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Ⅰ. 건국
처음에는 십제(十濟)로…
북사(北史)ㆍ수서(隋書)ㆍ통전(通典)에는 시조를 구태씨(仇台氏)로…
![]() |
百濟의 建國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북사(北史)․양서(梁書)․남사(南史) 그리고 三國遺事에서는 馬韓에서 생긴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北史에는 馬韓에 속한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 |
◇ 北史의 기록
百濟라는 나라는 馬韓의 강역에 속해 있으며, 본시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동명 이후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독실하고 어질면서 믿음이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그 당시 漢나라 요동태수였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처로 삼고 東夷의 강국으로 이루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바다를)건넜다고 하여 백제라고 하였다.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因號百濟…』
◇ 南史 夷貊傳 東夷편
百濟는 그 先祖가 東夷이다. 그때 三韓의 나라가 있었다.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세 번째는 변한(弁韓)이다. 弁韓과 辰韓은 각각 12개의 나라이다. 馬韓은 54개 나라가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호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다. 총 10만여 호이며 그 중 하나가 百濟라고 되어있다.
『百濟者 其先東夷 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 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魏璡夷傳)과 위서(魏書)에서는 扶餘에서 나왔다고 했다. 舊唐書․新唐書에는 扶餘의 別種이라고 되어있다.
◇ 구당서(舊唐書)편: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이었다.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 수서(隋書):百濟의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百濟之先, 出自高句麗…』
★ 三國遺事:최치원이 말하기를, 변한은 백제이다.
『卞韓 百濟….致遠云 卞韓 百濟也』
Ⅱ. 도읍지
온조(溫祚)가 도읍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위례성(慰禮城)
![]() |
★ 1474년 成宗 5년에서 1530년 중종 25년간에 저술된, 동국사략(東國史略) 본문을 소개해 본다. 삼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 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百濟始祖溫祚立. 漢鴻嘉三年新羅始祖四十年. 父高句麗王朱蒙以吊扶餘時. 所娶禮氏女子. 類利爲太子. 溫祚與兄沸流. 恐不相容南行. 沸流居彌鄒忽今仁川府. 溫祚都河南慰禮城今稷山縣. 國號百濟. 初以烏干等十人從行. 初號十濟後以百姓樂浪從改百濟. 後徙南漢山城今廣州. 又徙南平壤城今漢京』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온조는 하남성(河南省)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이다. 그리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
하남 위례성이 있는 직산현이라면, 지금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安邑)과 하현(夏縣)의 북쪽에 있는 곳이다.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직산현(稷山縣)이다.
직산현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과 분성지도(分省地圖), 그 밖의 여러 지리서(地理書)를 조사해본 결과 百濟時代(高句麗․新羅․隋․唐) 때의 河南省 西北쪽은 현재에 와서 성(省)의 위치가 바뀌어 산서성 최 서남부에 자리하고 있다.
★ 하남(河南)이 하남성(河南省)임을 알 수 있는 글귀가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백1권 당기(唐紀) 17권 1938쪽에『高麗百濟河北之民』이라고 적고 있다
자치통감은 삼국사기를 기록할 때 고증본으로 사용된 책이다.
고려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를 말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은 지금의 지나대륙 하북성 백성들이라고 되어있다.
★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가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라고 하여, 온조와 비류가 도망올 때 대수(帶水)와 패수(浿水)의 두 강을 건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고 되어있다.
『一云始祖沸流王…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동국사략(東國史略)에는 미추홀이 지금의 인천부(仁川府)라고 되어있다.
『沸流居彌鄒忽今仁川府』
한반도에 있는 인천(仁川)이 미추홀(彌鄒忽)이 아니라,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는 곳이 조선의 인천이며, 이곳이 미추홀(彌鄒忽)이라는 것이다.
◇ 미추홀의 仁川府는 三國 당시 중국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임이, 필자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 |
◇ 패수(浿水)에 대해 알아보자.
수경주소(水經注疏)에 의하면『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이라 했다.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임파현을 지난다…浿水는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다시말해 漢나라와 晉나라에 속해 있던 樂浪郡이라고 되어 있다.
응소(應劭)에 의하면 浿水는 낙랑국(樂浪國)이 있는 東으로 흐른다고 했다.
허신(許愼)의 말에 따르면, 패수(浿水)가 있는 곳은 그 당시 조선(朝鮮) 덕양현(德陽縣)의 경계라고 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68쪽에 있는 낙랑군(樂浪郡)을 보면, 朝鮮의 平壤이며, 서진(西晋) 말(末)에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낙랑군은 지금의 서안(西安) 일대이며, 패수(浿水)는 서안에서 낙양(洛陽)까지 흐르는 큰 바다와 같은 강(江)을 말한다.
패수(浿水)를 대동강(大同江)이라고도 하며, 일명 예성강(禮成江)이라고도 한다는 설(說)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서쪽으로 흐른다.
◇ 대수(帶水)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흐른다고 하여 대수라 했다.
대방(帶方)은 후위(後魏)가 있던 곳. 즉 지금의 낙양현(洛陽縣) 東北二十里를 말한다.
