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김정을 만난 양평 수련소에서 맨손 기술인 ‘손따수’만 익혔던 나는 빌랑대의 놀라운 기술력에 연신 감탄했다. 손따수의 원리로 정리된 빌랑대는 참으로 섬세하고 강력한 기술이었다. 빌랑대는 날의 각도에 따라 흐르는 공기가 달랐고, 칼끝(곳날)의 방향에 따라 뻗어나는 기운이 달랐다. 참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한 빌랑대 수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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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초순 도쿄 와세다대학 근처의 한적한 골목길. 작렬하던 태양이 어둠에 자리를 내준 지 이미 오래였다. 휘황찬란하던 네온사인이 하나둘씩 꺼져 가면서 거리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간간이 폭주족의 오토바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거리를 질주했다. 아라이야쿠시마에역의 시계바늘이 밤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역전에서 산 바나나를 벗겨 먹으며 터벅터벅 숙소를 향해 걸었다. 낮에는 바람 한 점 없어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공기가 들락거리고, 밤이면 푹푹 찌는 습한 공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도쿄의 여름 날씨는 정말이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아악-.”
소름이 끼치도록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에 혼미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아이 손목 굵기만한 대나무를 엮어 만든 마을 공용주차장의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일까?’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렸으나 이내 정적만 감돌았다.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환청이려니 여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타, 타스케테(살려 주세요.)”
서너 걸음쯤 걸었을까, 여자의 절박한 외침이 또 한 차례 들려왔다. 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공용주차장 안쪽이었다. 부리나케 뛰어갔건만 백 평 남짓한 주차장은 또다시 정적뿐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담벼락 너머에서 속을 니글거리게 만드는 사내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담벼락 바깥쪽은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다.
“고노 온나 스바라시이나(요년 끝내주는데). 고에모 가와이쟈(목소리도 귀여워 죽겠어).”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대나무 숲 초입에 당도하자 흐릿한 달빛에 거대한 오토바이 석 대가 눈에 들어왔다. 스티커로 요란하게 치장하고 번쩍거리는 야광 안테나를 부착한 것으로 보아 폭주족 오토바이임에 틀림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접근하자 널찍한 공터의 한쪽 그루터기에 엉덩이를 걸친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들은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다리를 흔들거렸다. 한 녀석은 껌을 질겅거리고, 다른 한 녀석은 뻑뻑 소리 내며 담배를 빨았다.
“아악-.”
또 한 차례 비명이 숲을 울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그루터기에 앉은 녀석들의 시선 방향이었다. 어둠을 더듬어 몇 걸음 더 다가가자 나무에 기대 선 여인이 눈에 빨려들었다. 여인의 앞에 선 사내는 낄낄거리면서 으름장을 높고 있었다. 여인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부들부들 떨었다.
“흐흐흐, 가와이쟈(귀여운데). 소로소로 야테미루까(슬슬 한 번 해볼까).”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이렇게 지껄이더니 여인에게 다가섰다. 노랗게 물든 녀석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쳤다.
“아악-.”
노랑머리가 여인에게 다가서는가 싶더니 여인의 흰색 원피스가 ‘북’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어깨살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때 나머지 한 녀석이 그루터기에서 일어섰다. 키가 작달막한 사내는 점퍼를 벗어젖혔다.
“야메테 구다사이(그만해 주세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일본어는 존칭어가 고작이었다.
“난다 코레와(이건 뭐야)?”
노랑머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지껄였다. 수월한 상황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밝터에서 수련에 전념하긴 했어도 살벌한 싸움터에서 어떤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세 명이었다. 무예를 수련한답시고 싸움터를 찾아다니며 실전을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상대가 싸움을 걸어올 때는 눈의 기운으로 제압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 다음은 말의 기운으로 제압해야 한다. 말로써 그의 싸우려는 의지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통하지 않을 때 마지막 수단이 기술을 부려서 이기는 것이다. 기술은 매우 정교하고 간략하게 보여 주되 가능한 한 부상을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흉기를 들고 덤빌 때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무조건 제압하고 볼 일이다.’
수련 도중 김정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시니타이노카, 고노 야로(죽고 싶어, 이 새끼야).”
노랑머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가왔다.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긴장감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녀석이 검지를 펴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앗!’
녀석이 흔드는 것은 틀림없는 잭나이프였다.
“스고이쟈(놀라운데).”
노랑머리가 가소롭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가방에 삐져나온 빌랑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오 마에 이노치데모 카케타노카(넌 목숨이라도 걸었나)?”
노랑머리는 잭나이프로 내 목덜미를 겨냥하며 야유하듯 지껄였다. 나는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빌랑대를 뽑아들어 손목을 내리치리라’고 작심했다. 노랑머리는 내가 주춤거리자 용기를 얻은 듯 성큼 걸어들어왔다.
