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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발행자명 | 명지어문학회 |
학술지명 | 明知語文學 |
ISSN | |
권 | 23 |
호 | |
출판일 | 1996. . . |
①春香
춘향의 이름은 春香이다. 글자 그대로 봄의 향기다. 우선 이 봄이라는 의미에 접근하여 보면 봄은 사전적으로 입춘부터 입하 전까지의 계절로 기상학적으로는 3·4·5월을 말하며 날씨는 따뜻하여 갖가지 꽃이 피는 계절이다.
春風에 花滿山이요 月風臺라
四時佳典이 사론과 혼가지라
허물며 漁躍?飛 雪影天光이야 어늬그지이시랴
-이황-
이 봄바람은 또한 희망과 소생을 주는 바람이다.
봄VNF이 푸르거든 즉시 도라오소서
-장현-
이 시조는 봄풀이 푸르러지면 가시던 님도 다시 돌아온다는 소생의 이미지에 있다. 따라서 이 봄은 미래의 희망찬 앞날을 형상학적으로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봄의 향기가 가장 왕성한 날은 5월 5일이 된다. 이 단오의 날은 바로 춘향 즉 봄 향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바로 이러한 봄의 향기. 즉 춘향은 여인으로서 가장 성숙하고 아름답다는 의미지수를 가진다. 따라서 가장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가장 아름다운 날의 이미지로 축약된다.
그런대 속요유회에 보면 이 춘향의 향기는 서로 미친듯이 상대방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스스로 가장 좋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진 자의 상징성이 된다. 그런데도 자기가 가장 좋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그 스스로 가지지 아니하고 님에게 향기를 주는 의미는 해학성이 된다.
봄 미나리 살진 맛슬 님의게 드리고져
-무명씨-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볕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가장 좋은 봄 미나리를 가진 자가 이것을 그의 대상을 향하여 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향기의 이동이 된다. 춘향이 그의 대상을 향하여 향기를 주고자 하는 의미는 그 의미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춘향보다 어느 것이나 더 낳을 것이 없는 그 대상을 절대시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것은 나보다 못한 대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해학성이 된다.
춘향은 이름자체가 하나의 해학성이다. 머물러 있지 못하는 이 향기는 날개를 가지고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자꾸 날아가는 이 바람을 가진 향기는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졔
-이조년-
梨花 스스로 가장 좋은 꽃이면서 봄 마음의 향기가 되는, 곧 가장 정이 많은 春心이 되어 소설의 춘향이처럼 그네를 타고 훨훨 창공을 나른다. 따라서 그것은 병이 깊음이 되어 그녀의 이도령을 향하여 날아가는 여인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해학성은 그 대상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이 춘향은 사람을 유혹한다. 마치 향수가 사람을 유혹하듯이,-향수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완전한 향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인 梨花에 月白한 장소, 혹은 이도령이 춘향을 만난 광한루에서 그의 대상을 향하여 향기를 발한다. 가장 아름다운 장소와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정비례하면서 봄의 향기가 된다.
듕과승이 萬疊山中애 만나어드러로 가오어드러로오시넌게 山조코물죠
혼듸곳갈시름 여보세 듸다하너푼넘느 양은白牧丹두퍼귀가춘풍
에흥을계워흔들흔를휘드러셔넘느 듯아마도山中시를은이둘 인가 노라
-무명씨-
중과 여승이 깊은 산골 좋은 경치 속에서 있는 모습이다. 춘풍에 흥을 못이기어 하면서 가는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의 향기를 가지는 홍을 지닌다. 아무리 아름다운 향기의 여인이라도 장소가 좋지 못한 곳에서 나는 향기는 향기의 특징을 상실한다. 춘향은 인간의 그리움의 원초적 고향이 된다.
② 봄향기의 꽃
봄 향기는 어머니의 향기와 같은 그리움을 주는 곳이다. 그러기에 봄 향기는 어떤 비정상적이고 괴로움과 이탈성이 있는 불건전한 정서가 있는 곳에서 발생하지 아니한다. 울음보다는 웃음, 퇴폐성보다는 웃음이 자생하는 곳에서 향기가 발생한다.
