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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집(澗松集)》 해제(解題) -퇴계학(退溪學)과 남명학(南冥學)을 아우른 학자
허권수|경상대학교 교수
Ⅰ.서언
《간송집(澗松集)》은, 조선 중기 경상도 함안(咸安)에서 활약하던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시문집이다.
간송은, 남명(南冥) 서거 33년 뒤인 1585년(선조 18), 남명의 영향력이 큰 함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먼저 퇴계(退溪)의 재전제자(再傳弟子)로부터 학문을 배워 강우지역(江右地域)의 대표적 학자로 성장하였다.남명의 제자 가운데는 퇴계의 문하에도 아울러 출입한 제자들이 많이 있듯이, 남명을 사숙한 후학들 가운데도 퇴계학파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은 학자가 적지 않았는데,
간송은 퇴계학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학자다. 간송은 구체적인 교육은 주로 퇴계학파의 학자로부터 받았지만, 장성한 후에 학자로서 그가 활동한 지역은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경상우도였다. 그래서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장점을 자신의 한 몸에 거의 다 흡수하여, 두 학파의 관계를 융화시키려고 평생 열심히 노력한 점이다.지금까지 간송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허권수(許捲洙)의 〈남명(南冥)ㆍ퇴계(退溪) 양학파(兩學派)의 융화를 위해 노력한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밖에 없다. 그 글에서는 간송의 생애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나아가 그의 학통과 사우관계, 학술사상,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융화를 위한 노력 등에 대해서 고명(考明)하였다.이번에 《간송집》이 남명학연구소(南冥學硏究所)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역주되는 것을 계기로 해제를 쓰면서, 이미 나와 있는 〈남명ㆍ퇴계 양학파의 융화를 위해 노력한 간송 조임도〉를 대대적으로 참고하고, 《간송집〉의 간행경위와 책의 체재 내용에 대해서 첨가하여 글을 완성한다.
Ⅱ.전기적 고찰
1. 생명
간송 조임도는 1585년 함안군 검암리(劒巖里, 지금의 伽倻邑 儉巖里)에서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입암(立巖) 조식(趙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5대조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어계 조부 금은(琴隱) 조열(趙悅)이 고려말기 공조판서(工曹判書)의 관직을 버리고 함안에 낙향하여, 군북면(郡北面) 원북(院北) 마을 일대에 정착하여 산 뒤로부터 그 자손들은 대대로 함안에 많이 살게 되었고, 간송의 조부 때 다시 검암으로 옮겨 살았다.간송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陜川)에 가서 피난하였다.14세 때는 정유재란을 만나 아버지를 따라 경북 청송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영주ㆍ봉화 등지로 옮겨 다녔다. 그때 봉화에서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에게 배웠는데, 김중청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제자였다. 월천은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으니, 이때부터 간송은 퇴계의 학통에 닿을 수 있었고, 이때부터 퇴계를 존모 하기 시작했다.(〈墓碣銘〉, 《澗松別集》)15세 때 여름에는 반천을 따라, 퇴계가 공부하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의성으로 옮겨가 살았다.16세 때는 의성에 살던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에게서 《대학》을 배웠는데, 두곡 역시 퇴계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17세(1601년) 때 다시 인동으로 옮겨가 살았다. 간송의 아버지가 자주 이사를 다닌 이유는, 간송으로 하여금 문헌의 고을인 경상좌도 일대에서 두루 유학하여 간송의 학문을 폭넓게 만들어 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때 간송은 비로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뵙고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때까지 간송의 이름은 기도(幾道)였는데, 여헌이 ‘기(幾)’자가 적극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하였으므로, 간송의 아버지는 아주 적극적인 뜻을 가진 ‘임(任)’자로 바꾸어 지었다.‘유도(儒道)를 적극적으로 책임진다’는 의미였다.19세 때 검암으로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澗松)’이라고 자호 하였다. 그리고는 “시냇가의 소나무 사랑하나니, 날씨가 추워져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라는 시를 지었으니, 소나무의 절조를 본받으려 한 것이었다.20세(1604) 때 향시에 합격하였고,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과거공부를 계속하였다.23세 때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 배 위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뵈었다. 이때 한강은 배를 타고 함안 도흥(道興) 나루 부근의 물속에 담가두었던 비석 석재를 찾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왔다.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용화산 아래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인근 고을의 많은 선비들을 찾아가 만났다. 이때 여헌 장현광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도 함께 있었으므로, 간송은 부친의 안내로 이 분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이해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노파는 본래 남명의 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었는데,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하여 정인홍과 노선을 달리하였다. 노파의 다른 사위가 성박(成鑮)인데, 성박은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로 내암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간송도 직접 간접으로 젊은 시절에는 내암과 관계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27세(1611년) 때 정인홍이 퇴계의 문묘종사를 배척하였는데, 함안 사람 가운데서도 정인홍의 지시를 받아 퇴계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작성하기 위한 소회(疏會)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고, 간송에게 참석을 강요하였다. 간송은 《맹자》의 〈방몽장(逄蒙章)〉을 인용하여 자신은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정인홍의 세력이 대단하였으므로, 선비로서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간송은 참여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천인벽립(千仞壁立)의 기상이 있다고 추앙하였다.32세 때 참된 학문을 하기 위해서,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였다.34세(1618년)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 조정의 6품 이상의 관원들의 수의(收議)가 있었다. 간송은 신자(臣子)로서 대비(大妃)를 폐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로 인하여 대북파(大北派) 세력들을 피하기 위해서 칠원현(漆原縣)의 내내(柰內)로 피신하여 상봉정(翔鳳亭)을 짓고 살았다.43세(1627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간송은 고을 사람들에 의해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 뒤 병으로 사퇴하고 말았다.47세 때 봉화로 가서 스승 반곡(盤谷) 김중청(金中淸)의 장례에 조문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를 참배하였다. 이때 예안 안동 등지의 퇴계학파 학자들과 결교하여 교유의 폭을 넓혔다.49세(1633년) 때 칠원현 내네에서 영산현(靈山縣) 용산(龍山) 마을로 옮겨 살았다. 강 건너 함안의 용화산 기슭에 합강정(合江亭)을 지어 독서와 영시(詠詩)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50세 때 추천을 받아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여러 선비들의 추대로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원장을 맡았다. 신산서원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배향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여헌에게 자문을 구하였다.53세 때 남한산성을 지키지 못하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이해 여헌의 부음을 듣고 설위(設位)하여 통곡하였다.59세 때 창원에 우거하고 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했다. 미수가 일찍이 용화산 청송사(靑松寺)로 간송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70세 때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던 동토(童土) 윤순 거(尹舜擧)가 간송을 방문하였다. 돌아가 간송을 진유(眞儒)라 칭송하였다.75세(1659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78세 때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여러 선비들의 공론을 듣고 간송을 등용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쌀과 콩을 내리자, 간송은 진사(陳謝)하는 소(疏)를 올려 규간(規諫)의 뜻을 1414개 조로 개진하였다.1664년 80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하자, 조정에서 미포(米布)로 부의를 내렸다. 함안의 아호(鵝湖) 선영의 동쪽에 안장하였다.1666년 사림들의 건의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1721년 사림들이 함안군 송정리(松亭里)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간송을 향사하였다.간송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유림활동만 한 순수한 선비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결신(潔身)ㆍ장왕(長往)의 자세는 아니었고, 우국연민(憂國憐民)의 사상을 늘 확고하게 지닌,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한 선비였다. 이런 점은 남명의 일생과 아주 흡사하다고 하겠다.
2. 위인(爲人)
간송은 명리에 초탈하여 임하(林下)에서 평생 학문 연구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자기 손으로 자전(自傳)을 지어 자신의 기질과 면모를 객관화시켜 표현했다.소탈하고 우활하고 뻣뻣하면서도 서툴러 세상과 맞는 것이 적었다. 일찍이 글을 일삼았지마는 이름을 이룬 것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정취가 있었는데,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매양 그윽한 샘물 기이한 돌 무성한 수풀 긴 대나무 등 깊숙하면서 고요한 곳을 만나면, 기뻐서 돌아올 줄 몰랐고, 그 속에서 삘기로 오두막집을 짓고서 한평생을 보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천성적으로 술을 좋아하나 주량이 적어 몇 잔만 마시면 곧 크게 취하여 즐겁게 천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어 스스로 노래하여 그 가슴속 생각을 읊어내었다. 비록 존귀하고 대단한 집안의 세력의 불길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도 아첨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홀아비나 과부, 자식 없는 늙은이, 부모 없는 아이일지라도 침범하거나 업신여기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 맞추어 알랑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고, 권력에 기대거나 남을 손아귀에 넣어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은 내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오뚝하게 자기 지조를 지켜 구차하게 남과 맞추는 일에 뜻을 끊었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할까 미리 걱정하지 않았고 믿지 못할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은 상대하지 않았다.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면서 걱정하시기를, “우리 애는 기질이 가을 물처럼 맑지만, 세속과 잘 어울리지 못하여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나 또한 깨끗하게 솔직하게만 살면서 남을 방어하지 않고서, “내 좋은 대로 할 따름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스스로 알 따름이다. 세상에서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온전하게 하려다가 얻는 비난과 뜻하지 않은 칭찬 등이 때때로 한꺼번에 닥쳐도 나는 거저 웃고 만다. 마음속으로 결단하여 스스로 믿는 어리석음이 이러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맑고 고달파 거의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마음은 사실 느긋하여 걱정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중략)한가하게 지내면서 애써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글로써 스스로 즐겼다. 산수에 흥을 붙여 사물 바깥에서 거닐면서 늙음이 장차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이렇게 찬(贊)한다. 재주는 성기고 짧고, 천성은 고집스러우며 어리석네. 세상에 나가서는 엎어지고 산에 있으면서 수양하네. 자연 속에는 금하는 것 없으니, 물고기와 새들과 사귄다네. 내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다 한평생 마치고자 한다네.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절조를 지키고, 자연 속에서 자기 천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바탕을 둔 자연친화적인 사림파 학자의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다.그 당시 세상은 순박한 기풍은 날로 사라지고 각박해져서, 재주 있고 영리하고 교묘하고 아첨 잘하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간송은 인정미가 사라져 가는 이런 세상을 가장 싫어하였다. 이를 풍자하는 글을 한 편 남겼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는 아무개인데, 천성이 못나고 말을 할 줄 몰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렵기에, 이 일을 매우 걱정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웃으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하루 빌려 천리를 붙일 곳으로 삼을 수 있을까?”라고 하자, 좌중의 사람들이 놀라 이상하게 여기며, “무슨 말씀인지요?”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천리라는 것의 물건 됨은, 교묘한 것을 싫어하고 서투른 것을 좋아하네. 꽤 많은 것을 싫어하고 어리석은 것을 좋아하네. 말 잘하는 것을 싫어하고 말 못 하는 것을 좋아하네. 예리한 것을 싫어하고 무딘 것을 좋아하네. 굽은 것을 싫어하고 곧은 것을 좋아하네. 사사로운 것을 싫어하고 공정한 것을 좋아하네. 교활하고 거짓된 것을 싫어하고 성실한 것을 좋아하네. 버릇없이 멋대로 구는 것을 싫어하고 공손한 것을 좋아하네. 잔포(殘暴) 한 것을 싫어하고 자상한 것을 좋아하네. 쟁탈을 싫어하고 겸손하게 물러나는 것을 좋아하네. 욕심내고 염치없는 것을 싫어하고 편안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네. 사치하여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하네. 경박한 것을 싫어하고 중후한 것을 좋아하네. 그래서 염계(濂溪)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가 졸박하게 되면 형벌과 정치가 없어지게 된다’라고 하셨고, 명도(明道)께서 말씀하시기를, ‘재빠르고 영리하고 교묘하고 사나운 것은 도(道)와 거리가 멀다’라고 하셨다. 그러니 서툴고 말 잘 못한다고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온 좌중의 사람들이 의혹스럽게 생각하며 내 말의 요지를 알지 못했다.간송은, 재주 있고 잘나고 날쌔고 약삭빠른 사람이, 평범한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출세를 도모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참된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은 것이다.이 글의 내용은 간송 자신의 언행의 특징을 말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그 자신의 처세지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언행이 일치하여 내면적으로 충실한 사람이자 꾸밈없는 순박한 선비를 간송은 지향했던 것이다.
