리가 흘러 나봤다. "내 방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한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책상 앞에 다가와 딘다. "부르셨습니까?" "이자영의 소재는 아직 파악이 안 됬죠?" "아직 안 되었습니다, 회장넘. 지금 찾고는 있습니다만." "영동 경찰서의 한반장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사흘 안 에 찾아내겠다고 장담은 했습니다만." 박주경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한일은 초조한 듯 눈을 여러 차례 깜 학였다. 비공개로 수사하느니만치 인력과 자금이 더 들어가고 있었다. 경찰 서의 반장과 반원들에게 두통한 수고비가 주어졌으므로 그들이 만사 제쳐놓고 이 일에 매달려 있지만 확실한 보장은 없다. 박주경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년이 3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런 쇼를 부리면서 그 자리를 빠져 나가 이렇게 크게 놀 줄은 몰람다. 본래가 교활한 계집이었다. 그리고 제 분수에 맞지 않은 허영으로 뭉친 꿈을 꾸는 년이었다. 그년과 결흔할 생각은 애초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자부한다. "신문사의 광고담당 편집자를 만나야겠어, 모든 일간지의. 그래서 우리 회사, 특히 나에 대한 폭로광고 의뢰가 오면 싣지 못하게 해야 돼." 박주경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한일이 눈을 둥그렇게 됐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서 돈을 준비해 가지고 나가. 몇 사람이 서둘러야 돼. 이자영이 신문에 폭로기사를 실으려고 하니까 편집장들한테 광고비의 배를 주 더라도 못 싣게 하란 말이야." "알았습니다, 회장넘." 그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박주경은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보 았다. 놈이 일을 벌이기 전에 이쪽에서 미리 선수를 쳐야 한다. 이미 이쪽 에서 어떻게 하겠다고 말을 해놓은 이상 저놈들도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막 전화기에 손을 가져가는데 벨이 울렸다. 얼떨결에 깜짝 놀란 박주경은 놀란 것에 화가 났고 수화기를 움켜쥐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뭐야!"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전화기가 외부 전화라는 것을 깨달 았다. "어머나, 저예요." 그쪽에서도 놀란 듯 대답해 온 것은 오경선이었다. 박주경은 기다랗 게 숨을 내쉬었으나 아직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웬일이야?" "당신, 무슨 일 있어요?" 그가 물었는데 그쪽이 오히려 되물어 왔다. "전화에 대고 그렇게 소리지르는 법이 어디 있어요? 놀랐잖아요." "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당신 흑시 이자영이라고 아 세요?" 박주경이 눈을 치켜 뜨고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오경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해 왔는데 집으로 무슨 서류를 보낸대요. 당신 이 지시하신 것이라면서, 이자영에 관한 서류라고 했어요. 저, 받아도 돼요?" 침을 끌어모아 삼킨 박주경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자성씨, 요즘 얼굴색이 좋지 않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거야 조한철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던 이자영이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아무것두." "그런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맛살을 찌푸린 이자영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1시 10분 전이었 다. 바 안의 손님들은 10여 명이 넘었으나 모두 외국사람들이었고 내국 인은 그들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요." 술잔을 집어 든 조한철을 향해 이자영이 말했다. "피곤해요." "그러지, 그럼 ," 술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 조한철이 선선히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 어딘다. 둘이서 양주 한 병을 나눠 마셨으니 마실 만름은 마신 것이다. 앞장 서서 클럽 안을 빠져 나가던 조한철이 바 안쪽에 서있는 바텐 더의 인사를 받고는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바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서너 명의 외국인이 그녀를 유심히 바 라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었으나 개의 裂리가흔들리는 것처럼 자연 스러웠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리던 이쪽이 오히려 무안해졌다 "오늘 안 들어가도 돼죠 한철씨." 문 으로 나온 이자영이 문득 그렇게 말하자 조한철은 퍼쪽 눈을 치켜 였다. 이제까지 그와 대여첫 번 만나 왔지만 외박한 일은 없다. 조한칠은 시원스런 성격이어서 은근히 눈치를 보이다가 이자영이 거 절하면 두말 하지 않고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영동에 있는 호델의 방 안에 들어설 때까지 조한철은 및 마디밖에 입을 열지 않았고 이자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 았는데, 이런 성격이 이자영의 마음에 들었다. 얼굴값을 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경망스럽고 말이 많았는데 조한철은 행동이 진득한데다가 필 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그를 결혼상대로 생각해 본 척은 없다. 박주경으로부터 채워 절 수 없는 신선한 분위기를 즐겼을 뿐이다. "몸이 끈끈해요. 샤워부터 하고 싶어요." 의자 위에 가방을 던져놓으면서 이자영이 말하자 조한칠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창가 의자에 합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보면서 이자영 은 화장실로 들어딘다. 