이것을 퇴계가 주장한 이기실과 연관하여 보면 기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운동을 말하고 음양은 오행의 질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음에 유의할 수 있다. 이라는 것은 이러한 기에 내실하고 있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주자가 주장한 하나의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라고 하여 태극 즉 이의 일원에 귀착시키려고 노력한데 대하여 퇴계는 이기이원을 상대적인 별개의 물건으로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선배들이 하지 못한 것을 자기의 창의성을 가지고 해명한 것이 된다. 퇴계는 이기이원을 가장 삼라만상의 실재의 근본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와 기는 서로 존재하면서 체용을 한다고 보았다. 그런고로 이 향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이가 있고 또 이가 있는 곳에 반드시 기가 있어서 이것은 문학의 원초적 고향이 된다.
이 원초적 고향의 향기가 있는 곳은 구체적으로 꽃이 피는 곳이다.
꽃퓌자 술이 닉고 달붉쟈 벗이 와서
-무명씨-
이 꽃이 피는 곳에서 밤을 새어 놀고싶은 것은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③ 나를 잊는 웃음의 해학
나를 취하게 하는 향기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은 시간관념을 가질 수 없다. 인구에 회자하는 무릉도원에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잊는다. 이 해학성은 내가 향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의 대상에게 나를 주거나 맡겨버리면 그 속에서 봄 향기가 자생하는데 있다. 나의 힘이 아닌 상대방에 의하여 나의 잊음이 자생하는 곳은 곧 가청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삶은 한 사람의 것이지만 이 어우러져 삶을 공용하는 동안 나는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 이 평화스러운 가정은 나의 양보로 나를 잊게 하는 끈끈한 정이 있는 곳이다. 마치 꽃 한송이가 그 주위를 넉넉하고 아름답게하듯이 개개인의 삶 내지는 인생을 감미롭게 하는 곳이다. 이 융합을 이루는 의미지수는 해학성이라는 거대한 문학적 명제와 관련된다. 여기에서 봄 향기의 해학성이라는 특별한 명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풍자적인 꼬집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훈훈함과 웃음과 사랑이 있는 곳. 그러기에 표현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는 특성이며 사회성보다는 인간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봄 향기의 해학은 그냥 나오는 웃음보다는 의미를 가진 웃음이라는 귀결점에 도달한다.
-무명씨-
일회적이고 유한한 인생이 만수무강하는 일도 봄의 향기를 맡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해학성이 된다. 즉 영원히 살 수 없으면서도 봄 향기를 맡으면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꿈꾸는 것이다.
ⓛ 여유로운 웃음의 향기
우리나라의 사계절인 봄·여름·가을·겨울은 우리 할머니들의 물레 잣던 손길, 농부들의 도리깨 타작, 어머님의 다듬이 소리와 어깨춤이 흥겹던 농악에 이르기까지 흥으로 시작되는 흐름(流). 굽이(曲). 마디(節). 풀림(解)이 연관된다. 한국문학의 속성인 여우가 여인의 치마자락과 남자의 도포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더구나 고름의 한들거림 또한 이러한 자생성과 관계된다. 멋이 들어 있는 이 한국적인 특징은 그 넉넉함의 옷자락에서 인생도 넉넉함의 감흥으로 일상성을 기쁨이건 슬흠이건 감미롭게 하게 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러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명월이 만공산한 향기는 삶의 향기이다. 이 향기를 지닌 삶의 풍요로움은 한국인의 자연 속에서 자섕한다, 이 여유로움은 우려들이 일상에서 겪어온 그 넉넉함의 향기를 자생시킨다. 일의 서두름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계 해 주는 이 봄향기는 인간의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도 喜化하려고한다. 사실 인간은 그에게 닥쳐오는 일상의 긴장감을 해소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든 해소할려고 하는 본능을 지닌다. 황진이는 자신의 의지로 할수 없는 대상을 일깨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로 하락시킨다. 입지가 전이된 이 향기는 오히려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가라고 하는 명령까지 함으로서 봄향기의 해학성적 극치를 보여준다.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가라는 향기는 그래서 그 대상을 쉬어가게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여유와 낭만을 가져오게 된다. 비논리적이면서도 이 굴곡과 마디의 흐름이 찾아지는 해학성은 향기의 근본적인 멋이기도 하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도 자고 가자
'가차 '가자 자고 가차'와 같은 청유형에 의하여 그 대상을 목적지까지 이른바 유인하는 장면은 은근과 끈기가 살아 움직임을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일반적인 우리들의 아름다운 생활방식은 드디어는 목적을 이루고 마는 향기로 세월을 이기는 웃음의 기본적인 의미지수가 된다. 따라서 오천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멋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권5에 나오는 永才편을 보면 영재는 성품이 해학성을 지녔고 향가를 잘 지었다고 하는 즉 남을 다스리는 입장에 선다. 만년에 南岳에 숨으려 代顥嶺에 이르렀을 때 60여 명의 도적이 나와 칼을 빼들고 목숨을 위협하며 그 이름을 물으니 두려운 기색없이 永才임을 말하고 노래를 지어불렀더니 도적이 감동되어 비단 두 끝을 준다. 그러나 그는 향기로운 웃음으로 말하기를 도적질한 물건이 지옥의 근본이 되는데 어찌 받을 수 있느냐고 한다. 그리하여 오히려 도적들이 그의 부하가 되는 장면은 바로 일상을 멋스럽게 살아가는 격조 높은 우리 국민의 멋스러운 삶의 해학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조상들의 속성임을 감지할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일상성에서도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인 원초적 고향이 된다.