Ⅲ. 학통과 사우관계
간송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스승을 찾아 학문의 길로 나섰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은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이었다. 14세 때부터 15세 때까지 봉화에서 그에게 배웠다. 반천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인으로서 이때 33세의 젊은 나이였는데, 이미 학문이 깊은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간송에게 원대한 바탕이 있는 것을 보고서, “벗이 멀리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일 년 동안 차가운 자리에서 가슴을 잘 열었다네. 갈림길에 서서 평생 사용할 말을 주나니, 좋은 구슬을 가시덤불에 버리지 말게나!〔不亦樂乎朋自遠, 一年寒榻好開襟. 臨岐爲贈平生語, 莫把良珠委棘林〕”(《澗松年譜》 권 1 2장)라는 권면하는 시를 지어주었다. 김중청은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정인홍에 의하여 파면당하였다.두 번째 스승은 의성에 살던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이었다. 16세 때 두곡으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두곡은 간송을 두고 “어린 나이에 실제로 보고 얻은 것이 있다”라고 칭찬하였다..세 번째 스승은 인동에 살던 여헌 장현광이었다. 여헌은 한강 정구의 질서였고, 한강은 퇴계와 남명 양문하(兩門下)를 다 출입하였다. 17세 때 처음 만나 53세 때까지 36년 동안 스승으로 모셨다. 23세 때 용화산(龍華山) 아래 배에서 한강과 함께 왔던 여헌을 다시 뵈었다. 그 뒤 29세 때 여헌을 찾아갔을 때, 여헌은 자기 이웃으로 이사오도록 권할 정도로 간송에게 관심을 가졌다. 40세 때 여헌을 찾아가 여러 날 동안 모시고 있으면서,《심경》,《대학연의(大學衍義)》,《독서록(讀書錄)》 등의 책을 읽다가 의문 나는 점을 물었다.41세 때 여헌을 찾아갔을 때, 여헌은 “치원(致遠 간송(澗松)의 구자(舊字))의 말은 천리에서 나온 것으로 매양 그것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은 적이 없다”라고 말하여, 이미 제자인 간송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여헌이 인정할 정도로 그 학문의 경지가 높아졌다. 이때 간송은 성리학에 침잠하여 위기지학에 힘쓰던 때였는데, 〈김흥십절(感興十絶)〉을 지어 그 학문의 경지와 학문하는 자세를 읊었다.50세 때 여헌을 찾아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배향하는 문제로 자문을 구했을 때, 여헌은 적극적으로 간송의 주장이 옳다고 하며 지지하였다.52세 때 여헌을 찾아가, “한당(漢唐)의 학문은 기송(記誦)이나 사장(詞章)의 학(學)에 불과합니다”라고 하며 그 폐단을 지적하자, 여헌이 탄복하며 말하기를, “이 설은 아주 통쾌하여 사람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반드시 도움 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라고 간송의 학문을 칭송하였다.간송이 36년간 여헌 문하를 출입하면서 친자(親炙)를 받은 것이 아주 오래되어 관감(觀感)이 아주 간절하였다. 평소 여헌의 언행과 출처 및 질의 답문한 것을 모아서 《취정록(就正錄)》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나중에 이 글은 《여헌문집》 속집의 부록으로 편입되었다. 스승 《여헌문집》을 편찬할 적에 간송도 참여했는데, 그 아들 장응일(張應一)에게, 여헌의 주저(主著)는 다 간행해야겠지만 시문은 절요(節要)하는 것이 좋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간송은, 여헌을 동계(桐溪)정온(鄭蘊),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와 함께 그 당시 유림의 영수요 조정의 으뜸 되는 원로로 보고 존경하였다.
투시위적막 (投詩慰寂寞) 시를 부쳐 보내 그 쓸쓸함을 위로하며
력수당세영 (歷數當世英) 지금 세상 뛰어난 인물 헤아려 본다네
동계우복당 (桐溪愚伏堂) 동계와 우복당과
기아장선생 (曁我張先生) 우리 장선생(張先生)이라네
유림망령수 (儒林望領袖) 유림에서 영수로 추앙하고 있고
조야칭원구 (朝野稱元龜) 조정이나 초야에서 원로 되어 있네
_〈次林樂翁南字〉, 《澗松集》
간송이, 여헌의 학문이나 행신(行身)에 대해서 추앙하는 정도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경앙장부자 (景仰張夫子) 장부자를 경앙하나니
고명관두남 (高名冠斗南) 높은 이름은 북두성으로 남쪽에선 으뜸
연충창해활 (淵冲滄海濶) 깊고 조화롭기는 너른 바다 같고
벽립태산암 (壁立泰山巖) 절벽처럼 우뚝한 건 태산 같구나
_〈拜旅軒先生于遠懷堂〉, 《澗松集》
간송은 어린 시절에 반천 김중청, 두곡 고응척 등 퇴계학파의 학자들에게 수업하였으나, 결국은 가장 오랜 친자를 받은 여헌의 학덕을 제일로 흠모하여 자기 학문과 행신(行身) 및 출처관의 바탕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여헌 역시 퇴계의 제자인 한강의 학통을 이었으므로, 간송은 퇴계학파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아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간송의 생장지인 함안에는,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죽유(竹牖) 오운(吳澐), 모촌(茅村) 이정(李瀞), 황곡(篁谷) 이칭(李偁),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 등 남명의 제자들이 많았으므로 남명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23세 때 간송은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따님에게 장가드는 것을 계기로 해서 남명학파에 확실하게 가입하게 된다. 노파는 남명의 제자 정인홍의 제자이고, 또 삼가에 있는 남명을 모신 용암서원의 원장을 맡아 일했으므로, 남명학파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간송은, 노파를 장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스승으로 모셨으므로 남명학파의 학문에 접맥 될 수 있었다.간송은, 한강 정구를 배견(拜見)하고 존모 하기는 했으나, 이때 한강은 이미 연로하였으므로 집지하지는 않았다. 황암 박제인, 망우당 곽재우, 모계(茅谿) 문위(文緯), 능허(凌虛) 박민(朴敏),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동계(桐溪) 정온(鄭蘊),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등 그 당시 강우지역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선배로 모시고 따랐다. 이 가운데 의성에 살던 오봉은, 한강의 문인으로서 간송에게는 종자형이 되었는데, 간송이 강좌지방의 사우들과 결식(結識)하는 데 있어 교량적 역할을 했다.(《澗松別集》 권 1 1장, 〈就正錄〉) 외재 역시 한강의 문인이었는데, 간송의 처재종조가 된다.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동계(東溪) 권도(權濤),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 강재(彊齋) 성호정(成好正), 익암(益菴) 이도보(李道輔), 수암(修巖) 유진(柳袗), 미수 허목, 청천당(聽天堂) 장응일(張應一) 등은 벗으로서 서로 학문을 강론하였다. 무민당이 편찬한 《남명연보(南冥年譜)》에 간송이 발문을 썼고, 무민당이 《산해사우록(山海師友錄)》을 편찬할 때도 간송은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그리고 간송은 그 당시 격심하던 당론에 얽매이지 않았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인 동토(童土) 윤순 거(尹舜擧)가 의령 현감으로 부임해 왔을 적에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서 퇴계를 향사할 덕곡서원(德谷書院) 건립의 일을 서로 의논하였다. 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제자인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이 거창 군수로 부임했을 때, 간송은 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 《석담유사(石潭遺事)》 등을 듣고서 그를 통해서 그 책을 구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간송의 사우들은 강우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강좌지역에도 폭넓게 고루 분포하여,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고루 아우른 특징이 있다. 간송은 한쪽 학파에 속한 인사보다는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는데, 이는 간송의 학문적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Ⅳ. 학술사상
간송은 퇴계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으므로 주자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았다. 주자학을 공부한 학자들은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학설이 많다. 더욱이 자신이 근 40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며 따라 배웠던 여헌은 성리학에 관한 학설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간송은, 문집의 분량이 원집, 별집, 속집 합쳐 모두 12권 66 책 정도의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성리학에 관한 학설은 전혀 실려 있지 않다. 학문에 관한 내용 가운데도 대부분은 학문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느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점은 퇴계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한 경우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남명의 학문정신과 아주 흡사하다.간송은 학자의 학문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하였다.옛날의 이른바 학자들은 반드시 궁행 심득으로써 근본을 삼았고,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알맞게 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고, 여러 가지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절차는 벌벌 떨며 조심조심하고 성나는 것과 욕심을 참고 잘못을 고쳐 착한 데로 옮겨가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_〈辭恭陵叅奉疏〉, 《澗松續集》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해서 아는 것으로는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고,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송은 강조하였다. 사람이 공부를 통해서 자기의 잘못을 고쳐서 착한 데로 나가는 데 학문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학문하는 과정을 간송은 이렇게 설정하였다.대저 학문의 길은 반드시 분발하고 단단히 뜻을 세워,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공(功)을 쌓아야 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러야 하고, 느긋하게 푹 젖어들어 덕을 길러야 한다. 조심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마음을 단속해야 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주정(主靜), 존성(存誠), 거경(居敬), 궁리(窮理) 등의 절차는 그 본령이고 골자다. 마치 수레에 두 바퀴가 있듯이 새에게 두 날개가 있듯이, 하나를 없애고서는 다니거나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종사하여 힘써 잘 따라서 노력하기를 오랫동안 해나가면, 뜻과 행실이 함께 나아가고 발과 눈이 같이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툭 트인 평원을 혼자 훤히 보게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현, 군자, 길인(吉人)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잠시라도 이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천리 밖으로 달아나 각기 제 갈 데로 가버릴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망령된 생각의 기미는 바로 이런 때에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이 옛날 성현들이 얇은 얼음을 밟듯 깊은 못에 다다른 듯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덕이 이미 성대하지만 스스로 만족하거나 여유를 부리지 않고, 도(道)가 이미 높아도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한 가닥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고 죽을 때까지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_〈管窺雜說〉, 《澗松集》
학문하는 본령을 주정, 존성, 거경, 궁리에 두었다. 이 가운데서 하나라도 결여되면 학문을 할 수가 없고, 또 간단없이 꾸준히 노력하여 스스로 눈이 트여 깨달음을 얻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글귀나 외우고 단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도를 깨치는 것을 진정한 학문으로 보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서 꾸준히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마음에서 일어나 학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망상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간송이 말하는 공부는 지식습득의 단계가 아니고,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는 단계를 말한다.간송은, 실천을 위주로 하여 그 사람됨을 바꾸는 것이라고 학문을 정의했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참되게 안 것을 실천하여 그 어떤 사람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순수하여 잡되지 않은 것을 이른 것이다. 글자로 표현하거나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말단적인 것이 아니다.
