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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쨌든, 감독이 되기위해 내가 작가 허성수 과 만든 원작에 충실했던 시나리오는 현실감이 없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반려를 당했다.
그것이 나를 전혀 다른 연출의 세계로 가게 된 게기가 될줄을......몰랐다.
궁여지책으로 회사에서는 이영희를 작가로 선정을 하여 다시 만든 시나리오는 내 뜻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내용으로 변질이 되어 있었다.
소위 그 당시에 유행하던 ‘세여자가 타인에의해 유린당하고 한여인은 미치고,한여인은 자살하고,한여인은 복수를 찾아 헤매는 스토리라인(입봉당시에는 ’변강쇠‘’뽕‘’어우동‘등 애로영화전성시대였다 )에 포커스를 맞춘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 작품을 계약한 1월16일부터 크랑크인한 4월18일 사이에는 영화계의 큰 격동기였다.
영협이사장 선거, 각 분과 위원장 선거, 스탶,캐스트 인건비 & 캐런티 인상등등으로 인한 혼란속에서 나는 몇차례에 걸친 각본 심의를 ‘예륜’이라는 검열기관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주연급 연기자들을 캐스팅 하기위하여 톱스타들을 일일이 만나야했고(그때는 소속사가 없는 시절이라서 매니져를 통하여 연기자 본인들이 작품 결정을 할때임), 겨우 캐스팅을 본인과 해 놓으면 회사가 사무적인 관계로 다시 타진 해야하는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몇 달을 뜬 눈으로 새우며 고민과 조바심을 가지고 그 작품속에서만 사는데 무슨 이유때문인지 82kg에서 겨우 5kg만 줄고 더 이상은 줄지 않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살을 찌우고 있었다.
첫 작품을 찍으면서 느낀 몇가지 점을 지적한다면,
첫째 기재의 낙후 였다,
늘 영화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말이 현실로 내 피부에 와 닿았다.
크랑크인 첫 날부터 말썽이 났다.
명동성당 성모병원 앞 언덕길을 웨딩드레스를 입은 윤정아가 뛰어 오며 김주승과의 포응장면 이었는데, 구경꾼이 많아 겨우 통제를 하며 촬영을 하는데 고속모터를 올려서 고속촬영을 시도하였다.
지금은 고속장면을 후반에 옵디컬이나 그래픽으로 작업을 하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현장에서 카메라의 회전수를 올려서 촬영을 해야만 했었다.
순간, 카메라가 우직끈 소리를 내며 카메라가 동작이 정지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촬영은 중단 되고 말았다.
그때의 울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어 평생해야 할 이 길이 첫날부터 기재의 낙후로 다가온 시련에 나는 4월의 하늘을 봤다.
뭉게구름속에서햇빛은 찬란했다.
찬란한 나의 이 길을 너무 방심하지 말라고 하늘이 나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나의 길은 험하고 가시밭길이리라,
수배당하며 숨어 살아 가야했던 암울한 시절이었기에 더욱 처참하였다.
하긴 동창들도 나를 세금계산서나 팔아먹은 파렴치범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의 십자가를 스스로 내가 먼저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 갈것이다 라고 다짐을 했었다...... 이제 불가에 입도했다면 까까중인 내가 에베레스트 정상보다 더 커다랗게 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설풍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고 생각을 하니 또 다시 외로워 지는 것을 그 당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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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분야에서도 ‘이상’ ’나혜석‘ 이런 분 보다 더 고독한 영화의 길을 걸어가신 선배들이 얼마나 많으셨던가?
지금도 현대판 ‘영화 고려장’에 갇혀 있는 영화인이 얼마나 많으신가?
이제 나는 입문하는 것이다, 라고 30년전 나는 다짐을 하였었다.
겨우 상투를 틀어 올리고, 수염를 기르는 것이다.
철없는 아이처럼 영화를 겁 없이 안을 것이고, 긴 입맞춤과 포옹,
그래서 나는 잉태 할것이고 옥동자를 분만하여 젊은 새색시처럼 부끄러워 할것이다.
그래서 나의 아이는 차츰 자랄 것이고, 나는 차츰 성숙하면서 언젠가는 덕이 있는 부모가 되어 영화의 어머니로서 한점 부끄럼 없는 생애를 마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입문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 한가?
