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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방해받아온 자연 질서 39-51
- 앙드레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1938-)
- 성의 역사와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Histoire de sexe et désir d'enfant, 2004)쥬아네(Pierre Jouannet, 1942)와 나움-그라프(Véronique Nahoum-Grappe, 1949-)외 12명, 김성희 옮김, 알마, 2009, P. 198.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1938-) 프랑스 역사가. 가족의 역사(Histoire de la famille 1986)(A. Burguière, Ch.F. Klapisch, M. Segalen, F. Zonabend (dir.) Paris, Armand Colin), 제3세계와 좌파(Le Tiers-Monde et la gauche, 1979)(codir. avec Jean Daniel), Paris, Le Seuil; 1979).
***이 논제는 성생활과 출산이 자연적인지 인위적(제도적)인지를 묻는 것이다. 교회가 들어오면서 인위적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성생활과 출산 일치가 자연적인지 분리가 자연적인지의 논쟁거리는 20세기말 보노보 연구에 와서야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논제는 가부장과도 연계되어 있다. 논자는 가부장(혈통)과 관련하여 “입양”의 논제를 제시했다. 핏줄로 이어지지 않아도 혈통의 성립은 프랑스에서는 완전양자입양(1966년)이후라 한다. (
*출산과 관계없는 성생활은 대부분의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언제부터 고유한 것으로 되었을까? 다시 말하면 자연이 우선인간 인간이 그 위에 무엇을 덧붙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연(본성)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가?
소크라테스 좌파인 퀴니코스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로 바꾸어 놓으려는 이해는 아닐까? 소크라테스 우파인 플라톤이 자연에 대해 인간의 우월성을 말한 것에 대해 자연의 우선성을 강조하려 한 것이 퀴니코스를 이어받은 초기 스토아의 사상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초기 스토아가 플라톤주의에 대해 전복을 실행하려 했다고 보는 들뢰즈의 입장도 자연 우선성이 아닌가 한다. (49OKH)
**인간이 제도를 만든 것은 자연성의 회복이라기보다 자연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제도가 자연에 휘둘릴 때, 인간의 나약함을 감추고 자연지배의 방식으로 사회성을 강조하다가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유일신앙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벩송이 이런 유일 신앙 종교를 폐쇄적 종교로 보았다. 자연의 다양한 다발(묶음) 속에서 한 줄기의 길을 잘 갈 수 있을 지를 탐색하는 것이, 즉 사회성의 폐쇄성에서 새로운 통로를 만드는 것이 열린 종교일 것이다. 자연(본성)의 자기 방어기제가 열린 종교일 것이다. 숙명(필연)의 인정은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9OKI)
# 오래전부터 방해받아온 자연 질서 39-51
- 앙드레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1938-)
아주 오래된 사회와 단순한 사회에서 매우 복잡한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는 출산을 이해하고 출산에 대처하기 위한 이론과 경험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 모든 사회가 일가 친척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혈통에 의미를 부여했다. (40)
성생활과 출산 40
고대 사회 특히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는 사랑과 쾌락(이성애적 관계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관계에 의한 것도)을 추구하는 것과 출산을 분리시켜 생각했으며 대중은 학계 사람들처럼 출산에 실용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40)
샤를마뉴(Charlmagne, 742-814)만 해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여러 명의 공식적인 첩을 아내와 함께 자신의 궁 안에서 지내게 했다. 개신교 국가들이 매춘을 금지하거나 미혼모를 색출함으로써 성생활을 마침내 부부 생활 안에 가둔 것은 16세기에야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가톨릭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프랑스에 그러한 규범이 자리 잡기까지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3세대에 걸친 시간이 걸렸다. ...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집 안에는 아내를 두고 집 밖에는 정부를 두어 딴 살림을 차리는 부르주아들의 이중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성생활과 출산 사이의 옛날식 구분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41) [19세기 후반 남자의 이중적 성생활이 합스부르크 왕가와 빅토리아왕조에서 심했으며, 이 시기에 상류층 여성의 억압과 억제는 히스테리를 양산했다고 프로이트가 말한다. (49OKJ)]
