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지났지만 작년 2006년에 읽은 소설 중 개인적으로 좋았던 10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1위. 원효: 한승원
언젠가 얼핏 이런 말을 들은 것 같다. 한국에 존재했던 모든 사상가를 다 합쳐도 원효 한 분을 이길 수 없다는 대충 그런 말이었다. 얼핏 어디선가 스치면서 들었기 때문에 출처는 당연히 모른다. 어쨌든 그런 위대한 원효 대사의 일생과 만나는 것은 나에게 퍽 흥미롭고 진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작품 안에서 묘사된 원효 대사는 철저한 반전주의자이다. 삼국이 치열하게 하나의 국가로 합치려고 온갖 살육을 저지르는 혼탁한 시대에 원효는 대담하게도 삼국 평화 론을 외친다. 피 흘리며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것 보다 피 흘리지 않고 삼국을 온전히 그대로 보존하자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원효는 신라 왕실에게 온갖 박해와 회유를 받으며 고난의 길을 간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한 인물을 구체적으로 만나는 것은 사실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막연하게 안다는 것은 그 인물을 잘 모른다는 것이고, 그 인물을 잘 모른다는 것은 그 인물이 겪은 역사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이 아닌 막연하게 아는 것은 그 인물이 가진 역사의 무게와 흔적,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반대로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그 인물이 가진 역사의 무게와 흔적, 고통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외부와 나 사이의 성찰을 요구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무척 아팠다. 원효 대사의 치열한 역사의식과 인간애에 한 번 아팠고 그것의 좌절을 통한 인간 원효의 실패와 시대의 실패에 두 번 아팠다. 그 아픔이 나의 마음을 진동해서 이 작품을 명실상부 2006년 나의 최고의 소설 1위로 등급 시켰다.
추신: 그럼에도 이 작품에 묘사된 삼국 통일에 대한 묘사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2위. 오래된 정원: 황석영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작년 2006년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황석영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 이름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읽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2006년에 들어와서야 읽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이 분이 가진 이름값이 너무 대단하고 무거워서 이 분 소설은 엄청 난해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경우로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왠지 읽기가 두려운 작가가 몇 명 있다. 가장 첫 번째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말도 안 되는 책 두께만 봐도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아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두 번째 작가는 허먼 멜빌이다. 나는 진짜 백경을 읽고 싶다. 근데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아 미칠 지경이다. 읽는 순간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외기타 등등...
각설하고 막상 이 분의 작품을 읽자 나는 내가 생각한 그런 유의 난해함과 어려움이 아니라서 꽤나 놀랐다. 고매한 철학과 관념으로 범벅된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강한 체취가 묻어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인간 냄새는 읽는 내내 인간의 삶과 신념에 대한 물음을 잡요하리 만치 내게 요구했다. 당신은 지금껏 얼마나 삶을 치열하게 살았나요. 골치 아프고 무서운,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이 서릿밭 같이 냉혹한 질문에 부딪친 나는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 작품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 항복의 미소는 아주 맑고 그윽했다. 앞으로 나는 황석영의 열렬한 팬이 될 것이다.
3위.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나는 노벨문학상 받은 작품은 읽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까닭 모를 난해함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읽지 않는다. 사실 노벨문학상이 아무리 세계적인 문학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서구라는 지역적, 사상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세계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일부 지역에 한정 되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를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세계를 포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더불어 또 다른 이유로는 서구라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 대한 환멸 때문에 그렇다. 서구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역사의 특별한 한 장일 뿐 완전무결한 보편일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서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태를 보면 화가 난다. 배짱도 자존심도 없는 허수아비 사대주의자들! 난 그들이 진정으로 혐오스럽다.
그랬던 나도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고 이 작품을 접했다. 무엇보다 수상자가 서구의 작가가 아닌 이슬람 작가라는 특이성 때문이다. 거기다 우리나라와 형제 국인 터키 출신 작가라는 친밀성에서 오는 편안함은 어느 새 한 낮 햇빛 속에 고요하고 아늑하게 자리한 한 떨기 꽃과 같은 마음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작품을 읽는 내내 배신하지 않고 그대로 끝까지 갔다. 정말이지 다양하다 못 해 혼란스럽기까지 한 복잡한 구성을 가지면 서도 방만하지 않고 팽팽하게 조율한 작가의 글 솜씨는 감복하기 이를 때 없었다. 역시 상 받을 만한 가치가 충만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오르한 파묵! 늦었지만 2006년 당신을 만난 것은 저에게 아주 큰 행운이었습니다.
