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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동안 끌어 온 전쟁]
검찰과 경찰은 전쟁 중이다.
이 전쟁은 광복이후 지속된 영토분쟁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은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경찰은 ‘검찰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 전쟁’이라고 하고, 검찰은 ‘적법한 친권자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반항’이라고 부르는 분쟁이다. 경찰은 이 싸움에서 ‘독자적인 수사권’을 쟁취하려하고 검찰은 경찰의 도전에 분노하면서 경찰의 수사조직과 인력마저 아예 검찰소속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온갖 법 이론과 외국의 사례, 역사적 고증들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새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일제시대 변호사 출신인 검사들의 문의가 빗발치자 미군정은 훈령을 통해 검사는 수사를 행하지도, 수사에 관여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법무국 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 1945. 12.29).
그러나, 소련과의 대치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다툼의 와중에 있던 미군정은 사회 안정을 취하고 공산주의의 발호를 제지하기 위해 일제식민경찰 출신 다수를 그대로 경찰관으로 임명하여 활용하게 되고 이것이 이후 60년간 수사제도 등 경찰제도 기형화와 검경분쟁의 원인이 된다.
1954년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을 제정할 당시 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엄상섭 의원이나 한격만 검찰총장 등 주도자들이 하나같이 “이론상, 그리고 언젠가는 경찰은 수사, 검찰은 기소로 분리가 되어야겠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는 검찰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부여해야한다”는 소위 ‘경찰자질 부족에 따른 시기상조론’을 내세웠다.
이 ‘시기상조론’이 이후 51년간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검-경 싸움 제1라운드 : ‘권력의 총애’를 받은 경찰의 우위]
수사권을 둘러싼 검경간 세력다툼은 주로 최고 권력자의 지지와 신뢰를 얻기 위한 충성경쟁의 형태로 행해졌는데 제1라운드는 경찰의 완전한 한판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충실한 사병역할을 수행했고 이강석이라는 경찰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 되면서 경찰의 권력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광복이 되면서 움츠러들었던 식민경찰 잔당들이 날뛰고 수사권자요 경찰수사의 법적 지휘자인 검찰이 되레 경찰관에게 면박을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경찰국가’였다.
건국초기 혼란을 온몸으로 막고 폭도와 공비의 공격에 목숨을 바친 경찰관들의 희생과 봉사는 선거부정에까지 개입한 정치경찰의 만행에 가려 빛을 잃었다. 독재 권력의 비호로 얻은 힘을 남용하며 국민을 등졌던 경찰은 그로 인해 호된 역풍을 맞게 된다.
[검-경 싸움 제2라운드 : ‘법의 칼자루’를 쥔 검찰의 우위]
4.19 시민혁명과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쿠데타로 중단된 후 전개된 기나긴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은 검찰의 ‘득세기’였다. 자유당 시절 경찰의 횡포에 시달린 악몽을 지우지 못한 검찰은 군사정부의 통치 구조를 설계하는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법률전문가로 참여해 헌법과 법률들을 군사독재에 맞게 고치고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운영의 효율성 극대화와 인권의 제약, 민주주의 억제에 그들의 지식과 재능을 헌신한 대가로 검찰은 형사사법제도를 검찰중심으로 새로 짤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그토록 기다리던 ‘법의 칼자루’를 쥐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헌법에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을 규정하고, 구속적부심 조항과 임의성 없는 자백의 증거능력 배제 조항을 삭제하는 등 ‘경찰수사권독립 주장의 싹’을 없애는 한편, ‘검사 마음대로’ 형사사건을 주무를 수 있는 헌법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법무부 소속 직원은 검사이외에는 누구도 수사할 수 없도록 검찰청 법에 규정한 것도 이 때다. 교도소 등 교정업무를 관장하는 교정국장 등 검찰업무와 관련 없는 형사사법 업무도 모두 검사의 ‘보직’에 포함되었다. 2-30대 새파란 검사들이 ‘영감님’소리 들으며 50대 경찰서장에게 반말하고 그 책상위에 앉아 서류 가져오라고 호통 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20대 후반의 새파란 검사 이건개씨가 ‘경찰개혁’의 사명을 띠고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된 것도 이 때다. 이후 경찰은 검찰업무의 뒤치다꺼리를 모두 도맡아 하기 시작하면서 업무과중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피의자 호송, 벌금미납자 소재수사, 검찰고소사건 수사대행, 검찰요구 정보수집 등...
[검-경 싸움 제3라운드 : 다시 독재 권력의 곁에 더 가까워진 경찰]
제5공화국 내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공안정국’이었고, 군을 투입한 광주항쟁의 유혈진압 이후 국제사회의 지탄과 압박을 받은 정권은 오직 경찰력만으로 시민의 항거와 노동현장의 투쟁과 학생들의 ‘운동’을 막아내야 했다. 경찰은 충성을 다해 독재 권력을 지켰다.
