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THE GREEN HORNET
중국제목 : 청봉협(靑蜂俠)
그린웨이 프로덕션 제작, 20세기 폭스TV 배급
제작 : 윌리엄 도저
프로듀서 : 리처드 브르엘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 : 찰스 B. 핏츠시몬스
감독 : 노먼 포스터, 제리 토머스, 윌리엄 뷰다인 외
각본 : 제리 토머스
촬영 감독 : 하워드 슈바르츠
촬영 : 컬 거스리
음악 : 빌리 메이
연주 : 알 허트 외
(Theme: Rimsky-Korsakov's The Flight of the Bumble Bee)
원작 : 조지 트렌들, 프랜 스트라이커
출연
가토(Kato) : 브루스 리
브릿 레이드(Britt Reid) : 반 윌리엄스
스캔런 검사(F.P. Scanlon) : 월터 브룩
마이크 액스포드(Mike Axford) 기자 : 로이드 고흐
비서 케이스(Lenore "Casey" Case) : 웬데 와그너
ABC TV 방영 1966년 9월 9일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극장판 :
〈BRUCE LEE IN THE GREENHORNET〉
그린웨이 프로덕션, 미국 극장 개봉일 : 1974년
〈FURY OF THE DRAGON〉
LL&JMJ 엔터프라이즈 필름, 미국 극장 미공개
줄거리
데일리 센티널지의 경영을 인수한 젊은 사장 브릿 레이드(반 윌리엄스)는 흉악한 범죄가 발생하면 검은 복면과 검은 옷으로 몸을 가린 그린호넷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그의 이중신원은 비서와 지방 검사만이 알고 있다. 쿵후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브릿의 유능한 조수 가토(브루스 리)의 보좌를 받으며 정의를 수호하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린호넷과 가토는 검은 미인호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린호넷 뒷이야기
1964년 브루스 리는 에드 파커가 주최한 캘리포니아 롱비치 국제 가라테 토너먼트에서 쿵후 시범을 보였다. 이때 관객이었던 헐리우드의 이발사 제이 세브링에 의해 〈넘버 원 선〉의 중국인 출연자를 찾고 있던 TV프로듀서 윌리엄 도저에게 소개된다.
에드 파커가 촬영한 데모 필름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된 윌리엄 도저는 브루스 리와 연락을 취했다. 이것으로 로스엔젤레스에서 20세기 폭스사의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배트맨〉의 프로듀서 윌리엄 도저는 스크린 테스트를 통해 훌륭한 표현력을 선보인 브루스와 계약을 맺었다. 곧바로 〈넘버 원 선〉의 제작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 〈배트맨〉이 호평을 얻어 13주간으로 연장 방송하게 되었으므로 브루스의 첫 출연작이 될 예정이었던 〈넘버 원 선〉은 연기된 끝에 결국 중단되었다.
브루스 리는 65년 2월의 스크린 테스트부터 66년 3월의 〈그린호넷〉 제작 결정까지 약 1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기다리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가족은 홍콩에서 4개월, 시애틀에서 4개월간 옮겨다니며 거주했고, 오클랜드에 소재한 제임스 리의 집에 얹혀살던 시기도 있었다.
〈그린호넷〉의 GO싸인이 나오게 된 1966년 3월에 가족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윌셔 거리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브루스는 약 1개월간 제프 머레이의 연기학교에 다녔다.
새차로 시보레 노바를 구입했다.
당시 미국영화와 TV에 등장하는 중국인은 변발을 하고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며 백인에게 순종적인 역할이 많았다. 이처럼 미국에서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은 이미지가 왜곡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이미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브루스 리는 비록 대사가 거의 없고,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 가토 역이지만 출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린호넷〉에서 브루스 리가 맡은 가토는 주인에게 아첨하거나 서투른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으며, 하인이 아닌 유능한 조수역을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그린호넷에게 닥친 어려운 사건은 가토가 없었다면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초에 시리즈에서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브릿 레이드씨입니다.’ 라는 대사 이외에는 극단적으로 말이 없는 가토로 설정되었다.
어느 비평가는 ‘가토에게 대사를 쓰게한다면 작품이 더 좋아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브루스 리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린호넷〉에 발탁된 이유에 대해 ‘브릿 레이드라고 발음할 수 있는 중국인은 캘리포니아에서 나밖에 없었기 때문’ 이라는 유머로 가득한 대답을 했다.
〈그린호넷〉은 〈론 레인저〉의 원작자인 조지 트렌들, 프랜 스트라이커가 초안한 것(실질적으로는 조지 트렌들이 초안)으로 1936년부터 1952년에 걸쳐 인기를 얻은 라디오 드라마가 원작이다. 원작에서는 레인저인 댄 레이드의 손자가 브릿 레이드라는 설정으로, 가토 청년은 단순한 일본계 인물이라는 조연이었다.
1940년에는 이 작품의 시각적 기반을 구축한 첫 영상물에 해당하는 〈그린호넷 THE GREENHORNET〉과 〈그린호넷 스트라익스 어겐 THE GREENHORNET STRIKES AGAIN〉이 제작되었다. 브루스 리는 액션이 어떻게 촬영될 것인지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작 스탭은 서부극처럼 서로 강하게 치고받는 격투신을 생각했으나, 실전적인 기술을 사용하고 싶었던 브루스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절권도의 진면목을 화면에 재현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흥행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실생활에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 뛰어 차기를 선보였다.