4위. 핑거스미스: 사라 워터스
2006년에 읽은 작품 중 순수하게 재미 면에서 최고였던 작품이었다. 진짜 읽는 내내 작품 속으로 진공청소기 빨려들어 가 듯 들어가서 헤어 나오지를 못 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작가의 농밀하고 치밀한 심리묘사는 가히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음에야 내가 어떻게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는 일개 독자일 뿐인 것을. 아무튼 나는 이 작품을 만나서 무척 행복했다. 아마도 그 행복감은 당분간 다시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시공에 상관없이 그저 여여 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에 담근 발의 아련한 감촉을 완벽하게 똑같이 재현할 수 없는 것처럼.
5위. 황진이: 홍석중
사실 나는 황진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물론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황진이를 재밌게 보긴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개봉할 장윤현의 황진이도 볼 생각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사극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에 본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황진이에 대한 무관심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작품으로서의 황진이 하나만큼은 계속해서 내 마음 속 깊은 곳 한 쪽에 고요히 간작할 용의는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바로 홍석중의 황진이다.
사실 이 작품을 접한 것은 황진이 때문이 아니라 홍석중이라는 북한 작가의 소설이라는 특이성 때문이다. 위에 오르한 파묵을 접한 것과 같은 이유다. 같은 피를 나눴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북한 동포의 살과 피로 엮어진 글을 읽는 것은 반가움과 동시에 일말의 불안감을 일으켰다. 저 멀리 터키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던 것과 비교할 때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기분을 상기시켰다. 역사의 비극에 휘청되는 인간의 비극이라는 연극 안에 나도 한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일깨워 준 것이다. 빌어먹을 비극 같으니라고. 다행히 작품을 읽는 순간 나의 불안감은 눈 녹듯 사라져 대지를 축축하게 적시는 물로 화했다.
황진이는 나에게 핑거스미스와 같은 선상에 있는 작품이었다. 일단 무지하게 재밌다. 읽는 순간 핑거스미스처럼 완전히 붙잡혀 글의 노예가 된다. 다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이다. 그러나 일단 다 읽고 풀려나오면 오히려 빠져나온 것이 아쉽다. 차라리 거기서 아주 오래 동안 기거하고 노숙하고 한뎃잠을 자고 싶은 심정이다.
6위. 뿌리 깊은 나무: 이정명
한국 팩션 소설의 가능성을 활짝 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재미도 재미지만 나에게는 발견의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를 느끼게 한 작품이다. 솔직히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에 발견의 기쁨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승원, 황석영, 오르한 파묵 등등 이쪽 세계에서는 이미 알아주는 실력파 중에 실력파들이 아닌가. 그러니 발견의 기쁨은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과 같다. 하지만 이 작가와 이 작품은 정말 나에게는 엄청 생소했다. 거기다 한글을 소재로 한 팩션 소설이라니 그 생소함은 한복을 입고 말을 탄 선비가 지금의 서울을 거니는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무척 망설였다.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흥미는 있는데 사서 읽기는 굉장히 껄끄러웠다. 더군다나 이와 유사한 소재를 가져온 또 다른 팩션 소설에 된통 당한 직후라 그 망설임은 어머니에게 용돈을 달라는 백수의 망설임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 작품을 선택했다. 한 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감동의 눈물이 쓰나미를 이룰 지경이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근사한 팩션 소설이 나타났구나 하는 자부심이 들었다. 거기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한글을 소재로 했으니 그 자부심은 배가 되었다. 앞으로 이런 유의 작품이 많이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7위. 가라 아이야 가라
데니스 르헤인은 진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재능을 가진 작가임을 이 작품을 통해 확실히 증명됐다. 전작 미스틱 리버에서 보여준 그의 신들린 공력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순 문학이 아닌 장르 문학에서 말이다. 일단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느와르 소설이다. 거칠기로는 소설 장르 중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무척 거칠고 난폭하다. 유아 성폭행, 납치를 비롯해 살인, 폭력 등 안 좋은 것들이 총출동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럼에도 이런 유의 작품과는 다르다. 거친 폭력에서 오는 짜릿한 쾌락이 이 작품에는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윤리적 망설임을 통한 슬픔이 들어 앉아 있다. 이건 무척 신기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내가 장르 문학을 읽으면서 통한의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던가? 없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적이 없다. 데니스 르헤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정당한 납치가 있다면 당신이나 나나 그것을 행하거나 혹은 용인할 수 있을까? 여기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하층계급에 속해있다. 