② 술향기와 웃음
송강은 술의 멋을 다음과 같이 표출한다.
재 넘어 성권농집이 술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희야 네 권농계시냐 정좌수왓다 하여라
-정철-
술향기로 인하여 성권농 집의 술을 마시기도 전에 정철 송강의 양볼엔 이미 술맛이 익을대로 익어있는 이 시조는 술을 진탕 먹어서가 아니고 술을 즐길 줄 아는 해학성이 들어 있다. 앞의 시조에서도 본 바와 같이 꽃이 있고 술이 있고 달이 있는 곳에서 취할 줄 아는 술의 멋이 들어 있다. 이 술이 주는 향기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다는 비극적인 존재에 대한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주고 있고 아이러니칼하게도 흥이 저절로 돋아나는 봄 향기를 가진다
한잔 먹새그녀 또 한잔 먹새그녀 곶것거 算놓고 無盡無盡 먹새그녀
이몸 죽은 후면 지게 헤 거적 덮어 줄이혀 메여가나 流소寶帳의 만인
이 울녜나 어욱새 속새 덥개나모 白楊 속애 가기곳 가면 누론해 흰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물재 뉘 한잔 먹자할꼬
하물며 무덤 우혜 잰납이 파람 불제야 뉘우친를 어떠리
-정필-
위 시조에서는 기왕의 비극적인 울음의 내용을 울음이 아닌 웃음의 향기로 바꾼다. 화려한 휘장을 하여 찬란히 꾸민 죽음의 상여를 배경으로 한이 장진주사는 오히려 죽음조차 향기로 바꾼다. 물론 술을 권하면서 인생의 맛을 음미하는 것이지만 실제의 해학성이 주는 멋은 죽음조차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멋을 지니는데 있다. 그래서 한잔 먹자는 시의 의연을 통하여 그 의미가 확대되어 간다. 그 죽음 너머에 우리의 눈물이 어리는 굴절이 숨어 있으며 인생의 마디를 넘어가는 지혜의 향기가 있게 된다. 한번 웃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따져 보면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어서 한차원 높은 지적인 웃음이 된다. 빳빳한 모시적삼 속에 비치는 하얀속살이 되는 해학성이며 돌아서서 옷을 수 있는 여유가 숨어 있는 술을 통하여 죽음의 괴로움을 넘어가는 우리들의 일상이 들어 있다.
③ 하늘을 향한 웃음의 향기
기와 지붕의 수기왓골 맨끝을 가리는 둥근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수막새에도 웃는 얼굴을 새겨놓고 있다. 얼굴 모양을 지닌 수막새의 미소는 한국인의 미소가 된다. 낚시 바늘에라도 걸려 올려진 듯 입술 가장자리며 토라진 두 눈의 웃음이 소복소복 담겨져 있는 이 이지적인 향기를 만드는 작업은 그림으로서의 호랑이의 모습이 어디에서나 웃음기 어린 해학성으로 일관하고 잇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인의 국민성은 울음보다는 웃음을 그 향기로 하는 해학성을 지닌다. 이 웃음은 바로 우리들의 문학에서의 해학성이 되는 것이다.
조윤제도 <자유문학> 20호에서 한국인의 멋이 일종의 희극적인 감정이요 일종의 해학미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거니와 이러한 점은 한국의 역사가 오천년이라는 끈질긴 시간의 길이와 일치하는 것이다.
