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 부모를 둔 백혜선은 외할머니 손에 자라다시피 했다. 손자 교육에 열성이었던 그의 외할머니는 백혜선에게 음악, 무용 등을 닥치는 대로 시켰다. 피아노를 시작한 것도 외할머니 때문이다. 어린 백혜선 손을 이끌고 피아노학원에 데리고 갔으나 학원 선생님은 “너무 어리다. 커서 오라”고 되돌려 보냈다. 외할머니는 피아노학원 선생님에게 김치를 담가 주면서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데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선생님 역할도 크다. 서울대 음대생이던 피아노 선생님은 방학 때마다 대구에 내려와 백혜선과 친구가 돼주었고, 백혜선은 하루 9~10시간씩 피아노 앞에서 놀았다. 그 서울대생은 훗날 교수가 됐다. 영남대 교수로 있는 피아니스트 추승옥 씨다.
그는 가장 잊지 못할 연주로 1989년 뉴욕 링컨센터 연주를 꼽는다. 메릴랜드 윌리엄 카펠 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한 후 뉴욕 음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가진 독주회. 객석에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 수술을 거부한 아버지는 딸의 연주를 보기 위해 무리한 여행을 감행했다. “여자가 무슨…. 교회 반주나 하면 되지” 하시던 아버지는 딸의 연주를 본 후 “언젠가 정명훈 씨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실력을 인정했다. 아버지는 몇 달 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말대로 그는 1993년 정명훈이 지휘하던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다. 그는 “아버지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끼가 많은 분이었다”며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나가셨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백혜선은 영감을 얻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 좋아하는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아 파스. 자연에 대한 찬가가 많은 파스의 시를 통해 백혜선은 자신이 직접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원시 자연의 모습을 상상하고 느낀다.
“20~30대 때에는 혼자 잘난 줄로 착각했는데 이제는 인생이 뭔지, 세상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백혜선. 그가 가장 경계하는 건 ‘이 정도면 됐어’하는 적당주의다.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순간이 망하는 순간이에요. 콩쿠르에 나갈 때에도 이 정도면 되는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들 땐 좋은 결과가 안 나와요. ‘난 왜 이렇게 모자라지?’ 할 때 좋은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오죠. 나이 들수록 내 자신을 컨트롤하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아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해요. 어떤 곡을 본인이 잘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예전 버릇대로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걸 깨고 새로운 발상으로 나이에 따라 재창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진 : 김선아
메이크업 : 이경민ㆍ헤어 : 김민선 이경민포레
장소협찬 : 우인아트홀 02-468-7851
▣ 백혜선이 걸어온 길
1964년 대구 출생으로, 예원학교 2학년 재학 중 도미하여 변화경, 러셀 셔먼에게 사사했다.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예비학교를 거쳐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92년 동 대학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아티스트 디플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3년간 1위 우승자를 내지 못하던 미국 메릴랜드 윌리엄 카펠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고, 1990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 입상, 1991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은상을 수상했다. 특히 199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에 입상, 29세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큰 화제가 됐다. 2002년 일본 사이타마 현 문화예술재단이 선정한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에 라두 루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랑랑, 엘렌 그뤼모 등과 함께 선정됐다.
서울대 교수 재직 시절인 1995년 이탈리아 레이 코모의 인터내셔널 뮤직 파운데이션에서 제공하는 연구 프로그램에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선정되어 머레이 프라이어, 알렉시스 바이젠버그, 레온 프레이셔 등의 지도를 통해 더욱 성숙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2005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문연주자의 자리로 돌아온 그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세계무대를 누비며 활동 중이다. 보스톤 심포니, 뮌헨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해외 정상급 심포니와 협연 했고, 5년 동안 부산국제음악제 음악감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