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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런 경험 난생 처음… 동굴 들어가 본 것도 실은 처음… 동굴 속에서 선생님과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그리고 또 선생님….
헵번은 상당히 취해 있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말하는 발음도 어둔하고, 불그스레하게 충혈 된 눈. 눈 껌벅임의 둔화… 등등. 자, 우리 그만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건 약속위반이야. 딱 한잔만 하기로 했는데…. 약속이요? 위반? 흥!… R은 그 앞 반쯤 찬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마시지 않고 )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는다. 자 이제…헵번, 그만…. 헵번이요? 오드리 헵번? 허! 허허… 선생님은 R?…작가? 그럼…. 독백조로 중얼대는 헵번.
R은 화장실에 들렀다가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였다. 밖은 여전히 비, R은 핸드폰시간을 확인하며 그들 자리로 가 앉았다. 늦은 10시 50분.
헵번이 손에 술잔을 든 채 R을 빤히 쳐다본다.
「R선생님.」
「…?」
「제 술 한잔 받으세요.」
헵번은 자신의 술잔을 비우고는 비운 잔을 쑥 R쪽으로 내민다.
R은 얼결에 그걸 받는다. 이내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약간 불편스런 얼굴과 어조로 R은 말한다.
「R이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R 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거의 못 마신다고. 말이 술이지, 그거…. 차라리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게 났지.」
R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투덜거린다. 술을 먹고 어떻게 글을, 소설을 써? 참!… 미친….
「커피요? 그럼 제가, 커피, 시켜 드릴게요. 여기 커피도, 파는 것, 같던데.」
헵번의 얼굴표정이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R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듣고서도 못들은 척 했는지도 모른다.
「됐어요, 커피는 무슨… 이런 데서….」
R은 탁자 위의 그의 핸드폰을 집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헵번의 약간 무안해하는 얼굴이 R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얼굴이 왠지 좀 슬퍼 보이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헵번. R이 술을 못 마셔서.」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헵번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들은 잠시 후 음식점에서 나왔다.
밖은 여전히 가는 비, 헵번은 걸음을 비틀거릴 정도로 취해 있었다. R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축을 해서 큰 길로 나갔다.
「R선생님, 죄송해요! 아으… 정말!」
「아니에요, 죄송하긴?… R이 오히려….」
R은 그녀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귀천동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니, 소리쳤다. 귀천?… 천상병 시인의?… R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택시를 잡았고, 헵번을 태워 보냈다.
안녕히 가세요오오오오…소리가 차 밖으로 흘러나왔다.
얼핏, 그 소리가 선녀동굴이요오오오오…하는 것 같았다.
잘 가, 헵번.
<소설을 쓰는 거나 소설을 사(生)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데, 마찬가지인데,
그냥 쓰는, 한번 써보는 것 아닐까?… 소설을 쓴다는 즉 창작행위라는 것이?>
R은 그렇게 키보드를 쳤고, 떠오른 글을 한참동안 응시하였다.
사면은 깊은 고요…. 다만 바깥 거실의 TV소리… 무슨 드라마의 재방송인 것 같다.
<예상치도 않게 헵번이란 사람이 불쑥…. 동굴 속까지 같이…참!… 차라리 강좌에
나가지 말아버릴까?… 아냐, 그럴 순 없어. 멋쟁이 L선생 강좌인데….>
R은 또 위 모니터에 뜬 글을 깊게 응시했다.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영혼J의 “여보, 저 오늘도 운동장 열 바퀴 돌았어요, 속보로. 저 잘했죠?” 하고 대견스러 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럼 M은, 잘 했다고, 힘들지는 않으냐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하며 살짝 때론 깊게 포옹을 해주었지. 그리고 영혼J는 얼마 후…차갑게… 하얗게… J!>
모니터의 글을 응시하는 R.… J! 하고 깊은숨을 내쉰다.
그는 굳은 혹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또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대 지금 무얼 쓰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로지 그것, 그것 하나가 모티브이었지 않은가? <진실>말이야, <순수>말이야. 진실순수의 눈빛 말이야!… 맞아! 그래 맞아! 백 프로 맞는 말이야, 진실! 순수!… 그런데 좀 추상적인 것 같다? 진실 순수란 말이? 아니지, 주 모티브는 <눈빛>에 있어. 진실순수의 <눈빛!>… 다만, 다만 그 눈빛에….>
6) 비가 그쳤으므로 R은 우산(긴 우산)을 접었다. 그걸로 땅을 짚은 채 서있었다.
