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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에 기록된 시조 할아버지 관련 번역문입니다.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왕조를 구한 시조할아버지의 활약상이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 통국통감 : 1485년(성종 16)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단군 조선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통사(通史)
고려인종 병오년 1126년
○ 3월 이자겸이 왕을 중흥택(重興宅) 서원(西院)으로 옮겼다. 왕이 의장(儀仗)과 호위도 없이 사잇길로 서원의 문에 이르니, 대경(大卿) 김의원(金義元)·최자성(崔滋盛)이 중흥택 집사로서 나와 맞이하고, 낭장 지석숭(池錫崇), 산원(散員) 권정균(權正鈞), 대정(隊正) 오함(吳含)이 산호정으로부터 남궁에 이르기까지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이때에 지석숭 등이 왕을 부축하여 북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이 그를 죽이려고 낭장 이적선(李積善)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지석숭이 왕의 옷자락을 잡고 다급히 구해달라고 소리치자, 왕이 이적선을 돌아다보며 꾸짖고 그 가슴을 찼으나 그래도 놓지 않아서 왕의 옷이 찢어지고, 복두(頭) 역시 기둥에 부딪쳐 찢어졌다. 이지미와 이지보가 문에서 왕을 보고도 계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는데, 최식(崔湜)만이 홀로 나와 절하고, 이적선을 꾸짖기를,
“성지(聖旨)가 계셨는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자, 이적선이 마침내 놓아주었으나 지석숭 등이 그래도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였다. 이때 환관 조영(趙寧)이 아첨하며 이자겸을 섬겼는데, 왕이 최식과 조영을 불러 말하기를,
“지석숭 등 3인은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니, 너희들은 나를 봐서 죽이지 말도록 하라.”
하니, 척준경이 이 말을 따라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왕이 당(堂)에 오르니, 이자겸이 그의 아내와 더불어 나와 절하고 손뼉을 치며 땅을 두드리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황후가 입궁하면서부터 태자 낳기를 원했고, 성인(聖人)께서 태어나시자 하늘에 오래 살기를 빌어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천지 귀신이 나의 지성을 굽어살피시는데, 오늘날 도리어 적신(賊臣)의 말을 믿어 골육을 해치고자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니, 왕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말이 없었다. 왕이 서원(西院)에 거처하면서부터 좌우 신하가 모두 이자겸의 무리여서 울적하고 무료하여 국사를 스스로 처결하지 못하고 행동과 음식 등도 모두 자유롭지 못하였다. 백료들을 근방의 사원으로 옮겨왔으나 머뭇거리기나 하며 인원만 채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더욱 위세를 부려 그들이 하는 일에는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생겼다 없어지고 찼다가 비고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이자겸의 악이 극도에 이르러 그 패망은 서서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지녹연 등이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음에 기인하여 임금 곁의 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지모가 부족하여 마침내 자신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데 이르렀다. 옛날 당(唐)나라 이훈(李訓)·정주(鄭注)가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감로(甘露)의 변을 일으켜 화가 나라에 미쳤는데, 그 일과 대략 비슷하니, 진실로 가탄(可嘆)할 뿐이다.”
이자겸이 척준신(拓俊臣)에게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증직하고, 미워하던 내시 25인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외가(外家)가 더욱 횡포를 부려 박승중(朴昇中)·허재(許載)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아첨으로 빌붙어서 위세를 부리는 것이 두려워할 만하였다. 왕이 몰래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과 모의하니, 최사전이 말하기를,
“이자겸이 발호(跋扈)하는 것은 오직 척준경을 믿기 때문인데, 상께서 만약 척준경을 얻게 되면 병권(兵權)이 내속(內屬)되어 이자겸은 한낱 필부가 될 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척준경이 국공(國公)의 심복이 되어 혼인까지 맺었고, 척준신 및 척순(拓純)이 모두 관병에게 해를 당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스럽다.”