∙교회의 감시 아래 놓인 성생활 42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로마 사회 내부에서 스토아주의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황실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가 됨에 따른 것이었다. 자아를 억제하고 육체를 멸시하는 [후기] 스토아적 윤리는 3세기의 로마 제국에 정신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이때 기독교는 교외에서 흔히 내세우는 말처럼 가난한자들과 약한 자들의 참여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방식이 아닌 위로부터의 방식, 즉 황실과 원로원 특권계급의 개종을 통해 로마 사회를 장악한다. (42)
교회가 인정하는 성생활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뿐이다. 하나는 결혼의 틀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 경우 최소한의 죄악 다시 말해서 색욕과 간통을 막는 방법으로 인정된다(이것은 사도 바울의 교리다)[바울(Paul de Tarse, à l'origine Saul, 8경-67경)]. 또 다른 조건은 종의 번식을 위해 하느님이 원하는 출산은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조건은 모든 형태의 혼외정사를 금지하게 만들었다. 둘째 조건은 출산과 동일시되는 ‘자연스런’ 성생활의 경계를 정했다. (43)
동성애에 대한 억압과 이단에 대한 억압이 혼동되었던 13세기[십자군 원정시기인데]에 첫째 종교적 압력이 있은 뒤에, 종교의 권력이 혼외 성생활을 없애는 데 이용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였다. (43)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결혼의 신성함’을 세우는 데, 즉 부부간의 성생활을 규범으로 만드는 데 전념했지만 단 방법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 부부의 책임을 강조하는 개신교[루터의 종교개혁(1517), 캘빈 종교개혁(1541)]의 개혁이 첫째. 배우자 각각이 성행위라는 분명한 시험 때문에 품을 수 있는 죄의식을 신앙고백 자리에서 따지는 예수회[(Jésuites 1534)]의 개혁이 둘째. 성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권하는 엄격한 얀센파[얀세니우스(Jansenius 1585-1638)]의 개혁이 셋째였다. (44-45)
17세기 말 프랑스의 도시 사회에는 산아제한의 선택을 조장하는 환경이 형성되었는데 나머지 서구 국가들은 19세기 말아야 접하게 되는 일이었다. (45)
∙아들을 낳을까, 딸을 낳을까? 46
고대에도 다양한 피임 기술(효과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부부의 가장 큰 걱정은 임심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이를 갖는 문제였으며 또한 가능하다면 성별을 선택할 수 있기 바랐다.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Ἱπποκράτης, 전460?-전377)에서 갈레노스(Galien, Γαληνός, Galenus, 129경-201/216), 소라노스(Soranos Σωρανός, 전2세기경)에 이르는 의사들이나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469-399) 이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여러 이론은 민간 신앙에서 하듯 아이의 성별을 고르려면 성관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늘어놓았다. (46-47)사
혈통의 문제 47
유전학은 최근의 학문이다. (48)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에 대한 법적 의제(legal fiction)를 만든 나라는 프랑스 밖에 없었다. (48)
로마법은 구속력있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불확실성을 해결했다. 로마법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아버지를 선언적으로 결정하는 발상은 생물학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그 결과 아버지 쪽 혈통은 순전히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49)
고대 로마의 정치가 [소(少)] 카토(Cato, 전95-전46)가 자신의 아내 마르치아((Marcia)를 호르텐시우스(Hortensius, 전114경-전50)에게 보낸 것도 그 경우다. 호르텐시우스가 죽자 카토는 마르티아와 다시 결혼했다. 물론 마르치아가 물려받은 고인의 재산도 함께 챙기면서. (49-60) [그리스에서는 아내를 친구에게 넘겨준 예로는 페리클레스(Périclès, Περικλῆς, 495경-429) 장군의 예도 있다. 그리고 그는 둘째 아내로 화류계 여인이며 연설문 담당자로서 아스파지아(Aspasie, Ἀσπασία, 470경-400경)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교회 50
인류학자 잭 구디(Jack Goody, 1919-2015)는 초기 교회가 기독교 사회 안에서 가족과 친족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일련의 금지 사항을 도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의 결속을 깨뜨리고 가족이 물려받아야할 재산의 일부를 교회가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그래서 일가친척간의 혼인을 금지하고 입양을 없애고 재혼을 막았으리라는 것이다. (50)
