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닮은 마을 시드물
문수산과 갈방산의 정기가 모여 깊은 계곡 따라 흐르고, 앞산 백운봉의 기상이 굽어보는 곳에 잔잔한 시내가 그림처럼 띠를 두른
마을에는 아늑하고 포근한 기운이 심신을 편안하게 한다.
1710년(숙종36)에 인근의 선비 45인이 모인 축수연이 시드물에서 열렸다. 송월재 이시선의 86세생신을 축수하는 자리에서, 송월재는 마을이름을 풍천(楓泉)으로 한다고 선언 한다. 물가에 신배나무가 있어 시드물이라 불렸던곳이 새로운 이름이 생긴 순간이다.
1594년 임진란으로 홀로되신 추만 이영기께서 풍기로 피난 오셨다가 유곡으로 장가 드시고, 여기 시드물에 터를 잡으시니, 이분은 태종의 아들 온녕군의 7대손이다. 문수산 아래 명당터에 강인한 개척정신과 높은 학문적 바탕은 후손들을 훌륭히 키우셨다. 아들 다섯분의 총명과 학문이 뛰어났다. 특히 송월재 이시선의 학문은 독학으로 영남뿐 아니라, 중국까지 알려지는 대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시드물은 풍천으로 불리면서 지리적으로 명당 이었고, 학문의 성취가 탁월했고 후진양성에 온힘을 기울여, 사덕정과 송월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과 배움을 실천적 자세로 행함에 모범을 보인다. 이런 정신이 시드물을 단시간에 인근 마을에 인정받는 아름다운 곳으로, 불미골, 명창골,갈방의 중심이 되고, 전주이씨들이 세거한후 400년. 이곳은 개척된 곳이다. 머루 다래넝쿨을 헤치고 들어와 작은 오두막에서 다섯 아들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를 위안 삼아 미래를 만들어간 곳이다. 그 결과 우뚝선 학문과 순절로 정려가 내렸고, 대과급제의 영광과 효우를 실천하는 가문으로 인정 받는다. 송월제의 제자에게 남겨주신 '불괴심'(不愧心). 부끄러워 하는 마음을 갖고 학문하는 것과 실천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이 전주이씨 가문의 정신적인 철학으로 이어져 왔다. 이면주 선생은 대과급제하고 활약 하시다가 1910년 한일합방 국치일에 음독자결하신 충신으로 국민훈장을 받으셨다.
시드물은 얼마전까지도 앞산 백운봉에서 소만일에 참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는 모임을 가지는 낭만도 있는 마을. 지금도 불천위 세분을 모시는 제사와 문중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
법전의 여러 마을과 문중이 그렇듯 시드물도 전주이씨의 가문역사로 이루어져 왔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전통문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지금, 시드물도 새 기운을 맞는다.
시드물은 과거 학문과 효우가 아름다운 곳 이었다. 그 전통을 되찾고 돌아볼 시점이 되었다. 산업사회에 밀린 전통은 지켜져야 할 귀한 정신이다. 그것에 관심 갖게 되면 알게되고, 알면 그때 아는것은 그 전과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