하고, 점을 쳐보니, 길조(吉兆)를 얻었다. 그리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 집에 가 충의(忠義)로써 논하여 말하기를,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화복(禍福)이 두려운데, 이자겸은 궁중의 세력을 믿을 뿐 신의(信義)가 없으니, 그와 뜻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공은 마땅히 일심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공을 세우셔야 합니다.”
하니, 척준경이 마음속으로 옳다고 여겼다.
○ 왕이 척준경에게 교(敎)하기를,
“생각건대, 짐이 명철하지 못하여 이번에 흉도(凶徒)가 사변을 일으켜 대신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과인의 죄이다. 이에 자신을 반성하고 과실을 후회하면서 하늘에 맹세하여 신민들과 더불어 그 덕을 유신(惟新)하기를 바라노니, 경은 다시 분발하여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좌해서 후일의 어려움이 없게 하라.”
하였다.
○ 백관을 불러 금(金)나라를 섬기는 것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이자겸과 척준경만은 말하기를,
“금나라가 옛날에는 소국으로 요(遼)나라와 우리 나라를 섬겼으나, 이제 갑자기 흥하여 요나라와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정사가 닦여지고 군대가 강성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 나라와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섬기지 않을 수 없는 형세입니다. 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先王)들의 도리였으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을 척준경의 사저[私第]에 보내어 빨리 일을 보도록 재촉하고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을 꾸짖기를,
“너의 주인이 왕의 자리를 쏘고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이며, 너 역시 적몰되어 관노(官奴)가 될 것인데, 어찌 나를 욕하는가?”
하니, 척준경이 크게 노하여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의관(衣冠)을 벗어버리고 말하기를,
“내 죄가 크다. 마땅히 법사(法司)에 가서 스스로 변명하겠다.”
하고는, 바로 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자겸이 이지미(李之美)와 이공의(李公儀)를 보내 화해를 청하니, 척준경이 꾸짖기를,
“전일의 난리는 모두 너희들의 소행인데, 어찌 유독 나만 죽을 죄를 졌다고 하는가?”
하고는, 끝내 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니, 왕이 듣고는 이런 명을 한 것이다.
○ 여름 4월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가니 이자겸이 호종(扈從)하였는데, 백관들이 말 앞에서 절을 하는데도 이자겸은 태연 자약하였다. 왕이 옛 궁궐을 돌아보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 정응문(鄭應文)과 이후(李侯)를 금나라에 보내 신하라 일컫고 표문을 올렸다.
○ 척준경을 문하시랑 판병부사로, 이수(李壽)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이자덕(李資德)·허재(許載)를 모두 참지정사로, 김부일(金富佾)을 정당 문학으로, 이지미(李之美)를 판추밀원사로, 김부식(金富軾)을 어사대부 추밀원 부사로 삼았다.
○ 5월 이자겸이 반란(反亂)을 꾀하자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에게 토벌을 명하여, 이자겸과 그의 무리를 외방으로 유배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겼는데, 이자겸이 궁궐 남쪽에 우거하면서 북쪽 담장에 구멍을 뚫어 궁궐 안으로 통하게 하여 군기고(軍器庫)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가 집안에다 보관하였다. 왕이 일찍이 혼자서 북원(北園)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이때 이자겸이 십팔자(十八子 ‘이(李)’자를 파자(破字)한 것)가 왕이 된다는 비결대로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떡 속에다가 독(毒)을 넣어 올리니, 왕비가 몰래 왕에게 아뢰어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자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 왕비로 하여금 왕에게 올리도록 하니, 왕비가 대접을 받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엎어버렸다. 왕비는 바로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 척준경이 이미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데다가 최사전이 또 틈을 타서 설득하자, 척준경이 곧 계책을 결정하고 부주(附奏)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국공(國公)이 비록 난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반역한 형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짐이 만약 먼저 거사한다면 친친(親親)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천히 상황의 변화를 기다려서 대응해도 늦지 않다.” 하고는, 항상 중인(中人)을 시켜 엿보게 하였다.