_〈篁巖先生遺稿序〉, 《澗松集》
귀로 듣고서 바로 입으로 말하는 학문은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고 사이비 학문에 불과하다. 《예기》에서 “구이지학(口耳之學)으로써는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진정한 학문은 사람을 더 좋은 쪽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학문을 말하는 것이다. 간송이 일생 동안 추구한 학문이 바로 이런 학문이었다.세상에 갖가지 학문이 존재하고, 유학 가운데도 갈래가 많지만, 성경(誠敬)을 주로 하는 정자ㆍ주자의 학문만이 바른 학문이라고 보았다.
儒術多岐路 유술다기로 유학 가운데도 갈래가 많지만
程朱獨不差 정주독부차 정자 주자만이 어긋남이 없네
存誠消萬僞 손성조만위 정성 간직하여 온갖 거짓 소멸시켰고
主敬敵千邪 주경적천사 경을 주로 하여 천 가지 사악함에 맞섰다네
操約能施博 조약능시박 요약함을 잡아야 능히 박을 베풀 수 있고
爲邦自正家 위방자정가 나라 다스림은 집안 바로잡는 것에 말미암네
瑤琴絃斷絶 요금현단절 아름다운 거문고의 줄이 끊어졌기에
空使後人嗟 봉사후인차 괜히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드네
_〈儒述〉, 《澗松集》
유학 가운데서도 정주의 학문을 정통으로 삼아야만 하고, 성경을 위주로 하여 박약을 겸비하여야 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한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참된 유학의 전통이 끊어진 당시의 유학은 정상적인 길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간송이 탄식한 것이다.학문하는 방법은 옛날 것만 묵수해서는 안 되고 앞 시대 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세의 학자들이 발견할 수도 있으므로 학문의 시대에 따른 진화를 인정했다. 의리는 무궁하고 지식과 견문은 한계가 있다. 이전의 성인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대의 성인이 발견할 수도 있고, 이전의 현자가 말하지 못한 것을 후대의 현자가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_〈管窺瑣說〉, 《澗松集》
주자가 《대학》을 주석하면서 보완한 〈보망장(補亡章)〉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그의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퇴계는, 회재의 주장이 주자와 위배되기 때문에, “한갓 경서를 훼손한 죄만 얻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송은, 퇴계의 주장을 맹종하지 않고 회재의 학문적 공적을 인정하였다. 학문이란 것은 한 사람에 의해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후세로 오면서 점점 발전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유학자들은 대부분 무조건 복고주의 상고주의에 사로잡혀, 성현의 학설에 대해서 감히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간송은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주자와 퇴계의 학설에 반대되는 견해를 제시하였으니, 용기 있는 양심적인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그 당시 학풍은 이미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을 간송은 이렇게 경고하였다.
世儒所謂學 세유소위학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學書能誦讀 학서능송독 글을 배워 잘 외워 읽는 것
世儒所謂業 세유소위업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사업이란
業文賭爵祿 업문도작록 글짓기를 일삼아 작록을 따는 것
心口不相應 심구부상응 마음과 입이 서로 맞지 않고
言行不相顧 언행부상고 말과 행동을 서로 돌아보지 않네
雖破萬卷書 수파만권서 비록 만 권의 책을 독파했다 한들
於德竟何補 어덕경하보 덕행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
事君盡臣節 사군진신절 임금 섬길 때는 신하의 도리 다하고
奉親供子職 봉친공자직 어버이 받들 때는 자식 노릇 한다면
人雖曰未學 인수왈미학 배우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말할지라도
吾必謂之學 오필위지학 나는 반드시 그런 사람을 배웠다 하겠네
君看顔四勿 군간안사물 그대 보게나! 안자에게 준 공자의 사물과
與夫曾子省 여부증자성 증자(曾子)가 날마다 세 가지로 반성하는 것을
何嘗言語工 하상언어공 어디 말을 솜씨 있게 한 데가 있던가
亦豈文字炳 역기문자병 그 어디 문장이 번지르르한 데가 있던가
終能聞大道 종능문대도 이 두 분은 마침내 큰 도를 능히 듣고서
具體承前聖 구체승전성 체제 갖추어 앞 시대의 성인을 계승했다네
奈何末流弊 내하말류폐 어찌하여 말세로 흘러온 폐단은
枝葉徒崇獎 지엽도숭장 한갓 가지와 잎만 숭상하게 되었는지
澆風散淳源 대박일륜상 요풍산순원 경박한 분위기가 순박한 근원 흩어버려
大樸日淪喪 크게소박한 기운을 날로 잃어 가는구나
鸚鵡謾好音 앵무만호음 앵무새처럼 제멋대로 말만 번지러하게 잘하니
簪裾愧厮養 잠거괴시양 의관 차려입었지만 마부들에게 부끄러우리라
透得名利關 투득명리관 명예와 이욕의 관문 통과한 뒤에라야
方是少歇處 방시소헐처 바야흐로 조금 쉴 만한 곳이 된다네
上蔡有嚴訓 상채유엄훈 상채〔謝良佐〕의 엄한 훈계가 있나니
服膺事史魚 복응사사어 이 말을 가슴에 새겨 둘지어다
_〈世儒歎〉, 《澗松集》
당시 세속적인 선비들은, 자신을 수양하여 세상을 교화하는 선비의 본래의 임무는 망각한 채, 입으로 글만 외워 과거에 합격하여 작록을 얻고 이름을 얻는 데만 급급하였다. 언행이 일치되지 않으면서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은 풍부하게 갖고 있고, 문장은 숙달되어 잘 지어내지만, 그 사람 자신의 덕행을 함양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공자가 말한 위기지학은 사라지고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세상을 휩쓸고 있을 때, 간송은 진정한 선비를 그리워하여 이런 탄식을 했던 것이다. 안자나 증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장을 잘한다는 칭송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성인의 큰 도를 듣고서 체득하여 후세에 전승시켜 준 업적이야말로 선비가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송은 보았다. 정자의 제자인 상채 출신의 사양좌가 처음에는 기송을 잘하는 것으로 자부했을 때 정자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우려가 있고 그의 병통은 ‘자랑〔矜〕’에 있다고 훈계하였다. 처음에는 사양좌가 수긍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자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자신도 기송의 문제점을 알았다. 그 이후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 늘 기송의 문제점을 훈계했다.(黃宗羲 《宋元學案》 권 24, 〈上蔡學案〉)언행이 일치되고 명예와 이욕의 관문을 통과하여 진정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을 일컬어 참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간송이 지향하는 학문의 길도 바로 이런 것에 있었다. 이런 학문경향은 남명의 학문정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초기에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이 대부분 퇴계학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간송 자신은 나중에 남명학파 내에서 중심인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선비들도 평소에 병법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간송은 가졌는데, 이는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던 남명의 사상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腐儒平昔不談兵 부유평석부담병 썩은 선비들 평소에 병법을 이야기하지 않다가
臨亂如今但骨驚 임란여금단골경 지금 와서 난리 당하자 뼛속까지 놀라기만 하네
月暈孤城消息斷 월훈고성소식단 달빛 희미한 외로운 성에선 소식 끊어졌는데
北辰回首涕空橫 북진회수체공횡 대궐로 머리 돌리니 공연히 눈물범벅이 되누나
_〈聞南漢受圍慨然有作〉, 《澗松集》
온 나라의 지식인들이, 평소에 국가 민생의 현실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공리공론적인 학문에만 힘을 쏟다가, 난리를 당하게 되자 아무런 대책 없이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간송은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현실적인 학문을 하지 못한 선비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평소에 심신을 잘 거두어 단속하고 명절(名節)을 닦으며 정도를 지켜나가던 선비들도, 명리의 문제에 당면하게 되면 자기의 본래의 보조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례를 우리나라의 역사상 많은 인물의 행적에서 볼 수 있다. 출처의 대절을 잘 지켜야만 올바른 선비라고 볼 수 있다고 간송은 생각했다.(《澗松集》 권 3 9장, 〈上旅軒先生書〉)초(楚) 나라의 은자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같은 사람은 세상을 구제하려고 다니는 공자를 비웃는 말을 하였기에 역대로 유가의 비판을 받아왔다. 간송은 그들을 성인의 도로써 논할 수는 없지만, 도를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영합하고 부귀를 탐내어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는 사이비 유자들은 장 저와 걸닉보다도 못한 사람으로서, 장 저와 걸식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澗松集》 권 3 45, 46장, 〈沮溺說〉)불가에서는 불법을 전파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불가에 귀의하기를 희망한다. 간송은 불가의 자기모순을 이렇게 지적하였다.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중이 된다면, 누가 임금이 되며 누가 신하가 되며, 누가 백성이 되어 관리들을 먹여 살리며, 누가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겠는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입산하여 불교를 받들게 된다면, 누가 부부가 되며, 누가 부자가 되며, 누가 형제가 되겠는가? 모두가 다 중이 되었을 경우 늙은 사람은 죽고, 젊은 사람은 늙고, 앞에 있던 사람들은 없어지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이어가지만, 백 년도 안 지나서 인류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은 나무 돌 새 짐승 벌레 뱀 가시뿐일 것이다. 우리 유도에 해악을 끼칠 뿐만 아니라, 불도(佛道) 그 자체도 끊어진다. 그때 가서 중이 되어 불교를 받들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느냐?
