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름 |
손정도 (孫貞道, 1872.7.26~1931.2.19) |
호 |
자 호건(浩乾), 호 해석(海石) |
본관 |
|
출생지 |
평남 강서(江西) |
주요활동 |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10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종교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12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일본수상 가쓰라다로[桂太郞]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전남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
3 ·1운동 직전에 다시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이 되어, 김철(金徹)·김구(金九) 등과 의용단을 조직,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흥사단(興士團) 활동에도 참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하였으며, 1922년 독립운동의 무대를 다시 만주 지린[吉林]으로 옮겨 국권회복에 진력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어록 |
|
저서 |
|
가족 |
딸 손인실 |
주변인물 |
김 구, 김형직, 김성주, 안창호, 김 철, 차이석, 주요한 |
생가 |
|
묘소 |
대전 국립현충원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 |
기념비 |
|
참고, 출처 |
네이버백과, EBS한국독립운동사 |
<자료원문>
4월의 독립운동가 손정도 의정원 의장 매일경제|기사입력 2007-03-30 20:02 |최종수정2007-03-30 20:02 국가보훈처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8돌을 맞아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孫貞道ㆍ1872~1931)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평북 강서 태생인 선생은 1910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돼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2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일본 총리 가쓰라다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전남 진도에서 2년여 간 유배생활을 하다 1914년 석방됐다.선생은 1919년 2월 3ㆍ1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같은 해 4월 13일에는 이동녕 선생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됐다. 선생은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됐으며 1922년 8월에는 김구 여운형 선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Copyright ⓒ 매일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자료원문>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선생
(1881. 7. 26 ~ 1931. 2. 19)
1. 선정배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8돌을 맞이하여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평북 강서군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해석(海石) 자는 호건(浩乾)이다.
1902년 평양에서 조 목사 집에 유숙하면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숭실학교를 졸업한 이후 남산현교회 부목사와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다시 서울 유학길에 올라 협성신학당에서 수학하고, 중국 북경과 북만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해석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독립근거지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일본 수상을 지낸 가쓰라 타로(桂太郞) 암살음모 미수죄와 105인사건 공모자로 체포된 후 경성으로 압송되어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뤘다.
석방된 직후 일제는 선생이 독립군무관학교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금광을 습격했다는 이유로 선생을 또 다시 체포하여 진도로 유배형을 보냈다. 북만지역 독립운동에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선생을 이 지역에서 분리하기 위한 일제의 계략에 불과했다.
이후 선생은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비롯해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하여 의정원의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도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비롯해 의용단, 흥사단, 대한교육회 등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하며 독립운동에 힘쓴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어 선정하였다.
2. 주요공적
❍ 1919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 1921 임시정부 교통총장
❍ 1922 대한적십자회 회장
❍ 1927 만주에서 농민호조사 결성
3. 기념행사
❍ 4월의 독립운동가 기념사진전
- 기 간 : 2007. 4. 1∼4. 30
- 장 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기념관
- 주 관 : 광복회(☎02-780-9662), 독립기념관(☎041-560-0114)
- 내 용 : 손정도 선생 공적관련 사진 전시
❍ 4월의 독립운동가 손정도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
- 기 간 : 2007. 4. 20 (금) 오후2시~4시
- 주 관 :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
- 내 용 : 손정도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
김 승 일(국민대학교 연구교수)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지방색(地方色)을 가르는 파당싸움을 말아야 한다. 좁은 나라 한 핏줄의 겨레가 무슨 남도니 북도니,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며 네 갈래 열 갈래로 갈라져 싸우는가? 이는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다”
- 선생의 설교 중에서.
1. 출생에서 목회자에 이르기까지
해석은 1881년 7월 26일 평안북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태어났고,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건(浩乾)이다.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 온 해석의 집안은, 전통적인 유가(儒家)집안으로서 강서지방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다. 이러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해석인지라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고, 지혜가 남달리 영특했다.
