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간 바빌론(Babylon Revisited, 1931)」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 in 피츠제럴드 단편선(조지현, 현대문화, 2008. P.428)
-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잃어버린 세대(1920년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미국 작가
* 프랑스 벨에포크(la Belle Époqu) 시대에 끝나는 시점은 인플레션과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평가 절하에서 온 것이리라. 1922과 1923을 주제로 삼은 들뢰즈/가타리는 평가절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피츠제럴드의 잃어버린 세대는 이런 시기에 망해서 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그림자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 [일반적으로 벨 에포크라고 하면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식민지 수탈에 의한 부가 유럽에 넘치는 시절이라고 한다. 프랑.위키(fr.Wiki)에서 벨에포크 설명: 프랑스는 프러시아 전쟁 패배 후에 1873년에서 1896까지는 거대한 의기소침(la Grande Dépression)의 시기라 한다. 좋은 시기는 19세기말에서 일차대전 이전까지이다. // 영어.위키(en.Wiki)에서는 1871–1914 사이라고 하여 폭을 넓혔다. 이런 사실을 영국이 전 세계 식민지를 통한 수탈로 국가독점 자본주의 성립시기이다. 게다가 평화의 시기를 두 가지 더 나열하였다. Roman Gaul: 50 BC–486 AD, Celtic Gaul: until 50 BC. / 그런데 프랑.위키(fr.Wiki)에는 켈트문화 시대나 로마 시대의 내용은 없다. 이는 제국주의 앙글로색슨의 가짜뉴스 만드는 버릇에서 나온 악의라 보여 진다. 이런 것을 일제부역자에 이어 꼴꽁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벩송이 말하는 실증성을 토대로 하는 “정확성(la précision)”이 중요하다. (51SLF)]
그러면 제목의 “다시 방문한 바빌론”에서 바빌론은 파리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즉 벨 에포크 시대에 파리를 살아본 주인공 찰리는 흥청거림이 지나간 파리의 황량함에서 바빌론 영광다음에 페르샤에 의해 폐허가 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식민지 부를 얻으러 왔던 미국인의 노마드의 이야기일 수 있다.
[참조 한위키: 현재의 바그다드 교외에 유적이 약간 남아 있으며, 기원전 600년경에 신바빌론 왕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 출신 왕비 아뮈티스를 위로하기 위하여 (식물이 있는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 아뮈티스는 건조한 사막으로 이뤄진 나라인 바빌론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바빌론에 건조한 정원이다.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침략하여 파괴했다. 궁전 안에 만든 높이 25미터, 1단이 넓은 장으로 5단 계단으로 되어 있는 테라스에 흙을 묻고 물을 위에까지 끌어올려 밑으로 흘리고 수목과 꽃을 심었다. 매우 큰 정원이어서 멀리서 보면 흡사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이 보였다. 가장 위 면적은 60평방미터로 추정이 된다.]
들뢰즈/가타리의 단편의 특성으로 보아, 찰리의 삶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에 대해서 이 단편 속에 있다. 그는 파산하기보다, 다른 곳 즉 프라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망하고 빈털터리로 파리를 떠났다고 하지만 말이다. (51QLC)
** 번역자의 이야기로는 찰리가 감옥을 갔다 왔고, 아직도 선량한 처형의 기대와 달리 산다는 것이다. 이중 대비가 중요하단다. 피츠제럴드는 자유와 감금을 대비하여 썼다고 한다. 피츠제럴드가 구상할 때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들은 바이런의 시 “쉬용 성의 죄수”에 영향을 입었다고 한다. (51Q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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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간 바빌론(Babylon Revisited, 1931)」 15-55
1. 웨일스 찰리씨가 딸 오노리어과 더불어 프랑스 파리에 다시 왔다. 예전에 만나서 같이 흥청거리며 다녔던 사람들의 소식을 묻는다. .
그는 처형 집에 우선 여장을 풀었다. 처형 메리언은 그에 대해 혐오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서 링컨은 그에게 여전히 예전처럼 사는 지를 묻는다. 그는 아니라고 하지만, 하루 돌아다닌 곳이 예전에 자주 다녔던 술집이야기를 했을 때 링컨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2. 딸 오노리어와 장난감 가게와 보드빌을 보러 가고자 한다. 딸은 장난감이 많아서 더 이상 사지 않고자 하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 장난감 가게에 가려 한다.
<제이름은 찰스 J. 웨일스이고 프라하에서 왔습니다.(27)>
딸을 딸의 이모에게 맡긴 것은 불어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프라하에 사니니까.
