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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사적저널 17 - 네겝
제목: 네겝
날짜: Wed, 19 Sep 2001 17:09:56 -0400
사진은 네겝사막과 텔 브엘쉐바의 상점터 발굴지입니다.
우리 일행은 내일 금요일, 네겝 사막으로 떠납니다. 3박 4일의 일정이지요. Negeb 의 본래 의미는 Dry 라는군요. 사막답게. 또 하나의 다른 뜻은 남쪽이란 뜻이랍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현재 이 나라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지요. 시나이와 맞붙어 있는데, 불행하게도 시나이는 못가게 되었습니다. 이곳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집중되는데 반해, 이짚트에서는 주로 관광객들을 타켓으로 한다는군요. 그래 상황이 불안정 하게되면, 제일먼저 취소 되는것이 이짚트 랍니다. 4년전에도 (1997년)27명의 독일 관광객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1967년 유명한 6일 전쟁때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뺏었다가 다시 돌려주어서, 그곳에 가기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안전을 이유로 이번에는 취소되었지요. 10월에 본격적인 이짚트 일정이 잡혀있는데, 혹시 상황이 호전되면 그때 다시 들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네겝 사막 북쪽의 제일 큰 도시 브엘세바를 거쳐 이스라엘의 국부라고 불리는 벤 구리온이 말년에 은퇴하여 칩거하던 Sede Bogel 이라는 Kibutz (키부츠)에서 일박하고 구약성서의 여러 유적지를 거쳐 Ilat(엘랏) 까지 내려갈겁니다. Ilat은 요르단쪽에서는 Aqava(아카바) 라고 불리지요. 바로 홍해에 접해있는. 홍해는 사철 기온이 일정하여 산호초가 아주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수영할 시간도 준대요.
우리 교수중 아주 smart 한 레슬리 홉이란 분이 있는데, 시나이에 못가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겠지요, 왜 시나이에 갈필요가 없는가를 성서고고학을 들어 재미있게 설명해주었지요. 다른 여러 학문적인 것은 차치하고, 웃기는 이유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시나이산에 올라간 사람은 모세밖에 없었다. 고로...
네겝은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유목민들이 거주하다가, 다윗과 솔로몬때 이스라엘에 병합됩니다. 솔로몬 사후 동쪽의 Edomite(에돔인) 들이 아랍의 압력으로 네겝으로 밀려들어옵니다. 에돔은 히브리어로 붉은색이란 뜻입니다. 그 지역은 주로 sand-stone(사암) 인데 이 돌이 붉은색을 띄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후일 로마가 점령한후에는 Idumea(이두메아) 로 명명하고. 바로 헤롯이 이곳 이두메아출신의 이방인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인터넷 연결은 돌아와서 다음 주 화요일쯤 가능할겁니다. 오늘은 김 대건, 정 하상, 동료순교자들 기념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날은 뭐 빼도박도 못하고 제가 주례를 할 수 밖에 없지요, 한국순교성인들 축일이니까요! 강론도 언제나처럼 짤막하게 했습니다. 다음은 그 강론이구요. 여기에 나오는 손님과 주인의 용어는 황 석영의 "손님" 에서 딴겁니다. 한번 꼭 읽어볼만한 소설입니다.
2001. 9. 20 한국 순교자축일에 예루살렘에서
The history of foundation of the Korean church is peculiar. Unlike beginning of the church in other nations, about 220 years ago, our ancestors came to the faith not by missionary's preaching but through personal study of books. One of our ancestors travelled to Beising, where he happened upon some books written by Italian Jesuit Matteo Ricci. He carried these books back to Korea and shared them with his friends. Being serious scholars, these men soon realized these books were not about western sciences but a religion previously unknown to them. Solely guided by these books and their shared conversations, these men accepted the faith and became the first Korean christians. Without any outside assistance they founded the church in Korea. They chose their own leaders and ordained them. On their own they established a clerical hierarchy with bishops and priests. This infant church was composed of scholars, their families and their servants. (This group was small, but it was the church). Eventually Roman authority heard of these development and hurriedly forbidden it. Later we refounded the Korean church according to official Roman Catholic norms. Today the korean church's membership is about two million believers or about 5 % of population. These Catholics largely are middle and upper class, so despite our small numbers we are quite influential.
