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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자 / 박성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초로 인생
인생은 짧다고들 말한다. 동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람의 일생을 곧잘 여름철 풀잎의 아침 이슬에다 비유했다. 얼핏 듣기엔 퍽 비관적으로 들리는 이런 말을 즐겨 쓰는 동양사람들, 그들은 과연 비관주의자들인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가 과연 비관적이고 염세적인가?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동양 사람들은 현실 긍정적이고 따라서 어디를 가나 적응을 잘 하고 그래서 항상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다.
비관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낙천주의자들처럼 보인다.
동양문화의 특성 또한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염세적인 흐름도 없지 않지만 대체적으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낙천적이라고 평한다.
인생을 풀잎의 이슬에 비유하는 사람들에게서 어쩌면 그렇게도 적극적인 인생관이 나올 수 있었을까?
여기에 소위 “동양의 지혜”가 진주처럼 반짝인다. 인생을 풀잎의 이슬로 본 것은 감상적인 비관이 아니라 천하의 이치를 한방울의 이슬에서도 보아내는 지혜이었다.
동양인의 적극성은 이러한 지혜의 산물이다.
지혜는 세상사람들이 보잘 것 없다고 돌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것들속에서도 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답게 산다
“사람답게 산다.” 이 말은 동양사람이면 누구나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말이다.
사람을 평할 때의 마지막 기준이 “사람”이다. 못마땅한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들은 흔히 “사람이 왜 저래” “사람이 아직 덜 되어 먹었어”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답지 못한 사람” 이라는 말들을 한다. 한결같이 “사람”이 최고의 기준이 되어 있다.
풀잎의 이슬같은 인생이 어떻게 이처럼 높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사람답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처럼 귀에 익은 말,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답게 산다”는 말이 항상, 우리에게 문제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항상 실천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천의 문제는 항상 자기가 처한 독특한 역사적인 조건, 사회적인 상황, 그리고 자기 자신의 타고난 바탕 또는 능력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일반화가 별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즉 실천의 현장인 역사, 사회, 그리고 실천의 주체인 자기자신 등은 모두가 순간 순간 부단히 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 잡히지 말고 역사와 사회와 자기자신을 모두 변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육체의 재해석
모든 것을 항상 변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유연해지고 융통자재하게 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자신부터 먼저 자유로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이 항상 변하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밖의 변화를 파악할 수도 없고 변하는 것들과의 관련도 올바르게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먼저 우리의 육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인간은 자유를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부자유는 육체를 오해한데서 비롯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육체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생활에서 육체가 하는 역할을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인생을 초로인생이라고 한탄할 때도 사실은 육체의 무상함을 한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풀잎의 이슬같은 육체가 하는 일은 대단하다.
사람의 일생에서 제일 먼저 필요하고 또한 마지막까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면 모두 “그것은 육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몸 하나 죽으면 고만인데...”라는 체념적인 표현이 역설적으로 잘 암시해주고 있듯이 우리의 육체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항상 주역을 하고 있다.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있어도 육체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없다. 따라서 사람답게 산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육체를 육체답게 한다는 말이 제일의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동양에서의 육체의 개념은 아주 넓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육체다.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을 비롯한 감성적이고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활동이 육체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 또는 의식세계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정신이 더 중요하고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류의 발언들은 모두 육체를 오해한데서 나온 발언들이다. 육체를 오해함은 인간을 오해함이요 인생을 오해함이니 그런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 수 도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있어서 육체가 육체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깨달으면 우리의 지도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고 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키는 근본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하나의 고기 덩어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돌맹이 같은 물체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조상들은 육체라는 말을 그렇게 좁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 우리의 소중한 육체를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쁜 뜻으로 쓰기 시작했는지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육체가 없는 사람을 사람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체노릇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령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가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가 육체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저지른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사람을 죽이는 죄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죄 역시 살인죄에 버금가는 큰 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발이 있어도 가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를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러한 독재정치를 경험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독재체제는 인간을 비인간화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감성과 지성과 심성이 모두 마비되어 제대로 느낄 수 없고,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제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흔히들 세상에서 가장 잘 보는 사람을 검사라 하고,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을 변호사라 하고 가장 판단 잘 내리는 사람을 판사라 하는데 요즈음 우리나라의 재판하는 모습을 보면 검사는 보지 못하고, 변호사는 말 못하고, 판사는 판단을 못하고 있으니 모두들 비인간화되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사람노릇 못하게 해 놓고서 국가안보는 무엇을 위한 안보며 경제발전은 누구를 위한 경제발전이란 말인가?