낙양 지방에서 황하의 본류에서 갈라진 다른 물줄기가 옆으로 흐르는 강물을 대수라 한다. 대방군은 지금의 山西省 중남부와 河南省 지역이다
이 두 강물의 물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왔다면 이곳은 분명히 대륙의 하남성(河南省)이다.
그리고 수사(隋史)ㆍ북사(北史)ㆍ구당서(舊唐書)에서 운운하는 대방고지(帶方故地) 역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일대임을 알 수 있다.
★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유차하남지지(惟此河南之址)라 했으므로 중국대륙인 하남성(河南省) 땅에 도읍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유차(惟此)는 오직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남지지(河南之址)라는 뜻이다.
지지(之址)라는 말은 터이다. 즉 그 땅이라는 뜻이다.
지(址)란 기(基)와 통한다. 지(址)는 지(阯)자와 같다. 그리고 지(趾)자와 통한다. 그렇다면 강의 남쪽이 아니라, 하남성의 땅에 위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Ⅲ. 강역
양서(梁書)ㆍ송서(宋書)ㆍ통전(通典)에 의하면
고구려는 요동(遼東), 백제는 요서(遼西) 진평이군(晋平二郡)에…
![]() |
고대 사해(四海)의 위치
황해(黃海)와 동해(東海),
청해(靑海)와 서해(西海)가 함께 표기되어 있고,
홍콩 앞 바다를 남해(南海)로,
몽고지방의 바이칼호를 북해(北海)로 표기하고 있다.
북해는 당(唐)나라 이후부터 소해(小海)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 구당서(舊唐書) 一白九十九上 列傳 第一百四十九上 東夷篇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國.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又外置六帶方管十郡…』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한 갈래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이다…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북으로는 신라가 있었고, 서해(西海)로는 월국에 이르고, 남해(南海)로는 왜국에 이르며, 북해(北海)로는 고구려에 이른다.
왕이 거하는 곳으로는 동서에 두 개의 성이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여섯 대방(帶方)을 두어 십군(十郡)의 관할을 두었다…
![]() |
★ 양서(梁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 晉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晋平二郡.』
진(晉)나라 때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있었고, 백제는 요서(遼西) 지방의 진평이군(晋平二郡)에 있었다.
★ 통전에 의하면 백제가 있었던 곳은 요서(遼西)에 있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다.
★ 송서(宋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畧有遼東. 百濟畧有遼西. 百濟所治謂之. 晉平郡晉平縣.』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에서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의 진평군 진평현에서 다스렸다
남사(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다. 서안(西安)을 기준하여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라면 하남성 일대를 말한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 진평이군(晋平二郡)의 땅을 점유했는데, 그곳에 백제군을 두었다…
『南史卷七十九夷貊傳
百濟者…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据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이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예전편에, 중국 곤륜산 길 서쪽의 가까운 길목에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목천자전(穆天子傳) 예전편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百濟)는 약 1백 나라라는 방대한 국가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과 선선현을 서주(西州)로 나누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의 작은 나라는 사방 1백 리였으므로 약 1만 리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백제는 기원전 213년 진(秦)나라가 건국된 후 마한 땅에 십제(十濟) 또는 백제(百濟)라 하여 건국되었다. 진나라가 세워진 후 8년 후의 일이다.
이때는 흉노의 잦은 침략으로 하북 지방에 있던 백성들이 남쪽인 홍콩, 광주, 남해 그리고 월남 북쪽 지방으로 약 5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이주하던 시기였다.
흉노들은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하였다. 흉노들은 하남성 땅까지 내려와 모두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백제는 이런 와중에 차츰차츰 남하를 시작했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성기의 백제 강역은 대단했다. 패수(浿水)의 북쪽이 거의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면, 남쪽의 거의 모두라 할만큼 백제의 강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도(大道), 즉 큰 섬인 필리핀, 보르네오, 자바, 기타 동남아시아에 널려 있는 모든 큰 섬들이 백제의 영토였으며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史記 五帝 夏本紀 참고)
그러나 남조(南朝)의 진통으로 백제의 국운이 쇠해 갈 무렵, 당나라가 건국하면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 백제에 야금야금 침공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때부터 사방에서 소모적인 전쟁이 끊일 사이 없이 없었고, 강역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변화가 심화되어 갔다.
한때는 하북성, 산서성 북방까지 성을 쌓을 정도로 강했던 백제가 당과 신라의 틈새에서 점차로 그 강역이 좁아져 갔다.
결국 백제는 당과 신라의 합공, 그리고 말갈과 해(奚), 왜(倭)의 틈새에서 결국 견디지 못했다.
백제의 많은 백성들이 주류성에서 굴집을 짓고 끝까지 항쟁했다.
