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스님은 그의 스승 경허스님과 더불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생사에 걸림이 없었던 당대의 선지식들은 세속인의 눈에는 기행 괴벽이라 볼 수 있는 일화를 창조해 놓고 가버린다. 무애 대자유가 선적 자유에서 출발됬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선적 실험을 통해 내뱉어지는 언어 행동은 그대로 그들의 자취로 살아 이제까지 숨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공스님에게는 스승 경허스님과의 경계를 털어버린 일화들이 산재해 있어 선종사에 찬란한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만공스님이 천장사에서 공양주를 할 때였다. 어느 날 어린 만공스님은 스승 경허를 따라 탁발을 나갔다. 당시로서는 탁발이 아니고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동냥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쌀자루에 쌀이 가득하여 무겁기까지 하였다. 천장사로 돌아가려면 한참 걸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만공스님은 쌀의 무게를 점점 느끼고 걸음이 더디다. 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도 절은 멀기만 했다. 이를 눈치챈 경허가 꾀를 낸다.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는데 길모퉁이 집에서 20세 가량의 어여쁜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나왔다. 길에서 맞부딪히게 된 경허는 다짜고짜 그 여인 앞으로 다가가 여자를 와락 껴안고 입술을 맞췄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금방 온 식구가 달려 나왔다. '저 중놈! 요망한 놈!'이 소리에 동네 청년들도 밖으로 나왔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은 도망을 쳤다. '저 중놈들 잡아라!' 동네 사람들이 뒤쫒아 왔다. 만공스님도 경허스님 뒤를 혼신을 다해 따라 붙었다. 이윽고 한참 만에 동네를 벗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추격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산길에 다다르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은 안도의 숨을 몰아 쉬었다.
만공스님이 투덜거렸다.
"아이고! 스님!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마트면 곤욕을 치를뻔 하지 않았습니까?"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에게 물었다.
"너 아직도 쌀이 무거우냐?"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무거운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다. 무겁다는 생각이 있지 않으면 무겁지가 않은 것이란다."
그는 최초로 스승으로부터 귀중한 선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만공스님은 힘도 장사였다. 수덕사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갈미라는 마을이 있었다. 갈미에는 당시 김씨가라하여 구한말 벼슬아치들이 이곳에 자주 들렀다. 나라는 망하여 갔으나 한때 영화를 그리워 하며 할 일 없이 떼지어 잡기놀이를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김씨가와는 친문이 있었던 만공스님은 어느날 우연히 그 집을 들렀다.
"도인이 오셨다."
한물 간 선비들이 우루루 그에게 몰려 왔다. 만공스님을 둘러싼 유생들은 도인이라는 만공스님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하는 호기심으로 모여 앉았다. 만공스님의 입이 열렸다.
"이 세상에는 제일 큰 도둑놈이 있소이다."
"어떤 도둑인데요?"
"어떤 자가 제일 큰 도둑이냐 하면 남의 집 담을 넘어서 물건을 훔치는 놈은 좀도둑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골패나 치며 놀고 먹는 놈들이야말로 제일 큰 도둑놈이오. 농부들은 일년 내내 전 가족들이 피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해가 바뀌어도 초근목피로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이 양반 부스러기들이 도둑 중에서 제일 큰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선비들은 이 말에 아무 대꾸도 감히 하질 못했다.
만공스님의 쩌렁쩌렁한 힐책은 이들 양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제시 그 권세가 시퍼렇던 총독 앞에서도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졌다.
당시 일본 총독 미나미지로가 주재하는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있었던 일.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미나미 총독주재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조선의 31본산 주지들은 전 총독 데라우찌에 대한 업적을 미나미 신임 총독으로부터 지리하게 듣고 있었다. 마곡사 주지로 만공스님도 참석하고 있었다. 미나미 총독은 전임 총독에 대한 찬사를 한참 늘어놓고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의 합병을 주장했다. 본산 주지들의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이때 만공스님이 벌떡 일어나 미나미총독을 향해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청정이 본연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겨 나왔는고?" 회의장은 웅성거렸다. 만공스님은 회의장을 가라앉히고 미나미 총독을 향해 합병불가론을 펼쳤다.
"전 총독 데라우찌야 말로 우리 조선불교를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일본 승려를 본받아 계율을 파하게 하고 대처토록 한 장본인입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정치와 종교는 엄연히 분리되야 합니다. 불교진흥은 정부가 불교를 간섭하지 않는 일이오."
만공스님은 본산주지들이 붙잡는 소매를 떨치며 유유히 회의실을 박차며 나왔다. 그날 한용운 스님이 그의 처소로 찾아왔다.
"참 장하도다. 사자후여! 한번 할 하매 여우새끼들이 서늘했으리. 그런데 일 할도 좋았지만 한 방망이 후려침이 좋았을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만공스님은,
" 이 좀스런 사람아!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사자는 할을 쓴다네."
선승에게는 선승다운 기개가 있는 것이다. 오랜 수행생활에서 축적된 얽매이지 않는 법력이, 그들을 향해 벽력같은 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허스님이 한국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라면 만공스님은 그 터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종장이다. 오늘날 덕숭산 법맥의 시발은 사실상 만공스님에 연원한다. 덕숭산 가풍이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법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의 무애자적한 삶은 그의 선지(禪旨)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만 특히 선시에서도 넉넉히 그의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경허스님보다 더 풍류적이다. 그의 시는 겁외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되 그 자연현상이 바로 우리의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대상이 그것일 뿐 자연과 나는 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척박한 삶의 현장, 질곡의 시대에 시대적 고통도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는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 선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