그는 6살이 되는 1888년부터 당시의 관습대로 향리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면서 성장했다. 1895년 13살이 되자 해석은 같은 동리 박용(朴鏞)씨의 장녀로서 2살 위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1902년(23세) 해석은 관리가 될 생각으로 평양으로 떠났는데, 가는 도중 날이 저물자 하루 저녁을 우연히 조 목사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조 목사로부터 새로운 학문과 세상 돌아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곧바로 상투를 자른 다음 관리가 되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의 사당(祠堂)을 몽둥이로 모두 부수어 버리는 둥 난동을 부리자 문중 어른들의 대노를 사 집안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에 크게 놀란 어머니지만 모정은 어쩔 수 없었기에 아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해석은 정신을 차리게 되자 곧바로 조 목사를 찾았고, 조 목사는 그를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였던 문요한(文約翰, John. Z. Moore, 1874~1963) 목사에게 소개해 주었다. 문 목사는 해석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삼고 목사관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숭실학교에 다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해석은 1903년 숭실(崇實)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학을 하며 신학문을 배우는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숭실학교에 다니는 동안 시댁에서 천대를 받던 부인이 간신히 평양까지 그를 찾아와 평양기독병원인 기흘병원에서 잡역부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았다.
1907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해석은 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니다가 휴학하고, 평양 남산현(南山峴)교회의 부목사를 담임했다. 그러면서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디 목사의 부흥회에 참가하여 감화 감동을 받고 국가가 가져야 하는 자주 독립과 국민이 가져야 할 민족주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이를 위한 선한 싸움을 해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곧바로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에 오자마자 협성신학당(協成神學堂)에 입학하여 목회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학업이나 행동 면에서 주목을 받아 감리교 부흥의 주도자로서 지목되어 부흥사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진남포(鎭南浦)교회에서 2주일 간 부흥전도사로 초청되었고, 그 결과가 호평을 받자 북감리교 측에서는 정식으로 전도사 직첩을 주어 해석을 진남포교회로 파송하여 1년 간 시무토록 했다.
그는 뛰어난 달변과 준수한 용모를 지닌 데다‘하나님 사랑’‘나라 사랑’을 외치면서 설교 때마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하는 그의 열정어린 목회사업은 교세가 미약하던 진남포교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한 북감리교는 다시 해석을 평양감리교 선교부의 목사로 파견하여 거기서 1년 간 시무케 하였다.
일년 동안 평양 감리교 선교부는 그의 활동을 주목하다가 당시 북감리교가 추진하고 있던 시베리아 및 만주지역에서의 선교를 위해 파견하고자 했다. 망국의 설움으로 인해 한숨짓는 불쌍한 동족들에게 굳센 신앙심을 갖게 하여 그들의 고뇌를 안무해 주고자 하는데 있었다.
2. 북만지역에서의 목회활동과 민족신학의 창시
북만지역의 선교를 명받은 해석은 먼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우고자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민족 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일본 수상을 지낸 가쓰라 타로(桂太郞) 공작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석의 선교지는 중국 천진(天津)이었다. 그는 여기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포교하다가 다시 하얼빈으로 가 본격적인 북만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여기에 본거지를 두고 이주해 온 동포들과 중국인들을 상대로 목회하였고, 안동(安東)․하얼빈․간도지방, 그리고 1912년에는 잠시 동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는 독립근거지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독립운동계 인사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 관헌들은 예비검속(豫備檢束)이라 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검거하였고, 해석도 암살혐의로 피체되었다.
일본영사관에서 고문을 받던 해석은 3개월 후에 가쯔라 공작 암살미수죄 및 105인사건 공모자라는 명목으로 경성 경무 총감부로 압송되었다. 당시의 고문으로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여러 흉터자국이 남게 되었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후에 중병을 얻게 되어 평생 그를 괴롭히는 멍에가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심에서 징역 5년을 언도 받은 해석은 무혐의로 풀려나기까지 1년여 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석방된 지 며칠 후에 해석은 북간도에 있는 독립군 무관학교에 무기를 대주기 위해 황해도에 있는 금광을 습격하려 했다는 이유로 다시 피체되었다. 무죄를 인정받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해석의 영향력을 감지하고 있던 일경이 어떤 식으로든 죄를 뒤집어 씌어 만주지역에서 멀리 떠나보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구실 하에 “거주 제한 1년”이라는 행정처분(行政處分)을 내려, 1913년 11월 5일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형을 보냈다. 그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지역주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은 물론 설교나 교육을 통해 나라 사랑, 독립정신을 가르치는데 불철주야 정열을 다 쏟았다.
이러한 진도에서의 모든 선교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던 감리교 연회에서는 1914년 11월 10일 그가 진도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자 위로회를 열어주었고, 몸을 추스르는 대로 1914년 동대문교회로 파송 명령을 내려 제13대 목회자로서의 길을 걷게 했다.
