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씹어야 한다
사람은 흔히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어려웠던 환경일수록 그립고 미화되어 새록새록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실제로 그 당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라하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고향친구 만나면 자연스레 소시적에 고무신 신고 보자기에 책 싸들고 학교다니던 시절로 돌아가 ‘야 임마 너는 쬐그마했던게 이제 나보다 더 컸네’하면서 아들 딸 얘기부터 손주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 나도 모르는사이 수염만 없고 팔자걸음만 안 걷지 예전 노인들 수준이 되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며 무작정 상경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주 부잣집 아니고는 어려운 가정일수록 그런집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성공해서 명절이면 자가용타고 내려와 자랑하곤 했던 것이 엊그제같다.
그렇게해서라도 늦게나마 고향찾고 친구찾는 얘들은 맘적으로나마 여유가 있는 것이고 그도 절도 아닌 영영 소식이 끊기거나 이미 저 세상으로 간 녀석들도 여럿 있다.
나이들수록 며칠전 일은 잘 기억이 안나 건망증인지 치매초기증상인지 구분 못하는게 우리네 삶인데 나도 마찬가지인지라 곧잘 뜬금없이 예전일이 상기되는 경우가 있다.
다는 기억못하니 가능하다면 메모지에라도 얼른 적어놓는 습관을 가지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생각난다는 것이 좋은 일이다.
특히 기억되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다. 그때는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실과 음악 미술 체육과목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전과 책보며 낱말 준말 본디말 비슷한말 반대말 숙제하고 속담 이솝이야기 옛시조가 생각나고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이라는 구절도 생각난다. 한자를 배우기도 하며 숙제도 많이 내주었는데 시험지도 여러장 풀어오라는 통에 다음날 학교에 와서도 다 마치지 못했다. 그런데 옆자리 재윤이는 세 번씩 쓰라는 한자를 나보다 많이 쓰려고 두 번 쓰고 다시 교과서의 한잣말을 앞에서부터 조금쓰다가 그치고 나는 일부러 두 번째 쓰는 마지막부분을 몇 개 남겨놓아 호랑이 윤경중선생님의 숙제검사를 받게 되었다.
결과는 재윤이가 더 혼났다. 대나무뿌리로 만든 회초리로 많이 맞은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속인 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회시간에는 우리나라지도 세계지도 걸어놓고 지명찾기 시합같은 것도 하고 특히 우리나라 역사공부와 시험지풀이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식으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시대와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고려 조선의 왕조를 순서대로 외우고 모든 역사를 사건위주로 연대별로 달달 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보니 체계가 있고 지금도 역사에 흥미를 갖게 해준 동기가 되었다.
그사이 중국의 하 은 주시대를 거쳐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 한나라 수 당 원 명 청조까지 배워야 했으며 중국은 통일국가가 되고자 할때부터 통일이 되면 반드시 우리를 쳐들어왔고 최근 1950년도에도 압록강건너와 전쟁을 치렀다. 일본의 역사는 백제시대 천황가와 백제부흥운동 등과 잦은 왜구들의 노략질과 삼포왜란부터 각종 왜란과 식민통치외에는 거의 배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또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승리하고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어 무서울 게 없는 일본을 견제하기위해 구미제국들과 통상수호조약을 맺어 외교력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애국선열들의 노력, 많은민족종교들이 탄생했으나 시대적 상황을 통찰하지 못한 쇄국정책의 결과는 처참했다. 문화는 융성해서 일본에 전파해 주었어도 청나라 손아귀 벗어나니 일본이 더 호시탐탐 노리고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수모를 겪고 지금도 한시도 맘 놓을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는 긴장을 하면서 예전 구호대로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해야 살아남는다.
그러다보니 부국강병을 해야 반도국가의 숙명을 벗어나 오히려 경제영토를 넓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역사를 억지로라도 배운덕에 오늘날에도 현 상황을 지난역사에 반추시켜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시간에는 태양 지구 달의 모형을 가지고 설명해 주시고 칠판에 춘분 하지 추분 동지가 생기는 이유와 공전 자전을 통하여 적도 남.북회귀선 영국의 표준시와 우리나라의 표준시가 동경 135도로 정해졌다는 것도 알았고
음악은 중학교입시관계로 금관악기 목관악기 들먹이는데 실제로는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고 음악책 첫 페이지 대한의 노래부터 옹달샘 슈베르트 베토벤자장가 금강산 초록빛바다 반달 고향의 봄 보름달 나뭇잎배 등 등 그리고 맨 마지막에 구두발자국까지 계이름 음표로 외우기를 한 덕에 집에서 가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취미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고마워하는 대목이다.
실과시간에도 밥상차리기부터 바느질하는 것 무조건 외워야 하고 여름방학무렵부터는 날마다 시험보고 채점하고 혼나고 하는게 일상이었다.
전깃불도 없는 교실에서 정말 열정을 가지신 당시 총각선생님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훌륭한 스승님이시다.
아마 우리모교를 졸업한 동문들 대부분이 가장 기억하는 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선생님도 사범학교시절에 안중근의사역할의 연극을 하셨다며 의리의 사나이였는데 이제 키도 목소리도 작아지시고 힘도 없으신 것 같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시고 아는사람 손들라 하실 때 몰라도 손을 들어야 했다. 안들면 그것도 모른다고 때리시니까. 그러나 일단 들고 있으면 나는 시키지는 않았다. 그것도 선생님을 속인 것이다.
이제는 한번씩 찾아 뵙고 몇몇동창들과 식사대접하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우리가 보호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본다.
우리모교가 지난해 개교 60주년이 되었다고 하여 총동문회장인 진호친구가 여러동문 선후배들의 협조로 잘 치르고 이제 진갑나이를 먹었다.
모교가 혁신도시와 만성지구개발로 중동 혁신도시내로 신축이전하였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전주시내 변두리에서 폐교직전의 학교가 가장 규모와 시설 교직원 학생수에서 최고의 자리를 잡았다.
1956년 1월5일 인가나면서 졸업생 57회까지 3,292명 현재 교직원 80명 41학급 1,160명의 학생인 것이다.
예전 우리가 다니던 교정도 인권센터와 공립유치원이 들어서서 입학하기위해 경쟁이 치열한 교육시설이 되었다.
하여튼 엊그제 같은데 산천도 변했고 인걸도 흩어져 영원히 떠난사람들도 생길정도로 역사가 숨쉬는 모교가 되었고 올해도 벌써 석달남짓밖에 안 남았다. 나도 오래 살고 있구나 하는 상념에 50여년전으로 돌아가 추억에 잠겨본다.
2017. 9. 17 김 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