지하철 2번 출구. 혹시 1번 출구로?… 아니야, R이 분명히 <이>라고 했어. 처음에 <일>로 했다가 바로 정정을 했어. 일이 아니고 <이>에요, 둘, 투(Two). 알았죠? 하고 확인까지 해주면서. R발음이 얼마나 정확한데….
토요일 오후라서 더 그렇겠지만 지하철출입구는 사람들로 차들로 갖가지 색깔들로 소리로 냄새로… 즉 기호들(허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R은 기호(허구)들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그것을 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R도 기호(허구)의 한 부분일 터였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 아래, 그녀가 인간허구들 속에 묻힌 채 올라오고 있었다. R은 조금 더 출입구 가까이로 다가간다. 그녀와의 시선이 부딪혔고, R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도 손을 흔들며 생끗 웃었다.
어서 와요! 오래간 만이에요. 예, 선생님. 일찍 오셨나본데… 아니에요, 조금 전에…. 그들은 가볍게 악수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글 많이 쓰셨고? 서예공부도…. 아이, 예 선생님.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R의 수염얼굴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R은 슥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인간허구들 사이를 헤치며 그들은 저 앞 <날개공원>쪽을 향해 걷는다.
그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메고 있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낸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놔두고 이거 같이 받아요. 예? 예, 선생님, 후후. 인간허구들이 넘쳐흘러서…부딪혀서… . R은 그렇게 중얼대고는 쿡 웃었다. 그녀는 입술로만 살짝 웃었다. R은 받고 있는 우산을 좀 더 그녀 쪽으로 가져간다. 선생님 비 맞잖아요. 괜찮아요. R은, 이전 소설 M이 그랬듯이 비를, 비 맞는 걸 좋아하거든요. 눈(雪)맞는 것도. 하기야 M이나 R이나 뭐, 쿡쿡. 그녀는, M…R…하고 되뇌며 씩 웃었다.
그대, 입고 있는 개량한복 참 예뻐요, 잘 어울려요. 멋있어요! 아이, 고맙습니다. 그대는 옷깃을 여미며 발그스레하게 웃었다. 그대 그 웃음에 황진이의 관능미가 겹쳐지는 것 같았다. 오, 그대 황진! 그대는 R의 옷차림—진갈색 가죽마이에 자줏빛 머플러, 아래엔 청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을 보며 선생님은 더 멋져 보여요, 하는 거였다. R이야 뭐. 그는 두르고 있는 머플러를 슥 한번 만졌다.
이때 뚱뚱하게 살이 찐 녀석이, 너 거기 안서?! 에이 씹새끼야! 하며 앞서 도망치는 역시 뚱뚱한 녀석을 쫒아가는 거였다. 쫒아가는 뚱뚱이에게 툭, R의 우산과 어깨가 부딪쳤다. 녀석, 욕은 잘하네, 삼겹살이! 아니, 오겹살이! R은 내뱉고는 킬킬 웃었다. 그대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들은 차를 한 잔 하기로 하고 공원 안쪽 커피숍을 들었다. 곧 그곳에서 나왔다. 자리가 비좁은 데다 손님들이 많아서 매우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허구 속을 또 걸었다.
R은 공원 저 뒤쪽, 철쭉 산으로 이어지는 경사 진 길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면서, 거기에 차향기가 그윽한, 아담하고 고즈넉한 한방차집이 있다고, 거기가 어떻겠느냐고 그대에게 물었다. 전 좋을 것 같은데… 근데 선생님 취향이…. R도 좋아해요, 때로는. 그대는 머릴 끄덕이며 웃었다. 먼 꿈길 때도 몇 번 가봤는데, 한방차집. 홍이 엄마랑. M 혼자서도 갔었지, 아마?
이쪽이 저쪽 보다 인간허구들이 좀 덜 분비는 것 같다. 그래야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큰 것 많은 것 값비싼 것을 좋아하는 게, 그걸 쫓는 게 인간허구들의 속성이니까. 욕망, 말이다.