_〈管窺瑣說〉, 《澗松集》
불가에서는 포교하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여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불가의 희망대로 모든 사람들이 승려가 된다면, 의식주의 재료는 누가 생산하며 인류는 어떻게 번식ㆍ보존하겠는가? 불교 교리는 공격할 필요도 없이, 불교 스스로 모순을 지니고 있는데, 이 모순을 간송이 잘 지적해 내었다. 유자로서 불교를 압도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었다 하겠다.간송은, 당쟁의 폐단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인식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짐독(鴆毒)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 자신은 당파에 얽매이지 않아, 공정한 논의를 견지하였다. 당론이 일어난 이후로 공론이 없어졌다. 당파에 속한 사람의 이름 가운데는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색목인 같지 않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다르게 된다. 그 논의가 나와 합치가 되면 줄곧 그를 좋아하여 그의 나쁜 점을 모르게 되어 조그마한 것까지 알리고 추켜세우기를 한량없이 한다. 그 논의가 자기와 어긋나게 되면 줄곧 그를 미워하여 그의 아름다운 점을 모르게 되어 죄에 밀어 넣고 죄를 얽어 만들기를 힘닿는 데까지 한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혼란스럽게 되고 시비가 뒤바뀌어, 서로 모함하고 다투는 분위기가 온 세상에 넘쳐흘러, 물과 불의 관계처럼 죽을 때까지 공격한다. 심지어는 부자간에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고, 형제간에 당파를 나눈 경우도 있다. 자기와 같은 당파이면 비록 천 리를 떨어져 살아도 아교와 옻칠처럼 착 달라붙는데, 자기와 같은 당파가 아니라면 비록 같은 집에서 거처해도 초(楚) 나라와 월(越) 나라의 관계처럼 원수가 된다. 아래로 각 고을 각 마을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국가의 존망은 생각지도 않고, 백성들의 고락(苦樂)은 걱정하지도 않은 채, 오직 당론에만 급급하니 공론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는가? 온전한 사람을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을 보건대, ‘당(黨)’이라는 한 글자는 나라를 망치고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짐새의 독이다. 대개 당론은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지 공정한 의리가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양자(陽子),묵자(墨子),노자(老子),불교의 해악이나 홍수와 맹수의 재난의 처참함도 이렇게 참혹한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_〈管窺瑣說〉, 《澗松集》
간송은, 당쟁의 해독을 잘 알고 있어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고, 노론이나 소론에 속하는 인물이라도 마음이 통하면 사귀었다. 이런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한평생 남명학파와 퇴계학파 두 군데 다 관계하면서 두 학파의 융화를 위해서 일생 동안 계속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간송 자신이 한평생의 정신적인 이정표로 삼은 간송이라는 호를 두고, 이렇게 시로써 풀이했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신세계의 방향이 그의 호 속에 내함 되어 있다.
獨愛澗邊松 독애간변송 나 홀로 시냇가의 소나무 사랑하노니
天寒不改容 천한부개용 날씨 추워져도 그 모습 변하지 않기에
深根盤絶壑 심근반절학 깊은 뿌리는 깎아지른 골짜기에 박혀 있고
直幹聳危峯 직간용위봉 곧은 가지는 높은 봉우리에 치솟았네
風烈聲逾壯 풍렬성유장 곧은 가지는 높은 봉우리에 치솟았네
霜嚴翠更濃 상엄취경농 서리 매서우면 푸르른 빛 더욱 짙다네
君看春夏節 군간춘하절 그대여 보게나! 봄철이나 여름철에는
百物共靑葱 백물공청총 모든 것들이 다 푸르고 싱싱한 것을
_〈栽松澗邊〉, 《澗松集》
간송은, 자기 일생의 삶의 방향을 ‘간송(澗松)’이라는 두 글자로 집약하여 표현하였다. 날씨가 추워져도 변하지 않는 그 절조, 깊은 학문적 바탕, 고상하고 강직한 언행을 갖고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상의 장애물이 앞을 막으면 자신은 더욱더 견결한 자세로 자기의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했다. 세속의 염량(炎凉)에 따라 부침하는 부류들과는 자신을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송(宋) 초기의 정승 범질(范質)의 〈계질아팔 백자(誡姪兒八百字)〉라는 시에, “화사한 화원의 꽃은, 일찍 피었다가 먼저 시드네. 더디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 울창하여 늦게까지 푸르름 머금고 있네.〔灼灼園中花, 早發還先萎. 遲遲澗畔松, 鬱鬱晩含翠.〕”라는 구절이 있다. 주자는 이 시의 교훈적인 가치를 크게 인정하여 《소학》에 수록하였다. ‘간송’이라는 호는 바로 이 시에서 따왔다. 울긋불긋 봄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꽃은 날씨가 추워지거나 서리가 내리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소나무만은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풍모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이런 소나무의 정신을 배워 일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집 앞 시냇가에다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간송은 퇴계를 공척(攻斥)하는 대열에 참여하라는 당시 불길 같은 세력을 가진 대북파의 위협에 조금도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조정에서 몇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나가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바로 간송 자신의 한평생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것이다.
Ⅴ.퇴계ㆍ남명 양 학파의 융화
남명학파의 영향권 안에 속해 있는 함안지역에서 세거해 온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퇴계학파에 속한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간송은, 완전히 퇴계학파로 편중되지 않았고, 나중에 남명학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철저하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조화롭게 융화시켜 나갔다. 정인홍의 퇴계 변칙으로 인한 두 학파 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시키는 데도 간송이 큰 역할을 했다.그는 퇴계와 남명을 거의 꼭 같은 비중으로 존모 하였으며, 두 분의 특징을 잘 파악하였다. 그의 〈동현십팔영(東賢十八詠)〉가운데서 퇴계와 남명을 읊은 시가 있는데, 먼저 퇴계를 두고 읊은 시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酷悅朱書便奪胎 혹열주서편탈태 주자의 책 몹시도 좋아하여 새로운 것으로 발전시켰고
潛心理窟不曾回 잠심리굴부증회 오묘한 이치 속에 침잠하여 일찍이 돌아선 적 없었네
巖栖玩樂餘香在 암서완악여향재 오묘한 이치 속에 침잠하여 일찍이 돌아선 적 없었네
晩隱淸風百世嵬 만은청풍백세외 늘그막에 숨은 맑은 기풍 백세에 걸쳐 높고 높으리라
남명을 두고 읊은 시는 이러하다.
泰山秋氣壓頹瀾 태산추기압퇴란 태산의 가을 기운이 퇴폐한 세속 물결 누르는데
敬義工程妙透關 경의공정묘투관 경의의 공정은 오묘하여 관문을 통과했도다
道不遇時寧小用 도부우시녕소용 도 지니고도 때 만나지 못했으나 어찌 작게 쓰이랴
懷藏國器軸薖間 회장국기축과간 나라를 경륜할 그릇 품고서 시골에 숨어 사셨지
주자학에 침잠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연구하여 밝힌 퇴계의 학문적 성취와 태산 같은 기상을 갖고 경의의 학문으로 퇴폐한 세상을 바로잡는 데 주력한 남명의 실천위주의 현실적 학문의 특징을 잘 구별하여 내었다.간송은 일생 동안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융합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절친한 벗 무민당 박인이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고 있을 때, 간송은 그 책 속에 퇴계의 행적을 수록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이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관계를 좋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무민당은 주저하며 선뜻 수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록의 가부에 대해서 여헌에게 자문을 구하여 결정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澗松集》 권 2 21장, 〈與朴伯和〉)간송은 남명에 대한 존모가 남달랐고, 또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융합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간송의 만년에 덕천서원 내부에 분쟁이 있었는데, 임곡 임진부가 덕천서원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간송에게 서신을 보냈다. 간송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다. 덕천서원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서원은 사우들이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곳이오.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소. 형은 어째서 재난을 실어 남에게 주는 일을 반쯤 죽어가는 늙은 것에게 맡기려 하시오. 이 늙은 것이 무슨 기력이 있어 거기에 생각이 미치겠소. 비록 그러하나 저는 남명에 대해서 존모 하는 마음이 얕지 않소. 바야흐로 《남명수 언(南冥粹言)》이라는 책 한 권을 편찬하고 있소. 그 가운데는 버리거나 취하거나 해야 할 것이 또한 많소.
〈해관서문답(解關西問答)〉, 〈여자정자강서(與子精子强書)〉, 〈책문제(策問題)〉 등은 빼버려야 하겠고, 퇴계가 남명에게 보낸 세 통의 서신, 퇴계가 쓴 〈유두유록발(遊頭流錄跋)〉, 서화담(徐花潭)이 지은 사운(四韻)의 시, 이구암(李龜巖) 선대의 묘비 등은 수록해야겠소.
