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감정은 기형을 보고 태토와 유약을 관찰하며 문양을 논하고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초보자는 단일한 기물에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중국도자中國陶瓷》에 나열되어 있는 대표적인 기물만 하더라도 그 수가 극히 많으며, 태토는 또 요지마다 다르고, 비록 동일한 요지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태토가 다르다.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골동시장에 모조품도 넘쳐흘러 90%이상이 모조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송대宋代의 오대명요五大名窯 가운데의 여요汝窯자기는 전세계에 통 털어서 100개가 채 못되고, 모두 대형박물관이나 수장가의 손에 수장되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가치는 하나의 성城과 맞먹는다. 그런데 현재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많은 여요자기가 시중에 돌아다니게 되었을까? 송대 오대명요 가운데 관요官窯와 가요哥窯 및 균요鈞窯 자기도 도처에 출현하여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진위감정은 수장에 있어 최고의 관건이 된다. 그리고 도자기의 굽은 고대자기에 내재되어 있는 정보가 최대로 나타나 있는 부위이다. 굽에서는 태토와 유약을 볼 수가 있고, 태토와 유약의 결합상태를 관찰할 수가 있으며, 소성기술을 살펴볼 수가 있고, 노화정도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시대판정은 용이하지만 자리 정하기(定位)는 어렵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렇다. 일반 수장가는 시대를 판정할 수는 있지만 진위를 구별하기는 어려우므로, 그 기물의 조형과 문양이 어떠하며 어느 특징은 어느 시대에 속하고 어느 기물이 진귀한가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물의 조형과 문양을 한 번 보고 맞다고 간주하여 진품이라고 흥분하지만, 그 결과는! 전문적인 감정을 거치면 곧 안색이 달라지게 된다.
초보자는 물론 기형을 살피고 태토와 유약을 관찰하며 문양을 평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속한 돌파구를 찾는 일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감각이 생기고, 비로소 얕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진품을 찾아내게 되고, 흥미도 크게 높아지며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그 돌파구는 무엇인가? 고대자기의 진위감정은 굽이 열쇠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도자기의 굽으로 감정상식을 설명하고자 한다.
작디 작은 도자기의 굽은 마치 사람의 내장과 같다고 할 수 있으므로, '오장육부'를 틀어쥐고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좀 더 쉽게 감각을 찾을 수 있으며, 가짜를 피하여 진품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굽의 "유돌(乳突-젖꽂지 모양의 돌기)", "선흔(旋痕-물레가 돌아간 흔적)", "나전문(螺鈿紋-소라껍질과 같은 소용돌이 무늬)", "절삭문(切削紋-깎아낼 때 생성된 무늬)", "도도흔(跳刀痕-칼로 깎아낸 흔적)", "종안(棕眼-땀구멍 형태의 오목한 구멍)", "화석홍火石紅(요홍窯紅)", "점소흔(점燒痕-소성시의 받침 흔적)", "호미저糊米底", "고저敲底", "첨요사(沾窯沙-소성시에 달라붙은 모래)" 등은 모두 고대자기가 남겨 놓은 뚜렷한 세월의 흔적이다.
'유돌乳突'은 굽의 중심에 젖꼭지처럼 융기한 돌기이다. 원대元代에는 '유돌'이 뚜렷하고, 명대초기明代初期에도 '유돌'은 비교적 컸으며, 홍무洪武 중기에 점차로 작아져서 영락永樂과 선덕宣德시기에는 '유돌'이 가늘고 작았다. 성화成化와 홍치弘治와 정덕正德시기에는 '유돌'이 적게 나타나지만, 가정嘉靖과 만력萬歷에 이르러 또 '유돌'이 출현하였다가, 숭정崇禎에 이르러 비로소 '유돌'이 사라진다. 이로부터 '유돌'은 명대明代 및 명대이전明代以前의 고대자기에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선흔'은 '도도흔'을 포괄하며, 명말청초明末淸初에 비교적 선명 : 명대초기明代初期 굽의 외벽에는 왕왕 중도重刀(무겁게 칼을 움직임)로 비스듬히 깎아낸 흔적이 나타난다. 송대기물의 굽의 내벽에도 반원으로 회전한 형태의 칼로 깎은 흔적이 있으며, 중간부위가 융기하여 한 줄기 등골처럼 보인다. 명대明代 정덕正德시기의 굽에는 왕왕 방사상의 나전문螺鈿紋이 나타난다.
'종안棕眼(침비공針鼻孔 - 유면에 나타나는 바늘구멍같은 구멍)' : 강희시기康熙時期 굽의 유면釉面에 왕왕 크기와 분포가 일정하지 않은 종안이 출현하며, 크기에 관계없이 '종안'을 통하여 선명하게 태토를 관찰 할 수가 있다. 광서光緖와 민국民國 및 현대에 강희자기를 모방한 작품은 종안이 크고 얕으며, 보통 종안을 통하여 태토를 관찰할 수가 없다.
'화석홍(요홍)' : 명대 이전에는 태토의 철분함량이 높아서 고온으로 소성할 때 유약이 없이 태토가 드러난 부분이 산화되어 홍색으로 변하였으며, 심지어 양羊의 간 색깔(짙은 홍색)을 띠기도 한다.명대 민요는 굽을 깎아낸 부위에 화석홍이 특별히 짙게 나타나지만, 모방품의 화석홍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일부 모방품은 장유醬油(간장 빛깔의 유약)를 칠하여 만들었으므로 들떠서 안정감이 부족하며 황색으로 치우친 것도 있다. 명대明代의 후기에는 화석홍의 색이 비교적 담담해지지만, 선덕宣德시기에는 보통 화석홍 반점이 나타난다. 청대초기淸代初期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화석홍이 나타난다.