님이여. 강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이 강물을 건너시려네
님은 이미 물에 싸져 죽었으니
님이여 넘이여 어이한다 말고
당신은 어이 하잔 말가
<공무도하가>
이 시가에서는 고대인의 해학성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백수광부의 아내에게 오는 절망과 체념이라는 운명적인 이야기보다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공후인을 치며 노래를 지어 부르는 아내가 갖는 마음의 여유 이전에 어떤 짙은 해학성을 볼 수 있다. 오히려 기독교적인 뒤를 돌아보지 않는 현실 삶의 진리와 남성적인 거대한 해학적인 향기가 밑바탕이 되어 있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눠해언고
본대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하릿고
<처용가>
이미 인구에 회자하는 사건을 문제삼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아내의 다리가 넷이 된 상황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갔다는 점, 그 차제가 바로 한국인. 특히 남성들이 가질 수 있는 거국적인 향기의 해학적 진미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대국적 웃음인 해학의 향기는 단연코 과거의 기정사실을 돌아보아 연연하지 아니하는 점이며 냉혹한 현실 대응의 처방방법의 멋스러운 점이 돌출되는 해학성이다. 그것은 바로 우행에 대한 자신의 여유와 해학이 갖는 방법까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후 역신은 전연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① 정철의 시조
새원 원쥐 되여 삿갓 메오이고
細雨서風의 一건竹 빗기 드러
紅상花백령주자의 오명가명 하노라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가
하늘같은 가없은 은덕을 어데 닿여 갑사오리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긔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訓民歌>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 다 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子孝·父子有親>
한 몸 들에 나눠 부부를 삼기실샤
있은 제 함께 놀고 죽으면 한데 간다
어디서 망녕의 것이 눈흘기려 하난다
<夫婦有思·夫婦有別>
팔복 쥐시거든 두 손으로 받치리라
나갈 데 계시거든 막대 들고 좋으리라
鄕欽酒 다 파한 후에 뫼셔가려 하노라
<長幼有序>
남으로 생긴 중에 벗같이 有信하랴
나의 왼 일을 다 이르러 하노매라
이몸이 벗님곳 아니면 사람됨이 쉬울까
<朋友有信>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잤사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옷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鄕間有醴>
네 집 喪事들은 어도록 차리나산다
네 딸 서방은 언제나 맞추나산다
내게도 없다 커니와 돌브고자 하노라
<婚姻喪事·隣里相助>
쉰 술 걸러내어 맵도록 먹어보제
쓴 나물 데워내어 말도록 씹어보세
급격지 보요 박은 잣징이 무되도록 다녀보세
공화문 들이 달아 內兵曹 上直房의
하로밤 다삿경의 스물석? 티난소래
그 덛에 陳이 되도다 꿈이론 듯하여라
신라 入百年에 높도록 무은 탑을
干斤든 쇠붑소래 치도록 울힐시고
들거너 寂寞山頂에 暮景 도울뿐이라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매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거든 네 논 좀 매어주마
올 길에 뿡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無情農桑>
비록 못입어도 남의 옷을 앗지 마라
비록 못먹어도 남의 방을 비디 마라
한적솟 때시란 휘면 고쳐 싯기 어러우리
辛君望 校理 적의 내 마참 修選으로
上下番 갖추어 勤政門 밧기러니
고운 님 옥같은 양자 누의 암암하여라
석양이 빗긴 날에 강천이 한 빛인제
楓葉蘆花에 울어네는 저 기럭아
가을이 다 지나가는데 소식 몰라 하노라
송강이 한문화 시대에 한글만으로 작품을 썼다는 것은 곧 한국인의 특징인 해학성을 그의 시조에서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지수가 된다. 이러한 것은 그의 시조 86수가 곧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향기나는 이 시조들은 우리말의 능숙한 구사를 불 수 있음으로서 그의 가장 알맞는 우리말의 활용이 그 당시의 한문화권이라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한국인의 멋을 자랑하는 결과가 된다. 訓民歌 16수는 그가 45세에 강원 관찰사로 있을 때 도민의 교화를 목적으로 지은 작품이다. 이것을 후에 효종조 이순원이 전국 국민의 교화용으로 쓰기 위하여 김정국이 편찬한 敬民扁이란 교화서에다 부록으로 넣어 제도에 편 일이 있을 후부터 訓I民歌(敬民歌)라 부르게 된 작품이다. 본래 훈민가는 18장 19수로 되었던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하는데 내용은 父義의 13항을 달고. 거기다 君臣.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3항목을 추가하여 지은 작품이다. 원래 경민편의 저자 김정국은 그 서문에서 힝벌과 법을 제정함이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백성들이 무지해서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인륜도리와 법을 깨우쳐 주지 않고 다만 법만 다스리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인도에 관계가 깊고 범하기 쉬운13개 조항을 들어 엮은 것이라고 경민가 서문에 밝힌 바 있다.1) 송강이 이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고 익혀서 부르고 외우게 하여 그때 그때마다 마음에 새겨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한 것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정의 발로라 하겠다. 해학을 가진 민족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본다. 죄없는 사회는 인간 공동의 삶의 원초적 고향이 되는 곳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 멋과 생활의 여유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문학의 주제가 된다. 따라서 문학이 어느 먼 광인의 일기가 아니라 인생을 가장 값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한 삶의 리얼리틱한 현실의 노력이라면 먼 곳의 시상이 아닌 실질적인 생활을 중요시하였다는 것 자체가 곰 향기가 살아 있는 문학이 해학적인 가치가 되는 것이다.