<갑작스럽게 과거의 망령들이 나타났다. 대학 동창인 던컨 세퍼와 30대의 사랑스러운 금발미인인 로레인 쿼럴스는 3년 전 몇 달을 하루하루 방탕하게 살도록 일조한 무리들 중 하나였다. (29)>
딸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 어머니 사진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3. <벌링턴(미국 버몬트 주 북서부도시)에 사는 여동생에게 이쪽으로 와서 집안일을 봐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오노리어가 제집으로 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35)>
그의 아내 헬렌 .. 그의 언니인 메리언의 기억
<“나는 죽을 때까지 헬렌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던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할 거예요. 뼛속까지 젖어서 덜덜 떨면서 제부가 문을 잠가버렸다고 하더군요.”(37)>
4. 찰리는 한때 돈 벌어 흥청망청 쓰다가 망하고 그리고 오랜 기간 후에 다시 회복했다. 그래서 딸을 데려가기 위해 파리에 왔다. 그런데 그가 파리의 거처를 처형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나, 처형부부가 찾아 왔다. 찰리는 처형의 허락을 받아야 딸 오노리어를 프라하로 데려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였다 - 해야 할 일들과 사랑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머무 많은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는 너무 지나친 애정으로 인해 아버지가 딸에게, 어머니가 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세상에 나갔을 때, 아이는 결혼 상대에게서 똑같은 맹목적인 애정을 찾으려 할 테이고, 아마도 사랑을 찾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사랑과 삶에게 등을 돌리게 되리라. (47) >
5. 찰리는 사업에 망한 것이라기보다 뒤비치기하고 또는 막차 탄 사람에게 넘기고, 프랑스 파리를 떠나 프라하로 간 것처럼 보인다. 딸은 처형에게 맡기고, 이제 그 딸을 다시 찾으러 왔는데, 처형이 찰리가 머물면서 하는 옛날 모습을 보고 질녀(오노리어)를 되돌려 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예전의 반 정도밖에 장사가 되지 않아요. 너무 많은 손님들이 모든 것을 잃고 미국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1차 폭락 때는 살아남았다고 해도 2차 폭락 때는 완전히요. 친구이신 조지 하트 씨는 무일푼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장님도 미국으로 돌아가셨나요?”/ “아뇨 난 프라하에서 사업을 하고 있네” / “주식 폭락 때 많이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랬지” (53)> - [*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의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전제들」 참조.]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그들이 그가 영원히 돈으로 해결하게 만들 수는 없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를 원했고, 지금으로는 그 사실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혼자만의 꿈들과 근사한 생각들을 가진 젊은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혼자가 되는 건 헬렌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전적으로 확신했다. (마지막 문단 전부)(55)>
# 역자의 말: 420-426.
[조지현(1973-) 세종대 교육학과졸... 번역에 종사.
<반면 「다시 찾아온 바빌론(Babylon Revisited, 1931)」의 경우, 피츠제럴드는 스스로가 이 작품을 뛰어난 단편 소설이라 평한 적이 있다. 사실 이 소설은 1930년대 그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쉬옹’의 지하 감옥을 방문한 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읽어주었던 바이런의 ‘쉬옹의 죄수’라는 시를 떠올리며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6개월 후 쓰인 단편은 자유와 감금이라는 이중적인 주제를 포함한 「다시 찾아온 쉬옹」이란 가제가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 속의 사치와 사악의 상징인 바빌론과 찰스 웨일스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갖고 싶어 하는 조용하고 적당한 가정이라는 대조된 모티브로 인해, 「다시 찾아온 바빌론」이라 불리게 된다. 비록 찰스 웨일스는 자신에게 양육권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에게 채워져 있는 족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소설 속의 바빌론은 찰리 웨일스의 방탕이 그 시대의 정신과 사건들이 일어나는 장소들처럼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우리들은 이 소설을 통해 피츠제럴드의 삶과 작품세계의 내적 그리고 외적인 슬픔을 직접 목격하고, 다시 인생을 쌓아 올리기 위해 애써 노력하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과거에 의해 패배하고 마는 이 가공의 죄수와 그를 비교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은 과거가 현재를 헛되이 흐르게 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425)> (3:11, 51QLD) (3:30, 51SLF)
* 참조 1.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Ch. 4. 20 novembre 1923: Postulats de la linguistique, pp.95-139).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1980).
[1923년 주제는 “1923년 11월 20일 막이 내렸다. 1년 전 오스트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끝은 갑자기 왔다. 좀 더 완만했던 프랑스 인플레이션에서처럼 놀랄 만큼 쉽게 끝이 왔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끝났던 것 같다. 11월 20일 옛 라이히스마르크는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되었다. 새로이 렌텐마르크가 도입되었다.”(51OLF)]
(51QLC)
* 참조 2.
바이런(Lord Byron)의 짧은 시 ‘쉬옹성’(On the Castle of Chillon)과 장문의 시 ‘쉬옹의 죄수’(The Prisoner of Chillon, 1816)가 있다. 이 성에 갇힌 신가가 보니바르이다.
보니바르(François Bonivard ou Bonnivard, 1493-1570), 사브와 신사, 제네바 애국자, 역사가. 그는 쉬용 성에 유폐되었다(1519-1521). 바이런(Lord Byron)의 시(Le prisonnier de Chillon 1816)가 있다. (51QLE)
설1896피츠제럴1931바빌론.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