그 대가로 경찰은 수당도 추가로 받고 계급도 늘리고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개정이 필요한 것 이외의’ 거의 모든 대통령의 혜택과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찰과의 싸움에서 늘 ‘자질부족’, ‘무식한 경찰’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밀렸던 경찰의 숙원 하던 엘리트 양성기관인 경찰대학도 이 때 설립되었다.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가 경찰출신이라는 점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양 기관의 싸움보다는 ‘관계기관대책 회의’ 등을 통한 협력과 공조가 더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 노력은 주로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경로를 통해 권력자에게 희망사항을 전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 등 ‘고문경찰’의 이미지가 굳어진 것도 독재정권에 대한 충성경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절대 충성’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경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검찰도 독재정권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검-경 싸움 제4라운드 : 검찰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은 흔히 ‘검찰공화국’이라고 부른다. 검사출신인 박철언씨가 ‘황태자’로 불리며 정부 주요 장관직을 두루 차지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노태우 정권은 주로 ‘검찰권’을 이용해서 야당정치인들이나 재야운동가들을 탄압했고 기업들을 요리했다. 검찰의 위세에 경찰은 제소리를 내지 못하고 눌려지냈다. 경찰수사권 독립 이야기만 나오면 고위 경찰간부들이 이런저런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어 갔다. 검사들이 청와대 주요보직을 차지하고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고 안기부 등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5공화국이 설립한 경찰대학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경찰을 더 이상 정권의 시녀로 쓰지 말라’며 소위 ‘경찰중립화 선언’을 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 것도 이 때였다.
[문민정부의 휴지기]
참으로 오랜만에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권력으로부터 받은 탄압 받은 개인적 경험도 있었고 ‘3당 야합’의 오명을 씻을 필요성도 있어 독재권력의 비리를 밝히고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5공 최고실세 전경환, 6공의 황태자 박철언 등 경찰과 검찰의 과거 배후세력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검찰과 경찰 등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언과 드라마 ‘모래시계’로 상징되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검사’의 이미지가 대중의 요구와 부합하면서 검찰은 대통령의 친아들 김현철씨를 구속하는 등 전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선거공약과 ‘논의중단 지시’]
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찰 수사권 독립’과 ‘자치경찰제 도입’을 공약사항으로 내걸었다. 검찰에 집중된 권력의 분산과 경찰의 분권화가 민주주의 정착의 전제조건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공약은 모두 지켜지지 않는 ‘空約’이 되어 버렸다.
자치경찰제 도입 추진 작업이 법안마련 단계까지 진척되었는데 검찰의 반발로 ‘수사권 분권화’는 시작도 못한 상태다 보니 경찰 측에서 공약이행을 드러내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검찰이 반박 논리를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양 기관은 마치 전쟁을 치르는 적군에게 하듯 비난과 폭로를 해대기 시작했다.
경찰청장의 동생이 구속되자 검찰총장 부인의 비리첩보가 공개되었고 다시 경찰청장이 퇴임하자마자 구속되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양 기관의 엇갈린 주장들이 보도되었다. 집권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정권 출범 당시와 달리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혐의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자칫 검찰에 불리한 조치를 취하면 ‘검찰 수사 외압’ 내지 ‘검찰중립화에 역행’이라는 비난에 처하게 되자 ‘수사권’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대통령은 양 기관에 ‘당분간 수사권 관련 논의를 중단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공개지시’를 하게 된다. 덩달아 ‘자치경찰제 도입’ 작업 역시 중단되었다.
[참여정부의 탈 권력화와 사법개혁]
노무현 대통령 후보 역시 ‘경찰 수사권 독립과 자치경찰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그 전개과정은 국민의 정부 때와 사뭇 다르다. 정부혁신, 지방분권, 경제 개혁과 사회개혁이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짜여진 로드맵에 따라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치경찰제 역시 로드맵에 따라 진행되어 국회 법안상정 단계에 와 있다.
사법개혁 역시 급물살을 타고 있다. 국민의 참여, 공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그 핵심을 이룬다. 검찰이 작성한 조서 등 수사서류만 놓고 재판하던 과거 파행적인 사법관행을 탈피하고 공개법정에서 기소측과 피고측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증거와 증인을 내어놓고 논리와 법리를 다투는 ‘공판중심주의’원칙을 법제화하고 있다. 기득권을 잃을 검찰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어 보인다.
법조일원화와 배심제 등 국민참여형 재판, 로스쿨 도입,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등 과거 ‘사법고시 동문’인 소수의 법조 엘리트들이 돌돌 뭉쳐 전관예우하고 사회를 장악하던 과거와는 이제 이별할 준비가 완료되고 있다. ‘수사권 문제’도 역대 정권에서 보지 못한 ‘정면돌파’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사권 조정’이라는 대전제하에 분쟁의 당사자인 검경이 ‘협의체’를 구성해서 하고 싶은 말과 주장을 다 했다.
