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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1일 아침 소묘
취중 소란과 소등(消燈)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긴 했으나 아무 탈 없이 아침이 왔다.
평소에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데 긴장했기 때문인지 더욱 그래서 늦잠이 들었다.
떠날 채비를 서두르다가 문득 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고도(古都) 레온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왜 삭막한 이미지인가(두번째 방문했을 때는
고약한 인심까지)
아마도, 이베리아반도라 해서 한반도와 다를 리 없는 급격한 산업화, 현대화 과정의
불가피, 부득이한 쇼크(부정적 부산물)일 것이라면 이 범부만의 소견일까.
이어서, 우리 8도인의 인성(기질)을 정리한 삼봉 정도전(三峰鄭道傳)과 청담 이중환
(淸潭 李重煥)이 생각났다(메뉴 <白岩斷片> 102번글 참조)
특히, 우리나라 인문지리학의 효시인 '택리지'(擇里志 또는 八域志)를 18c에 저술한
이조 영.정조(英正祖)때의 실학자 청담이 프랑스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기술했을까.
비는 그쳤으나 우중충한 이른 아침,
산 마르코스 광장(Plaza de San Marcos)을 겨냥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레온시의 외곽길인 파세오 델 파르께(Paseo del Parque)를 따라 투우장(Plaza de
Toros)을 지난 후 베르네스가 강과 나란히 간다.
시내를 관통하는 카미노와 합류점인 산 마르코스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사람 하나 없는 널따란 광장이 적막강산이었다.
장엄한 건물은 현재 고급 국영호텔로 운영중이지만 성 마가에게 봉헌된 고대수도원
이었으며 중세에는 레온의 17개 순례자 숙박소 중 가장 유명한 호스텔이었단다.
우리와 달리 우기가 봄철에 있으며 특히 갈리시아 지방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접경인 카스티야 이 레온에서 연 3일 비를 맞고 있다.
앞으로 비를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할지 걱정되는 아침이었다.
오락가락으로 변한 비가 베르네스가 강을 건너 께베도 거리(Avenida de Quevedo)
에 들어설 때 일단 멎었다.
그러나, 날씨에 대해서는 이 지역 주민들이 가장 잘 점칠 터.
비가 그쳤는데도 트로바호 델 카미노(Trobajo del Camino)에서 레온으로 걸어가는
이들의 손에 하나같이 들려있는 우산의 의미를 알만 하지 않은가.
트로바호 델 카미노는 푸엔테 카스트로처럼 레온 지근의 교외 마을이다.
육교를 통해 철길을 건너는데 레온공항을 떠나면서 무겁다는 듯 엄살떨며 요동치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가는 덩치 큰 여객기.
때마침 저만치서 심한 마찰음을 내며 산티아고 쪽으로 달아나는 열차.
저 놈들이 아침부터 늙은이의 맥을 잠시 약하게 했다.
감정이 둔한 사람처럼 걷기에만 열중하고 있지만 실은 집 생각이 뭉클뭉클 한다.
집에 전화하지 않는 것도 '무소식이 희소식'은 억지일 뿐, 심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릿매로 터 잡은 비르헨 델 카미노 교회는 성모의 약속
마음 가다듬고 본업으로 돌아갔다.
성 야고보(St. James)의 동상이 서있으며 야고보에게 봉헌되었다는 산티아고 암자
(Ermita de Santiago/작은 교회)를 지났다.
시라 산 페드로 광장(Plaza Sira San Pedro)도 지나고 길가에 있는, 마치 우리나라
광천(충남 홍성군)의 새우젖 토굴처럼 생긴 포도주 저장소(Bodegas)들도 지났다.
고갯길을 올라서면 뒤에 두곤 온 레온이 한눈에 들어온다.
긴 산업단지를 지나 주도로(N-120)에 진입하면 라 비르헨 델 카미노 가구거리다.
크게 자리잡은 중국인 관광상품점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은 없다.
이러다가 낙심하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와 에어콘을 비롯한 전자제품들은 눈에 익숙해졌으므로 적극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고 싶건만...
해발 900m대(919m)에 들어서 있는 라 비르헨 델 카미노(La Virgen del Camino)는
인구 4.300여명의 큰 마을이다.
비르헨(Virgen/성모)이 이 지방 목동 알바르 시몬(Alvar Simon)에게 나타나 레온의
주교를 찾아가 이 곳에 성모상이 있는 교회를 세우라는 자기 말을 전하라고 이른다.
주교가 자기 말을 믿겠느냐고 회의하는 목동에게 성모는 한 징표를 준다.
목동의 무릿매로 돌을 쏘게 한 후"그대가 주교와 함께 돌아오면 떨어진 돌이 바위가
되어 있을 것이니 그 곳에 교회를 세우도록 하라"고.
16c 초의 일이란다.