해석이 동대문 교회에서 1년간 시무를 맡는 동안 그의 설교와 실천적 행동에 매료가 되어 교인수가 날로 늘어갔다. 그러다가 1915년 4월 정동교회를 맡고 있던 현순 목사가 주일학교 총무로 파견되자, 해석이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파견되게 되었다. 당시 정동교회는 한일병탄(韓日倂呑)을 전후하여 민가들이 철거되는 바람에 일반인 신도가 거의 없어져, 예배집회 이외의 교회활동은 청년운동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청년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주일학교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동교회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게 되는 전기가 되었는데, 학생들을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함과 동시에 민족의식을 배양시켜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전국에서 민족지도자로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석의 노력을 보고 있던 연회에서는 1916년에 이전에 해산되었던 엡윗청년회를 10년 만에 재조직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의 감리교회 내에서는 청년조직이 다시 구성되기 시작했고, 교회개혁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신앙노선은 민족체험과 성령체험이 결합된 가운데 구국적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정동교회 신앙노선의 기본축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해석은 학문에도 계속 정진하여 1917년에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5회). 이러한 그의 능력은 해외에도 알려져 미 감리교연회에서는 1918년 6월 23일 미 감리교회 조례에 의하여 그를 장로목사(長老牧師)로 추대해 주었다.
3. 목회자에서 독립운동가로
그러나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해석에게 새로운 길을 가게 하는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정동교회에서의 성공적인 목회 활동을 통해 젊은 청년학생들이 그를 추종하자, 이는 일본 경찰의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일본경찰의 감시는 점점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자 해석은 교회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해석에게 있어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시기로 보였다. 그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민족운동의 전선에 나서야 하는 시기로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1918년 6월 23일에 있었던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대해 신병을 치료하겠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들어 휴직원을 제출하고 정동교회를 사임하는 결단을 내린 후, 목회자가 아닌 독립운동가로서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는 민족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동교회를 사임한 해석은 그 후 가족들을 데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평양의 보통강(普通江)가에 있는 자그마한 셋집으로 위장 이사를 했다. 이렇게 갑자기 해석이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이사와 분주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게 된 데는 1918년 8월 20일경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과 관계가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대한의 독립을 쟁취해서 공화정체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시대의 조류에 맞게 대개혁을 단행하며, 대한민족이 만든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공헌을 하도록 국제협력을 하는 조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창당 목적이었다.
그는 1919년 정월 대보름날 가족을 떠나 안동(安東)을 거쳐 열차 편으로 상해로 건너갔다. 이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려던 당시 이화학당 통교이던 하란사 여사와 의친왕 이강 공을 파리로 밀항시키기 위해, 이를 준비코자 하기 위함이었다. 해석의 망명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부인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서 무수한 매질과 협박을 당했고, 이후 가족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벗어나질 못했다.
해석은 먼저 북경에서 3․1운동에 관여하며 한인교포들을 이 운동에 끌어 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임무인 하란사 여사와 의친왕 이강 공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데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중 건강이 나빠져서 합달문내(哈達門內)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영병원에 입원하였기에 그녀를 곧바로 만나질 못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독살되는 바람에 결국 상봉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계획은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밀사파견 계획의 목적은 고종의 친서를 소지한 왕위 계승권자 의친왕 이강 공이 파리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서 독립정부로써 승인을 받게 되면 일제가 장악하고 있는 식민지 한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을 것이므로 중국대륙 내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자는데 있었다. 이러한 중대한 일이 성공리에 끝날 수 있도록 밀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해석․현순․최창식 이었다. 그러나 하란사와의 만남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성사될 수 없자 허탈해하고 있을 때, 현순과 최창식이 북경에 와 그들과 협의한 후 먼저 상해로 돌아가 망명정부 수립에 매진하기로 했던 것이다.