_〈答林樂翁〉, 《澗松集》
간송이, 남명을 존모한 나머지 남명의 시문의 절요 및 관계 자료를 부록으로 한 《남명수 언》을 편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퇴계학파와의 융합을 위해서 많은 주의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맨 처음 《남명집》을 편찬할 때 그 일을 주도한 정인홍의 의도에 의해서 편찬된 《남명집》이 반질 되자, 거기에 실린 글로 인하여 각지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로 인해서 남명학 파는 더욱 고립될 처지에 놓였으므로, 간송은 남명의 진면목을 바로 알리고, 다른 학파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남명수 언》의 편찬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남명학 파는 남명학 파는, 〈해관서문답〉으로 인해서 회재 이언적 집안과 관계가 악화되었고, 〈여자정자강서〉 때문에 구암 이정 집안과 관계가 나빠졌고, 남명의 인상도 나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책문제〉는 임금의 실정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듯한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인조반정 이후 가뜩이나 위축된 남명학파가 사방의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간송은 이 책을 편찬하려고 했을 것이다. 퇴계가 남명에게 보낸 세 통의 서신과 〈유두유록발〉을 넣으려는 것은 정인홍으로 인해서 악화된 두 학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이다. 화담의 시를 수록한 것은 화담의 시에 차운한 남명의 시가 경세의식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대비해서 보이려는 의도이다. 이구암 선세의 묘비를 수록하려는 것은, 남명이 이구암과 관계가 괜찮을 때 남명이 이구암의 요청에 의해서 그 부공(父公)의 묘비를 지었다. 만년에 남명은 하음 부사건(河淫婦事件)으로 이구암을 의심하여 절교하였다. 퇴계의 제자 노릇하던 구암은 남명에게 절교당한 뒤 퇴계에게 자기의 사정을 하소연하였고 퇴계는 구암을 위로하였다. 이로 인해서 퇴계를 싫어한 정인홍이 구암을 더욱 미워하였다. 나중에 정인홍이 《남명집》을 편찬할 적에 이구암 부공의 묘비를 수록해야 한다는 한강 등의 건의를 거절하고 수록하지 않았다. 간송이 볼 적에 남명학파와 구암 집안과의 갈등은 내면적으로 남명학파의 역량의 손실만 가져온다고 판단하여 그 해결방안으로 《남명수 언》의 편찬에 착수했던 것 같다.남명은 비록 벼슬에 나가 직책을 맡은 적은 없었지만, 남명이 끼친 정신적인 영향은 후세에 영원히 대단하다는 것을 간송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莫道南冥無事業 막도남명무사업 남명이 한 일 없다고 말하지 마소서
淸風百世振東韓 청풍백세진동한 백세의 맑은 바람 우리 동쪽 나라 떨쳤다오
_〈讀南冥集〉, 《澗松集》
맹자가 말한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남명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길이 할 것으로 보았다.남명의 일생 동안의 마음가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였던 사람은 바로 간송이었다. 그의 〈서남명선생차화담시후(書南冥先生次花潭詩後)〉라는 글은 이러하다. 조 선생이 화담의 시에 차운한 첫째 연은 “붉은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되살리고파, 누가 밝은 해를 돌려 이내 몸을 비춰줄꼬?〔要把丹心蘇此世, 誰回白日照吾身.〕”라고 되어 있다. 개연히 세상을 걱정하는 뜻이 말 바깥에 넘쳐흐른다. 보배를 품고서 세상에서 숨어 지내다가 바위틈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 어찌 선생의 본래 마음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벼슬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선생의 문제점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한 가지 절개만 가진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선조조의 대신 이탁(李鐸)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조모(曹某) 같은 사람은 지금 세상의 버려진 인재입니다. 그에게 제배(除拜)한 벼슬이 별 볼 일 없는 벼슬에 불과했기에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것이 전하께서 불러도 선비들이 오지 않는 까닭입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사실에 접근하는 말이다. 남명은 자기 한 몸만 깨끗하게 간직하기 위해서 세상을 잊고 멀리 숨은 사람이 아니었다. 늘 국가민족에게 관심을 갖고서 달밤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내린 벼슬자리가 자신의 경륜을 펼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명의 그러한 처지를 간송이 가장 잘 이해했던 것이다.간송은 남명이 만약 때를 만나 자신의 온축 한 바를 펼쳤더라면 남명이 그 당대나 다음 세상을 위해서 이 정도의 역할은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남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남명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기절만 있는 처사’ 정도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인 가운데서 노론계열의 인사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택당(澤堂) 이식(李植),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사라지지 않아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등에게 계속 이어져 갔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제자들이 대부분 정계에서 축출되자, 남명도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는 억울한 경우를 당하게 되었다. 간송은 이 점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것이다.경륜을 갖춘 남명 같은 사람이 임금에게 올바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일은, 후세의 왕들이 산림에 숨은 인재를 불러내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남명이 때를 만나 자기의 경륜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우리나라 백성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하의 사람들을 두루 교화하여 착한 사람을 만들어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의 도덕적 보루가 되어 그 공덕이 해와 달처럼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니, 오늘날 사람들이 운위 하는 정도의 남명에 그치고 말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송은 남명의 현실 정치에서의 능력을 아주 크게 평가하였다.만약 남명이 뜻을 얻어 천하 사람들을 두루 착하게 만들고 평생 쌓은 실력을 펼칠 수 있었다면,
세상인심을 맑게 하고 천리를 밝히고 세도를 만회하고 혼탁한 세상을 격려하여 우뚝이 세파의 지주가 되고 어두운 길에 밝은 해나 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니, 그 공덕과 사업이 어찌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아아! 애석하도다.
_〈南冥先生年譜跋〉, 《澗松集》
간송은 남명에 대한 존숭 하는 마음을 포괄하여 이렇게 시로 읊었다.
江河器局泰山容 강하기국태산용 강하 같은 기국에 태산 같은 모습
金玉儀形雪月衷 김옥의형설월충 금옥 같은 풍채에 눈 속의 달빛 같은 마음
正氣秋霜橫烈日 정기추상횡렬일 바른 기운은 매서운 햇살 아래 가을 서리 스치는 듯
貞操綠竹倚蒼松 정조록죽의창송 곧은 절조는 푸르른 소나무에 기댄 푸른 대 같아
功成敬義依前聖 공성경의의전성 이전의 성현에 의지하여 경의의 공 이루었고
道合中庸啓後蒙 도합중용계후몽 도는 중용에 합치되어 어린 후생을 깨우쳤도다
遯世初非忘世事 둔세초비망세사 숨어 지낸 것은 애초에 세상일 잊은 것 아니었나니
知時不可故藏踪 지시부가고장종 무슨 일 할 수 있는 때 아닌 것 알았기에 자취 감추었지
_〈讀南冥集〉, 《澗松續集》
남명의 큰 기상 깨끗한 인품, 우뚝한 학덕, 후세의 영향 등 남명의 전반에 걸쳐 존모의 뜻을 붙였다. 특히 남명이 은거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시대적으로 무슨 경륜을 펼칠 수 없어서 부득이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이니, 세상을 잊고 은둔을 고집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했다..간송이 사림의 추대를 받아 신산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스승 여헌을 찾아가 남명에 대한 평가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신산서원 배향문제를 두고 여헌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는 이러하다.여헌 선생께서 남명 선생의 높은 곳에 대해서 언급하시기를, “그 높은 곳은 벼슬과 봉록을 사양하고 풍절(風節)을 세운 것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의론이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고 식견이 보통 사람보다 몇 단계 앞서고, 자품과 학력이 아주 뛰어난 것에 있다.”라고 하셨다. 임도(任道)가 말하기를, “선생의 가르치심은 다행입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높다〔高〕’라는 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고풍정맥변(高風正脈辨)〉 등의 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는 “‘높다’는 뜻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정맥’이란 글자와 비교해 보면 약간 구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어른의 높은 것은 누가 능히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임도가 묻기를, “소생이 사림들의 함부로 추대하는 바를 잘못 입어 외람되이 신산서원 산장(山長)의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김동강을 서원에 배향하고 그가 지은 《경연강의(經筵講義)》 등의 책을 간행, 반포하여 우리 유도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매우 좋지, 매우 좋아!”라고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임도가 또 묻기를, “동강은 남명한테 친자(親炙) 한 것이 가장 먼저이고, 또 장가들어 손서가 되었으니, 그밖에 거저 설렁설렁 남명 문하를 출입한 사람들하고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한 사당 안에 배향하는 것이 예법에 알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신송계(申松溪)가 연향(聯享)의 위치에 있으니, 만약 사론이, ‘동강은 남명에게 손서가 되고 문인이 되니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송계가 동강에 대해서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다. 신산서원은 본래 남명을 위해서 창설한 것이다. 송계는 손님일 따름이다.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송계의 위패가 왼쪽에 있다면 동강을 서편 벽 쪽에 위패를 놓으면 되고, 송계가 오른쪽에 있다면 동강은 동편 벽 쪽에 위패를 놓으면, 무방할 것 같다”라고 하셨다.
_〈就正錄〉, 《澗松別集》
한강이 동강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에서 “퇴도(退陶)의 바른 맥을 영원토록 그리워하고, 산해(山海)의 높은 기풍 특별히 존경했네.〔退陶正脈終天慕, 山海高風特地欽.〕”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에 대해서 정인홍은 <고풍정맥변>을 지어 퇴계에게 정맥을 돌리고 남명에게는 고풍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여헌은 정맥과 고풍은 구별은 있는 것 같지만 남명의 아주 뛰어난 점을 포괄하여 ‘고(高)’자로 표현하였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산서원은 본래 남명을 위해서 창설된 서원이므로 비록 송계가 연향 되어 있다 해도 친자(親炙)를 가장 오래 받은 동강을 배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여헌은 간송의 질문에 답했다.남명의 학덕을 흠모한 유림들이, 남명이 강학하던 산해정(山海亭)이 있던 김해 신어산(神魚山) 기슭에 1578년 신산서원을 건립하여 1609년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원장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고, 강학의 기능이 해이되자, 1633년 유림에서 간송을 추대하여 원장으로 삼았다. 간송은 몇 번 사양해도 되지 않아 원장을 맡아 서원을 운영해 나갔다.
