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은 2017년 9월6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다. 구례에 있는 운조루 고택과 곡전재,압화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 구례를 찾았
다.먼저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운조루 고택을 들려 돌아본다. 운조루 고택은 남한의 3대 명당 자
리라 한다.
운조루 고택 앞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운조루 고택 앞 연못.
구례 운조루 고택(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
원래 이름은 '구례 운조루' 였으나, 2017년 지정명칭 부여지침에 따라 '고택'을 추가하여 '구례 운조루 고택'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이 집은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
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남한의 3대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
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九萬
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
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
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위성류(나무이름).
중국에서 선물로 받아 심었다고 함.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
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
기 때문이라고 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 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운조루에서 가까이에 곡전재가 있습니다.
곡전재(전남 구례군 토지면 곡전재길 15-2).
곡전재는 조선 후기 전통 목조 건축물로 부농의 민가 형식으로 지어진 한옥입니다.풍수지리상 천사의 선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이라 하여 '금환락지'라고 하는 위치에 지어진 집이며 기둥과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게 특징입니다. 곡전재는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택 관광 지원화 사업의 대상이 되어 현재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4채를 펜션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구례에서 유명한 고택은 1776년에 세워진 99칸 양반가옥인 운조루지만 금가락지가 떨어진다는 명당에 자리한 부농의 집 곡전재
가 조금 더 멋스럽습니다. 집안에 연못도 있고 작은 정원도 있고 2층 누각으로 지어진 대문은 운조루의 넓은 공간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1929년에 건립된 곡전재는 조선 후기의 전통목조가옥으로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석가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
은 것이 특징이며, 2층 누각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정원이 보이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춘해루가 나오며 그 앞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민박도 겸하고 있어 하룻밤 정도 지내보기에 좋은 곳이다.
구례압화박물관(전남 구례군 구례읍 동산1길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