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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거름으로 피우는 마음 꽃 한 송이
-2019 오하룡 시선집 『母鄕 失鄕 그리고』를 읽고
이 달 균(시인)
별향別鄕, 그 아이러니의 여백
오하룡 시인의 시선집 『母鄕 失鄕 그리고』를 읽었다. 선집은 걸어온 시력의 일단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창작 50년이 넘은 시인의 시세계를 개괄적이나마 살펴보려 한다. 하지만 한 시인의 시세계를 불과 원고지 몇 십 매로 요약해 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랴. 시의 속성이 은유와 상징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고, 다양한 체험을 통한 심상의 형상화 역시 다의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행간 속에 감춰두고 상상의 진폭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오하룡 시인의 경우는 좀 특별해 보인다. 시인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관통하는 시어 하나를 꼽는다면 ‘고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의 고향 정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향수와 동심, 타관에서 느끼는 커튼 너머의 파스텔조의 미화된 대상으로서의 고향은 아닌 듯하다. 다른 제호의 시집은 제쳐두고라도 『母鄕』, 『別鄕』, 『창원별곡』 같은 시집들에서 느껴지는 고향은 푸근한 당시의 지점으로 귀향하고 싶은 열망과 희구가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마음마저 돌아갈 곳 없는 실향의 이미지로 굳어있다는 점이다.
한국문학에서 실향, 귀향, 탈향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일본의 압제, 한국동란, 분단 등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장에서 비롯된 것과 둘째,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가는 동안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로 대별된다. 물론 전자의 경우만 해도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고려인 강제 이주 같은 지평이 확장된 별향, 북한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이데올로기가 빚은 탈향 등이 그것이다. 그에 비해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실향의 단면 혹은 자화상들이다. 갑작스러운 산업화로 인해 이농에 이농을 거듭하면서 높아만 가는 아파트의 층수를 세는 도시인의 허무와 상실감이 또한 그것이다.
오하룡 시인의 실향정서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가 구현한 ‘모향’은 태아가 느끼는 어머니 뱃속, 그 원형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심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탯줄을 타고 되돌아 갈 수 없는 한 자연인으로서의 빈 손짓이며, 주지하듯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잉태된 또 다른 결과물이 바로 ‘별향’이라 하겠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시인의 고향은 창원인데, 이곳에 돌아와 산 세월이 벌써 40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모향과 별향의 정서는 어찌된 것일까. 어쩌면 그 아이러니의 여백을 찾아가는 것이 오하룡 시인의 시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듯하다.
2. 상실의 도시, 창원
모향母鄕은 내 안에 생생하다
거리를 두고
굳어진 표정으로 비치다가도
꿈속처럼 휭 하니 다가오면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만다
어스름이 내리고
발자국 일제히 멎어버리고
동그마니 그 집이
내 곁에 오면
내 눈은 적적히 멀어 버린다
-「모향母鄕」 전문
여기서 ‘그 집’은 실존하는 집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 곁에 오면/내 눈은 적적히 멀어’ 버리게 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은 끝내 꿈속에서나 휭 하니 다가올 뿐이다. 그런 날은 무슨 일이 손에 잡힐 것인가. 돌아와 옛 마을에 섰으나 아는 이 하나 없고 낯익은 자취도 없다. 카레이스키나 탈북민의 탈향이 아니라 모성의 고향을 잃은 상실감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 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단이 어쩌다 지나갔다
상남은 어쩌다 눈을 떴다
인심이나 옛날같이 좋아질 거나
거리라도 말끔히 새로울 거나
연유야 어떻든 떠나간 사람이나
돌아올 거나
집집에 복덕방을 차려놨다
부자와 재벌을 차려놨다
천당과 극락을 차려놨다
어쩌다 지옥도 차려놨다
공단이 어쩌다 지나갔다
어쩌다 우리 모두 지나갔다
-「경로經路」 전문
이 시는 오늘날 거대한 산업도시 창원이 만들어지는 80년대 당시를 그리고 있다.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현재의 창원을 보았으므로 이 시를 읽으면 “그래서 어쩌라구...”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네 번이나 반복되는 ‘어쩌다’는 영문도 모른 채 삽시간에 변해버린 고향을 바라보는 시인의 푸념이다. 공단이 들어서기 전 창원은 넓은 들판을 가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정병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남천을 따라 합포만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이 물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으며 대대로 살아왔다. 들판 가운데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옹기종기 낮은 집들이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자란 시인은 성장하면서 타관으로 나가게 되고, 성장점이 멈춘 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곳은 내가 알던 예전의 그곳이 아니다. 마을과 논을 갈아엎고 공단이 들어서면서 늘어나는 것은 복덕방이요 신작로를 따라 빌딩들이 들어선다. 어쩌다 보니 있는 이와 없는 이로 나뉘고, 천당과 지옥으로 나뉘는 현실을 보고 있다. “왜?”라고 묻기도 전에 ‘어쩌다 우리 모두 지나갔다.’ 미처 상실의 빈 가슴을 매만지기도 전에 산업사회는 농경의 추억마저 매몰시키고 만 것이다.