“이얏-.”
순간 나는 몸을 회전하면서 빌랑대로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아-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 다른 손으로 손목을 감싸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잭나이프는 어디로 튕겨나갔는지 온 데 간 데 없었다. 밝터에서 수련하던 데 비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건만 노랑머리는 한방에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다가서자 노랑머리가 팔을 저으며 저항했다. 나는 재빨리 빌랑대를 노랑머리의 손목에 걸어 힘껏 잡아당겼다. 노랑머리는 빌랑대와 내 양손에 끼인 팔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이 새끼들, 연약한 여자를 괴롭혀? 나쁜 놈의 새끼들.”
분기탱천해 사내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우리말로 고함쳤다. 눈 깜짝할 새 혼절한 개처럼 바닥을 뒹구는 노랑머리를 본 나머지 두 녀석은 움찔했다.
“코노 야로. 데테 코이(이 새끼 나와).”
조금 전 점퍼를 벗어젖힌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사내의 손에도 어느 샌가 한 뼘 크기의 잭나이프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칼을 든 사내의 독특한 행동에서 어렵잖게 파악이 가능했다. 대체로 칼을 들면 거기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이 많다. 칼을 들지 않았을 때에는 손이며 발을 사용할 생각을 하다가도 일단 칼만 들면 오직 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고로시테 시마우조(죽여 버릴 테다).”
적을 노리는 방울뱀이 머리를 흔들 듯 사내는 칼을 좌우로 휘저으며 다가왔다. 칼을 든 상대와 겨룰 때에는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상대에게 다가설 것인지 한 걸음 물러설 것인지 신속히 판단해야 한다. 명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는 당하기 십상이다. 일단 두어 걸음 물러서며 사내의 칼 솜씨를 파악했다. 노랑머리가 무방비여서 빌랑대 공격에 성공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얏-.”
사내는 내가 뒤로 물러서는데 용기를 얻었는지 칼을 가슴에 겨누고 달려들었다.
“컥-.”
재빨리 몸을 돌리며 왼손으로 상대의 팔을 걷어냄과 동시에 상대에게 다가서면서 빌랑대 곳살(손잡이 끝부분)로 가슴을 찍었다. 녀석의 상체가 뒤로 휘청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확인 사살하듯 사내의 겨드랑이를 뿔주박(검지를 삼각형 모양으로 구부려 뾰족하게 잡는 주먹)으로 가격하자 사내는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동료 둘을 잃은 키가 크고 깡마른 녀석이 흘금흘금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치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달아나는 녀석을 뒤쫓을 필요는 없었다. 쓰러진 두 녀석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척도 없었다.
여인에게 다가갔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찢어진 원피스로 몸을 가리려고 애를 썼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와타시와 칸코쿠징데스. 이키마쇼(나는 한국인입니다. 가시지요).”
여인은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도죠(실례지만), 코레데(이걸로)…….”
수건을 건네자 여인은 그것으로 어깨 속살을 감췄다.
“이키마쇼(갑시다).”
여인은 일어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난감한 상황이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큰길까지만 안내하기로 하고 팔을 부축했다. 여인은 자신의 팔을 어깨에 걸치도록 순순히 내주었다. 1백여 미터를 걸어 도로까지 나오긴 했으나 의사소통이 원만하질 않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여인에게 택시를 잡아 줄까 하고 생각도 했으나 무작정 태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인을 도로변 건물의 담벼락에 기대앉도록 한 뒤 안절부절못하고 있기를 10여분. 순찰차가 지나가기에 손짓발짓 다해 여인을 태웠다. 물론 경찰관의 요구에 따라 파출소까지 동행해야 했다. 낯선 일본에서 엉뚱한 일로 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는 동안 여인은 기력을 회복한 듯 경찰관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요구하는 대로 인적사항을 한자(漢字)로 적어 주었다.
“혼토니 아리가토 고자이마시다(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경찰관의 안내를 받아 파출소를 나설 무렵 여인은 꾸벅 고개 숙여 예를 갖추었다. 경찰관은 친절하게도 나를 숙소까지 태워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녀간의 만남은 가슴이 설레는 법이다. 더구나 일회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만남은 더욱 미련이 남게 마련이다. 연락처를 알려 주면서 훗날 만나자고 제안하고 싶은 충동-그것이 일시적 충동이든 싹트는 사랑의 감정이든-은 언제나 잠재워지지 않는 본능이고 언제나 그런 충동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돌아서고 마는 게 인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러 연락처를 건넸다가 바람을 맞고서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면서. 물론 그런 여인과의 만남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가 반드시 결혼과 연결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어쩌면 감정의 사치이거나 늑대 근성의 발로일지도 모를 일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