양측 추천 민간위원들이 ‘자문위원회’를 통해 사회각계의 입장과 바램을 더했다. “경찰수사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검찰의 부당한 지배와 개입을 방지하되 경찰수사에 대한 검찰의 준사법적 통제장치는 확고하게 마련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마련된 ‘합의’요, ‘조정의견’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그 결과를 모아 검-경 60년 전쟁을 마무리짓는 ‘입법화’절차만 남았다. 재판주재권을 제외 사법권력 모두를 독점하던 ‘검찰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고 검사들은 당혹스러움과 불안함에 느끼고 있다. ‘수사수조 개편’이나 ‘공수처 신설’, ‘공판중심주의 도입’ 등에 극렬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검-경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
그동안 검-경 전쟁으로 시민사회가 얻은 소득도 만만치 않다. 거대권력끼리 싸우며 서로 헐뜯다보니 자연스럽게 양 기관의 힘과 거품이 빠졌고 과거 권력의 총애를 받기위한 충성경쟁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봉사경쟁으로 바뀌어 앞 다투어 인권보호 대책을 내어놓고 잘못된 관행들을 개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고 얻은 것 마저 그리 탐탁치는 않다. 범죄의 예방과 수사, 기소, 형사정책 마련 등 본연의 임무보다 서로간의 세력 확장과 영역확대에 더 골몰하다 보니 국민생활이 개선되는 실질적 효과보다 홍보성 프로그램의 홍수가 이어졌고 본질적인 구조개혁이 아닌 비방폭로 심리에 의한 들추기다 보니 부패와 권력남용의 뿌리와 핵심은 드러나지 않았다.
검-경 전쟁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몇 몇 시행령과 규칙 개정 등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봉합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된다면 앞으로도 두 기관은 서로의 목적 달성을 위해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한편 국민을 호도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펼칠 것이다. 범죄자들과 범법자들도 어부지리를 노릴 것이다.
중국과 일본, 미국의 수사기관들은 한국 검-경의 ‘제 살 깎기 경쟁’에 당황하고 있다. 마약, 밀수, 조직범죄 공조수사의 파트너가 누군지 알기 어렵고 같은 나라 두 기관이 서로 예산 들여 방문하고 친하자며 덤벼드는 현상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범죄수사 공조에 있어 한국이 ‘물을 흐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진술조사 녹음 녹화’가 화두로 떠오르자 한국 검찰 대표단은 미국과 영국, 호주, 독일 등 세계 선진 각국의 경찰관서를 돌며 사례연구를 하고 협력요청을 한 후 돌아왔다. 당연히 경찰도 그들과 연락하고 방문하고 조사했다.
국민 혈세가 엉뚱한 출혈경쟁에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다. 경찰관들도 ‘이제는 더 이상 검찰 하수인 노릇 못 하겠다’고 내뻗기 시작했다. 사상 최고의 마약수사관으로 이름 높던 수원의 한 형사가 검사의 요구를 묵살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검찰에 체포되면서 그동안 잠잠하던 하위계급 경찰관들까지 검찰에 대한 사이버 전쟁을 선포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종전 선언’은 형사소송법의 개정]
이제까지 전혀 검찰의 ‘인권옹호자’로서의 역할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 증거다. 검경 각자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상호 견제하고 서로가 시민사회와 사법부의 객관적이고 냉철한 감시와 통제 하에 저항 없이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전쟁’이 아닌 선의의 ‘경쟁‘을 하며 사회의 안녕과 국민의 권리보호, 정의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멋진 경찰과 검찰’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미래지향적인 검경관계]
‘한일간 불행한 과거가 있었지만 미래가 더 중요하다’ 이 말의 전제는 일본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사과와 배상, 교과서 등을 통한 정확한 역사교육, 불법적 영토확장이나 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확약 등 ‘과거청산’이다.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따르지만 검경관계에도 상당한 시사성을 갖는 원칙이다.
최근 검경전쟁중 검찰과 검사 개개인의 경찰비하 내지 모욕발언들이 공청회 등을 통해 공개되고 경찰관들의 무분별한 검사비리의혹 제기 등의 대응이 횡행하는 상황은 하루빨리 진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법개정을 통한 확고한 관계정립 노력이 절실하다.
검사들은 ‘하수’라고 생각하는 경찰의 반발과 도전에 무척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검사가 경찰관의 존경와 신뢰를 얻는 길은 지배복종관계로 꽁꽁 묶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현장성과 고유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면 법률지식이 부족한 경찰관은 검사를
과거 독재권력의 ‘힘에 의한 지배’이데올로기를 벗어나 경찰의 자율과 책임을 존중해주고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지적하는 ‘한 발 뒤로 물러선 지도자’로서의 성숙한 검찰 모습을 기대한다.
언론과 정치권, 시민사회도 ‘검-경간 밥그릇 싸움’이라며 상투적인 양비론에 안주하는 종전의 태도에서 벗어나 지난 잘못된 역사가 뒤틀어 놓은 검경관계를 바로잡고 권력이 아닌 열린 시민사회의 감시와 통제 속으로 이들을 원위치 시키는 시대적 사명에 동참하길 촉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