② 외국인의 웃음에 대한 이해
흔히 외국에서 말하는 유모어의 본질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도 한국적 관념으로서의 해학성이 된다. 먼저 버너드 쑈가 말한 유모어는 정의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웃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곧 유모어가 있을 때 우선 자연 발생적인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해학과 유모어는 유사성에 있다. 영국의 시인 몌레데이스는 유모어는 심령의 광휘요 지혜의 풍부라고 하고 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임어당이 말했는데 그는 대개 俗事를 해탈한 사람은 만상의 것이 모두 인생의 골계로 깨달아 지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 높여 웃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세에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웃음의 의미인 이삭이라 칭하는 것도 굉장한 해학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이름의 의미가 웃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학성의 정의는 보다 폭넓은 긍정성과 삶의 보다 폭넓은 의미지수가 된다.
① 가난과 해학적 향기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삶을 그들의 층이 아닌 사람들을 놀리는 웃음을 웃을 여유조차 없다. 더구나 괴로움을 느끼는 냉소적인 웃음을 웃을 시간도 없다. 그러기에 흔히들 풍자와 해학을 혼돈하기 쉬운데 풍자가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성을 조롱, 멸시, 분노, 증오 등으로 특히 가난하고 소외당한 충이 표출하는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흉부에게서 보이는 해학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드령 실건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해-여루. 당그여라 톱질이야
여보소 마누라 톱소리를 어서 맡소
톱소리를 내가 맡자고 한들 배가 고파서 못맡겄고
배가 정 고푸거든 허리띠를 졸라매소
헤-여루, 당겨 주소
작은 자식은 저리 가고 콘 자식은 나한테 오너라
우리가 이 박을 타서 박석일랑은 끓여 먹고
바가질랑은 부자집에 팔어다가 목숨 보명 살아나세
당겨주소-
강산에 떳는 배가 수천석을 제가 싣고 간들
내 한박 한통을 당할손가
진양조의 가락이면서도 그리고 웃음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 무궁한 인간 삶의 달콤함의 살맛이 들어 있어서 해학성이 된다. 오히려 아내와 남편의 사랑놀음으로조차 들리는 이 흥부가의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은 뱃가죽이 들어 붙어 있는 가난한 두 부부가 박을 켜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그 속에서 결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의 괴로움은 연상되지 아니한다. 조롱이 아니라 인간 존중의 다시 말하면 단순한 웃음이 아니고 인생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총분한 관찰의 결과에서 섕기는 여유로운 향기를 발하고 있다. 이 향기는 죽음을 넘어선 웃음의 고향을 가지는 것이어서 파라독스를 통하여 생기는 해학적 향기이다. 이 해학적 향기는 마치 대원군이 그의 아들을 의하여 우셋거리가 되어가며 삶을 지혜롭게 하였듯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웃음이 된다. 조롱보다는 오히려 노여움을 풀게하는 해학적 향기가 된다.