척준경은 병부(兵部)에 있으면서 무관직에 대한 인사 행정을 맡아보고 있었다. 왕이 작은 쪽지에다가 손수 글을 써서 몰래 환관 조의(趙毅)를 보내 척준경에게 보이기를,
“오늘 숭덕부(崇德府)의 군사들이 병기를 지니고 궁전 북쪽을 통해 침문(寢門)으로 들어올 듯한데, 짐이 만약 해를 당하게 된다면 이는 실로 짐이 부덕한 소치이지만, 원통한 것은 태조(太祖)가 창업하시고 열조(列祖)께서 왕위를 이어오셨는데, 과인(寡人)에 이르러 성씨가 바뀌게 되면 이는 짐 혼자만의 죄일 뿐 아니라 실로 보좌한 대신들에게도 깊은 수치가 되니, 경은 도모하라.”
하니, 척준경이 곧 그 어필(御筆)을 상서(尙書) 김향(金珦)에게 보여 주었다. 김향이 꿇어앉아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를,
“왕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의리상 마땅히 죽을 각오로 일을 처리해야지, 공이 편안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척준경이 김향과 더불어 장교(將校) 7인과 서리·복례(僕隸) 20여 인을 거느리고 북문을 나섰으나, 갑자기 닥친 일이어서 지닌 것이 없어 각기 울타리의 말뚝을 뽑아 몽둥이로 삼아 금오위(金吾衛) 남교(南橋)로부터 궁궐로 들어가니, 조의가 맞이하여 외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마침내 광화문(廣化門)을 닫는데, 이공수(李公壽)가 뒤따라 이르니, 왕이 명하여 한쪽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이공수는 바로 이수(李壽)이다. 이때 순검 도령(巡檢都領) 정유황(鄭惟晃)이 1백여 인을 거느리고 군기감(軍器監)으로 들어가 병기를 나누어주고 연경궁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이자겸의 무리인 소경(少卿) 유원식(柳元湜)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불순하므로 즉시 죽였다. 척준경이 갑옷을 입고 급히 궁으로 들어갔는데, 왕이 천복전(天福殿) 문에서 나오는 것이 더디므로 척준경이 왕을 받들고 나왔다.
이자겸의 무리가 활을 쏘자 척준경이 검을 뽑아 한 번 호령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들어가 군사들에게 호위를 엄하게 하도록 하고, 척준경이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이자겸을 부르니, 이자겸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왔다. 척준경이 이공수와 의논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장군 강호(康好)·고진수(高珍守) 등을 참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이자겸이 부리던 자들이다. 사람을 나누어 보내 지당(支黨)을 체포하고, 왕이 광화문(廣化門)에 나와 군중들에게 고하게 하기를,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화(禍)가 집안에서 일어났는데, 충신(忠臣)·의사(義士)의 의거에 힘입어 해를 제거하였다.”
하니, 군중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기뻐 날뛰었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지미(李之美)는 변란을 듣고 1백여 인을 이끌고 광화문에 이르렀으나 들어오지 못하고 배회하며 서성거리다가 이자덕(李資德)·김인규(金仁揆)와 더불어 병부로 들어갔으나 역시 이자겸이 구류된지를 모르고 있었다.
저물녘에 이르러 순검(巡檢)이 병부에 나아가 이지미를 붙잡아서 검점소(檢點所)에 가두니, 이자덕 등은 놀라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왕이 연경궁으로 돌아오려고 근시(近侍)가 먼저 들어와 궁궐을 청소하였는데, 승려 의장(義莊)이 내침(內寢)에 숨어 있자 잡아서 팔관보(八關寶)로 보냈다. 이자겸과 그의 처 최씨(崔氏), 아들 이지윤(李之允)은 영광(靈光)으로, 이지미(李之美)는 합주(陜州)로, 이공의(李公儀)는 진도(珍島)로, 이지언(李之彦)은 거제(巨濟)로, 이지보(李之甫)는 삼척(三陟)으로, 의장(義莊)은 금주(金州)로, 이지원(李之元)은 함종(咸從)으로 유배하였다. 합문 지후(閤門祗候) 박표(朴彪)·문중경(文仲經), 직장(直長) 박영(朴永), 태사령(太史令) 양인(梁麟), 동관정(冬官正) 양해(梁), 내시(內侍) 이숙신(李叔晨)·이분(李芬), 대장군 김호(金好), 장군 지호(池顥)·지복신(池福臣), 낭장 최사염(崔思琰), 별장 위호(位好), 산원(散員) 송용중(宋用中)은 자식 30여 인 및 관노(官奴)·사노(私奴) 모두 90여 인과 함께 먼 곳으로 나누어 유배하였다.
