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알려진 작품이 많은 작가여서 연륜이 꽤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용석은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작가다. 뮤직비디오 감독, 광고 감독, 미디어 아티스트 등 다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이 젊은 작가의 작업 이야기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그는 강남 8학군의 유복한 집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교육에 극성스럽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학교 공부 외에도 바이올린・피아노 등을 배우던 전형적인 강남 모범생이었다.
“게임기를 사려면 전교 1등을 해야 했어요. 성적 압박감에 시달리던 공부 잘하는 강남 아이였죠. 그나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두 명 있어서 형들을 통해 음악・영화 등 다양한 문화를 남들보다 일찍 접할 수 있었어요. 그 영향이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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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와 함께 집안 사정이 악화되어 고등학교 시절엔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혼자 살게 되었다.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고 학교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던 그가 택한 첫 직업은 댄서였다. 가수들의 댄서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접했다.
“이상하게 그때 고민은 ‘어떻게 하면 춤을 더 잘 출 것인가’가 아니라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만들까’ ‘저 무대 연출을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였어요. 춤은 잘 못 췄던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4년 정도 댄서 생활을 하며 보내는 사이, 집안 사정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춤에 재능이 있지 않았기에 앞날이 막연했고, 대학에 간 또래 친구들을 보면서 대학입시에 도전했다. 뮤직비디오와 무대 연출에의 갈증을 풀기 위해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물 만난 고기였다. 특히 영상 작업은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학교 장비를 사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하며 1, 2학년을 보냈다.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비주얼 아트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평소 길거리를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시각화하는 그의 작업은 교수와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나 영상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냄새가 풍길 정도로 영상 작업에 푹 빠졌다.
첫 뮤직비디오 작업도 학생 때 알던 형의 소개로 하게 됐다. 학교 장비를 동원하여 고생 끝에 ‘오리엔탈펑크스튜’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했다. 이후 아는 동네 누나였던 삐삐밴드의 전 보컬 이윤정이 속해 있던 EE의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다. 그는 첨단기술로만 치닫던 당시 뮤직비디오 경향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VHS 화질의 촌스러운 비주얼로 EE의 곡 ‘Curiosity Kills’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했다. 어설픈 복고풍이 아닌 진정한 복고 영상에 당시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어느 날 그가 자취방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려고 방 안을 비췄을 때 화면 안에 걸리는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구를 치우는 대신, 가구를 활용할 수 있는 영상을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기초적인 자취방 프로젝션 매핑 영상을 만들었다. 이 영상을 블로그에 올리자 누리꾼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전업체에서 광고 의뢰가 들어왔다. 빵빵한 지원 속에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라 그는 신이 났다. 광고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프로젝션 매핑을 활용한 각종 광고 의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자취방 영상으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뤄졌어요.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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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와 프로젝션 매핑,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등 그가 현재 작업하는 모든 것은 댄서 시절 경험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경험한 무대와 공연, 영상 작업들이 지금의 비주얼 아티스트 최용석을 만드는 데 큰 원천이 된 것이다.
“방황하고 춤추느라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엔 어려운 환경이 불만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하는 것들이 전부 그때 시작된 거잖아요? 그때 댄서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지금의 룸펜스는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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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용석이 작업한 프로젝트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이 차다. 수많은 광고와 전시, 재미로 만든 작업물의 공통점은 ‘불만스러운 것들에 대한 놀림’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유행, 관습을 강조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것을 타파하기 위해 때론 장난으로, 때론 조롱으로, 때론 재미로 시작한 작업들이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시도로 진화했다. 그는 프로젝션 매핑 아티스트로 한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제 작업은 알고 보면 전혀 체계적이지 않아요(웃음). 친구들하고 장난하듯이, 안 되면 그때 그때 필요한 스킬을 익히는 방식으로, 주먹구구로 작업해왔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은 것을 보면 결국은 센스와 아이디어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술보다 아이디어와 스토리에 신경을 많이 써요.”
그저 작업실과 차 한 대를 가진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의 꿈은 벌써 이뤄졌다. 새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뿌듯한 어른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꿈을 묻는 질문에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의 남은 꿈은 VAJP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제가 붙인 이름이지만 VAJP는 제 새끼 같아요. 앞으로는 VAJP를 더 다양한 시도로 발전시키고 싶어요.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하고도 싶고 해외에서도 공연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VAJP를 보면서 ‘우와~’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