새벽공기는 얼마나 정결淨潔한 빗질을 하며/소복소복 차려놓은 저 눈부신 업적들은/어떤 의미로 빛을 내는가를/그 빛나는 것을 향해 다짐한다는 것이/얼마나 얼마나 공허하게 하늘가를/맴돌던가를 귀 대고 듣고 있다-「종鐘소리」 부분
『母鄕』에서 바라본 변화된 고향은 서정의 노래로 치환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도시의 그 생경한 변화가 시행의 결을 고르는 것보다 산문화시켜 드러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란 판단을 한 듯하다. 사실화는 상상력의 창을 통해 보여주기보다 사진처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그에 비하면 인용한 위 시 「종鐘소리」는 서정의 결을 오롯이 갈무리한 시편이다. 산업화의 민낯을 말할 때는 직접적인 토로를 하였지만 ‘종소리’를 듣는 시간은 경건한 목소리로 내밀하고 내면화 된 관조의 시를 완성해 간다. 아쉬운 것은 초기의 이런 시편들이 선집에 너무 적게 실려 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화로 변한 현실을 노래하는 것만큼 내밀하고 정제된 시인의 심상이 발현되는 모습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3. 팍팍한 삶을 전하는 전령사
잡초의 생각으로도
우선 땅이라도 많이 차지해야겠다
결심했는지 몰라
불도저 캐터필러 자국이라도
지워야겠다는 일념이었는지도 몰라
먼지를 동원해서라도
눈 못 뜨고 쩔쩔매는 꼴
보고 싶었는지 몰라
농사나 짓게 둘 일을
얼마나 아까운가 속 앓아봐라
푸념 삼아 기 쓰고 설치는지 몰라
-「잡초의 생각으로도」 전문
잡초는 조금만 한눈팔면 금방 평수를 늘인다. 사람들은 자꾸 ‘불도저 캐터필러’를 불러 콘크리트로 뒤덮고, 잡초는 한사코 그 흔적을 지운다. 이 시는 사람과 풀의 생태를 잘 보여준다. 인간은 개발이랍시고 자연을 폐허로 만들고, 잡초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원시로 돌아가게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정작 지구를 살리는 것은 잡초들이다. 사람은 신작로를 내고 빌딩을 올리는 일을 최선이라 하고, 잡초는 그 최선의 노력 위에 덤불을 이뤄 과거를 재생시킨다. 둘 다 살기 위해 하는 짓이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지구는 이 충돌을 거듭하면 나이를 먹어간다. 가공할 인간의 위력 때문에 현재는 인간이 이기고 있지만 지나치게 거대해지면 다시 멸망의 길을 걷는 것는 당연한 이치다. 벌이 없어지면 인간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고 한다. 고대의 첨단 유물들은 현대의 과학으로도 다 밝힐 수 없음을 본다. 그것은 바로 인류 역사는 돌고 돈다는 가설을 증명해 준다. 창원은 들이 넓은 농경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도시로 꼽힌다. 시인의 고향은 이렇게 변해 버렸다. 시인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허접한 잡초만은 한사코 그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몸짓을 보여준다. 어쩌면 과거로의 회귀 혹은 재생은 잡초에게 맡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괴기 사이소
폴딱폴딱 뛰는 괴기 사이소
웅천 수도 밤 안 자고 온
괴기 사이소
창원 진동
횟거리 도다리 사이소
국거리 꼼장어 사이소
쎄비, 낙지, 문어
모두 모두 싸게 사이소
보채대는 젖먹이 울음 사이소
이래 괴기 장수 시키는
못난 가장 처세술 사이소
쎄 빠지게 일해도
밥 먹기 힘든
이 세월 사이소
-「괴기 사이소」 전문
