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日 왕권 상징한 가야의 神劍
『노래하는 역사』 연재가 막바지에 이른다.
오늘은 다소 긴 글이지만 작가와의 이별이 아쉬워 발췌하지 않고 성의껏(?) 그대로 옮겨보고자 한다.
「일본서기」엔 천지왕 8년(668년)에 일어난 일본 최고의 보물 도난 사건에 관한 기술이 있다.
일본 왕실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삼종(三種) 신기(神器)가 있는데 ‘구사나기’라는 이름의 대도(大刀), 동경(銅鏡), 곡옥(曲玉)으로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행(道行)이라는 스님이 신검(神劍) ‘구사나기노쓰루기(草薙劍·くさなぎのつるぎ)’를 훔쳐 달아나다 세찬 비바람 속을 헤매다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칼은 앞서 연재한 <#31 일본 역사책 속에는 예맥(濊貊)도 있다!>편에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스사노오라는 신이 여덟 개의 머리를 지닌 구렁이와 싸워 이겼을 때 그 구렁이 꼬리에서 나왔다는 칼이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고유 명사 등은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어(漢語)가 아니라 한자의 훈독 또는 음독으로 빚어지는 발음을 빌려 우리의 고대어를 표기해놓은 일본식 이두체이다.
따라서 칼 이름 ‘초치(草薙)’는 한자의 뜻 그대로 ‘풀베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초치(草薙)’의 일본식 훈독은 ‘구사나기(くさなぎ)’인데 이 발음을 우리 고대어에 대입시키면 요술처럼 그 의미가 떠오른다,
‘草’는 일본 훈독으로 ‘구사’이고 ‘薙’는 ‘나기’이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금관가야’는 ‘狗邪韓(구사한)’으로 적혀있다.
중국식 발음으로 하면 ‘가야’라는 음이 비슷하게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狗邪’의 우리식 한자 음독은 ‘구사’이고 일본말로 ‘풀’을 뜻하는 ‘구사(くさ)’와 거의 동음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저술자는 ‘구사’로 읽히는 ‘草(초)’로 ‘금관가야국’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기(なぎ)’는 우리 고대어에서 ‘건국왕’, ‘시조’를 뜻했다.
따라서 ‘草薙劍·くさなぎ’라는 이름의 칼은 금관가야 건국왕의 칼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칼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草薙’를 우리 이두식으로 읽어보자.
‘草’는 옛 훈독으로 ‘새’, ‘薙’는 음독으로 ‘치’ 합치면 ‘새치’이다.
‘새’는 ‘쇠’의 옛말 소리이고 ‘치’는 ‘왕’의 옛말이니 곧 ‘무쇠왕’으로 풀이된다.
금관가야는 우수한 제철 기술을 지닌 강력한 국가였으니 임금도 무쇠 왕이라 불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따라서 ‘草薙’는 일본식으로나 한국식으로나 금관가야를 이중으로 나타낸 교묘한 표기이다.
그러니 금관가야 시조의 칼이 고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 세력이 일본에 일찌감치 진출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칼이 역대 왜왕의 왕위를 상징했다는 것은 개척기 일본에서 금관가야 세력의 힘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그 칼은 일본 중부지방인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아쓰타 신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스님 도행이 여기서 칼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다.
도행스님은 이 신궁 근처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유명한 절을 세운 고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고승이 칼 도둑이라니?
그 칼 도둑으로 하여금 고대 일본 굴지의 대사찰을 건립하게 했다니 해괴한 일이 아닌가?
이 절의 창건 내력을 적은 기록에 의하면 <도행은 신라국 명신왕의 태자로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건너와 아쓰타의 보검을 훔쳐 달아나다 잡혀 옥에 갇혀 있는데 고승임을 인정받아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668년 무렵의 신라에 명신왕은 없었다.
자, 여기서 작가의 추리가 또 시작된다. 명신왕이 곧 김유신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지 않았다면 어엿한 왕일 수도 있었다.
신의 아버지는 경진(庚辰)일에 두 별이 나란히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경진’으로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일월(日月)로 이름을 짓지 않는 법이라고 하자 ‘경’자와 비슷한 ‘庾(유)’, ‘辰(진, 신이라고도 읽힘)자와 비슷한 ’信(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삼국사기」 열전).
천문의 이치에 따르면 일월(日月)의 合宿을 ‘辰(진)’이라 일컫는다 했으니 ‘日’과 ‘月’이 합치면 ‘明’자가 된다.
그러므로 ‘辰(진)’과 ‘明(명)’은 동일시된다.
즉 경진=유신=명신의 등식을 생각할 수 있다.
도행이 명신왕의 태자였다고 하니 임금을 이을 왕자인 동시에 큰아들이다.