(《澗松別集》 권 1 40, 41장, 〈遊觀錄〉) 당시 강우지역에서 간송의 명망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간송은 남명 못지않게 퇴계도 똑같이 대단히 존숭 했다. 퇴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퇴계가 남긴 책을 읽고 또 그 제자나 제자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문의 길로 접어든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하물며 나는 어리석어 일찍이 학문의 공(功)을 잃었고 나아가 바로잡아줄 사우도 없었음에랴? 그래도 다행히 선성(宣城)은 퇴계의 고향이요 일선(一善)은 여러 어진이들이 많이 나온 곳이다. 비록 제자의 예를 차리고 퇴계 선생의 곁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기풍이 남아 있었기에, 선현들의 도를 실은 책을 보고 선배들이 남긴 가르침을 듣고서 착한 본래의 마음을 계발할 수가 있었다.(《澗松集》 권 4 29장, 〈困知齋箴〉) 또 공자ㆍ맹자ㆍ증자ㆍ자사ㆍ요 임금ㆍ순 임금ㆍ문왕ㆍ무왕의 책을 구해다가 읽은 뒤에서야 환히 밝아져 마치 취한 꿈이 깨는 듯, 어두운 밤이 밝아오는 듯, 이 도를 돌이킬 수 있고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천지가 천지가 된 까닭과 사람과 사물이 사람과 사물이 된 까닭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의령 현감 윤순 거(尹舜擧)가 퇴계의 처형이라 하여 의령에 퇴계를 향사할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은 것에 대해서 간송은 관심을 보이면서 격려하고 있다. 자기가 사는 함안에 인접인 고을인 의령에 퇴계를 봉 향하는 서원이 생기게 된 것을 매우 감격할 정도로 기뻐하였다. 이 역시 퇴계에 대한 극도로 존모 하는 마음이 발로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또 덕곡서원에 퇴계를 봉안할 때, 간송은 그 봉안문을 지었다. 간송이 현감 윤순거와의 친밀한 관계도 있겠지만, 봉안문을 짓게 된 연유는 이 강우지방에서는 퇴계를 정확하게 알고 퇴계학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사로는 간송만 한 사람이 없다는 여론이 모아졌기 때문에 간송에게 청문(請文)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간송은, 이 봉안문에서 퇴계를 해동의 정주로서 이전 여러 유학자들의 학문을 집대성했다고 극도로 존숭 하였다..
惟我先生 유아선생 아아! 우리 선생이시여
海東程朱 해동정주 우리나라의 정자 주자 같은 분
折衷羣言 절충군언 여러 학설 절충하시고
集成諸儒 집성제유 여러 유학자들 학문 집대성하셨네
(중략)
故老相傳 고로상전 연세 드신 노인분이 전하는 말에
杖屨攸及 장구유급 선생의 장구(杖屨)가 미쳤다 하네
禮合稱祀 예합칭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예법에 맞기에
永寓矜式 상궐묘모 永寓矜式 영원히 공경하여 본받으리
尙闕廟貌 상궐묘모 아직까지 사우 없었던 것은
責在後學 책재후학 그 책임이 후학에게 있다네
_〈擬德谷書院奉安退溪先生文〉, 《澗松集》
그리고 퇴계의 발자취가 미친 의령에 사우가 없다는 것은 이곳에 사는 후학들의 책임이니, 마땅히 향사를 거행하여 영원히 사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1611년에 퇴계의 문묘종사를 공 척하는 정인홍의 지시에 의하여 정인홍에게 붙어 지내던 어떤 사람이 함안에서, 퇴계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소장을 작성할 소회(疏會)를 열고 간송에게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맹자》 〈방몽장(逄蒙章)〉을 인용하여, 간송은 자기 스승의 스승인 퇴계를 공 척하기 위한 소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정인홍의 세력은 대단하였고, 당시 젊은 간송은 이미 ‘정내암(鄭來庵)을 헐뜯고 모독한다’는 비방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의 앞날에 많은 위협적인 요소가 따랐지만, 퇴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澗松集》 권 1 〈年譜〉 42장)이런 점에서 볼 때 간송 자신은 퇴계학파에 속하는 학자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때 만약 간송이 정인홍 일파의 세력에 눌려 그 소회에 참석하여 대북정권에 가담했더라면, 의리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고, 퇴계학파 쪽의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을 당했을 것이다.그의 〈우언(寓言)〉이라는 글은 순리에 의하지 않고 힘과 폭력으로 반대파를 내치고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을 풍자한 글이다.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하지 않았지만, 간송은, 당시 정인홍 일파가 문묘종사되기로 되어 있던 퇴계를 공 척하는 일에 느낀 바가 있어서 이 글을 지었던 것이다.(《澗松集》 권 3 36, 37장, 〈寓言〉)1631년 47세 된 간송은 봉화로 가서 어릴 적의 스승 반천 김중청의 대상(大祥)에 참석하여 곡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으로 가서 한 존재(閑存齋)에서 자고 상덕사(尙德祠)에 알현하고 퇴계의 유물을 참관하고 도산서원 안팎을 둘러보았다. 이때 간송은 “직접 퇴계를 곁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듣는 것 같았는데, 시대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는 바가 있게 하였다”라고 자신의 감회를 적었다.(《澗松別集》 권 1 34장, 〈遠行錄〉) 이 원행(遠行)에서 예안ㆍ안동ㆍ영주ㆍ봉화ㆍ의성 등지를 둘러보고, 계암(溪巖) 김령(金坽),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육우당(六友堂) 박회무(朴檜茂) 등 퇴계학파의 여러 인사들과 결교하고 돌아왔다.간송은 어려서부터 퇴계학파에 접맥 되어 퇴계의 이론을 탐구하고 시문 창작하기를 즐겨한 퇴계의 태도를 배웠다. 그 바탕 위에 남명학파의 학풍이 짙은 지역에 살면서 절의를 숭상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를 결합하여, 실천을 중시하면서도 시문 짓기를 좋아하고 저술도 많이 남긴 학자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여타의 남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저술이 영성 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퇴계학파의 장점과 남명학파의 장점을 모두 흡수하여, 새로운 간송 자신의 독자적인 인물상과 학문노선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후손들의 의도에 의하여 간송은 점점 퇴계학파 쪽으로 더욱더 접근해 간 것 같다. 간송의 현손 조홍엽(趙弘燁)의 요청에 의하여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간송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퇴계에 관한 언급만 있고, 남명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외 서원 건립을 위한 사림의 상소문이나, 서원사우상량문(書院祠宇上樑文), 상향축문(常享祝文) 등에서도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으로만 되어 있다.
Ⅵ. 《간송집》의 편찬과정과 내용
1. 편찬과정
간송의 시문은 저자의 현손 조홍엽이 집안에 전해오던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하여 편정하였다. 그 뒤 1744년(영조 20) 겨울에 안동의 눌은 이광정에게 감정과 편차를 부탁하고 서문을 청하였다. 간송의 스승인 반천 김중청의 외후손인 이광정은 자신의 문인 권만(權萬), 권모(權謩) 등과 함께 교정하고 편차하여 8권 44 책의 정본을 완성하였으며 서문을 지었다.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간송행장〉의 말미에, “공의 증손 조은(趙檼)이 화산(花山)의 금양리(錦陽里)로 나를 찾아와, 공의 사자(嗣子) 조함변(趙咸抃)이 찬술 한 〈가전행 실기(家傳行實記)〉 1통 및 용성(龍城) 양천익(梁天翼)이 편차한 《연보》 1편을 보여 주며 행장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담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는데, 조 군은 갔다가 다시 와서 부탁하기를 매우 애써 하여 내가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李玄逸 《葛庵集》 別集 卷6, 21~28장)라고 했다. 갈암이 금양리에 거주할 때는 1702년경이었으므로 행장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지어졌고 이때에 이미 양천익이 편차한 《간송연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간송연보》가 편차된 시기에는 조함변 등이 수습한 초고가 함께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 뒤 이광정이 지은 묘갈명에는, “현손 조홍엽이 선생의 남긴 글과 행장을 가지고 와서,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 80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 문집을 간행하지 못하였고, 묘비도 새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때가 1744년이다. 이광정은 묘갈명을 짓고, 아울러 문집을 원집 5권, 별집 2권으로 편정하고, 양천익이 편차한 《간송연보》 1권을 합쳐서 8권 44 책으로 만들었다.이렇게 편정된 원집(별집 포함)은 간행 연도가 명확지 않으나, 정고본이 완성된 뒤 곧이어 저자를 배향한 함안의 송정서원에서 간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서유구(徐有榘)의 《누판고(鏤版考)》에 의하면 본집의 ‘판목 44 책이 송정서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초간본 《간송집》은, 현재 규장각(奎11650),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8),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828) 등에 소장되어 있다.본 문집은 판심제(版心題)의 권차가 권수제(卷首題)의 권차와 다르게 원집과 별집을 통합하여 총 4권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권수가 아닌 분책의 표시를 판심에 적은 것이다.그 뒤 원집에서 누락된 시문들을 후손 조선수(趙善秀)가 수습하여, 19세기 후반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에게 편정을 부탁하고 발문을 받았다. 장복 추는 속집을 4권으로 편정하고, 발문을 지었는데, 그 발문에 “원집이 간행된 지 1백여 년이 지났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대략 1800년대 후반에 해당한다. 이 속집은 간행되지 못한 채,사손(嗣孫)조한규(趙漢珪),6 세손 조광호(趙光鎬),조광련(趙光鍊)등에 의해서 보관되어 있다가, 1930년에 이르러서 다시 노상직(盧相稷)의 교정을 거쳐 후손 조병규(趙昺奎) 등이 본손 및 사림들과 함께 부록 11 책을 포함한 5권 22 책으로 편정하고 함안 합강정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2. 체재
《간송집》 원집과 별집은 목판본인데, 1744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세계도ㆍ연보, 원집 5권, 별집 2권 합 4 책이다. 한 면은 10행 20자인데, 규격은 세로 21.4㎝, 가로 16㎝이고, 상하백어미(上下白魚尾)이다.속집은, 판심에 《간송선생속집》으로 되어 있고, 목활자본인데, 1930년에 간행되었다. 모두 5권 2 책인데, 한 면은 10행 20자인데, 규격은 세로 21.1㎝, 가로 16.9㎝이다. 어미는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2년 한국문집총간 제89집에 편입하여 표점, 영인하여 양장본 11 책으로 반포했다.
