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3. 낙동제일강산(洛東第一江山), 문산리 파평 윤씨 영벽정(暎碧亭)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이번에는 우리 고장 낙동강가에 있는 유서 깊은 정자 영벽정에 대한 이야기다.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汶山里) 낙동강변에 자리한 영벽정은 우리나라 최대 벌족 중의 하나인 파평 윤씨 대구 문산 입향조 아암(牙巖) 윤인협(尹仁浹·1541-1597)이 지은 것이다. ‘낙동제일강산(洛東第一江山)’이란 자신감 넘치는 편액을 내걸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 대구권 누정(樓亭) 문화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정자. 파평 윤씨 문산 문중의 랜드마크 영벽정은 과연 어떤 내력을 지닌 정자일까?
파평 윤씨 유래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이에 버금갈 정도로 요즘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족보’ 이야기다. 재미는 고사하고 실생활과도 상관이 없으며, ‘누구의 몇 대손, 몇 대조, 사돈의 8촌’ 하면서 더하기 빼기에다 곱하기까지 나온다. 게다가 온통 한자투성이다. 그런데 문화유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족보’ 이야기가 나올 때가 많다. 특히 문중 유산을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시골 장날 똥개 한 마리를 살 때도 어미가 무슨 종인지, 키가 큰지, 사나운지, 건강한지, 잘 짖는지 등을 꼭 물어본다. 개 족보도 이 정도인데 사람 족보야 더 말해서 뭣 하겠는가.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벽상삼한익찬공신 삼중대광 태사공 윤신달(尹莘達·893-973)이다. 그는 기이한 탄생 신화의 주인공이다.
신라 진성왕 7년(893)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연못에 구름이 자욱하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연못 위로 옥으로 만든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고을 태수가 제단을 마련해 기도하기를 여러 날,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에 사는 윤온(尹媼)이라는 노파가 옥함을 건져보니 그 안에 잘생긴 옥동자가 있었다. 얼굴은 용(龍)의 상이오,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日·月을 상징),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오(잉어),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북두칠성)이 있었다. 노파가 거두어 기르며 자신의 성을 붙였으니 그가 바로 윤신달이다.
파평 윤씨 문중에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윤신달의 5세손인 고려 대원수 윤관(尹瓘·1050-1111)에 관한 이야기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잉어 떼가 다리를 놓아주어 윤관 장군이 죽음을 면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평 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 대구 문산 입향조
파평 윤씨 대구 문산리 입향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일이다. 입향조는 시조 윤신달의 21세손인 아암 윤인협이다.(字는 德深) 그는 진사(進士)를 하고 성균관에서도 명망이 자자했지만 벼슬을 탐탁찮게 여겨 진사까지만 했다. 중년에 고향 한성부를 떠나 이곳 문산리 낙동강가로 내려왔다. 행탄(杏灘) 위 아금암(牙琴巖)에 영벽정을 세운 그는 인근의 임하 정사철, 송계 권응인 등과 교유하며 이곳에서 처사로서 여생을 보냈다. 조부는 상주 목사를 지낸 윤탕(尹宕), 부는 윤응벽(尹應璧), 어머니는 옹진이씨(甕津李氏), 부인은 성산배씨(星山裵氏)이며,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 문산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 제일의 정자, 영벽정
영벽정은 아금암이라 불리는 제법 높은 벼랑 위에 있다. 강변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영벽정을 만날 수 있다. 영벽정은 정면 4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다. 한낮에도 정자 뜰에 서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는 수령 300년이 넘는 회화나무 4그루와 향나무가 만들어 내는 나무 그늘 때문이다.
정자도 재실처럼 2가지 유형이 있다. ‘강학형’ 정자와 ‘풍류형’ 정자인데 둘 다 특정 인물을 기린다는 점은 같다. 대부분 정자는 경승지에 위치한 탓에 주변 풍광을 읊은 시판이 많이 걸려 있다. ‘낙동제일강산’이란 명칭에 걸맞게 영벽정에도 많은 시판이 걸려 있다. 정사철·우성규·송근수·서찬규·송병선·송병순·최익현·이억상·윤종대·채헌식·이병운·서필도·박승동·윤봉오 등의 시판이다. 이중에는 영벽정 창건자인 윤인협의 시도 있다.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영벽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남으로 와 경치 좋은 곳이 이 강가이니, 늙어감에 놀고 쉬게 작은 정자 지었네.
홀로 시서를 안고 한가히 쉰지 오래인데, 세상사 많은 뜻이 이 가운데 멈추네.
南來形勝此江汀 老去棲遲築小亭 獨抱詩書閒臥久 風煙多意箇中停
영벽정 관련 시 중에는 영벽정 주변 여덟 풍경을 읊은 ‘영벽정팔경(暎碧亭八景)’도 있다. 이는 성주의 생원인 문잠(文潛) 윤종대 (尹鍾大·1763~?)가 지은 것으로 그는 영벽정을 자주 방문한 인물이다. 제목만 살펴보면 1경 행탄풍범(杏灘風帆), 2경 다림연류(茶林烟柳), 3경 연포호월(蓮浦皓月), 4경 운정취벽(雲亭翠壁), 5경 비슬선하(琵瑟仙霞), 6경 아금어화(牙琴漁花), 7경 마천조람(馬川朝嵐), 8경 봉산석조(鳳山夕照)다.
에필로그
영벽정은 ‘문산월주(汶山月柱)’로 유명하다. 매년 음력 7월 17일 밤이 되면 보름달이 동쪽 강물 위로 휘영청 밝게 떠오른다. 문산월주는 이때 영벽정에서 달을 바라본 풍광이다. 밤하늘의 달과 강물 위에 비친 달그림자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이어져 마치 기둥을 세운 것 같아 ‘월주’라고 한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절경이라 예전에는 많은 시인묵객이 영벽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관찰되는 문산월주가 예전보다 더 볼만하다는 것이다. 강정보 조성으로 낙동강 수면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넓어지면서 문산월주가 더 장엄해졌다는 것. 인근에는 월주로 유명한 곳이 한 곳 더 있다.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와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를 잇는 노강진(老江津)의 노강월주(老江月柱)다.
영벽정 주변에는 식당이 많다. 강변마을답게 대부분 잉어찜 전문점이다. 파평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참고로 파평 윤씨는 ‘선지’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한다. ‘소피국’이라 하지 ‘선지국’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시조 윤신달의 아들이자 파평 윤씨 2세조의 이름이 ‘선지(先之)’이기 때문에 ‘피휘(避諱)’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