이 광경 역시 지난 연대의 모습이다. 어시장에서 떼 온 신물을 용달차에 싣고 이 골목 저 골목 확성기로 외치던 잃어버린 시대의 정겹고 힘든 우리네 이웃들의 풍경화다. 밤 잠 못자고 새벽에 창원 진동이나 진해 웅천 등의 어판장에서 생선 사온 부부는 종일 도시를 돈다. 파는 것은 비린 생선만이 아니다. 보채는 젖먹이 울음이며 못난 가장 처세술, 밥 먹고 살기 힘든 세월도 판다. 이런 시어들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이 시는 그냥 시의 형식을 가진 언어의 나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어들로 인해 서민들의 팍팍한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가 지난 연대를 노래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의 것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 용 나는 곳에 용 나고, 가재 나는 곳에 가재 나는 등식은 갈수록 공고해 진다. 흙수저의 삶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쎄 빠지게 일해도/밥 먹기 힘든’ 괴기 장수의 아이는 ‘보채대는 젖먹이 울음’으로 대물림되고, 다시 못난 가장이 되어 괴기 사라고 외치는 미래가 예견될 뿐이다. 송곳 하나 꽂을 땅 한 평 갖지 못한 소작쟁이들의 변화된 모습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그런 사실성은 다음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내 항시 무슨 사색가나 되는 양/무거운 표정 하고/ 때 묻은 책 나부랭이 속에 파묻혀 있다 하여/과연 시인은 다르구나 여기지 말라//내 말 속에 좀체 죽음이란 말/담지 않는다 하여 거기에 대한/무슨 초월적인 자세라도 갖춘 양/여기지 말라 -「무제」 부분
시인은 결코 희로애락과는 거리가 있는 초월적 존재도 아니고, 미래의 길을 인도하는 예언자가 될 수도 없다. 그저 오늘 내 삶을 전하는 전령사이고 싶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깊은 심안을 드러내어 철학적 말씀으로 포장된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오하룡 시인은 이 부분에서만은 솔직해 지고 싶은 것이다. 사색, 죽음 같은 포장된 말들로 고상한 척 하지 못하는 촌놈기질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런 마음을 진정성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평가는 흔히 역경의 극복을 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시를 비판한다. 그러나 오하룡 시인은 그런 상투적인 희망을 전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에 주안점을 두고 싶어 한다. 아픔이든 절망이든 그 사실성이야 말로 시의 생명을 견지하는 무기임을 무겁게 인식한 때문이 아닐까.
4. 지난 연대의 풍경화 혹은 우리시대의 자화상
그의 이농 혹은 실향 정서는 시집 『별향』에 오면 회상 시편들이 늘어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미 회기 할 수 없는 모향은 어떤 모습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향 역시 정지용의 ‘향수’처럼 아름답고 푸근한 농촌 풍경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소출을 걱정하고, 농한기를 걱정해야 하는 살풍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농사철 끝났다
농한기 어떻게 보낼거나
올해는 취로 사업장이
어디서 벌어질거나
땔감이나 하고
거름이나 져내고 해 지우긴
너무너무 따분하구나
그놈의 잔손질 무섭지만
촉성채소나 가꿔볼거나
올해는 기름값이
들먹거리지 않을는지
어느 해 같이 난동暖冬이나
기대해 볼거나
-「농한기」 전문
어떤 독자들은 오하룡 시인의 잃어버린 고향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 소들 한가로이 풀 뜯고, 목동 피리 소리 들리는 목가적 분위기의 농촌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 서 말했듯이 시인은 사실성에 포커스를 둔다. 농사철 끝낸 젊은 농부들은 농한기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이 앞선다. 그저 ‘거름이나 져내고 해 지’울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취로 사업장’에나 나가볼까. 아니면 하우스 치고 ‘그놈의 잔손질 무섭지만/촉성채소‘나 가꿔볼까 등등 현실적인 고민이 많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이런 걱정 많은 곳이 바로 시인의 시선이 고정된 고향의 모습이다.
