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 : 8 - 18절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높게 평가를 합니다. 사실 그럴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견주어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인데 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엘리야가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죽은 사람을 살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신악성경에서는 예수님, 베드로, 바울 정도이고 구약 성경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정도밖에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도 못 가지고 있었던 능력이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 보여 준 표적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오병이어와 맞먹는 기적이었습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말아서 요단강을 치니까 갈라지는 기적도 보여 주었고, 극심한 가뭄의 때에 기도를 통해 비를 내리게 했던 사람도 엘리야였습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띄엄띄엄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엘리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런 예언의 말씀이 있는데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었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아브라함이나 다윗을 말하지 않고서는 그 정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는데 엘리야도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에 대해서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해 주셔서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도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니 기도해라. 그러면 동일한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시겠다’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말씀 속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라는 지역에 가서 한 사람을 고쳤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장애인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현장에서 복음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딱 보니까 저 사람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여겨질 정도로 사모함으로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사람을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울의 선포를 듣고서는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이 아니라 신인데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들이다.”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부르기 시작을 했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르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 최고의 신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 신의 대변인 격인 신이었는데 언어를 지배하는 신이었습니다. 바울을 그런 신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일어서라”고 큰 소리로 외친 사람은 바울이었는데 바울은 신의 대변으로 생각을 했고 오히려 바나바는 제우스 신으로 생각을 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헤르메스는 언어를 다스리는 신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증거 했던 사람이 바울이었고 또 소리를 쳤던 사람도 바울이었다는 점에서 바울을 언어를 다스리는 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바나바의 풍채와 성품에서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고 또 반대로 바울의 외모는 절대 제우스 신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그와 같이 판단하고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밖에 있던 제우스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는 바나바와 바울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자 했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런 상황을 포착하고는 옷을 찢으면서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다급하게 말을 하며 말렸던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말씀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엘리야든, 바울이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그들에게 이와 같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종종 착각을 하고 오해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을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밝혀 주시고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고 우리는 도저히 흉내 내지도 못할 그런 인생인 것 같아서 아애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에게서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하나님께서 몇 몇 사람들에게만 그런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는 능력을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16:17,18)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원칙이고 믿음 안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하지 마’ ‘안 돼’ 이런 말들을 너무도 많이 듣고 자라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설사 어렸을 때 그런 과정 속에서 자라났더라도 지금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바울과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말씀 증거를 통해, 순종을 통해 이와 같은 표적과 기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할 수 있다! 우리도 능히 못할 일이 없다!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고, 뱀을 집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새 방언을 말하고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나음 받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증거 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이고 권세이고 은혜인 것을 모르고 믿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이걸 모르고 평생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로 던질 수 있는 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고 뛰는 것은 일도 아니고 비가 삼 년 육 개월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안 오게 할 수 있는 능력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은 기독교 서적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에서도 꽤 오랜 동안 베스트셀러가 됐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공감을 줬던 책이었는데 믿음은 긍정 정도가 아닙니다. 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힘이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한 대학에서 선언을 합니다. '10년 이내 인간이 달 위를 걷게 하겠다!' 그러나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케네디는 그들을 불러 그 일이 왜 불가능한지 명확한 이유를 대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연구결과를 총동원하여 '유인 우주선이 달 위에 착륙할 수 없는 이유'를 너무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는 더 많은 과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비록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총격으로 암살당하지만 그가 바란 대로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인류 최초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긍정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힘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서 살아야지 늘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가까이 하면 자신에 대한 편견에 갇혀서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는 자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을 했을 정도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고 은혜이고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과 권세와 복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엘리야나 바울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제가 드린 말씀들이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틔루키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어진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그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 어찌 잠들었는가?”하고 왕이 여인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이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나 엘리야처럼 그런 확신만 가지면 됩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야나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밝혀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첫걸음을 꼭 회복해야 엘리야를 통해, 바울을 통해 보여 주셨던 크고 놀라운 일을 성도님들께서도 계속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을 성도님들도 경험하면서 사도행전을 계속해서 써내려갈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