3.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연보, 원집 5권, 별집 2권, 속집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원집은 권두에 이광정(李光庭)이 1744년에 지은 서(序)가 있고 이어서 세계도와 연보, 목록이 있다.권 1, 권 2는 시이다. 오언고시,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고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칠언배율이 시체별, 연대별로 총 214제(題)가 실려 있다.간송의 시는, 평이하면서도 심오한 의미와 간절한 호소력이 있다. 강산풍물(江山風物)을 읊은 서경시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자신의 정감을 은은하게 표현했는데, 묘사가 극도로 섬세하면서도 고아하다. 시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권 1의 〈세 유탄(世儒歎)〉은, 세상의 많은 유학자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을 개탄한 시이다.〈차임낙옹남자(次林樂翁南字)〉에서는, 지금 세상에서 동계(桐溪) 정온(鄭蘊),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의 원로라 일컬을 수 있다고 했다.〈동계만(桐溪挽)〉은, 동계 정온의 서거를 애도한 시인데,동계가 광해조(光海朝)에 강직하게 지절(志節)을 지킨 점을 부각했다..〈강재십영(江齋十詠)〉은,자신의 장수지지(藏修之地)인 합강정(合江亭)의 대표적인 열 가지 풍경을 읊은 서정성이 풍부한 시이다.〈기증허희화(寄贈許熙和)〉는, 자신을 방문해 준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준 시이다.〈유술(儒術)〉은, 정주(程朱)의 학문을 표준으로 해서 성경(誠敬)과 박약(博約)을 기본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한 시이다.〈재송 간변(栽松澗邊)〉은, 1603년(선조 36) 나이 19세 때에 간송(澗松)이라는 자호(自號)를 짓고 쓴 시로서 간송의 정신적 지향과 기개를 살필 수 있는 시이다.〈심덕천서원(尋德川書院)〉은, 1611년에 덕천서원을 방문하여 지은 시로, 남쪽 지방의 처사로 남명과 수우당(守愚堂)을 들 수 있는데, 세상에 숨어 살지만 세상을 잊지 않고,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하고 있는 공을 칭송하였다.〈숙망우정(宿忘憂亭)〉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사후 창녕(昌寧) 낙동강 가 창암(蒼巖)에 있는 그의 정자에서 자면서, 망우당을 추모하면서 지은 시이다.〈배여헌선생우원회당(拜旅軒先生于遠懷堂)〉은, 여헌(旅軒)의 학덕을 극도로 흠모하는 심정을 나타낸 시이다.〈풍수음(風樹吟)〉은, 돌아가신 부친을 그리워하는 효심을 나타낸 시이다.권 2에 실린 〈감흥십오수(感興十五首)〉는, 자연과 자신의 생활을 융화시켜 지어낸 걸작이다.〈삼강구절구(三綱九絶句)〉는, 그 당시 대표적인 충신 3인, 효자 3인, 절부(節婦) 3인을 기리는 9수의 절구시이다. 1617년 지었고, 자신의 발문(跋文)이 문집 권 4에 4 실려 있다.〈동현십육영(東賢十六詠)〉은,포은 정몽주,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추강 남효온, 정암 조광조, 화담 서경덕, 회재 이언적, 청송 성수침, 대곡 성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월천 조목, 고봉 기대승,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등 16명의 현인의 학덕을 칭송한 시인데, 자신의 학통을 위주로 인물을 선발하였다. 간송 자신의 간략한 주석이 있어, 우리나라 학술사와 유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문남한수 위개연유작이수(聞南漢受圍慨然有作二首)〉는, 1636년 겨울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예의문명의 나라 조선이 변발한 오랑캐 만주족의 백성이 된 것을 개탄한 시이다.〈봉정윤의령권립추강사우(奉呈尹宜寧勸立秋江祠宇)〉는, 의령 현감 윤순 거에게, 추강 남효온의 사우를 세울 것을 권유한 시이다. 추강의 행적은, 자신의 선조 어계의 출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문정동계 여질환산(聞鄭桐溪舁疾還山)〉은, 남한산성이 함락될 때 자결하려던 동계가 상처받은 몸으로 안의 금원산 속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이다. 동계로 인해서 천고의 강상이 유지됨을 부각했다..〈무제(無題)〉는, 자신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머리가 허옇도록 이루지 못한 것을 탄식하는 시이다.권 2의 끝에는 여헌, 동계, 황암 박제인, 외재 이후경, 노파, 모계 문위, 부사 성여신, 무민당 박인, 등암 배상룡, 복재 이도자, 모정 배대요, 인원 군 이휴복, 광서 박진영, 부령 부사 조영혼, 이도순, 임곡 임진부, 조은 한몽삼 등의 만사를 모아 실어 조선 중기 강우지역 유학자들의 생애와 학문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권 3은 소(疏) 1편, 서한 29편, 잡저 11편이 실려 있다.그 가운데 〈사사 속소(謝賜粟疏)〉는, 1662년(현종 3) 간송 78세 때에 조정에서 음식을 하사한 것에 대해 사례하고 아울러 기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널리 인재를 찾아 등용할 것을 청하는 내용인데, 엄궁금(嚴宮禁), 친유신(親儒臣), 설경석(設經席), 흥교학(興敎學), 수무비(修武備), 근본직(謹閫職), 무군졸(撫軍卒), 택수령(擇守令), 명출척(明黜陟), 급농무(急農務), 정풍 속(正風俗), 권절행(勸節行), 양염치(養廉恥), 숭례의(崇禮義) 등 14 조목의 시무책이 들어 있다.서한 11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스승 여헌에게 주는 서한이, 1622년부터 1631년까지의 5 통인데, 부친의 묘갈을 지어 달라는 요청과 군자의 출처대절에 대해서 논한 것, 한강을 봉안할 회원서원 사우 창건을 알리는 내용 등이다.수암 유진에게 보낸 서한은 2 통인데, 1631년에 합천 군수로 있던 수암에게 간송 자신이 《금라전 신록》을 편찬 중에 있으니, 서애가 지은 사종형 〈대소헌전(大笑軒傳)〉을 적어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또 용암서원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1632년에 보낸 편지는 서애의 학문을 이해하고 싶으니, 《서애문집》한 부를 보내달라는 내용이다.동계 정온에게 준 서신은, 신산서원에 동강을 배향하는 문제를 의논하고 있다.장응일에게 준 서한은 2 통인데, 스승 《여헌집》 편찬에 자신이 기록한 〈취정록(就正錄)〉의 내용을 초록해 보내니, 살펴서 《여헌집》에 수록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무민당 박인에게 보낸 서한은, 《산해사우연원록》에 퇴계에 관한 사실을 실을 것을 건의하고 있다.임곡 임진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덕천서원 내부의 갈등이 특정인에 의해서 야기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자신은 남명을 극도로 흠모하고 있지만, 덕천서원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경을 밝히고 있다.윤순 거에게 보낸 서한은, 퇴계를 향사할 덕곡서원 건립 과정을 논의하고 있는 내용이다.〈이 소회서(移疏會書)〉는, 퇴계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한 집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서한이다.잡저 가운데 〈우언〉은, 군자의 처세와 관련한 이치를 논한 글인데, 군자(君子)는 음사(陰邪)한 사람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굳이 다툴 것도 없으므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뜻을 얻었을 때는 군자는 은둔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은근히 정인홍 일파의 횡포를 풍자한 글이다.〈자전(自傳)〉은 천진한 성품을 지니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담박하게 살아가는 간송 자신의 모습을 읊은 글이다.〈기이(記異)〉는, 불교 교리의 허구를 논리적으로 지적한 글이다.
〈관규쇄설(管窺瑣說)〉 제1칙(則)에서는 진정한 학문의 자세를, 제4 책에서는 당론의 문제점을, 제5칙에서는 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권 4에는, 서(序) 5편, 기(記) 2편, 제발(題跋) 14편, 잠명(箴銘) 5편, 제문 16편이 실려 있다.〈금라전 신록서(金羅傳信錄序)〉는, 함안 사대부들의 비명, 묘지, 행장, 제문 등과 고금 향인들의 작품을 모아 1639년(인조 17)에 엮은 《금라전 신록》에 대한 서문이다. 함안의 인물과 문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희정당이선생문집서(喜靜堂李先生文集序)〉는, 남명 제자이자 간송의 장인인 노파 이흘의 문집의 서문으로, 간송의 문학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황암선생유고서(篁巖先生遺稿序)〉는, 황암 박제인의 생애와 학문 및 간송의 학문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여현정기(與賢亭記)〉는, 망우당 곽재우가 그 정자 망우정(忘憂亭)을 이도순(李道純)에게 주게 되어 이름이 바뀐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서포은선 생집 후(書圃隱先生集後)〉는, 포은 정몽주의 효성, 충절, 학문, 외교능력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났음을 부각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되는 것은 마땅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글이다.〈서남명선생차서화담시후(書南冥先生次徐花潭詩後)〉는, 남명은 은둔자가 아니고 구세정신이 투철한 선비였음을 밝히는 글이다.〈구일등고시발(九日登高詩跋)〉은, 그 선조 어계 조려가 요순의 이상세계를 갈구한 정신을 밝히는 글이다.〈어계선생전후발(漁溪先生傳後跋)〉은, 성문준(成文濬)이 지은 〈어계전(漁溪傳)〉의 입수 경위와 그 내용과 가치를 밝힌 글이다.〈남명선생연보발(南冥先生年譜跋)〉은,남명 학문은 요체가 경의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그 학문으로 국왕을 도울 능력이 있었다는 점과 무민당 박인이 《남명연보》를 편찬하게 된 과정과 문제점 등을 밝히고 있다.〈망우당연보발(忘憂堂年譜跋)〉은, 망우당의 충효대절과 자신과의 관계를 밝힌 글이다.〈곤지재 잠(困知齋箴)〉은, 간송 자신의 성학과정을 밝히고 있다.〈제여헌선생문(祭旅軒先生文)〉은 스승 여헌 장현광의 서거를 애도하고 자신이 훈자(薰炙)를 받은 과정을 서술하는 제문이다.〈제노파선생문(祭蘆坡先生文)〉은, 노파(蘆坡) 이흘의 별세를 애도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고, 용암서원 운영과 관계된 글을 밝힌 글이다.〈제박백화문(祭朴伯和文)〉은, 무민당 박인의 별세를 애도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고, 〈남명연보〉 편찬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밝힌 글이다.권 5에는 축문 19편, 비지(碑誌) 3편, 행장 4편 등이 실려 있다.〈예림서원봉안 오졸 자선생문(禮林書院奉安迂拙子先生文)〉은, 오 졸자 박한주(朴漢柱)를 밀양의 예림서원에 봉안하면서 고한 글인데, 오 졸자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한 글이다.〈관산서원봉안한 강선생문(冠山書院奉安寒岡先生文)〉은, 창녕 관산서원에 스승 한강 정구를 봉안할 때 고한 글이다. 한강의 학문연원과 후학에 끼친 영향을 밝혔다.〈어계사 춘추향사축문(漁溪祠春秋享祀祝文)〉은, 어계의 절의를 간명하게 정의한 글이다.〈의회원서원봉안문창후문(擬檜原書院奉安文昌侯文)〉은, 창원 회원서원에 문창후 최치원을 봉안할 때 고한 글이다. 최치원의 일생과 학문의 특징을 밝힌 글이다. ‘의(擬)’자가 붙은 것으로 봐서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의회원서원고한강선생문(擬檜原書院告寒岡先生文)〉은, 회원서원에 최치원을 봉안할 때 이미 향사되고 있던 한강 정구에게 고한 글이다.〈의덕곡서원봉 안퇴계선생문(擬德谷書院奉安退溪先生文)〉은, 의령 덕곡서원에 퇴계 선생을 봉안한 글이다. 퇴계의 학문과 후세의 영향, 의령과의 관계 등을 밝힌 글이다.〈의봉안남추강문(擬奉安南秋江文)〉은,의령 자굴산 아래 추강 남효온의 사우를 짓고 추강을 봉안할 때 고한 글이다. 그가 강상을 부식(扶植)한 공적을 부각한 글이다.〈오졸 자박선생여표비명(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은, 조선 전기 충절신 오 졸자 박한주(朴漢柱)의 행적을 기록하고 효성을 부각한 글이다.〈희정당행장(喜靜堂行狀)〉은, 노파 이흘의 일생의 행적과 학문을 기록한 글이다. 용암서원의 운영에 관한 사실이 상당히 밝혀져 있다.〈무민당행장(无悶堂行狀)〉은, 무민당 박인의 일생의 행적과 학문을 기록한 글이다. 무민당과 정인홍과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밝혀 놓아 참고 가치가 높다. 《남명연보》와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가선대부황해도방어사박공행장(嘉善大夫黃海道防禦使朴公行狀)〉은, 광서 박진영의 일생과 학문을 기록한 글이다.