이렇게 보니 R의 손이 그대의 어깨를 살짝 부여잡고 있었다. R은 그대로 가만있었다.(어깨를 부여잡은 손에 약간 힘을 준 것 같았다.) 그녀도 그대로 있었다.(부여 잡힌 어깨가 가늘게 꿈틀 한 것 같았다.)
그들은 저 위 찻집을 향해 천천히 올라간다.
「길이 한적하고 퍽 조용해요. 마치 시골길처럼.」
길 양 옆을 둘러보며 그대가 말했다.
「그렇죠? 도심 속 암자 같은 데라고나 할까? 평일엔 더 조용해요.」
R은 말하고, 가끔 혼자서 여길 오지. 그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지, 하고 혼잣말을 하듯 했다.
「좋으시겠어요. 참, 선생님 댁이 이쪽이시라고 했죠, 아마?」
「예, 그리 멀지 않아요. 저 쪽.」
R은 손을 들어 왼쪽 대각선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가로수가 비에 젖고 있고, 하나 둘씩 잎이 지고 있고, 그 아래 낙엽이 쌓여 있고, 바스락…바스락… 그들은 낙엽 길을 걷는다, 말없이. 마치 혼자인 것처럼.
마른 잎 떨어져 길 위에 구르네.—
바람이 불어와 갈 길을 잃었나.—
아무도 없는 길—을—
나만 외로이 가야만 하나—
(…….)
R은 그렇게 한껏 감정에 젖어 노래(<마른 잎 떨어져>)를 불렀다.
그대의 가을비 같은 목소리가, 선생님 노래 너무 잘 부르세요!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숨을 푹 내쉬는 거였다.
R 입에서, 숨결! 소리가, 크지는 않게 하지만 깊게 새어나왔다.
찻집 <눈길>간판이 비에 젖고 있고, 그들은 마치 <눈길>속으로 빨려들듯 찻집을 들었다.
어서들 오세요, 비가 오시는데…. 연둣빛 개량한복차림의 여인(중년)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비가 내려서… 가을비가. R이 그렇게 말하자 연둣빛 여인이, 선생님은 항상…하며 애교스런 웃음을 웃어보였다.
그들은 안쪽 감색 분위기가 감도는 반(半) 칸막이가 된 <솔잎>실로 안내되었다.
「어때요? 분위기가 그런대로 괜찮죠?」
「예, 선생님. 조용하고, 아늑하네요.」
그대는 벽의 그림, 코너의 이런저런 장식품 등을 둘러보았다.
「혼자 올 때는 홀에 앉아서 차를 마시죠. 저쪽 구석 R의 자리가 있어요. 가만히 앉아있죠…. 책을 읽기도 하고. 때론 저 연둣빛여인이 말을 걸어 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땐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죠, 인사치례로. 그러고는 R은 또 혼자.」
그대 입에서 혼자,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R은 말을 이어 한다.
「때론 혼자가 좋은 것 같아요. 외로움, 그리움 그런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가, 누군가가, 한 없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보고 싶고, 때론 안고 싶고…. 그런데 그 대상이 특정한 누구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저 어떤 사람, 혹은 그 무엇. 말하자면 환상 환영 같은 것. 가령, 여기 시를 쓰고 서예를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그대 같은….」
R은 눈빛으로 그대를 가리켜 보였다.
「예? 아이 선생님, 후훗.」
그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들은 차를 주문했다. R은 눈길쌍화탕 그대는 눈길모과차였다.
연둣빛여인은 차를 내오기 전 작은 종지에 꿀 인삼을 가져왔다, 서비스라면서. R과 그대는 고맙다고 하고 그걸 먹었다.
실내엔 Y시인의 시를 노래한 <고향>이 꿈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다.—
산 꿩—이 알을—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내 고향 떠ㅡ나지 않고
먼 항구로 떠도는 구려ㅡ
(….)
위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R은 말했다.
「Y의 <고향>, 알고 있죠?」
「예? 예, 시는 조금. 히히.」
그대 왼쪽 보조개가 그렇게 웃는 것 같았다.
「Y의 <고향>은….」
하고 R은 쌍화탕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말했다.