그가 눈길 주는 연민의 대상은 이렇게 표현된다. 앞서 가는 젊은 농군들은 컴퓨터로 농사짓는데 내가 아는 이웃들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해도 ‘아침저녁 손 호호 연탄 갈고 환기창 여닫고’ ‘십 년 되어도 이십 년 되어도/이 방법 뜯고 짓고 주먹구구 이 방법’(「주먹구구식」)밖에는 도리 없는 이들이다. 한마디로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시인도 이들이 편한 모양이다. 문제는 이들이 떠난 고향을 그도 떠나와 별향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을 떠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그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길래
진정으로 반가워 얼른 손을 덥석 잡으나
그는 별로라는 표정 띠며 마지못해
손 내미는 척하거든 눈치채야 합니다
나는 그를 참으로 찌든 농사꾼 벗어나
허리 펴고 살 도시 사람 된 것 다행스러워
벌쭉 웃으나 그는 덤덤한 눈길로
되받으면 얼른 알아채야 합니다
내가 아는 그는 참으로 얌전한 선비 같아서
허튼소리는커녕 농담 한마디 모르는데
약간 주기가 있기는 하나 육두문자
질퍽하니 쏟거든 깨달아야 합니다
-「이주민·2」 전문
그의 마을은 공장지대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웃들은 모두 타관으로 떠나거나 이주하여 도시민이 되었다. 오랜만에 길에서 만나 ‘참으로 찌든 농사꾼 벗어나/허리 펴고 살 도시 사람 된 것 다행스러워’. 손 덥석 잡았으나 그 반응은 영 덤덤하다. 이 옷은 내 옷이 아니라는 듯, 황망히 떠나면서 취기에 의지하여 어색한 ‘육두문자 질퍽하니 쏟’아내며 뒷모습만 보인다. 시인은 한참을 그 모습 보고 있었지만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 그 자연스럽지 못함을 아둔하게 그가 떠난 후에야 알아챈다. 고향에서 느끼는 이방인 정서는 시집 『창원별곡』에서만 봐도 여러 시편에서 나타난다. 대충 일별해 보아도 「공감」, 「재수여 가라」, 「남천에게」, 「천성」, 「무심하기 연습」 등이 그렇다.
그래 그 모습이다 저 옆으로 보이는
남북 대좌하고 앉은 양쪽 장교의 옆얼굴
어디서 본 얼굴이다 저 얼굴도
아직은 젊고 패기차지만 그 보다 더 젊고
더 패기 찬 얼굴 얹어보면 보이지
우리들의 얼굴 아니 우리들이 일찍 잃어버린
저 전쟁에서 아차 하는 순간 놓쳐버린
그리우나 인제는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우리들의 큰 형님, 둘째 형님, 이웃집 아저씨
아니 우리들의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아니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저기 회사에서
막 돌아와 모자 벗으며 싱긋 웃고
저 들판에서 흙 묻은 신발 툭툭 털며
축담에 당당히 올라 설 우리들의 기둥들
그 기둥들 지금은 폭삭 늙었겠지만
그러나 다시는 그렇게 허용될 수 없이
넋이 된 우리들의 그리운 얼굴들
가만히 보라 지금 신문에 난 사진들
지금 화면에 비치는 저 모습
남북 장성회담 광경이란 이름 달고
대좌하고 앉은 저 남북 장교들 모습 보라
이제 환영으로나 만나는 그리움을 보라
-「그리운 환영幻影」 전문
시인의 자아 찾기는 『내 얼굴』에 오면 ‘나’라는 개인은 더 사회적인 혹은 더 역사적인 대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저 옆으로 보이는/남북 대좌하고 앉은 양쪽 장교의 옆얼굴’은 매우 낯익다. TV에 나오는 남북정상회담장에 앉은 이들은 나를 닮았을 뿐 아니라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우리들의 큰 형님, 둘째 형님, 이웃집 아저씨/아니 우리들의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아니 우리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어린 날의 힘겨움, 실향, 그리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만난 이방의 정서로 귀결된 ‘내 얼굴’은 북측 대표들에게서도 공히 나타난다. 그들이 사는 평양 또한 뭐 그리 낯익은 곳이랴. 논밭은 다 갈아엎어져 인공기로 덮이고, 옛집이 있던 곳엔 거대한 동상이 들어 서, 옛 정취 사라진 시내로 변모되고 말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이런 그로데스크 한 이미지는 남과 북 모두가 공동으로 경험하는 낯선 세계인 것이다. 그 낯선 도시, 낯선 역사를 사는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름 좋아서인가/아무도 아무개의 아재비도 그 여편네도/그 이름 문제 삼지 않는다/거기 들락대는 연놈 문제 삼지 않는다 -「러브호텔」 전문
그렇게 닮아가는 우리들, 그러므로 누가 누굴 탓할 것인가. 네 삶은 네 것이고, 내 삶은 내 것일 뿐이다. 이 선집 전체를 통털어 ‘연놈’이란 쌍스러운 말은 단 한 번 나타난다. 위에 밝힌 바대로 오하룡 시인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시에서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런 직접적인 토로가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할 말은 하는 원로로서의 발언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5. 황혼에서 만난 반가사유상의 미소
그냥 무료히 꺾인 날들
무슨 일이 스쳐갔더라
새벽은 그냥 열리고
문을 나서면 허허 들판
어디더라 거기가 어디더라
방향을 잡으니 그 방향은 아니고
젊음은 파릇하게 스치나
노년은 어둡고 스산하여
헤매다보면 환영幻影 뿐
다시 낯선 허허벌판
어디더라 거기가 어디더라
혼미해지는 막막한 방향
-「방향方向」 전문
