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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어린이도서연구회 전남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김진영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권정생, 한 시대의 고향
방송 : 2007년 9월 25일 밤 10시
채널 : KBS1
연출 : 유동종
작가 : 오정요
기획의도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탑리 노인들은 많이 놀랐다고 한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전국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걸 보고 놀랐고, 병으로 고생하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연간 수 천만원 이상의 인세수입이 있는 분이란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10억원이 넘는 재산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조목조목 유언장에 밝혀 놓으신 걸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 도종환, 경향신문 2007.5.31
동화작가 권정생은 ‘가난’의 상징이다. 권정생은 한국 아동 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로 생전에 천여편의 동화를 남겼지만, 그 자신이 평생동안 소유해 본 것은 다섯 평짜리 오두막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10억여원의 유산과 지속적으로 나오는 천여만원대의 인세 전부를 북한 어린이에게 남겼다. 그로서 그는 마치 진정한 ‘가난’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스스로 자신의 ‘가난’을 완성 짓고 떠났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한 시대의 고향’은, ‘가난’을 온 몸으로 실천하며 살다 간 권정생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서,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며 한 시대가 도달해야 할 고향이라고 봤던 곳은 바로 '가난한 어머니의 삶‘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요 내용
“돌아가시기 직전 선생님은 산소호흡기의 고무호스가 꽂힌 입을 움직여 무언가 맹렬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입모양은 ‘어메’였습니다. 그 ‘어메’ 소리를 2-3분간 안간힘을 쓰면서 지르시더니 더 이상 입모양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김용락, 한겨레 신문 2007.5.21
권정생의 죽음, 칠십년의 고통과 축복
1937년생이니 꼭 칠십년을 살았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 그러나 권정생에게 그 칠십년은 너무 길었고, 그와 더불어 산 시대에게 그 칠십년은 너무 짧았다. 평생을 전신결핵에 시달리며 하루를 사는 게 기적에 가까웠던 권정생에게 칠십년은 너무 길고 참혹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와 한 시대를 건너온 동시대인에게 그가 살아낸 칠십년은 다시 만나기 힘든 축복의 생이자 아름다움이었다.
“권정생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시니까 속상해요. 아주 많이 속상해요. 제가 할아버지랑 약속할 게 있어요. 세상이 저지르는 나쁜 일들 싸우면서 살게요. 안 좋은 건 안 좋다고 말하면서 살게요. 착하게 살게요. 할아버지도 하늘에서 착한 분들과 외롭지 않게 지내세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 유연수, 기찻길옆 작은학교 6학년 (유연수는 2007년 5월 20일 권정생의 영결식장에서 이 편지를 읽었다.)
권정생, 한 시대의 상징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는 그 단 한마디다. 그러나 그 단순한 어휘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게 또 권정생이다. 권정생의 무게감은 단지 그가 <몽실언니>나 <강아지 똥>같은 한국 아동문학의 고전을 만들어낸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권정생은 그의 삶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상징이자, 그 자신이 한 시대의 결과였고, 그 자신이 한 시대의 꿈이었다.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식민지 이주민의 출생, 온갖 풍상을 겪다 급기야 걸인으로까지 전락했던 최악의 가난, 평생 동안 천형처럼 따라다녔던 전신결핵의 고통, 조그만 시골교회의 종지기, 수십편의 동화집과 동시집을 남긴 이후에도 여전히 ‘빌뱅이 언덕’의 오두막을 고집했던 청빈의 상징까지...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의 삶은 그대로 ‘삶이란 무엇이며 문학은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화두가 되었다.
“이렇게 말재주를 부리지 않고, 진솔하게, 혹은 뜨겁게, 우리 겨레의 마음을 노래한 시가 우리 아동문학에서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 소박한 시들이 무조건 감동을 주는 것은 항상 가난하고 약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선생님이 온 몸으로 피와 눈물로 썼기 때문입니다.” - 이오덕, 권정생의 동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발문 중, 1987년, 지식산업사
권정생과 이오덕, 한국아동문학사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
이오덕이 없었다면 권정생은 없었다. 그리고 권정생이 없었다면 이오덕이 그토록 확신에 차 제시하던 한국아동문학의 희망 또한 한결 헛헛했으리라. 이오덕과 권정생의 만남 속에서 한국아동문학은 비로서 꽃을 피웠고 비로소 제 이름을 가졌다.
