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上 海
벗겨진 낡은 탁자가 중앙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그 둘레에 머리를 맞대로 앉아 있었다. 윤홍철(尹洪喆)은 담배를 말던 손을 멈추고 하품을 했다. 며칠 째 잠을 설치고 있었으므로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낮잠을 잘 여유는 없었다. 해야할 일들이 그만큼 밀려들고 있었다. 벌써 10년 가까이 중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나이보다는 늙어 보였다.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살과 거친 피부가 그의 생활의 어려움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 때때로 고향에 두고온 아내와 딸 여옥의 생각에 가슴이 저려올 때면 소리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편으로 어렴풋이나마 가족의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재작년 겨울부터는 소식이 끊겨 궁금하지 짝이 없었다. "내일 몇 시에 열립니까?" 젊은 청년 하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리하게 여윈 청년으로 두 눈만이 찌를 듯이 빛나고 있었다. "오전 11시...... 경계가 삼엄할 거요. 이쪽도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 거요." 홍철은 중국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구식 육혈포로 손질을 잘하지 않으면 곧잘 고장이 나곤 하는 총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한 자루 있어서 퍽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 동안 육혈포에 쓰러진 일본인 및 친일분자는 열 명이 넘었다. 그것을 매만질 때마다 홍철은 가슴으로 스며드는 자신감을 느끼곤 했다. "더이상 이쪽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비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젊은 목숨이 너무 아깝습니다. 지금까지 벌써 열 여덟 명이나 희생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방법을 모색해 주십시오." 윤홍철 외에 청년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하나같이 홍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모두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윈 청년이 주로 홍철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홍철은 이마를 두 손으로 짚었다. 머리가 어찔어찔 해오고 배에서는 쪼르륵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청년의 말에 그 역시 동감이었다. 용맹스런 테러리스트들이 자꾸 죽어가고 있었다. 몸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부딪쳐 들어가기 때문에 희생은 불가피했다. 아무리 애국의 길이라고는 하지만 아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갈 때마다 홍철은 몹시 가슴이 아프곤 했다. 그러나 지령이 내려온 이상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항일(抗日)이 최대의 과업인 만큼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사태 또한 격렬한 테러를 필요로 할 만큼 절박해지고 있었다. "나도 동지들의 목숨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사람이오. 이 지역 책임자로서 내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었다는데 대해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소. 이러한 내가 더이상 어떻게 동지들의 희생을 요구하겠소. 다만 나는 상부의 지시를 나 혼자 처리할 수가 없어서 여러분들과 상의하려고 한 것뿐이오." 홍철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 이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구구히 설명을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것이 자신을 변명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두려웠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쪽의 희생을 죽이고 일을 성취시킬 수 없을까 해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청년이었다. 그러나 가식은 없어 보였다. 홍철은 답답한 가슴이 말게 개이는 것을 느꼈다. 사실 항일운동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기약없이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과 같이 생사를 초월한 격렬한 투쟁은 그 빛을 많이 잃고 있었다. 모두가 지쳐 있었고, 그런 나머지 목적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고 개중에는 배신자도 더러 있었다. 임시정부(臨時政府) 자체도 사분오열되어 항일전선에 많은 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판에 젊은 대원들에게 여전히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귀중한 용사들이었다. 이들에게 더이상 어떻게 죽어달라고 요구하겠는가. 지령대로 움직이면 모든 문제는 간단히 끝날 지 모른다. 그러나 피로 맺은 동지들인 만큼 한 사람의 죽음은 전대원들의 가슴을 찢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상부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지시를 내려야 하는 김구(金九) 주석의 고충은 십분 이해되고도 남았다. "김구 주석의 의도는 사건을 성공시킨 후 이쪽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국제적으로 우리 민족의 피나는 투쟁을 주지시키고 국제여론을 환기시키자는 것으로 생각되오." "외도는 말씀 안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그 뜻에 따라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우리 동지들의 희생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주석에게도 이 뜻을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청년의 말은 완강했다. 거사에 참가는 하된 더이상 이쪽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지들은 자진해서 그 어려움에 몸을 던져왔었다. 거물급 인물을 쏘아죽인 다음 분명히 몸을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스스로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용사들이 눈을 감을 때마다 망막에 어른거리곤 했다. 그러한 거사가 있을 때마다 이쪽이 노리는 선전효과는 과분하리 만큼 충분한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까운 동지들의 목숨을 잃는다는 있었다. "잘 알겠지만, 이제 먼저 간 우리 동지들의 뜻이 이루어질 가망이 높아지고 있소. 도처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전해지고 있소. 벌써 태평양상의 중요 기지는 미군들이 거의 다 점령해 버렸소. 중국 대륙에서도 멀지 않아 곧 대회전(대회전)이 있을 것 같소. 장주석은 이미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소. 자체에 그간 부진했던 우리의 활동을 옛날처럼 다시 활발히 벌여 독립의 기회를 다져야겠다는 것이 계획인 것 같소. 중격의 임정뿐만 아니라 미주(美州)를 비롯한 전 해외동포들도 이 기회에 일제히 호응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소. 그러니까......이번의 지시는 대세라 생각하고 여느 때보다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소. 그렇다고 동지들의 희생을 더이상 요구하지는 않겠소. 이쪽의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적을 타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합시다. 주석께 여러분의 의견을 보고할 테니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맙시다. 다만......일군의 감시가 심해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욱 몸조심을 하시오. 급한 연락은 왕선생 집으로 하도록 하시오." "황가(黃哥)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 일단 동정을 살펴보고 나서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합시다." 