'호미저糊米底(누룽지가 달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굽의 바닥면) ' : 명대明代와 명대이전明代以前의 대반大盤의 굽에 붙어 있는 모래는 태토의 철분함량이 높으므로, 소성후의 고온상태에서 공기가 진입하여 냉각될 때, 굽에 붙은 모래가 산화되어 누룽지처럼 탄 흔적이 남게 된다.
'고저敲底' : 도광시기道光時期의 균홍자鈞紅瓷는 유층이 두터워 유약이 굽까지 흘러 내린 부위가 소성된 후에 도지미에 달라붙게 되므로 떼어내야만 했다. 이것은 인공으로 떼어낼 수 밖에 없어 굽 주위가 톱니처럼 울퉁불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경과되면 톱니처럼 떨어진 부위는 심하게 변색이 되며, 손에 닿는 감촉이 매끄럽게 된다.
'요사저窯沙底' : 과거에는 소성기법에 따라 왕왕 쟁반과 완의 굽에 비교적 굵은 모래가 달라 붙게 되었다. 자주요완磁州窯碗의 굽에는 비교적 굵은 요사窯沙(가마에서 달라 붙은 모래)가 붙어 있으며, 명청시기의 적지 않은 쟁반과 완 등의 굽에도 요사가 붙어 있다.
태토가 드러난 부위의 노화상태 및 자연적으로 마모된 상황(모조품의 마모상태는 비교적 매끄러우며, 진품처럼 자연스럽지 않다.)을 관찰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대자기의 진품은 태토가 드러난 부분이 비교적 메마른 느낌을 주지만, 모방품은 그렇지 않고 아주 매끄러우면서 견고하며 기름진 느낌이 든다. 당연히 일부 고대자기의 노태처露胎處에도 윤택하면서 견고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지만, 모방품과 비교하면 여전히 조금 더 메마른 느낌을 준다.
소성시 받침 흔적(점소 흔적)의 감정 : 여요汝窯는 지마정(芝麻釘-참깨알 같이 작은 빚음 눈 받침)을 이용하였으며, 관요官窯와 가요哥窯에는 '질족跌足'이 사용되었다. 명대 이전의 기물에서는 보통 받침 흔적이 명확하게 나타나며, 요지窯址마다 각자의 점소법(소성시에 기물을 받치는 방법)이 존재했다.
명대 중기이전의 기물에는 알각(Wajiao - 후벼 파내서 만든 굽)이 아주 선명하다. 宋代 병의 알각과 명대明代 홍무洪武시기 완의 알각은 특별히 돌출되어 있으며, 더욱이 민요는 작은 완(알각을 얕게 파내었기 때문)모양처럼 파내었다. 그러나 모방품에서는 파낸 부위가 부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알각이 아니라 모주模注(틀에 부어서 만든 것)도 있다.
굽에서 각 시기 태토와 유약이 결합되어 있는 상황을 관찰한다. 특히 명대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호태토(護胎土-태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바르는 고운 흙)나 화장토나 자금토紫金土가 칠해져 있다. 그러나 모방품에는 주사홍朱砂紅이 칠해져 있거나 장수漿水가 칠해져 있거나 아무 것도 칠해져 있지 않다.
첨사沾沙현상(모래가 붙어 있는 현상)을 관찰한다. 명대 이전의 기물에서는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첨사현상이 나타나며, 청대의 관요와 민요에는 굽 내부의 유약이 뭉친 부위에도 첨사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모방품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극소수이며(위조품에도 첨사현상은 드물며, 진품처럼 노화되고 메마른 느낌이 없다), 소성기술이 고대보다 발전하여 유약도 과거처럼 두텁게 칠하지 않으므로 유약이 뭉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 틀로 찍어내어 조형이 지나치게 반듯한 등의 이유로 첨사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극소수이다.
각 시기의 굽 제작방법에는 특이한 점이 존재하므로, 태토가 드러난 흔적을 이용하여 감정한다. 남송南宋시기 병의 굽에는 원형의 회전무늬(旋紋)가 있으며, 원대元代의 기물에도 대부분 물레흔적과 계심점(鷄心点-닭의 염통처럼 볼록한 부위)이 나타나고, 명대明代에는 대부분 방사상의 깎아낸 흔적이 나타나며 물레흔적은 적다(다만 명대 초기에는 원대元代의 유풍이 남아 있다). 청대淸代의 민요에서는 대부분 유약을 투과하여 물레자욱이 나타나 보이지만, 관요에서는 거의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방품에서는 왕왕 이 점을 간과하여 좌나 우로 치우쳐 있다.
위에서 말한 고대자기에 나타나는 굽의 특징은 모두 고대자기와 신제품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모방품 제작자의 수준이 끊임없이 높아져서, 새로운 모방품에서도 도도흔이나 화석홍 등을 모방하여 만들어 내지만, 자세히 관찰한다면 구분이 가능하다. 고대자기의 감정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심오한 학문이지만, 나태하지 않고 노력하여 항상 돌파구를 꽉 붙잡고, 하나를 통해 열을 알며 한 걸음씩 깨달아 나아가면 사이사이에 즐거움이 넘쳐날 것이다. (堯治華Yaozhih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