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에서 보내는 문학편지 Ⅱ-유혹들 13
너무 긴 젓가락 혹은 베일의 언어들
강은교
1)
지난겨울, 석 달을 나는 오른팔과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로 보냈다. 나도 몰랐던 일들이 일어났다. 오른손잡이인 탓에 많은 일상적 일들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모든 뚜껑들, 마개들이 나의 적이 되었다. 음식 먹기도 물론 고된 일 중의 하나였다. 무잇인가를 먹어야 할 때마다 이솝 우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두루미에게 맛있는 스프를 대접하는 우화. 길고 뾰족한 부리로 그 납작한 접시의 스프를 먹자니.....아무리 스프가 맛있은들 어찌 먹을 수 있으랴. 젓가락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밥과 반찬을, 국의 내용물까지도 될수록 큰 포크로 집어 올리다보면 가끔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가 떠올라 실소하기도 했다. 지옥으로 간 이들은 긴 젓가락을 받았다. 사람들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놓여도 입으로 가져올 수 없어 맛있는 음식 냄새만 맡으면서 굶주림에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반면 천국에 간 이들은 긴 젓가락이 음식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서로 먹여주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거이 다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긴 젓가락을 가졌으나, 그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2)
나는 버릇처럼 나의 시를 생각한다.
말하자면 음식을 입으로 가져올 수 없게 하는 그 긴 젓가락처럼 나의 시도, 말하자면 지나치게 시적인 시, 시 같은 시가 되어, 즉 언어의 모자, 감정의 모자들이 너무 많이 들씌워져 있지 않았었던가, 하는 점이다. 언어의 모자, 감정의 모자들이 너무 많이 들씌워져 있으면 그 시는 읽는 이가 너무 쉽게 들어와 모자들만을 들치다 오히려 시를 지나치게 됦 것이다. 혹은 모자들이 너무 많아, 말하자면 아름다운 베일들이 모자와 모자 사이에 있는 틈들을 가려, 읽는 이들이 들어올 문을 아예 만들어 주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럴 때 나의 시는 긴 젓가락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풍성하고 맛있는 언어들이 아름답기까지 한 시의 접시에 놓인들 누가 정작 입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시에 대한 몇 개의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읽는 이는 물론 나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
아마 그런 고정관념 중 하나에 ‘모자가 너무 깊이 씌워져 있거나 베일의 언어들에 지나치게 가려진, 의 언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 과연 영감이란 무엇일까? “어떤 영감을 받아 그 시를 쓰게 되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인인 나를 늘 콤플렉스에 빠지게 하는 그것, 시뿐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에 쉽게 쓰이는 그것. 때로는 신비스러우며, 뭐랄까, 몽환스럽기까지 한 그것, 그러나 막상 뭐라고 대답할라치면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그것, 하긴 이런 영감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낭만주의 시인이나 신비주의, 고답파, 또는 형이상파 시인들은 그것 없이 어찌 시가 쓰여질 수 있느냐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파블로 네루다 같은 시인은 ‘영감은 허구’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3)
‘신비한 영감이라든가 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은 불순한 의도를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순간에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압력이나 이전의 독서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얼마간은 타인의 것이다.’(네루다)
반면 네루다와 같은 중남미 권의 시인 옥타비아 파스는 영감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건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 편의 시에 덮어 씌워진 영감의 모자들은 그 시를 ‘몽환의 늪에 빠지게 하거나 묘한 신비에 빠지게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난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이 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우주선을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은 타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장면을 보면 우주선 로켓을 발사하는 순간부터 몇 단계의 분리가 이루어진다. 그때엔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난다. 마지막 단계의 분리, 폭발 후 우주선의 몸통은 홀로 우주로 유영해 가는 걸 볼 수 있다.
아무튼 낭만주의도 신비주의도 건너온 ‘오늘’이라는 시점에 서 있는 시에선 위에 언급한 두 견해 중에서 네루다의, ‘허구’라는 의견이 파스의 의견보다 힘 있을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영감이란, 파스가 표현한바, 외부에서 온 몽환적인 ‘신비의 모자 또는 신의 베일’이 아니라, 평소에 시인의 내부에 끓고 있던 것이 어떤 언어 또는 어떤 상황 이미지와 만나는 순간 일어나는 폭발 또는 그 자극, 그리하여 ‘폭발’이 일어난 뒤에도 남아있을 몸통 하나를 만들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언어 또는 이미지의 모자를 다 벗어 버렸을 때에도 남아있어, 그 ‘폭발과 자극의 순간을 이끄는 기제’라고 해야 하리라.
오늘의 시에서 영감은 결코 대상이나 상황의 말을 신의 말처럼 몽환의 늪에서 받아적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4)
‘그즈음 나는 대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대작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스러운 수련도, 또 그 어떤 희생도 끝까지 견뎌내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상태였다. 대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장을 갈고 닦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수련을 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연애는 두말할 것도 없고, 남의 부인을 몰래 빼앗고, 유흥비로 하룻밤에 백엔을 날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또 주식을 사서 천 엔을 벌거나 만 엔을 잃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해두지 않으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천성이 겁쟁이에 부끄럼쟁이인 나는 그런 경험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 해보자고 결심을 해도, 내게는 정말 무리였다. 나는 십 전짜리 커피를 마시면서 찻집 소녀를 흘끔흘끔 훔쳐볼 때조차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다자이 오사무, 「낭떠러지의 착각」
위의 고백적인 글은 아마도 그 ‘베일에 싸인 모호성, 또는 신비의 모자들’ 거기서 파생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영감’이라는 고정관념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한때 많은 작가 • 시인들이 빠져드는 영감이라는 늪. 네루다의 말처럼 그것은 오늘의 시 앞에서 허구이거나, 자칫하면 시로 하여금 속임수의 이 되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
강은교
강은교 시인은 1945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하였으며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는 『허무집』, 『풀잎』, 『빈자 일기』, 『소리집』, 『붉은 강』,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초록 거미의 사랑』,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 『바리연가집』,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미래수펴 옆 환상가게』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습니다. 수상으로는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 구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