성모 마리아의 예언대로 교회가 세워졌고 1961년에 지금의 현대식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l Camino)로 개축되었단다.
개축은 포르투갈의 도미니시안 건축가 코엘루(Fray Francisco Coello)가 했다는데
서문(西門) 위에는 13명의 현대인 스타일 동상이 서있다.
조각가 호세 마리아 수비락스(Jose Maria Subirachs)의 작품이란다.
중앙에 높이선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산티아고를 바라보고 있는 야고보를 포함해
12사도가 양 옆에 서있다.
1927년 바르셀로나 출신인 수비락스의 작품"Monument Unio d'Orient i Occident"
(동서 연합의 탑?)가 1989년에 서울에도 들어왔다는데 알 길이 없다.
비르헨 델 카미노를 벗어나면 카미노가 또 3개로 갈라선다.
하나의 메인 길(principal)과 대체 길(alternativo) 2개로.
복수의 길에서는 프린시팔(추천루트)과 알테르나티보(대체루트)로 구분하는데 안내
책자마다 비중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늘 현지 간판을 따르는 것이 내 방식이다.
이 구간에서는 나뿐 아니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이 길로 집중했다.
내가 택한 길은 지하도를 통해 A-66고속도로를 건너가고 작은 동산에 오른 후에는
13km 이상을 N-120국도와 마냥 동행한다.
신설 개통된 A-71고속도로가 국도의 차량들을 흡수함으로서 한가해진 도로다.
새들의 보금자리 엔그라시아 교회와 페레그리노의 친구 아가피토
갈라진 후에 첫 번째 마을인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Valverde de la Virgen)의 산타
엔그라시아 교회(Iglesia de Santa Engracia) 종탑이야 말로 백로의 보금자리인가.
신도로 가득차야 할 교회 안은 텅비고 종탑과 지붕이 새들로 붐빈다.
그들의 둥지는 이제껏 보아온 것들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그들에게는 대궐에 다름
아닌 저 집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는 듯이 보였으니까.
저 집에서 알을 낳고 부화를 한 어린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물어오는 노동과 자식을
보호하는 일을 부모가 번갈아 하며.
참으로 의아스러운 것은 저들의 귀가 저 요란한 쇠북소리와 웅성거리는 미사과정를
어떻게 아름다운 선율로 순화시켰을까.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는 자장가 쯤으로?
반복의 효과?
처음에는 경련을 일으키며 달아났을 것이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무해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점차 적응이 되었고 사람이 하는대로
아멘을 하게 되었을 터.
다람쥐들이 통비닐 속에서 자고있는 내게 다가와 먹을 것을 나눠달라고 애교를 떠는
것처럼.
이제는 만일 종소리가 들리지 않고 미사가 없다면 오히려 무력감에 빠지고 살 맛이
없다고 비명일 수도 있겠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올려다 보며 해본 생각이다.
시에스타가 끝나기만 기다렸다는 듯 바르 앞 노천 테이블에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할 일을 두고 그럴 수 있겠는가.
매물로 쏟아져 나온 땅과 건물이 지천인데 짓다 만 건물도 종종 뜨인다.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스페인의 불경기를 의미하는데 오늘도 길가에 '세 벤데'(SE
VENDE/賣物) 판이 붙어있고 작업이 중단된 건물이 나그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외형이 거의 완성된 꽤 큰 규모의 아파트인데.
어찌 피안(남의 나라)의 일일 뿐인가.
조금만 더 걸어가면 산 미겔 델 카미노(San Miguel del Camino)다.
한 집 앞에 세요(스탬프)와 방명록이 있는 탁자, 사탕과 과자 등을 놓은 벤치가 있다.
순례자를 위한 집주인 아가피토의 배려다.
<순례자여, 여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순례자들의 친구 아가피토가 드립니다.
행복한 순례길이 되십시오
Peregrino, esto es para ti
Te lo da AGAPITO el Amigo de los Peregrinos.
Buen Camino>
건물 벽에 걸린 안내판의 글이다.
세요(sello)의 내용도
<순례길과 순례자의 한 친구가 순례길에서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Un amigo del camino y del peregrino te desea suerte en el camino.>
안내판에는
<200m만 더 가면 마실 물이 있다>는 안내가 재미나게 그린 그림과 함께 있다.
아가피토(Agapito Trigal Lopez)!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여러 날 계속해서 카미노를 걸어보면 신기로운 법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건이 있으면 곧 그 짐을 덜어주는 행운이 기다린다.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은혜로운 보살핌일까.
카미노가 갖고 있는 신비일까.
차도는 차량의 왕래를 위해 존재한다.
차량의 매연을 먹고 사는 무기체이기 때문에 차량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차량의 홍수를 이루던 국도가 신설 고속도로에 차를 다 빼앗기고 강등을 거듭하다가
끝내 기능을 상실, 도태되고 마는 경우는 우리 국내나 스페인이이 다를 리 없다.