설사 경제사정이 좀 나아졌다한들 인간이 비인간화된 이 비극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인간의 비인간화가 우리 민족의 성격형성에 끼치는 해독과 우리의 문화에 끼치는 피해는 앞으로 두고 두고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일부 종교인들의 오류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중대범죄를 집권에 혈안이 된 무지각한 정치인들만이 저질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독재체제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덕을 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비인간화는 정치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종교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불교의 경우도 그랬고 기독교의 경우도 그랬었지만 극락가고 천당가는 것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육체가 간다고 생각했었다. 얼핏 들으면 황당무계한 소리처럼 들리는데 사실은 거기에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첫째, 죽은 다음에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이 따로 혼자서 간다고 생각하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이것은 분명히 일부의 육체천시사상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할 말이 없는데 누군가가 마치 자기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혼자서 큰 소리 치는 분위기는 매우 불건전하다.
거기엔 맹목적인 추종이 강요되고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미신이 싹트게 된다. 그런 세계에서는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발언권과 기능을 박탈해 버린다.
육체가 썩어 없어진 다음의 이야기를 하는데 눈을 가지고 있은들 무엇을 하겠는가?
귀와 입을 가지고 있어도 쓸모가 없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인간의 비인간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종교준비설이 나온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지상적인 의미는 죽은 다음의 세상, 즉 내세를 준비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어떤 종교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것을 큰 미덕으로 삼는다. 여기서 현실도피적인 인간이 형성된다.
종교의 세계에 초자연적인 신비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 어떤 인간이 구태의연한 상식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인간으로 비약하려 할 때 고도의 정신집중이 이루어지고, 그런 경우에는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요 또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항상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인간이 가져야 할 육체적 기능이 이미 마비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 모르는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그게 항상 그런것처럼 오해하고 마치 자기들도 그렇게 되는것처럼 가장한다면 이는 인간의 비인간화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 온 이래 이제까지 종교처럼 영향력이 컸던 것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엔 사원조직을 이용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막대했었다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지만 사상적이고 문화적인 영향력이 그 주된 바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종래의 종교인들이 독재치하의 판검사들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겠는가?
올바른 의미에서의 종교계 지도자들은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보고, 누구보다도 더 잘 듣고,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옛날에 비해서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점점 더 영향력을 상실한 까닭도 그들의 육체천시사상에 기인한 인간의 비인간화 경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사는 길
종교인들 공통의 관심사는 영원히 사는 길을 찾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육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과 사명을 제대로 다 발휘함으로써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동양적 인생관에서는 영원히 사는 길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들을 따르면 영원이란 순간을 등지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순간을 떠난 영원이란 영원이 아니라고 한다.
풀잎에 이슬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원히 사는 길은 영원을 찾기 위해 순간을 등질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순간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들은 순간 속에 영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동양에서는 “깨달음”이라 부른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한 순간도 버릴 순간이 없고 한 공간도 버릴 공간이 없고, 한 중생도 버릴 중생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그는 사람답게 사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다름 아닌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항상 있을 가지가지의 모든 생명체, 그 생명체는 이 세상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다. 지금 내 눈은 이런 모든 생명체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응시하고 있으며, 지금 내 귀는 이런 모든 생명체에서 나오는 소리를 다 듣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면 나는 다른 모든 개별자들과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갖게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인 만물이 한 몸이라는 말도 이러한 소식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본다.
몸은 분명히 각각 다른 몸들인데 이들이 하나로 통해 있는 것이 생명의 신비스런 구조이다.
이런 생명의 신비를 해치지 않고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타락과 인간성의 회복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로막는가?
그것은 인간의 사리사욕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은 인간이 인간을 오해하는데서 비롯한다.
현상적으로는 인간이 보아야 할 것을 다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 한 몸임을 모르게 되고, 여기에서 가지가지의 사리사욕이 나오고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허위와 기만이 백출하게 된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단적인 증거는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속이려하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처럼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고 목적을 성취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런 좋은 예가 미국 행정부의 대이란 무기밀매요 그 이익금의 유용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심복들은 한편으로는 증거를 인멸하고 한편으로는 거짓말 좀 했기로서니 무엇이 잘못이냐고 강변하고 나섰다.
놀라운 것은 상당히 많은 미국국민들이 이러한 행위를 애국적이라고 칭찬하고 나선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허위와 기만이 성공하면 이들은 혼자서 미소짓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쉴 것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속이는 사람들은 그 거짓말이 통하고 속임수가 발각되지 않으면 모두 혼자서 미소 짓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쉴 것이다.
그러나 크든 적든 거짓말이 통했을 때 이 세상에 허위는 기승을 부리고 더욱 커져가며 진실은 숨을 못 쉬고 점점 시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실이 시들어 갈때 생명도 함께 시들어 간다. 시들어 가면 거짓말이 통해서 미소 짓는 그 사람도 함께 시들어 가는 것이다.
설사 내가 큰 손해를 보고 망신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이 기필코 드러나서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이 모두 기를 펴고 풍성하게 잘 자라나야 하겠다.
이 길만이 인간성회복의 가장 올바른 길이요 지름길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정말 자기나라의 국민을 위한다면 탄핵의 위험이 있고 하야의 수모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용감하게 진실을 드러 내 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