교회의 종지기였던 권정생이 처음 세상에 발표한 글은 <강아지 똥>이었다. 조그만 기독교 잡지에 실렸던 그 동화 한편은 사실 그대로 세상에 묻힐 수도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이오덕은 그 길로 교회 종지기였던 권정생을 찾아가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30년간에 걸친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때부터 권정생은 ‘쓰고’ 이오덕은 ‘발표하는’ 두 사람의 역할이 시작된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글에서 한국 아동문학의 희망을 봤고, 아름답고 정직한 글쓰기의 한 전형을 봤다. 두 사람의 만남이 한국아동문학의 한 시대를 열었고 한 시대를 지켰다.
“백만명의 독자보다, 단 백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이 읽어준다면, 더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지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글 너무 쓰지 마시고 쉬시도록 바랍니다. 선생님은 좀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 이오덕이 권정생에게 보낸 편지 중
‘어머니’에게로 가는 70년간의 길
죽는 순간까지 ‘어메! 어메!’를 외쳐 부르다 갔다는 권정생. 그의 칠십년의 생애는 한마디로 압축하면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인 ‘어머니’의 상징임과 동시에, 모든 것들의 ‘고향’의 상징이었다.
그가 부르는 어머니라는 한마디에 한 시대를 통과해온 ‘가난’과 ‘슬픔’이 있고, 그가 부르는 어머니라는 한마디에 한 시대가 도달하고픈 ‘그리움’과 ‘꿈’이 있다. 그는 전 생애를 던져 어머니의 가난을 껴안았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했으며, 어머니의 넉넉한 품을 그리워했다. ‘어머니’라는 단 하나의 어휘로 한 시대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그는 가장 단순한 작가임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작가였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 추우셨던 어머니 / (...)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 앞산 가득 뒤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 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 오래 오래 살았으면. - 권정생,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권정생, 한 시대의 고향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도달했을까. 그의 유언장을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도 ‘어머니 없는’ 이 세상을 안쓰러워했고, 슬퍼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어메! 어메!를 외쳐 부른 건...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의 가슴’과 ‘어머니의 용서’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이제, 권정생은 포기하지 않았던 그 꿈으로 하여, 그 자신이 하나의 ‘어머니’,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한 시대의 가난과 슬픔, 한 시대가 품었던 그리움과 꿈의 내용이 ‘권정생’이라는 하나의 어휘 안에 모두 있다. ‘권정생’이라는 어휘는 단지 한 아동문학가의 이름이 아니라, 한 시대가 거쳐 오고 한 시대가 도달해야 할 ‘고향’의 다른 이름이다.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 권정생의 마지막 유언 중
방송 보기에 앞서 다음 글을 읽었으면 합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져 TV를 통해 나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과 다르게 비춰지더라도 우리가 아는
권정생선생님의 뜻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지요.
아랫글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동화작가 박기범씨의 글입니다.
방송에 비춰질 선생님의 삶이 잘못 알려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져 함께
읽어보고파 올립니다.
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어제 저녁 조탑에 올라갔다. 들어갈 때는 해가 막 저물고 있었는데 금세 어둑해져 걸음마다 발딛을 자리를 골라야 했다. 여기도 비가 적지 않게 왔을 텐데, 바람도 많이 불었지. 집 앞 평상을 덮은 노란 장판이 뜯겨 너덜너덜하다, 방에난 작은 창을 막아 놓던 비닐도 너풀너풀이다. 이미 결정내린 집 보존 문제에 다시 무슨 시비를 걸고픈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모습은 너무도 쓸쓸하고 아프다. 깨끗이 그대로 풀과 나무의 땅으로 돌려 주었으면 좋으련…….
손수 심어 놓았다던 어린 포도나무에는 네 송이 매달린 것 그대로 쪼그라 들어 있다. 한 알 따다 입에 넣으니 지리한 비에 물을 많이 먹었는지 단 맛이 없어. 빌뱅이로 오르는 집 뒤꼍에는 무성한 풀숲을 끌어안은 넝쿨 가지가 누런 호박들을 품고 있어. 반 보다 조금 배를 불린 진노란 달이 떴고, 매미들도 이제는 다 갔나 봐. 스산한 바람 소리만. 추석이에요, 하얀 쌀 가루 빻아 어머니랑, 목생 형님이랑 즐겁게 드세요. 그 날 밤에 텔레비전에서 뭐 할 건데, 그거 보고 속상해하실지도 모르는데…….
