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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세이스트 원문보기 글쓴이: 안규수
아버지의 오른쪽
어깻죽지에 손바닥만한 검붉은 반점(斑點)이 있다. 그 반점은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운 아버지의 완강한 힘과 권위(權威)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점은 선천적인 것이지, 병리적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나이 팔십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셨고, 지금은 비록 중풍 든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시고도 병객인 체를 않고 지내시는데, 나는 그 반점이 원자로의 핵처럼 당신을 지탱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 목을 꼭 잡고, 얼굴을 등에 꼭 붙여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나는 아버지의 그 반점을 그때 처음 보았다. 아버지 신체의 비밀을 발견하고 나는 당혹감에 내 얼굴을 아버지의 등에 대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얼굴을 아비 등에 꼭 붙여라."
나는 엉겁결에 얼굴을
아버지의 등에 꼭 댔다. 내 얼굴이 반점에 닿지는 않았지만 바로 눈앞에 화난 아버지의 검붉은 얼굴 같은 반점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초인적인
의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할 뿐인데, '내 힘이니라'는 듯이 눈앞에 아버지의 반점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강변 모래 바닥에 엎드려 오른쪽 어깻죽지의 검붉은 반점이 들썩거리도록 소리 없이 우시던 아버지의 아픈
한 시대는 그 흐린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아버지의 반점은 그때 그 아픈 강과 더불어 분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강을 건너서 참 오랫동안 우리 부자는 각자의 인생을 나이 차이만큼 떨어져서 걸어 왔다. 아버지는 항상 내게 확신을 갖지 못하시고 불쾌하신 얼굴로 돌아보시며 저만큼 앞서 가시고, 아버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나는 주눅이 들어서 그 뒤를 따라 왔다. 그 까닭은 아버지의 힘에 대한 위압감 때문인지 모른다. 그때마다 그 강이 생각났다. 내가 아버지로서 그 필연의 강에 열네 살 먹은 내 자식을 데리고 섰다면, 과연 나는 내 자식을 건사해서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아버지는 그런 내 의지의 박약함을 눈치 채시고 나를 '못난 놈' 하고 나무라시는 것만 같아서 아버지 앞에서 나는 늘 움츠러드는 것이다.
이제 아버지와 나는 다시 아버지의 강에서
만났다. 중풍에 드신 아버지는 그 흐린 강가에 앉아서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시고 뒤따라오는 자식을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의타심(依他心)이 간절한
눈길로 뒤따라 온, 나를 바라보신다. 이제 비로소 내 등에 업혀 강을 건너가시려고 못난 자식에게 기우는 아버지가 가엽고 고맙다. 그 강에서
아버지가 나를 소중히 건사해서 건네주셨듯이 이제 내가 아버지의 숨찬 강을 건네 드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등만큼 완강하지 못한 내 등을
감히 아버지께 돌려 대 드린다. 그 빈약한 내 등에 기꺼이 업혀 주시는 아버지가 나는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다.
몇 달 전, 나는 하회 마을을 다녀오는 길에
그때 그 나루터였지 싶은 낙동강 상류 어디를 가 보았다. 아버지의 극적인 강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가로놓인 강
양안에는 생선 매운탕을 해서 파는 '무슨, 무슨 가든'이라는 간판이 달린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강은 넓은 모래 바닥에
턱없이 적은 강물이 흘러갈 뿐, 경이로운 아버지의 강에 대한 이미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어느 해 상주 낙동 근처의 낙동강을 본 게
이 작품의 소재입니다. 문득 육.이오 사변 당시 아버지 뒤를 따라서 경산까지 피난을 다녀온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낙동강을 건넌, 오래 된 그
기억에다 상상의 날개를 다니까 위대한 父性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당시 나를 업고 흐린 강을 건넌 아버지는 생사를 하늘에 맞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어깨의 반점을 그때 처음 보았는지 그 전에 이미 보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때 처음 본 걸로 하는 것이 이
글의 긴장감과 내 감동을 표현하는데 좋을 것 같아서 그때 처음 본 것으로 했습니다. 이것이 어느 수필가들이 허구라고 말하는 禁忌事項 인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가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글의 내 의도를 집어내는 예리한 눈으로 '소설 같다'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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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성균 수필가의 많은 글을 읽으면서 감동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마음먹은 감정을 어쩌면 저렇게 섬세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지 감탄스럽습니다.
불러도 대답없는 아버지.
보고싶어도 볼수없는 나의 아버지가 스쳐 지나는 군요.
글을 읽으며 짠한 마음를 주체할수 없었습니다.
좋은글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