그러나 주류성에서 왜인(倭人)과 만나 싸우고, 백강구에서는 4번 싸워 이겼지만, 4백여 척의 배가 불타는 바람에, 백제 32대 마지막 왕인 풍(豊)이 몸을 피해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A.D.66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Ⅳ. 말갈과 백제와의 관계
한반도에는,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수서(隋書) 말갈편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그러나 삼국사기에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 |
![]() |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선과 맞물려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온조왕 2년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 의자왕 15년의 기록.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
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신라본기의,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의 기록.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 그런데 수(隋), 당(唐) 時의 지도를 보면, 말갈은 요동 흑수(黑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그리고 각종 정사(正史)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
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
『靺鞨在高麗之北』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는 말갈에 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Ⅴ. 백제의 城을 통한 고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의 성(城)을 조사하여, 그 강역을 대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 위례성(慰禮城):하남성(河南省)에 있다.
◆ 한성(漢城):한주(漢州)로 사천성 덕양군이다.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이다.
![]() |
◆ 남한산성(南漢山城):대륙의 남쪽 광주(廣州) 옆에 있는 남해(南海)를 말한다.
◆ 북한산성(北漢山城):산서성 태원이다. 이곳은 백제 땅이었으나, 백제가 망한 후 모두 신라 땅이 됨.
◆ 웅진성(熊津城):웅이현(熊耳縣)이나 웅이산(熊耳山)에 있는 것으로 지명사전에는 적고 있다. 이곳은 하남성 낙녕현(洛寧縣) 동북이며, 또 한 곳은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서남 70리이다
◆ 웅천성(熊川城):웅이산(熊耳山)에 있다. 하남성 노씨현(盧氏縣)에 있다.
◆ 남평양성(南平壤城):한경(漢京)이라 하며, 한양성(漢陽城)이라고도 한다.
◆ 독산성(禿山城):독산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천성 유양주(酉楊州)로 청(淸)나라 때 독산현이라 함.
◆ 독산성(獨山城):본래의 성 이름은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다. 당나라 정명진에 의해 격파당한 후 독산진(獨山陳)이라 했다가 독산성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 서남 18리.
◆ 구천성(狗川城):독산성과 함께 낙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 수곡성(水谷城):산서성(山西省) 西南.
◆ 적현성(赤峴城):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西北 남현(嵐縣).
◆ 우산성(牛山城):안휘성(安徽省) 의성현(宜城縣).
◆ 우두성(牛豆城):우두산에 있으며,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남쪽이다.
◆ 우두산성(牛頭山城):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南.
◆ 사비성(泗沘城):사주(泗州)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동남이다.
◆ 각산성(角山城):각산(角山)에 있다. 강서성 파양현(鄱陽縣)에 있다.
◆ 송산성(松山城):직예성(하북성) 청원현(淸苑縣) 서북 70리.
◆ 석두성(石頭城):강소성 강녕현(江寧縣) 서쪽 석두산에 있다.
◆ 탐라국(耽羅國):호북성(湖北省) 의성(宜城) 지역.
◆ 아차성(阿且城):기록이 없으나 말갈의 잡종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말갈과 접하고 있는 북쪽 국경지역인 것 같다.
◆ 신성(新城):춘추시대 때 진(晉)나라가 있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동쪽 29리.
◆ 마천성(馬川城):산서성 삭현(朔縣).
◆ 사현성(沙峴城):청해성(靑海省) 서녕(西寧) 南 280리.
![]() |
◆ 우명곡(牛鳴谷):섬서성(陝西省) 안강현(安康縣) 北.
◆ 치양성(雉壤城):하남성(河南省) 보풍현(寶豊縣) 南.
◆ 원산성(圓山城):감숙성(甘肅省) 양당현(兩當縣) 南.
◆ 장령성(長嶺城):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東南.
![]() |
◆ 쌍현성(雙峴城):사천성(四川省) 경계.
◆ 무주군(撫州郡):강서성(江西省) 임천현(臨川縣) 西.
◆ 무산성(茂山城):사천성(四川省) 무산(茂山).
◆ 감물성(甘勿城):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北.
◆ 옥문곡(玉門谷):감숙성 돈황(燉煌) 西 150리.
◆ 서주현(西州縣):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 당항성(棠項城):청해성(靑海省) 서녕지(西寧地). 청해(靑海)가 있는 대적석산(大積石山) 일대. 백제인들이 고구려인들과 함께 뒤섞여 살았으나 당나라가 침공하면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곳.
![]() |
◆ 탄현(炭峴):감숙성(甘肅省) 영창현(永昌縣) 동남 20리.
◆ 황산(黃山):섬서성(陝西省) 무공현(武攻縣).
◆ 백강(白江):감숙성(甘肅省)에서 사천성(四川省)으로 흘러 장강(長江)으로 흘러든다.
![]() |
◆ 관미성(關彌城):하남성 영보현(靈寶縣).
◆ 도곤성(都坤城):사천성 성도(成都) 西北 관현(灌縣).
Ⅵ. 연대표
百 濟 年 代 表
百濟王(暎)(一名 溫祚王), 樂浪君 鎭東大將軍.
(宋書卷九十七 列傳 第五十七 2392쪽 본문참고)
건국: B.C.213년, 亡 A.D.660년. 873년간.
http://www.yulgon.kr/html/history02-4.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