25일이 될지 26일이 될지, 그 두 날짜 중 밤 열 시나 열한 시에 나가게 될 거라 하더니 편성일자가 정해진 모양이다. [추석기획]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한 시대의 고향, KBS1, 25일(화) 22:00
방송에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할아버지의 삶과 작품에 대해 말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할아버지와 가깝던 벗들이던 선생님들과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 그리고 여러 평론가 분들의 이야기들. 처음 방송국에서 목수학교로 찾아올 때는 나도 그 많은 둘레 사람들의 인터뷰 한 꼭지만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것이 방송을 찍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했고, 방송 제작팀과 함께 할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함께 더듬어 보면 좋겠다 했다. 감히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내가 마음이 끌린 것은 방송에 얼굴을 비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다녀볼 수 있다는 데에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 하면서 촬영은 목수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장례와 영결실이 이어지던 때 방송국에서 나온 피디 분이 혹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냐 해서 나는 이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전한 일이 있는데, 프로그램 구성안의 배경은 그 글들을 바탕으로 해 짜여진 거였다. 목수학교부터 시작해 카메라는 내 뒷모습을 찍는 것으로 해서 38번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안동 길, 그리고 조탑의 집과 빌뱅이, 일직 교회, 마을에서의 모습들을 담는 것으로 시작해 그 뒤로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들. 나병에 걸린 목생이 형님이 숨어 살다 굶어 죽었다는 의성 길안의 나환자 마을, 떠돌이 거지 시절 할아버지가 지났을 그 어느 새벽의 간이역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하던 곳과 책을 빌려다 읽었다는 계몽서점과 그곳을 대신하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 초량동 어딘가, 그 시절 가난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까치 고개 산비탈 마을, 바닷가……. 그렇게 방송국 팀이 일러주는대로 할아버지가 걸은 길을 찾으며, 그리고 지난 주까지 이어지고 있던 유물정리 일들을 하면서 새롭게 조각조각 맞춰지는 할아버지의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곤 했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그 말이 그래서였구나, 그 때 그러셨구나……. 그랬기에 방송 일로 다니던 그 시간들은 소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다시 만나는 시간들, 그리고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또다른 날들을 만나는 시간들.
방송을 찍는다는 것에는 생각지 못하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장면 하나 하나를 찍는 일은 무척이나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논픽션 다큐로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짜임을 가진 이야기에 담아내게 할 때에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연출이 있어야 했던 것. 나는 마치 어설픈 배우가 되기라도 한 듯 걸은 길을 걷고, 또 걷고, 되돌아와 다시 걷고, 한 번 더 걷기를 많게는 십여 차례 해야하기도 했다. 조탑 큰 길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데까지만 삼십 분도 넘게 걸렸던가. 걸음이 너무 빨라요, 길 안 편으로 걸으세요, 이쯤 와서는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미안해요 한 번만 더……. 거기에다가 방송을 하는 분들로서는 화면 밝기 같은 것을 맞춰야 했기에 힘들여 조명을 맞추어 놓으면 구름이 지나 해를 가리거나, 흐리던 하늘에 잠깐 볕이 비추거나 하면 그것도 엔지, 다시 가야 하는 일이 되곤 했다. 십여 미터 안 되는 길을 걷는 것만도 다시, 다시, 다시, 한 번만 더, 한 번 더요……. 변소에 들어가는 것만도 한 열 번은 더 들락날락했던가. 그 변소 문을 계속해 여닫으면서 내내 할아버지가 이걸 보며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돌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방송하는 분들 처지도 생각할 수밖에. 그 분들로서는 가장 잘 보여질 수 있게 하려 애를 쓰는 것일 텐데. 방송이라는 걸 잘 모르기는 하지만 영상도 하나의 언어라면 말로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화면에 담는 장면의 구도와 빛깔, 속도, 떨림 같은 것 모두가 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것일지니. 