「<향수>인가? 그것 하고는 완전 달라요. 거 있잖아요.<실개천이 흐르고… 얼룩빼기 황소가…>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말이에요. 그 노래를 들을라치면 왠지 노래가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 같아요. <향수(鄕愁)>가 아니라 <거짓 향수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요. 길긴 또 한없이 길지. 그것도 노래라고, 참!」
그대는 약간 민망스런 얼굴로 R을 빤히 쳐다보았다.
R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입에 문)담배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R은 말한다.
「그 노래에 대한 R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죠. R과는 다르게 그런 노래를 좋아하는 나가 감동을 받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겠죠. 그대는? 후자?… 전자?」
다문 입을 오물거리다가 그녀는 말한다.
「노래는 듣기에 좋으면 좋은 노래 아니겠어요? 그런 노래가 물론 부르기에도 좋을 테고요. 하지만 <향수> 그 노래는, 선생님 말씀을 들어서가 아니라 저도 그다지….」
그대는 머릴 갸우뚱 하며 히쭉 웃었다.
R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침묵.
밖은 여전히 비….
아 참! R은 그의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낸다.
그걸 그대에게 내밀며 R은 말했다.
「이거요… 지난 번 <어디로가실건가요…예?>에서 그대에게 약속했던.… 자, 받아요.」
「어머! 웬 책을?…두 귄 씩이나… 선생님 작품이신데!…. 고맙습니다!」
그대는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책을 받는다.
책을 들고 있는 그녀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때 그대가 책을 보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M이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따라서 이건 그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에요. 다소 완성도가 낮은 작품일지 모르지만.」
「아이 선생님!… 아 정말!」
그대는 책을 굽어보며 <겨울이야기>…<먼 꿈길>…하고 되뇐다. 그러면서 책표지를 살살 어루만진다, (사랑하는) 아기의 혹은 남자의 몸을 그렇게 하듯. 그러는 그녀의 보랏빛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퍽 예뻐 보였다.
R은 잠깐, 하고 몸을 일으킨다.
화장실을 들렀다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건너편,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은행잎은 하나 둘씩 꽃처럼 지고ㅡ
노란 잎이 또 하나 지고ㅡ(...)
그 옆 키가 큰 아직 푸른빛이 조금 남아있는 나무에게로 시선이 옮겨진다.
그 너머 허공은 회색빛.… 가슴에서, 선녀는…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런 진실이, 그런 순수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
R은 몇 발짝 더 앞으로 나간다. 얼굴을 쳐들고 비를 맞는다.
아 좋다! 상쾌하다!
어떻게, 무엇으로, 그 진실을 순수를 안아줄 수 있을까!
어떻게 이전처럼 서로 꿈을, 이야기를 엮어나갈 수 있을까!
아 정말!… 나쁜 놈! 바보엉터리!
MR은 한참 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다.
그는 허둥대듯 눈길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머! 밖에 나갔다 오셨어요? 어깨가 많이 젖었어요! 그러다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여기…. 그대의 걱정스런 얼굴이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어 MR에게 내민다. 고마워요. MR은 티슈를 받아 몇 장 뽑아서 어깨의 물기를 대충 닦는다.
그대의 표정이 뭔가 좀 망설이듯 한다.
그러더니 흰색 편지봉투 하나를 R쪽으로 내민다.
「저, 이거… 책값이에요. 선생님 작품이니까요.」
「어?… 됐어요. 책값은 무슨… 그때 <어디로가실건가요…예?>에서 M이 말 했는데? 책값은 필요 없다고. 읽고서, 그럴 수 있다면 독후감이나 말해달라고.」
R은 봉투를 받지 않는다.
그대는, 그게 아니라고,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얼마나 힘들여 쓴 작품인데… 하며 한사코 받으라고 한다.
MR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눈을 뜨고 MR은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해요. 그걸로 찻값을 내는 거로. 그럼 되겠죠?」
MR을 빤히 쳐다보는 그대.
「그럼 그렇게 하시고요, 음…저녁은 제가 살게요.」
「저녁? 그거야 뭐… 그럼 그러시든지, 하하하….」
연둣빛 여인이 그들 옆을 스치고 가면서, 선생님 작가시구나!… 왠지! 하며 묘한 웃음을 웃어보였다. 저희 선생님 연극도 하세요. 어머! 그러세요? 연둣빛은 더 묘한 웃음을 웃었다.