상해에 온 해석 등 일행은 각지에 산재해 있던 애국지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의 대본영으로서의 망명정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만전을 기하게 되는 것이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전후의 활동
임시정부의 조직은 현순이 전면에 나서고 해석이 뒤에서 지원을 하는 형식을 띠면서 전개되어 갔다. 해석 등은 먼저 3월 26일, 프랑스 조계 모처에서 러시아령에서 온 이동녕, 만주에서 온 이회영․이시영, 북경에서 온 이광․조성환․조용은(趙鏞殷=素昻), 그리고 상해에 와 있던 인사들과 회합하였다. 그리고 해석과 이광수는 정부를 설립하기 전의 순서로서 우선 입법기관을 구성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4월 9일 임시의정원 건립을 제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임시의정원이 4월 13일 의장인 이동녕이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그의 후임으로 해석이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해석은 의정원 의장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임시정부의 실질적 주도세력으로서 이를 이끌고 있었으나, 1919년 9월에 위장병이 악화되어 부의장인 정인과에게 의사진행을 위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동안 내부적인 여러 갈등 문제를 감싸 안으며 내외인사들을 중재하던 해석이 자리를 뜨자 임시정부 내부의 계파 간 갈등이 불거져 결국에는 임시정부의 조직체계가 흔들리기에 이르렀다.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및 구미열강에 대해 외교적인 선전활동을 하는 것이 당시의 독립운동으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상해로 오지 않고 있었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해석은 병중인 몸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써 이승만의 마음을 움직여 중국으로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상해에 온 이승만은 이동휘(李東輝)와 극한 대립을 하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동녕 내각과 김규식 내각의 책임 추궁에 버틸 수가 없자 1921년 5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태평양회의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미국으로 가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짐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실질적인 숨은 공로자인 해석과 현순에게 떠맡겨졌다. 그리하여 이후의 임시정부는 이들 두 사람에 의해서 내면적으로는 주도되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현순이 외교문제를 둘러싼 의견대립으로 퇴임하고 도미해 버리자, 해석의 임시정부 내에서의 활동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후 해석의 활동 방향은 주로 국내에 문서를 전달해 주는 일과 국내 유지들로부터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국내동지들과의 비밀연락을 위해 해석은 1921년에 교통총장에 피임됐다.
이러는 가운데 1922년 2월 23일 대한적십자회 제3차 정기총회가 열렸고, 해석이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0년 1월에는 세계의 새로운 조류에 따라 우리 민족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하나 민족의 앞날이 불투명한 기로에 처해 있으니 이를 위해서는 살신성인의 자세로서 순국해야 하는 것은 국민된 도리라고 부르짖는 의용단을 성립했다. 나아가 해석은 흥사단 원동위원회에도 참가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중국 정부에 알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한국의 독립은 무력실력 양성을 통한 혈전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표명한 한국노병회는 1922년 10월 1일 상해 프랑스 조계 맥새이체라로(麥賽爾蒂羅路) 24호에서 조직을 발기했는데, 해석도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그 구심점이 되었다. 1919년 10월 15일에는 또 박은식과 함께 상해에서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조직하였다. 조직 목적은 국가 독립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가 이해관계에만 집중되어 있고, 진정으로 독립을 위하는 마음이 없음을 한탄했기에 진정한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는데 있었다.
한편 그는 상해지역의 교민자녀들을 위해 상해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1917년 미조계(美租界) 조풍재복리(兆豊載福里)에 방 1칸을 빌려 상해한인기독소학교(上海韓人基督小學校)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해한인교육의 요람이었던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전신이다. 또 해석은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해석은 이 회의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마음과는 달리 임시정부를 중심한 각파의 대립은 점점 더 격화되어 갔고, 독립역량 또한 거의 소실된 것처럼 판단한 해석은 드디어 자신이 순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꿈꾸어왔던 북만지역에의 독립운동근거지 설립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드디어 길림지역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5. 길림지역으로의 이동과 독립운동근거지 건설 노력 해석에 있어서 북만지역은 1911년 이 지역 선교사로 파견되면서부터 한국감리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한국 감리교회 측에서는 1918년부터 다시 파송하게 되었고, 1921년부터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해석은 다시금 과거 선교시절의 열정을 발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골치 아픈 상해를 떠나 드넓은 만주지역에서의 목회활동을 갈구하던 그는 결국 상해생활을 정리하고 길림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는 가족들을 불러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여유를 갖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길림에서의 생활은 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되돌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동안의 독립활동 등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전되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시켜야겠고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또 그러한 점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길림한인교회 안에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2세들의 교육, 특히 민족교육에 전력을 기울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편 해석은 동포들을 애국심과 신앙심으로 뭉치게 하고 동포들이 억울한 사정이 있을 때는 대신 관청에 출입하며 의지할 곳 없는 동포들의 변호사 역할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석의 교회는 길림일대 한인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구심점으로 변모하였다.
해석의 민족의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설교 요지는 「단결과 협력」・「도리(道理)」・「정직」・「애정」・「선(善)」・「근면」 등 여섯 가지였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추진해야 할 독립운동 방책으로는 「독립에 대한 가능성 제시」・「시련의 극복」・「과학적 사고의 제창」・「경험의 극대화」・「남의 탓 지양」 다섯 가지였다.