브루스 리의 액션이 너무 빨라서 화면의 상이 흔들려, 움직임을 늦추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엑스트라였던 피터 찬의 회상으로는 촬영중에 브루스가 자신의 육체나 기술을 출연자와 스탭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린호넷과 가토는 〈배트맨〉의 몇화에 게스트 출연했다. (1966년 41화 ‘The Spell of Tut’, 67년 85화 ‘A Piece of the Action’, 86화 ‘Batman's Satisfaction’).
86화에서는 배트맨의 파트너인 로빈과 대결을 벌여 가토가 날카로운 뒤돌려 차기로 배트맨 일행을 제압한 장면이 흥미롭다.
배트맨은 로빈보다 인기가 높았지만, 그린호넷은 가토에 필적하지 못했다.
가토와 로빈의 대결 장면을 촬영할 때, 브루스 리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로빈역인 버트 워드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고 하며, 스탭이 이것은 촬영이므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브루스 리에게 납득시켰다.
대치한 순간에 긴장한 로빈을 보고 참다 못한 브루스 리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브루스 리 앞으로 도착한 팬레터는 주연배우인 반 윌리엄스의 팬레터보다 많아 하루에 최대 600통에 달하기도 했다.
브루스 리가 팬에게 보냈던 답장을 소개한다.
“친애하는 빅키에게.
내가 TV에서 행하는 무도는 가라테가 아닙니다. 가라테의 원형이 되는 쿵후라고 일컬어지는 무도로 중국이 발상지입니다(그러므로 가라테도 마찬가지죠). 판이나 벽돌을 격파하는 것은 단지 시선을 끌기 위한 것으로, 누구에게나 더구나 당신과 같은 여자 어린이에게는 권장하지 않습니다. 배움의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은 기술입니다. 뭔가를 격파해 보고 싶다면 망치를 사용하면 되겠군요. 편지 보내줘서 고마워요.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많은 TV프로그램과 캠페인, 사인회에 참석한 브루스 리는 축제에서 장식된 수레에 오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에 갔을 때는 팬들이 붐벼 자신의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고 ‘BLACK BELT지’ 에서 언급했다.
현재에도 확인할 수 있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밀턴 벨 쇼’ 에서는 그린호넷과 함께 가토 복장으로 출연하여, 쿵후로 인형 부수기 등의 액션을 선보였다. 그 밖에 마스크 모양이 다른 파일럿판, 분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게스트 출연한 기자회견 등과 같은 귀중한 영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20세기 폭스사의 창고에는 당시에 커트된 많은 필름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오프닝 나레이션은 제작자인 윌리엄 도저가 맡았다(배트맨에서도 맡음).
〈그린호넷〉에서는 브루스 리의 더빙되지 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괴조음’ 과 같은 기합소리도 들을 수 있다. 후에 제작된 홍콩영화의 괴조음과는 조금 다르지만, 간혹 매우 흡사한 소리도 확인할 수 있다.
가토가 운전하는 검은 미인호(Black Beauty)는 66년형 크라이슬러 크라운 임페리얼을 50,000달러를 들여 개조한 것이다. 제작은 〈배트맨〉의 배트모빌(BatMobile)을 손보았던 딘 제프리스이며 제작에는 약 30일이 소요되었고, 극중에서 볼 수 있는 가동 부분은 모두 실제로 작동한 것이라고 한다.
제작 초기에는 광택이 있는 블랙으로 도장되었지만, 촬영시 차체에 스탭이 비춰진다는 이유로 광택이 없는 블랙으로 재도장되어 중후한 외관을 갖게되었다.
현재는 미국의 유명한 수집가 J.R. 굿맨 (J.R.Goodman)씨가 기본 구조만이 남은 상태로 발견된 검은 미인호를 제프리스에게 의뢰해 복원하여 소유하고 있다.
〈그린호넷〉은 지금도 미국 현지에서는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어 수많은 관련 상품이나 코믹북이 발간되고 있다.
브루스 리 사후 1974년에 TV판 10화, 11화, 24화, 25화를 통합하여 〈BRUCELEE IN THE GREENHORNET〉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에서 공개되었다.
극중에서 중국식 무기인 표창(그린호넷 다트)과 쌍절곤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물론 서구의 차이나타운을 제외하고 쿵후가 본격적으로 미국 가정의 TV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1966년부터 67년에 걸쳐 매주 금요일 7시 30분부터 〈와일드 웨스트〉, 〈타잔〉 과 같은 시간대에 방영된 경쟁 프로그램으로서 26화가 방영된 〈그린호넷〉은 어린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어른들에게는 어필하지 못하여 약 반년만에 종영되어 〈배트맨2〉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종영될 무렵에는 윌리엄 도저에게서 메모를 건네받았다고 하며, 그것에는 브루스의 말에 따르면 ‘공자 가라사대 초록의 벌은 두번다시 날개소리를 내지 않을지어다’ 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브루스 리의 계약금은 약 1,800달러이며, 출연 개런티는 주당 약 400달러에 달했다. 프로그램 종료후에도 각지에서 재방영되어, 어느정도 넉넉한 수입이 있었다고 한다. 안정된 생활을 바라던 브루스 리는 윌셔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헐리우드의 고급 주택지 벨 에어로 이사했다.
스티브 맥퀸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의 부동산을 매각한 돈으로 포르쉐를 구입했다.
1970년 어머니를 미국에 모셔오기 위해 홍콩으로 귀국한 브루스 리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 종영된 〈그린호넷〉으로 어떻게든 수익을 얻고자했던 20세기 폭스사는 홍콩과 동남아시아에 프로그램을 판매하여, 중국어로 더빙된 〈그린호넷〉으로 가토는 홍콩에서 일약 인기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골든 하베스트사와 계약을 맺게된 브루스 리는 스타덤의 길을 걷게 된다.
첫댓글 엑박이라니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