입양의 경우가 가장 굴곡이 많았다. ... 프랑스에서 입양은 대혁명이 일어나고 나서야 법적인 지위를 되찾았다. 나폴레옹은 ‘자연을 흉내 내는’ 그 방식에 호의적이었으며 그래서 아주 제한적이긴 했지만, 민법에 입양을 포함시켰다. 법을 통한 자유화에도 19세기에는 입양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특히 수많은 고야를 양산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입양을 장려하기 위한 확실한 법적 조정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제한 적인 성공을 거두는데 그쳤다. 신생아 입양에 대한 진정한 열기는 오히려 프랑스에서 어린아이의 유기가 드물어진 시기에 나타났는데, 완전 양자입양에 관한 법이 제정된 1966년 이후의 일이다. (50-51)
# 인명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1938) 프랑스 역사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l'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EHESS) 연구원장을 지냈다. 1975년 이래로 새로운 관찰자(Nouvel Observateur)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가족의 역사(Histoire de la famille 1986)(A. Burguière, Ch.F. Klapisch, M. Segalen, F. Zonabend (dir.) Paris, Armand Colin), 제3세계와 좌파(Le Tiers-Monde et la gauche, 1979) (codir. avec Jean Daniel), Paris, Le Seuil; 1979), 결혼과 사랑: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로부터 대혁명에 이르기까지(Le Mariage et l'Amour ; en France de la Renaissance à la Révolution, 2011)(Paris, Le Seuil, 2011).
소(少) 카토(Cato, 전95-전46) 로마의 정치가. 아내 마르치아를 호르텐시우스(Hortensius, 전114경-전50)에게 보냄. / 마르치아(Marcia, 전80년-??), 마르키우스(Lucius Marcius Philippus)의 딸, 카토의 둘째 부인(la seconde épouse de Caton d'Utique).]
샤를마뉴(Charlmagne, 742-814) [칼 대제(Karl der Groβe)], 프랑크왕 재위 768-814, 로마황제 재위 800-814): 메로빙어(Merowinger) 왕조는 일종의 제정일치체제를 가진 카롤링어(Karolinger) 왕조로 바뀌고, 프랑크 왕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비호자 역할을 맡게 된다.
갈레노스(en fr. Galien, en gr. Γαληνός Galenos, en lat. Claudius Galenus, 129/131-201/216) 고대 그리스 의사. 수학과 논리학의 작품도 있다.
구디(John Rankine Goody, Jack Goody, 1919-2015) 영국 인류학자. 유라시아에서 가족과 결혼(Famille et mariage en Eurasie, 2000)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Ἱπποκράτης, 전460?-전377)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의 의학자. '의사의 아버지'. 인체의 생리나 병리를 체액론에 근거하여 사고했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는 설을 치료 원칙의 기초로 삼았다.
호르센티우스(Quintus Hortensius Hortalus, 전114경-전50) 로마 연설가, 변호사, 정치가.
코르넬리스 얀세니우스Cornelius Jansenius 1585-1638) 네덜란드의 신학자. 얀센주의(le jansénisme)는 1653년에 로만카톨릭에 의해 단죄되었다.
예수회(Jésuites 1534) 가톨릭교회의 남자 수도단체. 1534년 성 이냐시오(St. Ignatius de Loyola)가 파리에서 창설, 1540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 로욜라 [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 (영)Saint Ignatius of Loyola. 세례명은 Inigo. fr. Ignace de Loyola 스페인의 신학자.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축일은 7월 31일. 16세기 가톨릭 종교개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534년 파리에 예수회(제수이트 교단)를 세웠다..
바울(Paul de Tarse, à l'origine Saul, ou saint Paul 8년경-67년경) 현 터키 남동부 지중해 연안지방인] 킬리키아(Cilicie, Κιλικία)지방의 타르소스(Tarse, Ταρσός) [스토아학파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 출신이다. 로마에서 죽었다. 대낮에 신을 보았다는 점[환각]에서 파라노이아 망상에 빠진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469-399; 70살)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450-386)가 소씨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불렀다.
소라노스(Soranos, Σωρανός) 전2세기경, 방법학파 계보. 에페소스(Éphèse) 출신 의사. 그는 트로야누스(Trojanus, 기원전 98-117),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두 제왕시대에 로마에서 활약한 의사로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다.
(4:35, 49O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