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부족한 엄마에게 소원이를 저희 가정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류소원, 정신지체 2급 장애'
저의 사랑하는 둘째 딸에게 붙는 수식어가 여느 아이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생후 5개월때 경련을 일으켜 전북대 병원을 거쳐 서울의 경희 의료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영아연축’ 처음에는 '뇌병변 1급 장애'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그 당시 영아연축의 심각성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정읍과 서울의 긴 거리를
눈물로 쫓아 다녀야 했습니다.
모세 기관지염,경기,심한 변비 이런 증상들로 인해 병원 생활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다시피 하고 망망한 대해를 돛단배를 타고 항해 하는
험난한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소원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 했지만 부모인 우리의 노력은
무기력함 그 자체였고 모든 약물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은 채 소원이의 경기 횟수는 날로 증가했습니다.
생후12개월, 광주에 있는 병원에서 뇌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하면서 첫 돌을 병상에서
맞이 하게 되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상황으로는
수술 받음으로 인해 오히려 아이의 상태가 더 악화 되었고 병마와 싸우고
개선장군이 되어 씩씩하게 퇴원을 하고 싶었던
우리 가족의 바램은 무너지고 우리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진 패배자의 모습으로
퇴원을 해야 했습니다.
1998년 한 해동안 9번을 입원 하면서 소원이의 ‘간질’이라는 병과 뇌의 이상소견으로 인한
장애를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소원이처럼 뇌에 이상이 있고 발달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당장 어떤 결론을
얻기 보다는 긴 시간을 지켜 보며 아이의 성장을 기대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을 감당하기란 너무도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아이의 회복을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로인해 저와
가족이 겪어야 하는 마음 고생은 정말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지경의 고통이었습니다.
응급상황이나 입원시에는 남편과 가족의 도움이 컸지만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왔을때는
소원이는 온전히 엄마인 내 몫이었고 내 딸이 장애아이고 병과 싸우고
있다는 현실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버리고 싶은 심정은 우리 엄마들이면
누구나가 거쳐 가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투병생활과 함께 새벽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어느날,
‘하나님! 저는 이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요. 차라리 이 딸을 천국으로 데려 가세요’
눈물의 절규를 하며 하늘을 향해 원망했고
말초신경조차 곤두 서 있는 나의 감정은 남편을 향해 여지없이 쏟아 부었고
미쳐 버릴것만 같은 마음과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끌어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내 삶의 주변에서 보내오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마음마저 상처로 얼룩지면서 그들을 강하게 거부하는 시간이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소원이 아빠는 크게 요동하지 아니하고 아픈 가슴으로 현실을 받아 들여 가며 살아갔고
큰 딸 주현이는 어린나이에 동생으로 인해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중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우리 큰 딸 주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 아빠는 성인이기에 나에게 주어진 내 몫임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의 주현이는 엄마의 눈물을 지켜 보아야 했고
엄마의 살얼음판 같은 감정의 시간들을 곁에서 겪어야 했으니까요.
장애아를 키우면서 현실로 부딪쳤던 가장 어려운 점은 치료비와 교육비에 대한 부담감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소도시이다보니 교육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하다는 것 이었습니다.
네 살박이 큰 딸과 두 살인 소원이를 품에 끼고 전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차 안에서는 보채는 아이 때문에 난감했고 20분간의 치료를 위해서
먼거리를 다니는 일은 간단치가 않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정읍지역에도 장애인을 위한 공간인 장애인 복지관이 세워지게 되었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연이 있다면 40개월때부터 걷기 시작한 소원이는 산만함이
너무 심했었는데 40분간 이루어지는 개별수업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면
교실 안의 교구를 온갖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고 의자에 앉아서
수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힘든 과정을 함께 했던 선생님과는 올 초에 수업을 종결했는데 마지막 수업 하는 날
선생님의 아쉬워 하는 모습속에서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막무가내였던 소원이는 작년부터는 의자에 제법 앉아서 수업을 하는 아이로 성장을 했고
이 모두가 소원이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우리 복지관 선생님들의 노고라 여겨집니다.
소원이가 아기였을때 이 어린 생명이 엄마 아빠도 없이 시설 같은데서 자란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가끔 생각을 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를 흔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찾아온 귀한 생명에 감사합니다. 소원이의 모든 것이 내 살이 되고
피가 되기까지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기에 이 생명이 이 세상 어느것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우리 장애아 엄마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죠.
우리 아이들보다 하루만 더 살다가는게 소원이라는 이야기.......
저는 소원이에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엄마가 생명이 다 하는 그 날까지 소원이가 세상 가운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우리 가족과 소원이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걸음이
느린걸음이라 할 지라도 우리의 느린걸음은 작은 것에 감사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장애아를 키우면 엄청 불행하기만 할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 몫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남들보다 불행 할 수는 있습니다.
겨울을 견디고 돋아나는 새싹이 귀하고 아름답듯이 우리 장애아 엄마들의 행복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지켜 나가는 행복이기에 더 소중하고 값진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문득 문득 아이를 바라볼때 시린 가슴을 느끼지만 저는 이것도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결코 핑크빛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기에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합니다.
소원아!
너와 내가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은 가는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해 낼 수 있단다.
소원아!!! 화이팅~~~^^*
2004년에
'말을 할 수 있는 그 수준 만큼 글을 읽을 수 있다' //
소원이는 대화가 100% 되는 아이인데요.
교장선생님의 글에 기대를 가지고 차근차근히 헤쳐 나가고자 합니다...
교장선생님! 복지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가입 인사 드립니다^^*
[1] setReplyCount(231, 1, true);
2007.11.23
낮잠자고 일어난 소원이에게
테스트를 했어요.
※ 정확히 읽은 글자 : 가 나 마 바 사 차 카 타 파 하
※ 틀린 글자
다 →디귿으로 읽음 라 →리을이라고 읽음 아 →10 이라고 읽음(숫자) 자 →'가지'라고 읽음
가나다라...를 함께 공부한지가 한달이상은 되었기에
오늘 표현은
소원이가 그동안 쌓아 온 실력을 보여준것으로 생각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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