소녀의 어머니는 무관심이라는 옷을 입은 몹쓸 여자다. 어머니의 자격이 깨알만큼도 없는 여자다. 그런 환경에서 소녀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성장해봐야 창녀같이 천박한 계집아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 한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누군가 소녀를 납치해서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안락한 가족의 품으로 소녀를 데려가 준다면 어떨까. 그래서 소녀에게 없던 해맑은 미소를 되찾아 준다면 그 납치는 어쩜 정당한 납치가 될 수 없을까? 바로 이때부터 작품은 독자에게 심각한 윤리적 망설임을 선사하다. 소녀의 미래를 위해서 이 납치를 용인하자.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납치는 명백한 범죄다. 이 두 개의 윤리적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연약한 인간들. 그리고 결국 선택해야만 하는 인간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윤리적 상처를 내고야 마는 지독한 게임. 그래서 이 작품은 2006년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섭고 슬픈 작품이었다.
8위. 이프: 이종호
나는 공포 문학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인간의 여러 감정 중 가장 특출 난 감정인 공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또한 가까이 하고 싶은 양가적 감정. 거기서 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은 느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 묘미와 쾌락을 일단 경험하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다. 가히 합법적인 마약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동안 나는 그것을 외국에서 공수해야만 했다. 일본, 미국, 유럽 등등에서 말이다. 이유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한국에는 공포 문학이 자리 잡지 못 했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붕괴라고 해야 할 수준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도 같은 값이면 되도록 한국 문학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외국의 문학보다야 내가 피부로 마음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한국 문학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6년에 불현듯 한 작품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동안의 보상을 해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작품이 바로 이프다. 나는 처음 이 작품을 보고 사야할 지 말아야할 지 망설였다. 한국 공포 문학의 신뢰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한국 공포 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막연하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전에도 한국 장르 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유치한 사명감으로 뭣 모르고 샀다 피 본 작품이 있었던 터라 더더욱 선택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한국 공포 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예의 그 유치한 사명감에 결국 덥석 사고 말았다. 나 하나가 소설 하나 산다고 해서 한국 장르 문학이 사는 것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하여간 나도 참. 그러나 결과는 전혀 뜻 밖에도 대만족이었다. 아아아 한국 공포 문학이 어느 사이에 이 정도 수준으로 올라왔었던가 하는 감격이 올라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웰메이드 공포 소설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후 이종호의 열렬한 팬이 되고 말았다.
9위. 주몽: 박혁문
2006년의 화두는 고구려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민족사의 훼손을 우려한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이 빗은 현상이었다. 나 또한 한국 사람이기에 중국의 행태에 심한 분노와 적개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 분노와 적개심에는 절망감이라는 슬픔이 배면에 깔려 있었다. 정녕코 동북아시아의 평화, 그리고 넓게 봐서 세계평화의 길은 멀기만 한 것일까. 도대체 왜 자기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탐하려고 하는 것일까. 내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한에 남도 나의 것을 탐하지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슬프다. 인간의 탐욕이여. 인간의 한계여.
어쨌든 그 결과 2006년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 관한 소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중 내가 선택한 주몽은 바로 박혁문의 주몽이다. 일단 이 작품은 그동안 나온 주몽 소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었다. 두 권으로 되어있지만 일단 한 번 읽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꽤나 신경 쓴 고증은 작품의 사실성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줬다. 물론 이건 어디가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10위.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이종호 외
자 드디어 마지막이다. 말 그대로 한국 공포 문학이 그동안 쌓아올린 성과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지침서와도 같은 작품집이다. 이프와 더불어 2006년에 내가 읽은 최고의 공포 문학이었다.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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