I wonder about differences between our beginnings as a church and today's church. Unlike our native church, contemporary Korean Catholic church has few indigenous characteristics. I see a connection between situation of today's korean Catholic church and situation of our divided nation. The Korean people have the only homeland in the world still cut in half by post world war politics. I can come here to Israel, looking for ruins of ancient biblical people, but I cannot visit my own ancestors home in the northern part of country.
I believe the division of my country and absence of a korean character in my church have the same roots. Because Korean colonization by Japan came to an end not by our own people but by foreign powers(westernized christianity, Marxism), we koreans have lost ownership of our own destiny. Now the guest has become the host, the host has become a guest in our home.
Only when we, Koreans recover our selfidentity, will the guest go back to their proper role as a guest. Once these two things happen, we recover our selfidentity and the guest again is guest, then Korean acculturation of the Catholic faith and the reunification of our country will be possible. I believe in doing this, we will be faithfully following the historical Jesus(who was himself faithful to his own culture, tradition, religion).
보충 자료 -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의 경제상황
팔레스티나는 길이 240Km, 폭 85km, 총2만 평방(km)의 작은 땅이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에는 5만 명이 살았다. 예루살렘은 지중해에서 해발 760m, 사해로부터는 해발 1,145m의 고원지대 극단에 위치했다. 커다란 종교적 명절때면 해외의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성전으로 와서 18만여 명의 순례객이 모였다.
팔레스티나는 긴 능선이 중앙을 가로지른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 평야가, 동쪽으로는 깊은 요르단강 계곡이 있다. 남부는 사막이다(네겝). 북부에는 갈릴레아가 있고, 낮은 구릉이 펼쳐진다. 일년 내내 눈이 쌓여 있고 2,815m나 되는 헤르몬 산과 평균 1,875m나 되는 레바논 산맥이 있다. 이 산들을 향해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북부 갈릴레아와 남부 유다는 중요한 곳이었다. 두 지방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나뉜다. 갈릴레아는 예수님의 고향이다. 푸른 언덕으로 둘러 쌓여 있고, 파란 호수가 펼쳐져 있다. 예수님과 가까운 이들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살던 어부들이었다. 갈릴레아 북쪽은 레바논 산악지대가 경계를 이룬다. 동쪽으로 요르단강, 서쪽으로 해안평야 지대가 경계를 이룬다. 갈릴레아는 서늘하고 나무가 많은 농업지역이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 포도밭 등의 과수원이 많은 비옥한 땅이었으니 작은 마을이 산재했다.
갈릴레아는 자연 강우량이 많았고, 갈릴리 호수와 하천이 있어 물이 충분한 이상적 농업지대였다. 또한 도로가 교차하여 주변 나라가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교역이 발달했다. 자연히 외부 영향을 환영하고, 쉽게 수용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희랍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많았고 이방인들이 가장 큰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릴레아인들은 점점 유대화되어 갔으며, 유대 율법을 신봉했다. 기원후 6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호구조사를 하자 이방인이 많이 사는 갈릴레아가 반발했다. 그래서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열심당의 발상지가 되었고 그 후 갈릴리인들은 거의 무정부주의자로 인식되었다.
팔레스틴의 남단인 유다는 돌이 많은 고지대로 가파른 계곡들로 둘러 쌓여 분지를 형성했다. 남쪽 경계는 네겝 사막인 반면, 동쪽에는 깊고 험한 요단 계곡과 염분이 많은 사해가 있었다. 서쪽 경계는 굴곡이 심한 계곡으로 이루어졌다. 유대고원은 비옥한 곳도 있었으나 돌이 많아 농토로는 부적당했다. 분수령 지대에는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었다. 예루살렘 북서지역은 해발 790m, 남동지역은 해발 730m이다.
