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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38) /
"부활 신앙! 체험 신앙! 순교 신앙!”
☞ 말 씀 : 요 한 복 음 11장 45절 - 57절 (신약성경 p.166)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어떤 일에서든지 항상 어둡고 부정적이며, 과거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기쁨이나 행복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고 절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긍정적인 사람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해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성령 안에 거한다면 언제나 희망입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생각은 믿음을 낳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적극적인 생각을 낳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동네서 사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죽어 나흘이나 된 시신이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세 가지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명령은 “돌을 옮겨 놓으라!”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셔서,
무덤을 막고 있는 무겁고 큰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언제나 먼저 장애물을 제거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기적을 행하시려 할 때 돌문이 막혀 있어, 예수님께서 돌문을 옮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함께 온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을 잘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도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즉시, 그 장애물들을 치워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의 집을 심방해 보면, 언제나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항상 영적 자세와 영적 자부심을 흩뜨리지 않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주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이란 것을 아는 영적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자세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명령은 “나사로야 나오라!”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셔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열어놓으라는 첫 번째 명령대로, 사람들이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자,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고 두 번째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향해 큰 소리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무덤 밖 예수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나왔습니다.
모든 기적은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오직 믿음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장애물을 제거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악하고 더러운 귀신들아,
어둠의 세력들아,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실 때 모든 저주들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걸어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명령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나사로의 얼굴에 감겨 있는 수건을 벗겨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습관,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얽매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은, 이런 세상의 습관,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들을,
끊어버리고 믿음의 사람답게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 가지 명령에 부활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에 갇혀 있던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우리가 거기 있었다면 크게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와!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이구나.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분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나사로의 부활에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째 반응은, 오늘 본문 45절입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본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모든 일을 보았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얼굴에 수건을 감은 채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에는 이성의 요소와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진실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이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우리 사람이 새롭게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성의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부활 기적의 현장을 보았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 나사로의 부활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 중에,
마리아에게 가서 알린 사람들도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부활의 기적과 능력에 몹시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이유는,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나사로의 부활기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고 아마 축소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빈정대듯 말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믿겠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회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반응은, 오늘 본문 47절, 48절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 세 번째 반응을 보인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소집해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하니, 골치가 아프구나.
기적을 많이 행하면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믿게 될 터인데, 이는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가져 올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 때문에,
종교적 질서를 망가뜨리고, 우리의 기득권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관심은 정치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분할 통치권을 위임받아, 유다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것이 뒤집혀지는 날에는, 통치자들로서 자신들의 입지가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거리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예수라는 사람을 잡아다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지금 저와 여러분은 두 번째 부류의 예수님의 부활 기적에 회의적인 사람들이거나,
세 번째 부류의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났고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 주신,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유대인들은, 부활 기적을 직접 보고도 믿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도 없고,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있습니다.
교인지만 이중적인 삶의 자세로 언제나 괴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100% 성령 충만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성령님의 세례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예수님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합니다. 49절과 50절 말씀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으니.” -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예상 밖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불리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에겐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51절과 52절 말씀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위의 두 구절은, 조심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은 가야바가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하는 예언적 성격의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를 통해서도, 예언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는 밤에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남편 빌라도에게 전달했습니다.
불신자나 반 기독교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예언이 역설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역사하고,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오묘합니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인 예언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음모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53절 말씀입니다.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반드시 음모가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이뤄진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연을 가장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것인가 하고, 여러 각도로 고심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중을 선동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협박까지 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반사회적인 음란물 사이트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퍼트리므로 기사 조회수를 늘려서, 돈을 벌어들이는 유투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 -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갑자기 많아지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를 통해서 “기독교를 파멸시키자, 이 땅에서 교회를 다 몰아내자,
교회는 민족의 적이다.’ - 하면서 가짜 뉴스를 만들어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유투버들은, 기독교가 말살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비판하며 공격합니다.
그리고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은, 연대해서 성경의 진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온 인류의 구원자요. 대속자요.
이 시대에도 기적을 베푸시는 유일한 우리 희망이라는 진리를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5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 예수님께서 그들의 공격을 피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강하게 대응하실 것을 기대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방법을 택하신 것은 ‘십자가’ 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십자가 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군가와의 투쟁을 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투쟁과 혁명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신 십자가로 사랑, 용서의 복음으로 구원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갔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55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성결 의식을 치르려고,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오늘 본문 56절 말씀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57절 말씀입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것은 예수님에게 체포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음모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 상황입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으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교회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회복한다면, 어떤 압력, 위기,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교회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체험 신앙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를 체험하는 신앙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신앙은, 능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교회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순교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순교를 결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대는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하게, 물질 문명과 싸우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적당히 예수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 영적 악한 시대를 헤쳐 나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을 걸고 헌신할 때, 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 한 분 한 분이, 부활 신앙, 체험 신앙,
순교 신앙을 소유하고 승리하시기를, 승리자 -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