찻집 위쪽 언덕이 진 길을 그들은 천천히 걷는다. 역시 R의 우산을 같이 받고서.
아직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서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철쭉 산을 오르기로— 했던 것이다.
R은 길 옆 자그만 커피하우스에서 커피(아메리카노)를 샀다. 그대는 이거저거 메뉴를 살피더니 홍차를 택하는 거였다.
「홍차, 홍이 엄마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R이 그대 손의 홍차를 보며 말했다.
「예? 홍이 엄마요?」
그대 눈이 반짝하며 약간 커진다.
「아, 소설이야기에요, <먼 꿈길>. <어디로가실건가요…예?>에도 나왔었나? 홍차 마시는 장면이?」
「선생님도 참, 후훗.」
R은 슬쩍 그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가 움찔하며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후배, 그러니까 그대 동생이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소설로도 실제로도…. 이렇게 고운, 예쁜 그대를 만나게 해 주었으니!」
「아이, 제가 드릴 말씀이죠. 동생이 선생님 말씀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선생님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녀의 그 다소곳한 입모양이 아내 J의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존경은 무슨…. 존경은 오히려 후배가 받아야 해요. 그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그렇게 크고 건실한 기업을 일구고.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 그 많은 형제들을 다 거두고…. 참 대단한 친구에요. 게다가 의롭기 까지 하잖아요. 인간미도 풍부하고. 약자, 어려운 사람들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고. 어쩌면 후배가 지금도 이 R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존경 같은 걸 한다면, 그건 아마도 과거의, 그러니까 어린시절, 젊은 시절의 R, 그 모습이 잠재적으로 이어져 오는 것일 거예요. 뭐랄까, 부러움의 대상 혹은 선망의 대상 같은 것. 그대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R의 가정환경이, 다른 집들에 비해서 좀 좋은 편이었거든요. 다 부모덕이겠지만요. 뭐랄까, 다소 선진적인, 그러니까 시골 속에서의 도시적 생활이라고나 할까? 문화적으로 좀 앞선 집이라 할 수 있었어요. 음악과 영화와, 시 소설 등 문학, 그리고 전에 말한 것 같은데 서예 등, 말하자면 예술향기가 듬뿍 풍기는 집이라 할 수 있었죠. R 위로 누나가 셋 그리고 R. R 밑으로 또 여동생이 하나. 딸 넷에 아들 하나였죠.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특히 엄마의 이 R에 대한 사랑은 엄마의 생명 그 자체였어요! 어머니 존재의 의미였어요! 아, 정말!… 어머니! 엄마! 아으!….」
「저, 선생님!」
그대의 손이 R의 손을 꼭 잡는다. R의 목소리가 고조 되면서 목이 울컥 했던 것이다.
「미안해요. 말을 하다 보니 그만….」
「아니에요, 선생님이 워낙…. 저도 선생님에 대해 알만 큼은 알고 있습니다. 동생을 통해서 많은 얘길 들었거든요. 그리고 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선생님 말씀대로 부러움 선망의 대상 그리고 예술성, 멋스러움,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무엇 보다 운동,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나요? 후훗… 그 일에 헌신을 하신, 그런 부분이 좀 더 큰 것 같아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매우 훌륭하게 그리고 고결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동생도 가만 보면 좀 진보적인….」
「저….」
하고 상대방의 말을 끊고 R은 말했다.
「그런 부분이 조금 있을 수도 있겠죠. 굳이 부인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그것, 그러니까 운동에 참여하고 나름 그 일에 열정을 쏟은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R에게 잠재적으로 깔려있는 예술성, 그것의 한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시대가 다분히 그랬잖아요. 광주! 군부독재 파쇼! 반민주 반민중 독점자본!… 그것들에 울분을 터트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이 R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죠. 조금 앞장서서 외쳤다는 것 뿐. 그리고 그 일이, 다시 말해 운동이 참 재미있었어요. 신났어요!… 분노 떨림 아픔 슬픔 등의 감정이 가슴을 저미게 했지만, 한편으론 그 순간들이 기쁨이기도 했어요. 벅찬 기쁨의 순간들!... 특히 이 R같은 감정파 순정파에게는 더욱!… 뭐랄까, 운동의 에로티시즘이라고나 할까? 컥, 컥컥….」
R은 얼굴을 위로 쳐들고 웃었다.