한편 유대는 주변세계에서 단절되고 고립되었다. 그러한 고립은 외부세력에 대한 격렬한 저항정신과 민족적 폐쇄성을 초래했다. 유대는 철두철미하게 유대인들만의 땅이었고, 로마군과 식민지 관리를 제외하고는 이방인이 거의 없었다.
팔레스티나의 경제기반은 당시에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농업이었다. 특히 갈릴레아 북부 평야에서 농업이 발달했다. 수공업과 소매업도 있었다. 갈릴레아와 유대 토착민들은 유산으로 받은 토지를 경작했다. 토지를 상실하면 독립생활을 할 수 없었다. 루까는 씨뿌리는 농부(루까8:5-8), 잃어버린 양(루까15:4-6),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유한 농민가정(루까15:11-32),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루까20:9-16) 등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농민들이 생활모습을 소개한다. 예수님께서는 사생활과 공생활 대부분을 갈릴레아에서 보내셨다.
팔레스티나 농민들은 대개 가난했다. 예루살렘의 소수 상류층과 갈릴레아의 대지주등 소수만이 부유했다. 부유한 농부는 대토지 소유자였다(루까12:16-21). 나자로가 구걸하던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서 재산을 축적했을 것이다(루까16:19-31). 그 토지는 원래 농민의 소유였다. 토지를 상실한 원인은 세금미납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로마 세금, 성전세, 지역 제사장과 회당을 위한 세금 등 삼중의 막대한 세금을 물어야 했다. 로마 조세정책은 세금을 화폐로 요구하는 체제였다. 농민들은 세금을 낼 수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지주에게 토지를 팔아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토지가 몰수되었다.
갈릴리는 유대와 달리 비교적 풍요로운 여건이었다. 호수는 농민들에게 고기잡이를 통한 생계수단을 제공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치던 제자들을 부르시고(루까5:1-11), 배에 앉아 이야기하시고(루까5:3), 폭풍을 가라앉혔다(루까8:22-25). 농어민은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연명했다. 직조공, 피륙 다듬이공, 재단사, 대장장이, 필사공, 도공 등의 수공업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대받았고, 생활수준은 풍족하지 못했다.
세리도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로마 제국주의는 세금을 징수할 때 민중의 여론을 고려해 유대인 세금 대납업자인 세리를 시켰다. 세리들은 로마의 유대인 하청업자인 셈이다. 자연히 세리는 민족주의자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들은 종종 수탈도 자행했기에 유대인들의 증오대상이었다. 예리고에 사는 자캐오도 지역의 통행세와 시장세 징수를 하청받은 세관장으로서 동업자를 시켜 세금을 징수했다(루까19:2). 그래서 예수님이 자캐오 세관장집에 머무시자 사람들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루까19:7).
다수가 일자리를 찾아 방황했다.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빌려 소작인으로 경작하거나(루까20:9-16), 대농장의 임금노동자(마태오20:1-16), 또한 부유한 집의 집사나 하인이 되었다(루까16:1-8). 도시의 건축사업에서 고용기회를 찾기도 했고, 헤롯왕이 예루살렘과 그밖의 장소에 세운 대 건축물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난은 해소되지 않았다. 실직한 이들은 장래를 염려해야 했다(루까16:1-8).
예루살렘은 각지에서 모여든 상품집결지였다. 그래서 교역이 크게 번성했다. 상인을 습격하는 강도들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다(루까10:30-35).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여성들은 매춘에 의존하여 연명하기도 했다. 매춘은 유대도시보다는 헬레니즘화된 희랍도시와 그 영향을 받은 갈릴레아에서 행해졌다(루까7:36-50).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신부님 잘 읽었습니다..경제 상황을 성서구절로 집어 주시니 이해가 빠르게 전달 됩니다..감사 합니다..건강하셔요..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라 처음 글부터 마지막 글까지 아주 열심히 한 번 더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