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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11 03:30
작곡가 개성 드러낸 '레퀴엠'
▲ 2013년 영국 런던에 있는 로열 앨버트홀에서 열린 여름 음악 축제 ‘프롬스’ 공연에서 미국 지휘자 마린 올솝이 이끄는 계몽 시대 오케스트라(OAE)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연주하는 모습. /김기철 기자
지난주 목요일 KBS 교향악단 기획으로 지휘자 정명훈과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합창단이 함께 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주제 음악은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레퀴엠'이었어요. 마치 오페라를 듣는 듯 극적인 효과와 아름다운 선율이 번갈아 나오며 청중을 사로잡는 명곡이죠.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베르디의 인기 곡 중 하나입니다.
레퀴엠은 우리말로 '진혼 미사', 혹은 '위령 미사' 등으로 번역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죽은 이를 위해 진행하는 종교의식의 한 종류죠. 그런데 레퀴엠 음악은 종교를 뛰어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습니다. 많은 애호가가 있는 음악 장르죠. 고인의 영혼을 달래고 안식을 비는 엄숙하고 차분한 악상은 평안함을 전달합니다.
많은 작곡가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레퀴엠들을 만들었는데요, 의도한 작품의 성격에 따라 악장 수를 생략하거나 통상의 레퀴엠과 다른 가사를 채택하는 등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넘치는 작품이 많습니다. 오늘은 클래식 팬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레퀴엠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죽음 예감한 모차르트, 마지막으로 작곡
먼저 언급할 작품은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유작으로 남긴 레퀴엠 K(쾨헬-모차르트 작품 분류 번호) 626입니다. 모차르트는 그의 마지막 해인 1791년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으로부터 레퀴엠 작곡 의뢰를 받습니다. 음악을 부탁한 사람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으로, 그는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레퀴엠이 필요했죠. 당시 건강 악화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한 레퀴엠처럼 생각했어요. 병상에 눕게 된 모차르트의 이 작업을 여러 사람이 도왔지만, 결국 그해 12월 5일 모차르트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납니다.
모차르트 아내인 콘스탄체는 미완성 상태로 남은 레퀴엠 작품이 완성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에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가 미완성 부분을 보완해 1792년 작품을 완성하죠. 스승이 남긴 작품을 이어받아 심혈을 기울인 쥐스마이어의 공이 큽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모차르트의 솜씨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립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 특유의 서정성과 엄숙한 분위기, 정제된 합창의 울림 등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요, 그중에도 '눈물의 날'은 그 애절한 선율이 드라마나 광고 음악 등에 자주 쓰입니다.
스승과 어머니 위한 독일어 성경 가사
독일 레퀴엠 작품번호 45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오랜 기간 구상해 1869년 첫선을 보였습니다. 이 곡은 작곡가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로베르트 슈만과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돼 있습니다. 슈만은 브람스에게 스승이나 다름없었는데요, 브람스를 유럽 음악계에 소개해준 은인이었어요. 오랜 투병 끝에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슈만을 위한 레퀴엠의 구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 때문에 작업은 잘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브람스는 1865년 어머니 사망을 계기로 레퀴엠 작곡 작업을 다시 시작합니다. 레퀴엠은 처음에는 3개 악장으로 구성됐었지만, 최종적으로는 7곡으로 완성됐습니다. 제목 앞에 '독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이 곡의 가사가 전통적인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돼있기 때문입니다. 브람스는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서 가사를 취했어요. 성경에 있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시편, 요한계시록 등의 내용이 독일어 가사로 등장합니다. 바리톤과 소프라노 독창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합창 위주 구성입니다. 영혼의 고뇌와 슬픔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차분한 위로가 이어집니다. 전통적인 레퀴엠의 형식에서는 벗어났지만 언제 들어도 깊은 감동이 밀려오는 걸작입니다.
오페라처럼 장엄… 존경 바치는 레퀴엠
엄숙한 가운데 마치 오페라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 레퀴엠도 있어요. 베르디의 레퀴엠 작품번호 48은 오페라 작곡가의 작품답게 드라마틱한 짜릿함과 흥미진진한 진행으로 듣는 이들을 사로잡아요. 1873년 5월 이탈리아의 대문호였던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서거합니다. 소설 '약혼자들'로 잘 알려진 만초니는 이탈리아의 민족정신과 가톨릭 신앙을 강조했던 인물이죠.
평소 만초니를 깊이 존경해온 베르디는 그를 위한 레퀴엠을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만초니의 서거 1주기인 1874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작품을 초연했습니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솔로와 혼성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이 대작은 약 90분 동안 장엄하게 진행됩니다. 인간의 희로애락과 속죄, 구원을 절절한 드라마로 다루죠. 이 레퀴엠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도입부의 강렬한 음향이 인상적인 '분노의 날'입니다. 테너 독창곡 '저는 탄식하나이다(인제미스코)'도 그의 오페라에서 나오는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올해로 서거 100주년을 맞는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작품번호 48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모두 7개의 곡으로 구성됐어요. 포레는 1887년 레퀴엠의 작곡을 시작했고 이듬해 1월 이 중 먼저 다섯 곡을 완성해 파리 라 마들렌 교회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최종본이 완성된 것은 1900년 7월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작품이 1885년과 1887년 세상을 떠난 포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는 것이라고 추정했어요. 그러나 작곡가 포레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에 대해 "평온한 안식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프라노, 바리톤 솔로와 혼성 합창단,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이 연주하는 네 번째 곡인 '경건한 예수(피에 예수)'는 특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습니다. 소프라노의 독창에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죠. 이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11월 포레 자신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됩니다.
삶과 죽음, 용서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노래 속에 담은 레퀴엠은 종교와 언어 등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에게 와닿는 힘을 지니고 있죠.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며 직접 들어 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레퀴엠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 음악.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바르바라 크라프트의 그림. /위키피디아
▲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카를 브래시의 사진. /위키피디아
▲ 주세페 베르디(1813~1901). 조반니 볼디니 그림. /위키피디아
▲ 가브리엘 포레(1845~1924). 존 싱어 사전트 그림. /위키피디아
김주영 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기획·구성=장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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