「운동에로티시즘이요? 후훗.」
그대의 어깨—R 손이 얹혀있는—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산 중턱 오솔길, 그들은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그 옆 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저 아래, 비안개 자욱하고, 회색빛 배경의 갖가지 기호들이 부옇게 윤곽만 들어내 보이고 있다. 건축물, 집, 거리, 나무, 차 오토바이… 자본(주의), 욕망, 종교, 그것들의 강도짓… 삭막함, 사람(같은 것), 에로티시즘, 섹슈얼리티, 반여 홍이엄마 그리고 N. 기쁨슬픔, 웃음눈물, 죽음의 삶, 삶의 죽음, 과거현재미래, 불균형… 텅 빔… 등등.
R은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푸우….
연기를 그녀의 반대쪽으로 뿜어내었다. 그냥 피우시지. 지금 그냥 피우고 있는 거예요. R은 담배를 깊게 빨아 머리 위 허공으로 내뿜는다, 길게. 서너 번에 걸쳐 그렇게 했다. 그는 담배를 꺼트렸다. 꽁초를, 휴지로 돌돌 말아 손에 든 채 여기저길 둘러보았다. 저 위 상당히 먼 거리에 휴지통 같은 게 하나 있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선생님. 여기 비닐봉투 있어요. 고맙습니다.
중년의 마른 체격의 여자가 염소모양을 하고 있는 검정개를 끌고서 우에서 내려오고 있다.
중년의 여자(와 염소모양의 개)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딱 염소네, 생김새가… 염소 두 마리! 소리가 R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이 선생님, 후후. 그대는 살짝 눈을 흘겼다. 그대의 웃을 때 폭 파이는 왼쪽 보조개가 소녀—소설<겨울이야기> 속 안채 소녀 말이다.—의 그것과 거의 똑 같아 보였다. R은 아니, RM은 오른 손 인지로 그녀의 볼 보조개를 콕 찔렀다. 아이, 선생님!… 눈 덮인 하얀 산, 비닐하우스 방. 참 좋았는데. 비닐하우스요? 그대는 볼—RM이 손가락으로 찌른—을 만지며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RM은, 소설이야기라고 그리고 현실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대는 모호한 얼굴로, 겨울이야기…눈,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더 올라가 볼까요? 예? 예, 그러시죠 뭐. 그들은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쌀쌀한 흐린 날씨라서 그렇겠지만 산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없이, 침묵처럼 조용했다, 비현실감이 들 정도였다.
그걸, 그러니까 침묵비현실감을 깨트리려고 그러기라도 하듯 저 우에서, 트레이닝복차림의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 주—던 산새—소리에—/ 여린 가슴 속을 태웠ㅡㅡ소.
선글라스트레이닝복은 그렇게 노래하며 그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고개를 이쪽으로 틀고 그들을 쓱 째려보듯 하는 거였다. 내려가는 선글라스를 돌아보며 R은 투덜거렸다. 자식! 날도 흐린데 선글라스는… 노래하는 것 하고는!… 아이 선생님! 그대는 미간을 약간 찌푸려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 미소가 서려있었다.
소나무잣나무단풍나무 등이 우거진 깊숙한 숲속, 솔향기가 그윽하다. 사면은 푸른 어둠…침묵, 고요… 새소리 벌레소리 하나 없다.
저 옆쪽 검붉은 빛의 네모난 바위 하나가 외롭게 있고, 그들은 그리로 가서 바위에 걸터앉는다.
먼 꿈길 산속아지트하고 비슷한 것 같네? R이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하듯 했다. 아지트요?… 있어요, 소설 속 아지트…반여. 그대는, 먼 꿈길? 하더니, 아, 선생님 작품 얘기신가 보구나! 하며 입술웃음을 웃었다. R의 입에서, 반여는!… 소리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6회분 여기까지.)
(세월호참극으로, 그 비현실의 현실로, 한동안 글을 쓰지도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글쓰기에 또 전념을 해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