홍철은 일어서서 청년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한 열기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시라고는 하지만 상해 중심가에는 역시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적응력이 강한 중국인들인 만큼 일제의 점령 하에서도 생활에 바쁘게 쫓기도 있었다. 삶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상해 거리였다. 1842년 이래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급속히 발전한 상해는 상공업의 중심지이자 중국 최대의 무역항으로서 명실공히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번화가인 남경로(南京路)는 세계각국의 인종들이 들끓고 있어서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언제 보아도 거리는 온통 인력거로 뒤덮여 있었고 궤도 전차와 무궤도 전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달리고 있었다. 2층 버스도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외국인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남경로 뒷골목으로 들어선 홍철은 어느 고서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경을 낀 중년의 사내가 안에서 고개짓을 해보였다. 홍철은 안으로 들어갔다. 책방에는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홍철은 손님과 등을 대로 서서 벽에 꽂혀 있는 책들을 뒤져보았다. 이윽고 손님이 나가자 그는 책을 제자리에 꽂고 안경낀 사내를 바라보았다. "왕선생님, 별일 없습니까?" 그는 능숙한 중국말로 물었다. 왕선생이라고 불린 중국인은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그 사람, 왔소." "누구 말씀인가요?" "원, 잊어먹다니......그 다리 저는 사람 말이요." "아아, 그래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홍철은 다급해서 물었다. 왕선생은 뒷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에 왔는데 들어가 보시오." 홍철은 벽 한쪽에 나 있는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책방 뒷쪽으로는 큰 가정집이 들어앉아 있었다. 자주 드나드는 곳이지만 홍철은 언제나 이곳에 들어올 때 마다 어려움을 느끼곤 했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늘인 소녀를 따라 그는 긴 마루를 걸어 갔다. 제일 끝방에 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청년이 잠을 자고 있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홍철이 흔들어대자 청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선생님....." "음,오랜민이군." 홍철은 청년의 손을 쥐어주었다. 청년은 눈물부터 주르르 흘렀다. 1년 전 홍철이 가족들 안부를 알기 위해 특별히 조선에 내보낸 청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이젠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1년만에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감옥에 있었습니다." 청년은 박박 깍은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쓰다듬었다. "왜? 무슨 일로?"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대라기에 잡아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래도 수상하다고......사상이 불온한 자로......" "나쁜 놈들......" "그런데 선생님......" 청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홍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는 성급하게 묻지 않고 침착하게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눈물을 닦더니 차마 말하기가 거북한 지 홍철의 시선을 피하면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홍철이 무거운 침묵으로 대답을 기다리자, 청년은 드디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따님은......지닌 겨울에......정신대에 끌려갔습니다." 홍철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정신대 말인가?" "네, 그렇답니다." "누가 그런던가? 우리집 사람이 그러던가?" 홍철의 눈은 크게 확대되고 입은 벌어져 있었다. "아,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집 사람은 못 만났는가?" "못 만난 게 아니라......사모님께서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홍철의 눈이 금방 눈물로 가득 찼다. "정말입니다. 따님이 정신대에 끌려간 후 식음을 전폐하신 채 몸져 누우셨다가 얼마 못가 그만......운명하셨답니다. 그리고......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홍철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담배를 종이에 마는 동안 그의 손은 자꾸만 떨렸다. 눈물이 손등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비통한 모습에 청년은 더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담배는 말아지지 않고 홍철의 손에서 자꾸 흩어지기만 했다. "산소는 어디다 썼던가?" 한참만에 홍철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정을 억제하는 힘이 놀라웠다. "마을에서 가까운 공동묘지에 모셨더군요. 먼 일가뻘 되는 사람들이 모신 모양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다시 방안을 채웠다. 홍철의 여윈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두 눈은 이상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내 딸애는 그 후 소식이 없다던가?" "네, 전혀......" "생사도 모르겠군."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엄청난 사실앞에 그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아내와 딸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좀더 변변한 남자를 만났다면 아내는 그렇게 외롭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더 똑똑한 아버지를 만났다면 여옥이는 그렇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내 탓이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자식에게, 아내에게 죄인이 된 것이다. 내가 그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 아내는 지금 편히 잠들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여옥이는 어디로 갔을까. 과연 살아 있을까. 죽일 놈들. 밖으로 나온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왜놈들은 한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야 한다.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 그는 술집에 들어가 독한 술을 마구 퍼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괴로움에 더욱 못 견딜 것 같았다. 마음은 평정을 잃고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고국에 있을 때는 주정뱅이라고 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대던 그였다.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와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일체 술을 끊었다. 그러던 그가 오늘밤 비로소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걸어갔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그것을 손등으로 닦곤 했다. 밤늦게까지 그는 그렇게 거리를 헤맸다. 그동안 그가 줄곧 생각한 것은 자신도 멀지 않아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고 죄스럽게만 생각되었다. 딸애를 생각하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빈민가에 자리잡은 어느 집 다락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그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