임진왜란 창의과정, 이괄의 난의 상황, 국경지방의 경비상황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황곡행장(篁谷行狀)〉은, 퇴계ㆍ남명 양문(兩門)을 출입한 황곡 이칭의 일생의 행적과 학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임진왜란 때의 창의상황과 강우지역의 선비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간송집》 별집은 두 권이다. 권두에 목록이 있고, 권 1에는 서(序) 1편, 설(說) 1편, 녹(錄) 6편, 기(記) 1편 등이 실려 있다. 권 2는 부록인데, 이광정이 지은 저자의 묘갈명 및 당시 사우, 후학들이 쓴 만장, 제문, 송정서원상량문, 봉안문, 합강정중건상량문 등이 실려 있다.〈취정록(就正錄)〉은, 여헌 장현광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훈도를 받은 내용과 여헌의 언행을 기록한 글이다. 여헌을 연구하거나 여헌과 간송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용화산하동범록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는, 1607년 음력 1월에, 한강 정구가 용화산 아래 도흥(道興)에 머물렀을 때,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도 함께 왔는데, 함안, 영산, 창녕 등의 선비가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상황을 기록하였다. 한강학파 제자들의 분포와 활동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심현록(尋賢錄)〉은, 1626년 음력 7월에, 조은 한몽삼 등과 함께 내내(柰內) 강사(江舍)에서부터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풍의 도동서원, 인동의 오산서원(吳山書院)을 둘러보고, 인동에서 여헌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창녕을 거쳐 돌아온 기행문이다.〈과종록(過從錄)〉은, 1629년 음력 3월에, 임곡 임진부와 함께 배를 타고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경양대(景釀臺), 우포(雩浦), 망우정 등을 둘러보고 인근의 사우들과 어울려 놀던 기록이다.〈원행록(遠行錄)〉은, 1631년 음력 6월에, 봉화로 가서 스승 반천 김중청의 상에 조문하기 위해서 하양, 청송, 영주를 거쳐, 봉화에 가서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의 도산서원, 오천을 심방하고, 의성, 선산을 거쳐, 인동에서 여헌을 뵙고, 현풍, 창녕, 영산을 거쳐 돌아온 기행문이다.〈유관록(遊觀錄)〉은, 1635년 음력 3월에, 김해 신산서원 원장을 맡아 춘향에 참제(參祭) 하기 위해서, 사우들과 칠원 내네에서 배를 타고 김해까지 왕환(往還)한 기행문이다.〈개진기회록(開津期會錄)〉은, 1643년 음력 3월, 등암 배상룡 등과 함께 고령의 개진에서 만나 산수를 유람한 글인데, 끝에는 미수 허목의 발어(跋語)가 첨부되어 있다.속집은 5권이다. 권두에 있는 목록은 상당 부분이 착간 되어 있다. 권 1은 약 200여 제(題)의 시인데 시체별로 되어 있다. 남명의 영시(迎諡) 행사, 《남명집》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시가 들어 있다.
각 시체의 끝 부분에 만사가 따로 모아져 실려 있다. 여헌 장현광, 당암(戇菴) 강익문(姜翼文), 한사 강대수, 광서 박진영, 경암(敬菴) 오 여벌(吳汝橃), 모정 배대요, 능허 박민 등 중요한 인물들의 이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권 2에는 소(疏) 3편이 들어 있는데,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사양하는 소, 대군사부를 사양하는 소, 성학(聖學)을 면려하는 소 등 중요한 소가 들어 있다.권 3에는 서(書) 38편, 서(序) 1편이 들어 있다. 서한은,여헌에게 올리는 것 2통 이외에,여헌 아들 장응일,무민당 박인,임곡 임진부,동계 권도 등에게 보내는 것들이 들어 있다. 특히 무민당에게 주는 서한에서는,각재(覺齋)하항(河沆)의 덕천서원 종양 문제, 신산서원 원장 문제,《산해사우연원록》과 《남명연보》 편찬 문제에 관한 중요한 논의가 들어 있다. 오 여벌에게 주는 서한에서는 《금라전 신록》 편찬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권 4에는 축문 10편, 제문 5편, 묘갈 6편, 전(傳) 1편, 찬(贊) 2편이 실려 있다. 축문 가운데는 오산서원(吳山書院)에 여헌을 봉안하는 축문, 점필재를 새 사당에 봉안하는 축문, 어계를 새 사당에 봉안하는 축문이 들어 있다. 상향고문(常享告文)에는 삼족당 김대유, 황암 박제인, 망우당 곽재우 등을 향사할 때 쓴 축문이 들어 있다. 제문 가운데는 여헌, 광서 박진영, 인원 군 이휴복 등에게 제사 지내는 제문이 들어 있다. 찬에는 신재 주세붕, 인원 군 등을 찬미하는 글이 들어 있다.권 5에는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겸재 하홍도 등 42인이 지은 만장과 신시망(辛時望) 등 26인의 제문이 들어 있다. 양시우(楊時遇)가 지은 〈상봉정기(翔鳳亭記)〉, 서명서(徐命瑞)가 지은 〈조양루기(朝陽樓記)〉가 실려 있다.속집 권미에는 사미헌 장복추, 일산 조병규, 소눌 노상직이 쓴 속집발(續集跋)이 실려 있고, 끝에 1930년 5월에 속집을 합강정에서 활자로 간행한다는 간기(刊記)가 실려 있다.
Ⅶ. 결어(結語)
《간송집》의 저자인 간송 조임도는, 남명학파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상 우도에 속한 고을인 함안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간송은 어릴 적부터 경상 좌도의 퇴계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스승으로 삼아 퇴계학파의 학통에 먼저 접맥 되게 되었다.간송이 23세 때 노파 이흘의 사위가 되어 노파의 문인이 되었지만, 책을 펴 놓고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과 학문의 형성에는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 가운데서도 여헌 장현광의 영향이 가장 컸다.그러나 간송의 활동지역은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경상 우도였으므로 그는 남명학파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남명학파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고향인 함안에는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고, 자기 처향(妻鄕)인 삼가현은 남명이 생장하여 강학하던 곳이다. 또 간송의 장인인 노파는 남명을 모신 용암서원의 원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퇴계학파를 떠나 남명학파로 이적한 것이 아니고, 퇴계학파로서의 소속을 유지하면서 아울러 남명학파의 소속으로서 활동하였다.남명학파와 퇴계학파에 모두 교유관계가 있었던 특수한 위치에 있던 간송은 두 학파 간의 융화를 위해서 한평생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쪽 학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주 균형감 있게, 두 학파의 장점을 흡수하여 그 사이에서 자기의 위상을 정립하였다.그는 두 학파의 장점을 잘 흡수하여 자신의 새로운 독자적인 인간상과 학문노선을 형성하였다. 자신의 지절을 굳게 지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견지하여 벼슬하지 않고 임하(林下)에서 일생을 보낸 것과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민생의 일을 잊지 않고 계속 관심을 갖는 것은 남명학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간송은 이런 점을 잘 섭취하였다. 학문을 탐구하여 저술을 많이 하고 시문을 저술하기를 좋아하는 점 등은 퇴계학파의 특징인데, 이런 점도 간송은 잘 흡수하였다.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 방면의 저술이 많은데 간송의 문집에는 성리학에 관한 저술이 하나도 없다. 이 점은 퇴계학파를 배웠으면서도 자기가 좋지 않다 생각한 것은 남명학파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요약해서 말하자면 간송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양심과 용기와 균형감각을 갖고 양학파(兩學派)에 속하면서 두 학파의 장점을
잘 흡수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여 활동한 학자이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후학이나 후손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남명학파와는 관계를 멀리하고, 퇴계학파에 더욱더 접근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몰락과 관계가 있다.
이런 사실 왜곡은, 그 당시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간송집》은 저술이 적은 남명학파 내에서 보기 드물게 체재가 갖추어진 내용이 풍부한 문집이다.《간송집》 속에는, 간송의 생애에 학문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는 물론이고, 남명의 학문 성향과 남명학파의 동향, 경상 우도 일원의 퇴계학파의 영향,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와의 교류관계, 한강학파(寒岡學派)의 동향 및 경상 우도의 영향, 여헌의 학문과 간송과의 관계,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 우도의 인물과 학문, 어계 대소헌 등 함안 조 씨 일문의 인물과 학문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경상 우도 출신 학자들의 문집 가운데서도 그 가치와 비중이 매우 높은 자료하 하겠다.(이 해제의 작성에는, 朴憲淳의 〈澗松集解題〉(韓國古典飜譯院)를 많이 참고하였고, 許捲洙의 〈南冥ㆍ退溪 兩學派의 融和를 위해 노력한 澗松 趙任道〉에서 재인용한 내용이 많다.)
2015년 12월 30일
[출처] 간송 조암도의 폭넓은 정치사상|작성자 동산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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