화장실 안의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을 본 이자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제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이다. 두 눈에 음울한 광채를 내고 입 술을 꼭 다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시선을 땐 그녀는 한 가지씩 옷 을 벗어 세면기 위쪽에 내려놓았다. 샤워를 끝내고 난 이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세면기에 놓인 옷뭉치 를 안고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까의 그 모습 그대로 조한철이 앉아 있다가 두 눈을 둥그렇게 됐 다. 옷가지를 의자 위에 걸쳐놓은 이자영은 알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 선 조한철이 그녀의 온몸을 榮아보았다. 이자영이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서 침대로 다 가가 시트 속으로 하반신을 밀어넣었다. 그는 이런 식의 도전에 당황하거나 주춤거릴 사람이 아니다. 이자영 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받으면서 조한철이 옷을 벗어 던졌다. 금방 그의 건강하고 미끈한 알몸이 드러 났다. 이미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거칠게 이부자락을 제쳤다. 그와의 입맞춤도 처음이었으므로 이자영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 이 자신의 눈에서 코로,다시 입술로 내려오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 출 동안 그녀의 몸도 점점 뜨거워져 갔다. 그의 숨결이 귀를 간지럽힐 때는 참다못해 두 다리를 黑았다. 조한철은 서두르지 않았고 이자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온 몸을 확인이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얼굴을 가져다 대었는데 이윽고 그 의 입술이 아릿배를 지나자 그녀는 엉덩이를 들었다. 방 안은 뜨거운 숨결과 비릿한 땀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조한철은 그녀의 깊은 곳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두 손길로 매끈한 허맥지 의 안쪽을 어루만졌다. 이자영은 자신의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액체가 밑쪽으로 흐르는 것 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했을 때 조한철은 상반신을 끌어당겨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이자영은 아래쪽에서 뜨거운 충격을 느졌고 그것은 가득 찬 포만감으로 연결되었다. 감탄하듯이 그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리를 번쩍 치켜 들었으므로 그녀의 몸은 어깨와 두 발만이 침대를 짚은 자세가 되었고 그것이 조한철의 움직임과 맞추어 엉덩이를 들었 다가 내린다. 이윽고 그녀는 두 다리를 번쩍 치켜 들고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방 안이 터져 나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신비로운 여자야." 가뿐 숨을 겨우 진정한 조한철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방 안은 끈끈했고 장마 직전의 날씨처럼 비린내와 열기에 덮여 있었 다. 알몸을 내평개치듯 침대 위에 누운 채 이자영도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만를 멋진 여자는 없었어, 내 인생에서." 그는머리를돌려 이자영의 옆얼굴을바라보았다. "자영씨, 당신을 사랑해." 천장을 바라보던 이자영의 입술이 꼭 다물어진 채로 부풀어 오르더 니 입술 끝이 천천히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알고 계시면서. 난 결혼할 남자가 있는 여자예요," "박주경 회장 말인가?" 그의 손이 젖꼭지를 건드리고 있었으므로 이자영은 시선을 내려 그 것을 바라보았다. 의지와는 반대로 붉은 젖꼭지가 기론 듯 일어서는 중이다. "동부그룹의 회장딸과 결혼을 했더구만 그래. 나도 알아봤어." "잘못 알아보았군요, 한철씨. 난 박주경 회장의 심복이었을 뿐이에 요. 깊은 관계는 없어요." 조한철의 한 손이 그녀의 깊은 곳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의 촉감이 이쪽에게도 느껴졌는데 아직도 뜨거웠고 끈적거렸다. 조한철의 입김이 다시 귀에 닿았다. "그렇다면 그랜드 호텔은 왜 자주 가서 묵고 와?" "그 사람이 내 몸을 필요로 해서요." "그것도 비서가 해야 할 일이야?" "나도 필요하기도 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자영씨." 이자영이 손을 뻗어 그의 남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것은 다시 단 단해져 있었고 끈적거렸다. "이제 우리의 관계는 끝났지만 당신의 그 말이 나에겐 큰 위안이 돼 요, 한철씨. 고마워요." 조한철의 손놀림이 멈줬으므로 이자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를 모으고 엉덩이를 들어 스스로 자극을 만든 다. "박주경과 만나는 동안에 내가 필요했었단 말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와의 관계가 끝나면 이쪽도 끝나게 되는 것이었나?" "당신은 신선한 남자였어요. 가끔 산소공급을 받는 것 같았어요. 당 신을 만날 때에는." 이자영이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자신의 손에서 때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 하나만으로 난 살 수가 없는 여자이 고요." "또." 그가 재촉하듯 뒷말을 따라 물었으나 이자영은 머리를 저었다. "난 본래 당신을 결혼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랑의 대상으로 도." "날 잘 아는 모양이지?" 웃음띈 목소리로 그가 묻자 이자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회사가 이름과 전화번호만 걸어놓은 회사라는 것도 알아요. 더 자세한 것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이자영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줘요. 오늘 밤이 새도록." 목에 힘을 주어 버티던 조한철은 바로 얼굴 밑으로 그녀의 달아오른 두 볼과 두 눈을 보았다. 조금 벌린 입술 사이로 흰 치아가 드러났다. 이윽고 조한철은 그녀의 몸 위로 상체를 실었다. 