박표는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여 이자겸에게 아첨하여 무릇 취렴(聚斂)하고 부익(附益)한 것이 모두 그의 소행이었기 때문에 이익을 노리고 벼슬을 얻으려는 자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 마침내 거부(巨富)가 되었으므로, 조정에서 더욱 이를 미워해서 중도에서 죽여 물에다 던져 버렸다. 또 신봉문(神鳳門)에 활을 쏜 자 1인과 이지언의 가신(家臣) 김충(金)에게 칼을 씌워 도시(都市)에 3일 동안이나 조리를 돌리고 먼 섬에 유배하였다. 그리고 그 친당(親黨)인 이자덕(李資德)·이인규(李仁揆), 동지추밀원사 김의원(金義元), 예빈경 이자원(李資元), 전중 소감 박효렴(朴孝廉), 내시 낭중 왕의(王毅), 지후(祗候) 이존(李存)을 모두 수령(守令)으로 좌천시켰다.
○ 선지(宣旨)하기를,
“짐이 어려서 조업(祖業)을 이어받아 외가(外家)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두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위임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포악한 짓을 함부로 하여 백성들과 나라에 해가 됨을 짐이 비록 알고 있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변란이 일어나자,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거를 일으켜 난을 안정시켰으니, 그 공로는 잊을 수가 없다. 마땅히 해당 부서로 하여금 논공(論功)하여 많은 상을 내려야 하고, 군기 소감(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도 뜻을 같이하여 은밀히 보좌하였으니, 아울러 공로를 포상하게 하라.”하였다.
○ 박승중(朴昇中)을 울진(蔚珍)에, 그의 아들 박심조(朴深造) 등 4인은 남쪽 변방에 유배하였다. 박승중은 허재(許載)·최식(崔湜)과 더불어 이자겸에게 아부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 부(府)를 세워 관원을 두었으며, 전(箋)이라 일컫고 절(節)이라 일컬은 것이 모두 박승중의 소행이어서, 이때에 이르러 간관이 논하여 배척한 것이다.
○ 척준경을 문하 시중으로 삼았는데, 척준경은 서열을 건너뛴 것이라 하여 고사(固辭)하고 받지 않았다.
○ 6월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 공신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서경유수사 상주국(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戶部事兼西京留守使上柱國)으로 삼고, 처 황씨(黃氏)를 제안군 대부인(齊安郡大夫人)으로 삼아 의복(衣服)·금은기(金銀器)·포백(布帛), 안장 갖춘 말 및 노비(奴婢) 10명, 전답 30결(結)을 하사하였으며, 이공수를 추충 위사 공신 판이부사(推忠衛社功臣判吏部事)로, 김향(金珦)을 위사 공신 호부 상서 지문하성사(衛社功臣戶部尙書知門下省事)로, 최사전(崔思全)을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 허재(許載)를 내보내 풍주 방어사(풍州防禦使)로, 아들 허순(許純)을 금주 방어 판관(金州防禦判官)으로 삼았다. 처음에 간관(諫官)이 허재를 박승중(朴昇中)과 같은 죄로 논하였는데, 척준경이 비호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좌죄되니, 여론이 시원하게 여겼다.
