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댄다. 그럼에도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지난 2일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 준공식과 전시관 개관이 있던 날, 거제 칠천도로 향하는 풍경이다. 416년 전. 칠천량해전이 있던 그날도 어두운 먹구름에 비를 뿌렸을까. 세찬 바람에 바다까지 조용했을까. 이날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트막한 산언덕에 자리한 전시관은 조선수군의 뼈아픈 기억을 가득 안고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칠천량. 지금은 양식장의 하얀 부표가 바다를 점령하고 있지만, 눈을 지그시 감으면 당시 치열했던 전투장면이 스멀거리며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 칠천량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이 있는 언덕에서 서서 바라보는 칠천도 앞바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안내문이 서 있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는 귀청을 때린다. 검붉은 피를 흘리는 군인들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부서져 침몰하는 조선수군의 배가 가라앉는 장면에서는 더 이상 눈을 감고 있기가 힘들다. 눈을 떴다. 한 순간에 전투장면은 사라지고 평온의 바다가 펼쳐있다. 참으로 야속한 과거의 회상이자 현실 속의 풍경이다.
칠천량해전. 이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에 의해, 1597년 7월 16일(음력) 새벽 칠천도 앞바다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은 이때, 처음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겪는다. 이 패배로 인해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흐름이 뒤집어졌다. 조선 민중은 일본군이 저지르는 학살과 약탈 등 온갖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하늘거리며 타오르는 모형 불빛이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치유의 메아리라 이름 지은 추모의 바다다. 뒤로 선 조형물에는 아크릴 모형에 치열한 전투장면을 담은 그림이 색깔을 바꿔가며 보여준다. 잠시 고개 숙여 당시 목숨을 잃었던 1만 여 수군의 영혼에 애도의 묵념을 올렸다. 뒤쪽 벽면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나라 소식 들어보니 동쪽 왜놈이 / 전통말쌍구(傳通抹桑寇) 바다에 목을 지켜 수군을 쳐서 / 잠요하뇌사(潛邀下瀨師) 병선(兵船)이 파도 속에 뒤집어지니 / 과선아엄수(戈舡俄渰水) 통제사라 수사가 다 죽었다는군 / 도호총여시(都護摠輿屍) 한나라 장수는 능히 월을 베었지만은 / 한장능주월(漢將能誅粤) 주나라는 기산(岐山)으로 도읍 옮겼네 / 주거공읍기(周居恐邑岐) 한밤 중에 홀로 앉아 눈물 쏟으니 / 중소좌수체(中宵坐垂涕) 이 분통을 어느 뉘 알아주리오 / 우분유수지(憂憤有誰知)
"본국 수군통제사 원균 및 수사 이억기와 최호가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처절한 전투상황과 전투에 패한 당시의 심정을 솔직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 전시관은 아이들의 역사기행에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선 임진왜란 해전사가 간략하지만 알기 쉽게 요약돼 있기 때문이다. 임진란이 발발한 후 일본전선 26척을 파괴하며, 조선군의 첫 승리를 안겨 준 옥포해전(1592년 음력 5월 7일, 이하 음력). 거북선이 첫 출전한 사천해전(1592. 5. 29). 임진년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한산도해전(1592. 7. 8). 그리고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퇴로를 위협하여 한성에서 철수를 강요한 부산포해전(1592. 9. 1) 등이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5년 뒤 다시 일어난 정유재란(1597년). 이 전쟁은 조선수군의 뼈아픈 첫 패배를 안기는데, 바로 칠천량해전공원을 조성한 이유가 있는 칠천량해전에서다. 1597년 7월 16일.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 원균이 지휘한 전투로,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궤멸된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해전에서 조선전선 100여 척이 파괴되고 원균·이억기·최호 등이 전사하게 된다.
거제 칠천도, 역사공부와 함께 떠나는 가족여행지로 안성맞춤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명량해전(1597. 9. 16).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함대에 맞서 승리한 해전인 노량해전(1598. 11. 19).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등 10여 명의 장수가 전사하고, 7년간의 조선침략 전쟁은 마침내 끝을 맺는다는 기록이다.
▲ 영상관 영상관에는 국내 상설전시관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아이라이너 시스템을 통한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30석 규모로 20분간 ‘칠천량 해전 속으로’라는 전쟁 영상물로 오전 2회, 오후 5회 등 1일 7회 상영하고 있다.
영상관에는 국내 상설전시관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아이라이너 시스템을 통한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30석 규모로 20분간 <칠천량 해전 속으로>라는 전쟁 영상물이 오전 2회, 오후 5회 등 1일 7회 상영된다. 전시관은 ▲ 임진왜란 속으로 ▲ 조선수군을 만나다 ▲ 칠천량해전의 배경 ▲ 패배 ▲ 칠천량해전의 결과 등 총 5막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임진왜란 역사를 고스란히 알 수 있는 곳이다.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아직도 잔뜩 찌푸린 표정이다. 1만여 명의 조선수군이 목숨을 잃은 칠천량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온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 전시관 마당에는 '평화의 바다'라는 조각물 하나가 서 있다. 칠천량 바다를 보며 나라를 위해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고귀한 넋을 다시 한 번 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칠천량해전공원 주변으로는 수심이 얕은 옥계해수욕장이 있다. 넓은 백사장은 아닐지라도 가족단위 피서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고둥도 잡고 작은 게도 잡는 체험도 즐길 수 있다. 캠핑을 즐기는 여행자라면 주변에 자동차 전용 캠핑장이 있어 가족나들이에 알맞다. 올 여름 가족과 함께 푸른 바다에서 더위도 피하고 역사공부도 하는 안성맞춤 여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