로그로뇨 이후 지금껏 꽤 많이 만나거나 동행해온 N-120국도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국도가 성시를 이룰 때 만들어진 센다가 지금은 사실상 무의미한 구간이다.
12유로로 누리는 행복을 얕보겠는가
프랑스 길 18일째 되는 날 산 미겔을 막 지난 지점에서 한 기인을 만났다.
애완용 개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세 식구 페레그리노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이태리노라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었다.
희미한 말 발굽 자국으로 보아 간혹 말탄 순례자가 있는 듯 한데 내겐 그가 유일하며
훗날 마드리드 길에서 개와 함께 걷는 폴란드인 순례자와 교행한 적은 있다.
산티아고까지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하는 동안 가끔 그의 말 발굽 자국이 공헌하기도
했는데(애매한 데서) 한가로운 피스테라 길에서 다시 만나 바디 랭귀지로 알아냈다.
47세의 조반니니 라는 것을.
말을 타고 간다 해서 마냥 편한 것이 아님은 일장 일단의 이치다.
개의 배설때문에 멈추어야 하는 것은 휴식시간으로 간주하면 되지만 장기간 두 식솔
(개와 말) 먹이 챙기는 일과 밤에 숙소 정하는 일이 난제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지리하게 계속되는 차 없는 국도와의 동행이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aramo)에서 일단 끝났다.
C.P.산티아고 아포스톨(Colegios Publicos Santiago Apostol /사도 야고보학교?)
앞에 서있는 1999년산 카렌스(기아)가 어찌나 깨끗한지 주인 나오길 기다렸다.
라라소아냐에서 처음 국산차를 발견하고 흥분한 이래 차주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내가 한국 영감이라니까 젊은 차주는 그리 짐작했단다.
그는 눈치가 빠른가.
내가 묻기 전에 고장 없고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워 올렸다.
그의 엄지 따라 내 어깨도 으쓱대려는 듯 했다.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알베르게는 나그네가 피로를 풀기에 알맞는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호감이 가지만 지리적 위치가 애매하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레온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통과할 수 밖에.
마을을 관통하여 짧은 숲길을 벗어나면 다시 긴 센다가 이어진다.
수로(水路)까지 3개의 길이 모두 한가롭다.
농수용 소운하를 건너 얼마쯤 가다가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
입구에서 세찬 비를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지근에서 알베르게가 대기하고 있다.
저층은 비를 피해 미리 도착한 이들에게 돌아갔고 2층만 남았다.
내게는 더없이 다행스럽게도 매트리스(mattress)를 택할 기회가 왔다.
침대에 비해 2e나 저렴한 3e짜리다.
순례길에서 처음 이용하며 가장 싸게 자지만 가장 편한 밤이었다.
집에서도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침대를 거부하는 체질이므로.
이 산 저 산의 야영생활을 통해 굳어진 체질이다.
주인 부부가 주문 제공하는 9유로짜리 비프스틱 디너도 양과 맛에서 흡족했다.
"시장이 반찬"이기 때문이었을까.
특히 비를 맞아 후줄근해진 몸에 따뜻한 갈릭 스푸는 최고의 안성맞춤이었다.
아침과 점심은 어제 먹다 남은 햄버거와 빵으로 때웠으므로12유로로 행복한 하루를
만든 날이다.
단돈 12유로 짜리 행복이라고 얕보겠는가.
그렇다면 일당 120, 1.200, 12.000유로 짜리는 어떨 것 같은가.
행복이란 도량형으로 측정되거나 금액으로 환산되는 가시적 유체가 아니다.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 느낌이다.
이것을 객관화 하려 하는 것이 불행이며 그래서 불행의 반대 개념이 곧 행복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이란 그것을 느낄 줄 아는 자에게만 존재하는 신비다. <계 속>
파세오 델 파르께를 따라 투우장을 지난 후 베르네스가 강과 나란히 가면(위1~3) 산 마르코스 광장이다(위4~6)
베르네스가 강을 건너면(아래1) 트로바호 델 카미노 마을이다(아래2~5)
에르미타 데 산티아고(위)와 와인 저장고(bodegas/아래)
와인 저장고 뒤 언덕에 오르면(위1) 라 비르헨 델 카미노 마을이다(위2~4)
비르헨 델 카미노 교회(아래1~3)와 도미닠 수도회(아래4)
3개의 루트로 분산되는 카미노에서 이 길은 프린시팔이라고 소개한 길이다(위)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 마을(아래/ 아래3은 산타 엔그라시아 교회)
산 미겔 델 카미노 마을(위/ 위2는 아가피토의 집. 4는 이태리노 조반니니)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아래/ 아래2는 1999년산 기아자동차 카렌스, 3은 파라모 알베르게)
긴 센다를 지나면(위)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 알베르게(아래)
첫댓글 눈여겨 봐 둡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