그러나 해석이 북만지역으로 자신의 활동 근거지를 옮겨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독립운동근거지를 세우자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의 재산을 팔아 액목현 지역에서의 토지구입과 농민호조사의 설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생산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근대 과학적 영농방법과 기계, 수력전기 개발에 힘썼고 교육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위생생활을 유도하여 보건에 대한 계몽을 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는 억척스런 그의 노력에 의해 길림 일대의 동포들이 어느 정도는 함께 모여 살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6. 북만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혁신파 독립운동자들과의 연계 하에 길림에서 활동무대를 마련한 해석은 교회 일을 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며 활동하였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이를 독립지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토록 하는데 힘썼다. 동시에 그들과 독립운동문제를 협의하고 함께 실천했다.
그는 정의부가 계획한 농업공사의 설립에 협력하였고, 이때까지의 독립투쟁 방법을 반성하고 새로운 정당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겠다고 성립된 단체인 고려혁명당에도 협력하였다. 통일된 정치이념을 통해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 역량을 하나로 묶는 유일당운동의 결과인 고려혁명당에 대해 많은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했다. 비록 내분으로 실패는 했지만, 민족협동전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해석은 이후 삼부통합운동 등 민족유일당 운동에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는 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길림지역의 상황은 엄청난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 야욕이 두드러지면서 중국 군벌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 지사들을 체포 구금하여 그들 대부분을 이 지역으로부터 떠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부터 오는 외로움과 서글픈 감정은 해석의 가슴속에 응어리를 지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해석은 길림성 밖에 있던 한인촌의 교회를 떠나 성문 안에 있는 우마가(牛馬街) 거리로 이사를 하였고, 다시 북경으로 옮겨가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은 해석의 모든 계획을 수정토록 했다. 그동안 길림성을 중심으로 일구어 놓은 농업합작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농민운동․선교사업도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험성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야말로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해석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각오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에서의 투쟁을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는 가족의 보살핌도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자, 결국 길림의 동양병원(滿鐵이 경영하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그 다음날 강제로 퇴원하게 되었다. 병원을 나온 해석은 액목현의 한 동포 집으로 가 저녁을 먹다가 그의 지병인 위궤양이 터지고 말아 다시 동양병원에 입원했으나, 이미 병이 깊어진 그의 생은 더 이상 연명되지 않고,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쓸쓸히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살았던 파란만장의 삶을 끝내게 되었던 것이니, 때는 1931년 2월 19일 밤 12시였다.
말씀과 행함이 일치되는‘걸레 철학’의 진실된 포본 이었던 해석의 죽음은 한인 동포는 물론 그곳 중국인들에게도 한없는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49세라는 너무도 짧은 그의 생은 민족과 국가의 입장에서도 아주 큰 손실이었다.
민족운동가로서 조국 광복의 날도 보지 못하고 망명지인 타국에서 생애를 마친 그의 부음 소식은 1931년 2월 21일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전 국민에게 답지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서거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장례비가 없어 길림 동문 밖 봉천인(奉天人)의 의지(義地 : 임시 장지) 1등 제8호 정구실(停軀室)에 임시 사빈(沙殯)으로 봉안되어 있다가, 이해 6월 첫 회 연회석상에서 이러한 사실이 호소되어 장례비를 거두게 되어 9월이 되어서야 길림성 북문 밖 북산(北山)에 있는 중국인 토지 100여 평을 830원에 구입하여 유택지로 삼아 시신을 안장할 수 있었다.
한편 장례식이 치러 진 2월 22일 일본 경찰은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많은 인파들이 모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여 그의 장례식도 성대히 치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장례식은 그의 처 박신일(21일 도착)과 실제(實弟) 손경도(孫敬道) 및 당지의 이름 있는 조선인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히 치루어졌다.
이러한 해석의 공로는 뒤늦게 인정되어져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그의 항일민족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국민장(國民章)을 추서(追敍)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그의 묘소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정부는, 중국문화대혁명 때 묘소를 전부 파헤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의 동생 필도씨에 의해 밀산으로 이장되어 조카 손원진씨가 관리해 오던 것을 알게 되어,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그 유해를 봉환시키게 되었고, 그 다음날인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첫댓글 이승만은 기독교를 망쳤지만 손정도는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에 빛과소금의 역할을 다했던분이군요
^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