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수의 카자흐스탄 견문록 - 신뾰뜨르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노래
신뾰뜨르 할아버지(82)를 만나 뵈웠습니다. 국가집이며 청대인 아파트가 아니라 땅집(단독주택)이라 아무래도 찾아갈 자신이 없어, 알마티 감리교회 앞으로 나와주시라 부탁했더니, 10분전에 오셨습니다. 교회 부근인 줄 알았더니 버스로 네 정거장이가 가는 곳이라 죄송했습니다. 걸어가면서 녹음을 시작했는데, 우리 할머니가 평산 신씨라고 했더니 같다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어디 가도 못 말리는 우리 민족의 문화입니다.
할아버지는 원동 탄광촌에서 살다가, 강제 이주 때 카작스탄의 탄광촌인 카라간다에 왔다가, 크질오르다를 거쳐, 병충해 퇴치 기술 때문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일하다가, 다시 알마타로 와서 지내다 은퇴한 분이었습니다. 크질오르다에 있을 때 결혼한 첫째 부인은 혼혈아였는데 두 아들을 남기고 병들어 세상을 떴고, 알마티에 와서 다시 만난 고려인 부인과 자녀 없이 단둘이 살고 계셨습니다. 사는 형편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농업기사로서 가는 곳마다 활약을 많이 해, 소련정부로부터 받은 열너덧 개의 훈장을 받았다며, 자랑하셨습니다.
주로 러시아 사람이나 카작 사람과 함께 일하느라 러시아어와 카작어를 더 많이 써서 한동안 우리 말을 잊었으나, 형과 누나가 사는 알마티에 와서 지내면서 다시 우리말을 찾았고, 교회와 합창단, 노인회(고려인 및 전체) 활동을 하느라 분주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게 구연해 준 이야기는 원동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인상깊게 기억한 셈이니, 아이들에게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이따냐 할머니가 구연했던 <여자에게는 비밀을 말하지 말아라> 이야기가, 자기가 들었던 것과 약간 다르다며 구술하셨는데,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개성을 지닌 각편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돌짝밭 일구는 과정에서 실수로 죽인 이웃집 아이를 파묻은 비밀을, 아들 부탁을 따라 아내한테 발설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토로했다가 나중에,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아내가 홧김에 그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아이의 부모가 알게 되었다는, 큰 줄거리는 같았으나 약간 달랐습니다. 그 현저한 차이는, 비밀을 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이를 매장한 지 여러 해가 흐른 후, 밭일을 하던 남편이, 샛밥을 내와 아이 묻은 돌무더기 위에 놓자, “다른 데서 먹자”고 하며, 그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그만 발설하였다는 대목은, 이따냐 할머니의 각편에는 없던 내용이었습니다. 좀더 상세히 비교 연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듣고 기억하기에는 좀 무섭기까지 한 모자간의 불륜 이야기도 구술했습니다. 그리이스 비극 <오이디푸스>를 연상하게 하는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은 러시아 이야기라고 했지만 분명히 우리 동포에게 영향을 준 이야기이므로 동포 구비문학으로 포섭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모티프를 가진 우리 작품과 비교하고 그리이스 비극과도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뽀뜨르 할아버지는 다른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젊을 때 들었다는 <양산도>를 비롯해 민요 서너 곡을 불러주셨습니다. 흥겨운 노래 가락에 나도 즐겁게 어깨를 들먹이며 들었습니다.
점심 때가 되었다며 차려주시는 밥과 된장국, 닭고기, 치즈, 소시지, 집에서 가꾸신 방울토마토와 고추 요리와 오이무침을 맛있게 먹으며, 러시아와 카작스탄과 우리의 문화적인 차이와 동질성에 대해 질문해 의문을 많이 풀었습니다. 큰절은 우리만 하는 문화였습니다. 장유유서 따지는 것은 카작과 우리가 같은 점이었습니다. 생일이라든가 혼인 때 여러 사람 초대하는 것이며 그때 빈손으로 안 가는 것도 카작과 우리의 같은 점이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족과 친척 위주로 치른다 했습니다.
첫댓글 교수님께서 느끼신 것처럼 장유유서가 있는 카작민족이니...현지에 오셔도 윗사람들은 한국에서 처럼 대우를 해드려야 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