○ 왕이 이씨(李氏)를 폐비(廢妃)하고, 임씨(任氏)를 비(妃)로 삼았다. 간관이 여러 차례 상소하기를,
“이자겸의 두 딸은 상께 종모(從母)가 되니, 본디 배필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왕이 곧 두 비를 내보내고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 임원애(任元)의 딸을 비로 삼은 것이다. 비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문하 시중 이위(李瑋)의 딸이다. 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가 꿈을 꾸었는데, 황색 큰 깃발이 그 집 중문(中門)에 꽂혀 있었고, 기의 꼬리가 바람에 날리어 선경전(宣慶殿) 치미(尾)에 얽혀 있었다. 비가 태어나자 이위가 특별히 사랑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일 선경전에서 노닐게 될 것이다.”
하였다. 자라서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혼인하던 날 저녁에 김지효가 문에 이르자 비가 갑자기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사실을 말하여 돌려보냈다. 이튿날 점장이가 병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근심하지 마소서. 따님의 귀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국모(國母)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이자겸이 이미 두 딸을 왕비로 들인 뒤라 그 말을 듣고 미워하게 되어 즉시 상소를 올려 임원애를 개성 부사(開城府使)로 좌천시켰다. 1년 남짓 지나고 부의 관원이 꿈을 꾸었는데, 태수 청사(廳事)의 동량(棟梁)이 벌어지면서 큰 구멍이 뚫리고 황룡(黃龍)이 나왔다. 이튿날 아침에 관원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임원애에게 나아가 그 꿈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례하기를,
“사군(使君)의 집안에 반드시 특별한 경사가 있을 것이니, 공께서는 알아두소서.”
하였다. 또 왕이 일찍이 참깨 다섯 되와 황규(黃葵 해바라기) 석 되를 얻는 꿈을 꾸고는 척준경에게 말하니, 척준경이 대답하기를,
“깨[荏]의 글자는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씨 성을 후비(后妃)로 맞을 징조이며, 그 숫자가 다섯인 것은 아들 다섯을 탄생시킬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과 같으며, 규(葵)는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린다[道揆]는 규와 같습니다. 이른바 황규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이며, 그 숫자가 셋인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징조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고려인종 정미년 1127년
○ 김인존(金仁存)을 판이부사로, 이공수(李公壽)를 판병부사로, 김부일(金富佾)을 호부 상서 판예부사로, 김향(金珦)을 검교 태위 수사공으로, 김부식(金富軾)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최자성(崔滋盛)을 동지추밀원사로, 최사전(崔思全)을 이부 상서 지도성사로 삼았다.
고려인종 무신년 1128년
봄 정월 이자겸(李資謙)의 처 최씨(崔氏)를 소환하였다.
○ 최사전(崔思全)을 추충 위사공신 수사공 상서좌복야(推忠衛社功臣守司空尙書左僕射)로 삼았다.
고려 인종 / 신해년(辛亥年, 1131)
봄 2월 평장사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에게 큰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조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고려 인종 / 기미년(己未年, 1139)
○ 3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사전(崔思全)이 졸(卒)하였다. 최사전은 당초에 의술(醫術)로 진출하였는데, 척준경(拓俊京)을 깨우쳐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게 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갑자기 뛰어올라 재사(宰司)가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스스로 한미(寒微)한 지위에서 일어나 지극한 총애를 넘치게 받았다 하여 굳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다. 두 아들이 있으니, 최변(崔弁)·최열(崔烈)이다. 최사전이 각각 금으로 만든 술그릇[金]을 1구(具)씩을 내려 주었는데, 그가 몰(歿)하기에 미쳐 첩(妾)이 그 가운데 한 개를 훔쳤다. 최변이 노하여 채찍으로 때리려 하니, 최열이 말하기를,
“사람은 선군(先君)께서 사랑하시던 분이니,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 구휼(救恤)해야 하는데, 하물며 이 물건이겠습니까? 아우가 얻은 것이 아직 있으니, 형한테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가히 효성스럽고도 인자하다고 이를 만하구나.”
하고, 어서(御書)로 이름을 ‘효인(孝仁)’이라고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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