실제 김유신의 큰아들의 이름은 삼광(三光)이다.
훗날 고위직에 오른 대신이었지만 스님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666년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668년 고구려를 치라는 당 고종의 직지를 가지고 지금의 화성 남양에 도착한 뒤로는 한동안 종적을 감춘다.
그런데 668년이라면 일본 아쓰타 신궁의 신검 도난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해이다.
그리고 삼광이 역사 기록에 다시 나타난 것은 683년 신문왕이 새 왕비를 간택하는 혼사 때이니 그로부터 15년 후이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도행이란 이름으로 스님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잠행, 금관가야 시조의 칼을 탈환하려다 실패하여 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다시 신라 문무대왕과 일본 문무왕을 상기해 보자.
668년 고구려를 평정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경주로 개선하였다.
금관가야의 핏줄이 통일신라의 대권을 장악한 것이다.
즉 금관가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김유신은 왕권의 상징인 신검을 가져와 축하의 선물로 바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김유신은 문무대왕의 외삼촌이니 삼광과 문무는 외사촌간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681년에 문무대왕이 사망한다.
아니 일본에 망명했다.
그가 상륙한 지점과 도행이 창건한 법해사가 있는 고장은 바다로 가면 할 달음에 갈 수 있은 이웃이다.
그러니 사촌끼리 힘을 합친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무렵 도행은 천무왕 밑에 있었을 것이고 친가야-신라계의 천무는 672년 쿠데타로 정권을 쥔 임금이었다.
절의 이름 법해(法海)도 어쩌면 문무대왕의 이름 ‘법민’과 천무왕의 즉위 전 이름 ‘대해인’에서 한자씩 따서 합친 것처럼 여겨진다.
법해사는 문무와 천무를 위해 창건된 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무왕은 삼광을 고국에 돌려보내 신문왕을 돌보게 한다.
683년 신라로 돌아온 삼광은 신문왕의 재혼을 서두르게 된다.(신문왕의 첫째 왕비는 문무대왕 상중에 부친이 반란을 일으킨 죄로 파혼된 상태였다.)
문무대왕이 죽은 것이 681년 7월 1일이고 반란이 평정된 것은 8월 8일이다.
이 반란의 배경엔 필경 당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고, 문무왕은 죽었거나 긴급히 피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아들 신문왕에게 남긴 편지가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왕위를 계승하여 처리할 사항을 낱낱이 지시한 편지이다.
그 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편지가 여러 통 실려있다.
일본 문무왕도 명문의 편지를 자주 썼다.
특히 성덕왕(신라 문무왕의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그 애틋함이 흥건하다.
특히 세 번째 편지는 국기를 튼튼히 하며 나라 안을 안락하게 하고 풍속을 순화하게 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어버이가 자손들에 타이르는 듯한 말투인데 일본 문헌에 따르면 고작 스물네 살의 일본 문무왕이 강대한 통일신라 왕에게 보낸 서한이라고 하니 영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라는 문무대왕 시대에 통일의 대업과 당의 간섭을 물리치며 국기를 다졌다.
일본도 문무왕 시대에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국기를 튼튼히 했다.
조정의 제반 의식도 이때 제정되었고, 정월 초하룻날 대극전에서 베풀어지는 하례 행사에 금동제 삼족오(三足烏)의 눈부신 당(幢;휘장. 군대 편성의 단위), 해-달-청룡-백호 등 갖가지 기치를 처음으로 세우게 한 것도 문무왕이다.
금동의 삼족오(三足烏)는 가야 세력의 상징이었다.
가야-신라의 흔적을 곳곳에 드러내 보여주는 일본 문무왕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광고 : 아이보리 비누
물에 뜨는 순도 99%의 비누, 그 향기가 여성스러워 동산유지 다이알 비누와 비교됐던 비누~
두 제품 모두 지금도 판매되고 있나 보다.
동서지간이었다는 Proter와 Gamble(P&G)은 역사적 브랜드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팬틴, 질레트, 다우니, 페브리즈, 오랄비..... 등은 여전히 베스터 셀러이다.
(‘비누’가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역사정보>
비노(17세기~18세기) → 비누(20세기~현재)
설명
현대 국어 ‘비누’의 옛말인 ‘비노’는 17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단어는 ‘노’가 ‘누’로 바뀌어 현재의 ‘비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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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신도시 건설 계획에 따라 일산 분당 평촌 산본에 100만 호의 주택이 들어설 때, 주택 청약에 다 떨어졌다.
이유를 알고 보니 세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살며 세대주 분리를 하는 것이 불효인 것 같아 미루다가 결국 분가하며 이듬해 내 집을 마련했다.
그때 재형저축과 더불어 대한주택공사 장기 대출이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