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옆에 고판화박물관 차린 '머리 긴 스님' 한선학
버스 한 대 간신히 통과할 만한 좁은 시골길로 산비탈을 올라갔다. 분명 조금 전 대로변에서 본 푯말에는 '치악산(雉嶽山) 명주사(明珠寺) 고판화박물관(古版畵博物館)'이라 쓰여 있었다. 1㎞를 채 못 가 넓은 벌판이 나타났다.
"해발 600m인데 평지 넓이가 6000평입니다. 뒤를 돌아보세요. 감악산(紺岳山)이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건 여기밖에 없습니다…."
목소리 크고 피부색 좋은 중년 사내의 숱 많은 머리카락은 은색이었다. 그런데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다. 그곳에 사내가 주지로 있는 명주사가 있다. 본명이 한상길(韓相吉)인 한선학(韓禪學·53)은 박물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어쩐지 보통 스님 행색 같지는 않았다.
"여기는 태고종 사찰입니다."
한선학은 1998년까지 15년 동안 군종장교였다. 당시만 해도 조계종에서 군승(軍僧)만은 결혼이 허용됐다. 제대와 동시에 이혼하든지
조계종을 떠나야 했다. 그는 생이별 대신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여기에 절과 박물관을 지었다. 고판화의 세계로 들어선 것은 인생 후반기의 반전(反轉)과 관련이 있었다.
국방부 법당에 있던 1996년 신도들과 함께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의 주화산(九華山)을 찾았다.
그곳 육신보전(肉身寶殿)에 8세기 신라 왕자였던 김교각(金喬覺) 스님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밤 늦게 도착했는데 중국 절은 저녁에는 그만 문을 닫아걸더군요. 40명 중에서 8명만 남아서 108배를 올렸습니다."
새벽 2시30분에 갑자기 절 문이 활짝 열리며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모든 게 달라졌다.
귀로에 항저우(杭州)의 골동품 시장에서 새삼 고미술에 눈을 떴다. 그 관심이 급기야 고판화에까지 닿게 됐다.
"판화라는 게 그렇게 아름다운 건 줄 몰랐습니다. 한 번 파 놓으면 수없이 인쇄가 가능한 대중예술의 꽃이지요."
민화, 불경, 책표지, 편지지, 부적, 책 삽화…. 금세라도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한 현란하고 정겨운 무늬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원래 그의 전공은 미술이었다.
동국대는 미술학과가 불교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군종장교로 군대에 갈 수 있었다. 1981년에 출가, 2년 뒤 임관돼 21사단으로 갔다. 당시 사단장이 참모식당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는 그를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온 스님도 땡춘가 보다!"
그는 정색하고 말했다.
"옛날처럼 산속에만 살면 나물만 먹어야겠지만 이렇게 나와서 포교를 하려면 이런 것도 같이 먹어야지 말입니다."
사단장은
"재미있는 스님이 왔다"
며 껄껄 웃었다.
전역을 앞둔 그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포교해 보자'는 마음을 굳혔다. 1996년 경기 군포 아파트를 팔아 강원 원주 신림면 황둔리에 땅을 마련했다. 전국 고미술상을 이 잡듯이 뒤져 중국 판화를 모으던 때였다.
"중국이 갑작스럽게 성장하더군요. 이때 아니면 안 되겠다 싶었죠."
'기존 콜렉션과 차별성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목판으로 찍은 삽화가 들어 있는 우리나라 책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국내 삽화 책 중 반 정도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는 1998년 치악산 명주사를 건립했다. 소나무와 황토, 너와지붕을 사용한 특이한 팔각 건물이다. 절이 아니라 전원주택 같다고 했더니
"우리나라 최초의 전원사찰"
이라고 맞받았다.
2004년 그 옆에 고판화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한 기자가
"박물관을 새로 만들다니 망하려고 작정을 했느냐"
고 혀를 찼지만 괘씸하게 생각할 뿐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해, 그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보물 중의 보물'을 찾아냈다.
일본인이 갖고 있던 조선시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목판 원판이었다. 그런데…. 그 꼴을 보고 그는 눈물을 삼켰다.
"목판이 '이로리'를 감싸는 장식 용구로 둔갑해 있더군요."
이로리란 일본식 4각 화로다. 우리 문화재가 이렇게까지 굴욕을 당했던 것이다.
그의 박물관은 1년에 1만 명 가까운 관람객이 찾는다. 모든 관람객은 유물 하나하나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목판 2000점, 서책 700점, 판화 800점 등 3500점의 유물을 소장한 이 박물관은 한국·중국·일본·티베트·몽골의 옛 판화들을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장소다. 박물관은 전통판화학교 체험 코스도 운영하고 있다.
"판화는 그 나라의 인쇄문화와 같이 걸어가는 작품입니다. 디자인인 동시에 디지털적인 복제성을 지니고 있지요." 그는 자신의 인생과 재산을 쏟아 부은 판화야말로 창의력의 원천이자 꿈의 발전소라고 말했다.
"이 우키요에(浮世繪·일본 목판화) 좀 보세요. '짱구는 못 말려'에 나오는 주인공과 똑같지 않습니까?"
문득 궁금했다. 이렇게 많은 고판화를 모을 때까지 집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웬걸요. '다시는 모으지 않겠다'는 각서도 여러 차례 썼지만 수집은 중독이나 마찬가지더군요.
얼마 지나면 또 몰래 사들였습니다. 아, 이 얘긴 나가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