이제까지 이런 경 험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지금은 미 워할 수도 없었다. 이자영이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음식에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찌개에서부터 김치에 이르기 까지 단맛이 났다. 생선피개를 몇 모금삼키고 난 이자영은 수저를 내 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장 안에 었는 음식점이라 장을 보러 온 아줌마들과 따라온 아이들, 주변 가게의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손님들 의 대부분이다. 그들이 내지르는 밝고 거친 소음과 밖에서 들려 오는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가 가득 귀를 매우고 있다. 이자영은 도무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이질감으로 외로워 졌다. 물론 그들과 어울리려고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니다. 집에 연락을 하였더니 형사들이 다녀간 후라 집 안이 벌컥 뒤집혀 있었다. 어머니 는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렸고 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것이 틀림없는 데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박주경이 경찰에 신고를 하였을 것이다. 이자영은 휴지를 집어 입가 를 누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딘다. 계산을 치르고 식당을 나온 그녀는 질퍽거리는 시장바닥을 사람들 과 부딪치며 걸어 나왔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쓰래기에 묻혀 질 퍽거리는 시장바닥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것의 시작이 부회장 비서로 발탁되었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박주 경의 유혹을 받아들여 그랜드 흐델의 열쇠를 손에 쥐었을 매부터인지 는 알 수 없다. 시장을 빠져 나온 이자영은 시장 입구 쪽의 과일행상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싫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누르자 골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저, 유혜정씨 좀 부탁합니다. " "전데요." "언니, 나야, 이자영이." "어머나 니가 편일이니? 나한테 전화를 다 하구?" 저쪽에서 깜짝 놀란 듯 반가워했으므로 이자영은 가늘게 숨을 내쉬 었다. 유혜정은 그녀의 대학 선배로 대한항공에 취직해 있었다. "언니, 오랜만이야. 내가 바빠 자주 연락 못해서 미안해."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에 신경을 쓰면서 이자영이 말하자 유혜정은 짧게 옷었다. "너, 바쁘다는 소문은 들었어. 바쁘면 좋지 월, 너 잘되면 내가 네 덕 볼지 어떻게 알" "언니, 지금 바빠?" "아니, 괜찮아. 그런데 패?" "내가 급해서 그러는데, 미국 가는 비행기 중에서 어떤 것이 오늘 제 일 빠르게 떠" "누가 가는데?" 유혜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셨다. "너회 회사 높은 분이야? 회장님?" "아니, 내가 심부름으로." "1둥석도 괜찮아?" "응. " "목적지는 미국 어디?" 이자영은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디스코장 웨 이터 강철수의 빨간색 딱지가 붙어 있었다. "LA. " ' "잠깐 기다려." 컴퓨터의 키를 두드리는지 철택거리는 소리가 났다. "됐다, 우리 비행긴데 오후 5시 출발이야. 두 시간 후니까 지금 공항 으로 가야 돼. 너 비자는 있지?" "응, 그런데 언니 " 이자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강철수의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왜?" 의아한 듯 유혜정이 물었다. "아냐,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지금." "공항으로 직접 가도 되는데 내가 네 이름을 입력시켜 놓았어. 네 코 드 넘버는 Xq1572야." "아냐, 떠나기 전에 언닐 잠판 보려고." "그래, 어서 와. 사무실에서 기다릴게." 30분 후에 극자영은 대한항공 본사 유혜정의 책상 옆에 그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유혜정은 그녀가 반가운지 생글거리다가 이내 눈을 깜박 이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언니, 박주경이가 결혼한 것 알지?" 문득 이자영이 되묻자 유혜정이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놈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내쟁개쳐졌어, 언니, " 이자영이 일성그룹의 회장인 박주경과 가합다는 소문은 이미 동창 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박주경이 동부그룹의 친째 딸인 오경선과 결혼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박주경이는 결혼하고 나서도 날 잡아 두려고 해, 언니. 그래서 미국 으로 나가 있으려고." "어머나, 세상에, 왜?" 오혜정이 눈을 둥그렇게 띤다. "결혼하고 나서도 예전처럼 관계를 갖자고 협박하고 있어." 이자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 공항의 세관 컴퓨터로 연결해서 내 신원조회 좀 해줘. 그 사 람이 손을 썼는지도 몰라. 악랄한 사람이야." "응." 책 몸을 돌려 앉은 유혜정이 이자영의 여권을 바라보며 번개 같은 존놀림으로 컴퓨터의 키를 두드렸다. "이상 없어, 자영아." 이자영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얘, 같이 가 줄게, 공항까지." 유혜정이 의자에 걸린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네가 떠나는 걸 봐야 내가 마음이 놓이겠다. 부모님한테는 잘 말씀 드렸겠지?" "응, 유학이나 가려고 한다고 인사드렸어, " "가자. " 이자영의 어깨를 안은 유혜정은 사무실을 나왔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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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감상~~~고맙습니다~~~~~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