실향과 탈향의 시간을 감내한 후에 펴낸 시집 『몽상과 현실 사이』, 『시집 밖의 시』에 이르면 시인의 시세계는 더욱 내면화 되고 결이 순해진다. 냇물은 소리가 크지만 강물은 소리가 없다. 대부분 젊은 날의 시는 덜 정제되어 나타난다. 세월은 시의 결을 발효시키고 주의주장의 목소리를 낮추는 동시에 의미들을 행간에 감추면서 익어간다. 그런 과정은 오하룡 시인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어느 날 문득 생의 한 교차로에서 걸어온 날을 돌아본다. 뭐 그리 특별한 기억도 없이 황혼에 닿은 것이다. 다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걸어갈 길은 다시 막막하다. 길 잃고 헤매다 여기까지 왔다지만 헤쳐 갈 미래 역시도 혼미하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았어도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물음표일 뿐이다. 인생은 나침반 없는 항해, 그 미지의 방향을 살아 온 날만큼 길어진 더듬이의 촉수로 살펴갈 것이다.
비할 바 없이
곱다
보이지 않으면서
피는
마음꽃
너에게 안겨주고
나도 받고 싶다
-「마음꽃」 전문
이제 시인이 키우고 싶은 꽃은 ‘마음 꽃’ 한 송이다. 그 꽃은 보이지 않는다. 빛깔도 향기도 모른다. 비할 바 없이 고운 마음 꽃은 내가 주고 싶은 꽃이고, 또 받고 싶은 꽃이기도 하다. 문득 스치다 환영처럼 왔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끝내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엔 그 꽃 한 송이 피워내고 싶은 것이다.
할아버지 한 분
자애慈愛로운 표정이었습니다
자꾸 그에게 눈이 가는 걸
어쩌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반복하며 조는 것 같기도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움직이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내 지척에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반가사유상」 전문
선집 전체를 정독하면서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었다. 변혁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자애로운 눈빛을 잃지 않은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자화상에 다가간 작품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난 노인은 타관을 떠돌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낯익은 듯 낯선 한 노인이라고 가정할 수 있겠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노인을 스쳐 지나다 그 얼굴에서 반가사유상을 본 것이다. 그가 만난 반가사유상은 한 노련한 공예가의 손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후에 세상을 보는 눈이 평화로워 진 이웃 할아버지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깊은 사색에 잠긴 얼굴이 아니며 존재의 극점에 선 눈빛도 아닌, ‘가끔 고개를 숙였다가/다시 반복하며 조는 것 같기도/미소 짓는 것 같기도’한 ‘내 지척에 있’는 노인에게서 문득 발견한 반가사유상, 우리나라 고대 조각의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작품인 만큼 시도 매듭 흔적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렇게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오하룡 시인은 한국문학사에서 공단건설로 인한 이농과 실향, 그로인한 상실감과 갈등을 가장 직접으로 그려낸 시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창원이란 무대를 통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가는 전환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쓴 결과물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실향과 탈향의 시간을 감내한 후에 만난 반가사유상은 마음 꽃의 또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실향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내 가슴에 품은 고향으론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시인이 두고 온 고향은 시집 속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독자들은 시인이 방부처리 한 추억의 편린들을 즐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시인은 독자와 함께 행복하게 늙어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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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균 시인은 87년 시집『南海行』과 《지평》으로 문단활동시작 하여
시집『늙은 사자』,『문자의 파편』,『말뚝이 가라사대』,『장롱의 말』,『북행열차를 타고』,『南海行』등이 있고, 시조선집 『퇴화론자의 고백』이 있으며 현대가사시집 『열두 공방 열두 고개』,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다.
중앙시조대상 및 신인상, 조운문학상, 이호우 이영도 시조문학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경남문학상,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마산시문화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출처: [도서출판 경남의 블로그: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