힘들었다면 그런 것이었다. 너무도 익숙치 않은 카메라와 그 앞에서 몇 번이나 다시 해야 하는 일. 한껏 마음을 모아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몇 번 되풀이하게 되는 똑같은 움직임에 어느덧 나도 모르게 마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기도 했으니.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허덕이며 오르는 것도 몇 번을 다시, 또 다시, 한 번 더. 웃으며 할 일이 아닌데도 돌아서면 낯선 그 일들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걱정은 촬영이 거의 끝나갈 쯤부터였다. 말 없이 그런 장면들을 곳곳에서 찍고 있기에 나는 그저 그러한 장면들이 화면으로 나가면서 어떤 나레이션 같은 것이 함께 흐르겠거니 했는데 우연히 보게 된 자세한 구성안을 보니 그 아래 흐르는 이야기가 나를 대신한 성우가 내 독백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전혀 내 마음도 아니고, 내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도 아주 달랐다. 할아버지의 작품이라거나 할아버지의 삶을 독백해 말하는 그것은 전혀 내 것일 수가 없었다. 자꾸만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 십억과 다섯 평 오두막에 초점을 맞추는 얘기들에, 할아버지의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랄지, 심지어는 마지막 맺음을 당신이 남긴 책들에 우리의 구원이 있을 거라는 식의 그 무엇들까지……. 놀라 피디 님에게 얘기를 했다.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아무리 방송 제작진 나름의 의도가 있고 기획이 있다지만 제가 하는 독백으로 내 보내는 것을 이렇게 제 마음과 다르게 할 수 있는지. 내게는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 십억이 아니라 십원이어도 권정생은 권정생이고, 당신이 다섯 평 오두막이 아니라 열다섯 평 연립주택에 살았어도 권정생은 내게 권정생일 거라고. 나는 그의 가난한 살림이 눈물겹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고. 그건 가난을 선택한 선생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일 텐데요, 아니에요, 그리고 그 결말, 선생님이 남긴 책들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말조차 너무도 달라요. 책이 책으로만 남는 한 그것은 아무 부질없는 거라는 건 선생님이 늘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자동차를 타는 것에 대해, 환경에 대해,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일이 없어요, 오히려 선생님은…… 이러한 것들은 선생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가까이 했던 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러한 내용의 독백을 하는 것으로 방송에 나가게 되어야 하는지…….
그 뒤로 머리가 너무 아팠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지……. 피디 님은 내가 한 얘기들을 듣고 난 뒤 얼마 전 구성안을 보내줘 이것을 직접 수정해봐 달라 했고, 나로서는 나름껏 짜여진 구성안의 틀 안에서 최소한으로 고쳐 보내기는 했지만 그 뒤로 아직 연락이 없다. 다시 편지를 보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묻는데도 아직. 막상 당일 날 방송이 나와봐야 알 수 있는 것인지. 방송이라는 것은 속성상 그럴 수 밖에는 없는지.
여전히 걱정이 놓아지지는 않지만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일이고, 그 방송으로 해서 져야할 무게가 있다면 고스란히 져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그리고 피디 님과 함께 다니는 시간 동안 그 분으로서 할아버지께 갖는 진정이 누구 못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으니 너무 걱정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다만 할아버지의 모습, 할아버지의 삶이 텔레비전이라는 네모상자 안에서 굴절되어 비춰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하얀 달빛에 실바람이 일고
초가 지붕 위엔 박꽃도 필까
누나 얼굴 같은 하얀 박꽃이 필까
조롱조롱 애기박이 열리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오는 걸까
바가지가 둥글둥글 굵어지는 가을이 오는 걸까
어머니는 사기 요강에 오줌 받아
박넝쿨 구덩이에 부어 넣으실까
바가지에 딴딴하게 영글라고
오줌 받아 부으실까
바가지 타서 말리시며
어머니는 시집간 귀분이 생각하실까
거기서도 추석이 있을까
설날이 있을까
어머니는 추석에도 외로우시겠지
어머니는 설날도 외로우시겠지
아직도 아들딸 이승에 두고 가셔
어머니는 문구멍에 귀 기울이시며
눈물지으실까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가운데 열 다섯 번째 연
첫댓글 광주지회에 올라온 글을 지부김진영 교육부장님께서 지부 카페에 올리시고 제가 또 퍼왔습니다~ 이 글 읽고 나서 텔레비전 보면 훨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