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미술시장 동향
최근 해외 미술품 시장은 계절로 비유하자면 봄을 지나 여름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브릭스와 중동지역 신흥 부유층이 입도선매식 매수에 나서면서 일부 작가 작품들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세계 미술 경매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크리스티는 올 상반기 글로벌 매출이 36억8000만달러(약 4조1200억원)를 기록해 작년 같은 기간보다 9%가량 늘어났다. 경쟁사 소더비도 올 1분기 현대미술 경매 부문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 증가했다.
일례로 지난 5월 미국 뉴욕 소더비에서 열린 경매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68년 작품은 3712만5000달러(약 414억원)에 판매돼 생존 작가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같은 달 뉴욕 크리스티에서 열린 ‘전후 현대미술 경매’ 역시 낙찰 총액이 4억9500만달러를 기록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배혜경 크리스티 한국사무소 대표는 “미국, 영국 등 전통적인 주류시장의 경제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미술품이 가진 안전자산 매력이 커지고 있다”고 인기 배경을 설명했다.
- 김창일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회장이 소유한 영국의 유명 설치미술가 데미안 허스트 작품 ‘채러티’
인상주의와 현대미술, 세계 미술 양축
이 같은 시장 변화는 지수로 봐도 알 수 있다. 미술품 가격과 관련한 국제지수 메이 모제스지수(Mei Moses Art Index)를 미국 S&P 500지수와 함께 움직임을 보면 두 지수 모두 전체적인 변화 추세가 비슷하다.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모제스 교수와 메이젠핑 교수가 함께 만든 메이 모제스지수는 미술품 투자 시장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김정환 대우증권 연구원은 “미술시장은 미국 증시를 6개월에서 18개월의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며 향후 시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최근 국내 큰손들도 뉴욕, 런던, 홍콩에서 열리는 크리스티, 소더비 경매에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 5월에 열린 홍콩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한 한 미술업계 관계자는 “미디어에서 얼굴을 본 유명 인사를 비롯해 상당수 한국인들이 눈에 띄었다”면서 “이들은 공신력을 가진 유통채널을 통해 구입해야 나중에 제대로 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여행업계도 관련 상품을 기획하고 나섰다. 하나투어는 지난 5월 2박3일간 아트페어를 둘러보고 현장에서 진행된 경매를 참관하는 ‘아트바젤 홍콩’을 부티크모나코미술관과 손잡고 판매했다. 상품을 기획한 김준형 하나투어 신성장사업팀 과장은 “상품가만 120만원으로 일반 홍콩관광 상품에 비해 고가였지만 전문 큐레이터의 도움을 받아 작품 및 구입 과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매년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아트페어 아트 바젤과 프랑스 피악 아트페어, 미국 시카고 아트페어, 뉴욕 프리즈 아트페어, 마이애미비치 아트페어는 국내 미술애호가들이 즐겨찾는 단골 미술행사다.
한 미술업계 관계자는 “예전부터 이들 아트페어를 통해 미술품을 구입해온 고객들에게는 행사전 전시작품에 대한 소개서와 초청장이 발송되며, 일부 부유층은 프라이빗 갤러리(전속 구매대행 화랑) 큐레이터와 함께 현장을 찾아가 작품을 구매한다”고 말했다. 해외 유명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다. 세계 최대 화랑인 가고시안갤러리, 화이트 큐브가 대표적인 곳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해외 미술 작품은 전후 현대미술과 인상주의 근대회화가 두 축을 이루고 있다. 그동안 피카소, 모네, 세잔 등 인상주의 화가 작품이 선두권을 형성했지만 유통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수가 점차 줄면서 전후 현대미술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메이 모제스지수에 따르면 지난 1955년부터 2004년까지 50년간 상승률은 평균 10.5%였으며, 이 중 7.3%가 2000년부터 2004년 사이 뛰었다. 이 기간 중 ‘1950년 이전 미국 회화작품’(25.2%)이 가장 상승률이 높았고 ‘인상주의 근대회화’(14.3%)가 그 뒤를 이었다.
- 미국 팝아트 거두 앤디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
쩡판즈·장샤오강 등 중국 작가도 인기
미국 작가 앤디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은 지난 1998년 275만2500달러에 거래된 것이 2001년에는 374만6000달러, 2006년에는 1625만6000달러에 판매됐다. 앤디 워홀 외에 데이비드 호크니, 프랜시스 베이컨, 게르하르트 리히터, 장 미셀 바스키야,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피터 도이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사이 톰블리, 루시안 프로이트, 빌렘 드 쿠닝 등은 세계 애호가뿐 아니라 국내에서 관심이 높은 작가군으로 불린다. 삼성특검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행복한 눈물’의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도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블루칩 작가 중 한 명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세계 미술 시장에는 차이나열풍이 거세다. 실제로 지난해 세계 경매 총액에서 차지하는 국가별 비중에서 중화권은 41%를 기록해 미국(27%), 영국(18%)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중국 작가들의 작품도 덩달아 뛰고 있다. 배혜경 대표는 “영·미권 미술 애호가들이 자국 작가인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작품을 대거 매입해 가격을 끌어올린 것처럼 차이나머니도 중국 고미술, 현대미술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중국 작가로는 쩡판즈, 장샤오강, 웨민준, 왕강이, 왕진쑹 팡리쥔 등이 꼽힌다. 일본 작가 역시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어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요시토모 나라가 ‘빅3’ 작가다. 현재 일본 작가들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적절히 사용한 팝아트로 세계 미술 시장에서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무라카미 다카시는 작품 값으로만 치면 세계에서 5~10위에 드는 인기 작가다. 대표작 ‘마이 론섬 카우보이’는 지난 200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516만달러에 판매됐다.
반면 국내 중견 작가는 홍경택, 최소연 등을 제외하고는 아직 해외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업 작가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제값을 받으려면 해당 국가 미술 시장이 기초가 돼야 하는데 현재 국내 미술시장은 냉각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국내 작가 작품이 해외에서 제값에 판매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