정성을 다 해서 ‘이혼녀’를 만들고 있다.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랬던것이 30년전 인데 과연 나는 지금 그 뜻을 이루었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감독 입봉을 하고서야 우리 경기상고 동창들을 만날 수 있었다.
충무로는 아무나 살아남는 곳이 아니기에 입봉할 때까지는 모두 아는 척을 안한다. 아니 못한다. 얼마 있다가 떠나는 곳이기에 더욱그렇다.
그후 우리나라에서 액션영화의 길을 열었던 임권택감독의 스승 정창화감독이 계심을 알았고, 헬리콥터에서 촬영하다가 한강 선착장에서 돌아가신 손현채 촬영감독님, 함남섭 촬영감독, 영화편집녹음의 일인자 한양녹음실 김영길 기사님, 여인천하의 김재형 감독님, 후배영화감독으로 서울예고출신의 ‘실연클럽’의 오덕재감독,그리고 배우 이영후, 김상순등 모두가 우리 경기상고출신들이다. 연극 영화과 출신이 아닌 자랑스러운 경기상고 선후배들과 충무로에서 충무로맨으로 살게 된것이다.
입봉영화의 음악은 전국노래자랑 악단장님이 맡았고 주제가도 가수 김부자가 참여해주었다.
작품발표회에는 우리나라 최고 영화배우 김지미, 변강쇠 이대근, 가수 박일남, 야구감독 김인식, 야구선수 양종혁등등 만은 분이 참가해주었다.
그날 나는 참으로 씁쓸했다. 우리 동창들은 한명도 없다.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데... 친구들이 없어 더욱 쓸쓸했다.
언젠가는 알겠지... 그 후 방송드라마 ‘나의 살던 고향은’에 현 동창회장 김용겸이 작품발표회에 참석해주어서 지금도 개인적으로 용겸에게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을 갖고있다.
‘앞으로 나는 인간의 숙명을 깊이 있게 다루겠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의한 영화작업을 하도록 최대한 노력을 할것이다.
철저한 리얼니즘 터치로 인간을 그리는 완전한 드라마를 구축하여 한국영화의 참여자로서 부끄럼이 없는 감독이 되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가슴속 깊이 다짐한다‘
이렇게 다짐을 했었건만 나는 먹고 살아 남기 위하여 영화이외에도 영상이 주는 모든 일(TV드라마,홍보,문학,교양프로 등등)을 잡식성으로 해 온 일생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언하고 싶은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충무로’ 즉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하여 모두 가슴을 열자는 것이다.
지난 세월에 잘못된 관행, 잘못된 영화진흥정책, 소수집단에 의한 충무로 장악, 소수 영화인만에 의한 영화 만들기,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 해보자는 것이다.
영화60년사를 묵묵히 지켜오는 선배,동료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자는 캠페인을 벌일 필요가 있다.
스크린쿼터가 178일로 대폭 삭감된 현 시점에서 충무로에 산재하여 있는 소위 ‘충무로’인에게 <일자리 만들어 주기 위한 운동>을 대 정부정책 및 영화 투자 정책에 반영시켜 활기찬 옛날의 충무로로 복원 하기를 희망한다.
그들에게 카메라를, 필름을, 연기를, 메가폰을, 다시 들려 줘야 한다.
그들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을 마련해 줘야 한다.
영화 관계 당국자들이나 영화진흥을 위한 관계자들은 그들을 충무로에 존재케 함으로서 한국영화의 풍토가 다시 조성되어 살아 난다는 평범한 진리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이것이 본인이 30여년간 생활해오면서 실제 피부로 경험했던 아쉬웠고 안타까운 일부분이지만 충무로에서 얻은 산 경험임을 밝혀 둔다.
그들에게 영화를 만들 일자리를 줌으로 인해서 수만명의 영화인과 그 가족들이 생동하는 잘 순환된 체재와 보다 의욕적이고 학구적인 풍토속에서 한국영화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대를 맞이 할것이라고 확신 한다.
전 한국영화감독협회 홍보이사겸대변인
일간연예스포츠 회장/영화감독 조우진<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