② 보일듯말듯의 웃음의 해학적 향기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더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 밖에
김동환 <웃은죄>
시인 김동환의 <웃은 죄>에서처럼 쓴 살짝 웃는 웃음이 우리를 유혹한다. 많은 말을 대신한 웃음이 된다.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어주는 웃음은 우리들의 웃음이다. 이 웃음은 질시나 미움의 웃음이 아니다. 이러한 웃음은 전래의 우리들의 웃음이다. 마치 옛날의 우리들의 선조들의 웃음이 된다. 버들의 새순이 함빡 피어난 어느 5월 조선 왕조시대에 한 사대부 새아씨가 나들이 길에 나선다. 뒤에 몸종을 거느리고 자주 깃이 달린 연두빛 쓰개 치마를 쓰고 버들가지 하느적거리는 산골짜기 길을 걸어간다. 새아씨는 그 산길에서 한 사람의 남자를 만난다. 그는 그 새아씨 앞에서 눈웃음을 준다. 새아씨는 두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머금는다. 이와 연계하여 보건데 문학에 보이는 한국 여인들은 전통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랑하고있다는 속마음은 간절한데 그래서 김이 가득찬 솥처럼 터질듯 부풀어 있으면서 어쩌다가 그 기회만 오면 살짝 입술을 올려 그 벽찬 기운을 노출시키는 빵긋한 웃음, 그것이 유일한 사랑의 신호이다.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요염한 웃음이 나오기가 바쁘게 입술을 깨물어 자제해 버리는 그런 웃음은 바로 문학에서의 한국여인이 가지고 있는 웃음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박으로 떠주는 물에다 나무 잎사귀를 얹어주는 그 웃음의 함축성은 바로 새종대왕비가 되는 일화의 웃음이기도 하다. 또한 낭군이 예불하고 도는 돌탑 아래 처녀가 탑을 돌다가 수줍게 눈이 마주치자 빵긋 웃음을 주며 빵긋한 마음을 감지한 순간 낭군은 아무 말 없이 숲 속에 들어간다. 역시 아무 말없이 뒤따라 들어간 처녀와 사랑을 속삭인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수줍은 웃음 하나만으로 그 봄의 향기가 넘치고 넘쳐서 신라시대 이래 아직까지도 우리 웃음의 유산이 되어 있다. 이 웃음은 기록을 통하여 보는 한국의 원초적인 고향의 웃음이다.
③ 화를 복으로 바꾸는 웃음의 향기
朱熹의 글에 陽氣發處金石亦遂 精神一圖 下事不成 웃는 낮에 침 뱉으랴는 의미나 임어당이 말한 세계 최대의 유머리스터 5, 6인을 국제 회담에 파송하되 여기에 전제군주의 전권을 맡겨보라! 그것으로 새게는 주게된다고 한 말이다. 김사엽의 해학의 관점은 웃음과 해학의 본질에서 해학은 따뜻하고 동정으로 그 대상을 감싸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낙천적 이 미소의 해학적 향기가 정서적 일치를 가져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열두 마당을 돌아가며 보일 듯 말듯 일부러 잇몸을 드러냈다 오므렸다 하는 마당놀이의 각시 웃음은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게 한다. 이와 같은 웃음의 전래는 한국인의 웃음이 다른 사람을 질시하고 증오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다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한 많은 의미를 함축하면서도 한 번의 웃음을 통하여 많은 말을 대신하면서 은근히 웃어주어 유혹하고 끝내는 모든 일을 웃음으로서 해결하려는 즉 한 마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의 웃음기 어린 말의 뜻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웃음의 본질을 강조한 점이다.
④ 욕심쟁이를 바라보는 자의 해학적 웃음의 향기
욕심을 가진 자를 바라보는 여유로운 웃음은 놀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자가 인간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욕심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지적하는 점이된다.
이때 춘절만시절 연자 나비는 펄펄
수양버들이 앉은 꾀꼬리 제 이름을 불러
제비 불러 나간다. 복희씨 내신 그룰. 그물을 맺어 둘러매고 망망산
으로 나간다. 이펀은 우도봉 저편은 좌도봉 건너펀 맞은봉 좌우로 층층
이 들렀난디, 맏당산 짓둘러 덤불을 축 쳐. 후여, 허허여 허여차. 저 제
비야. 네가 어듸로 행하느냐. 떴다. 저 제비. 야이이 아아이고 이리 와.
연비어천에 소개 보아도 졔빈가 의심. 남비 오작에 가치만 보아도 제빈
가 의심. 춘뭉황맹 꾀꼬리만 보아도 제빈가 의심. 저기 가는 저 게비야.
그 집으로 들어가지 마라. 천화 밑에 지은 집이로다. 화급이 동량이다.
내 짐으로 들어 오너라. 이리와라 와
위의 내용은 인간의 허상을 담담하게 바라봄으로서 인간의 욕심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미움보다는 오히려 측은하고 불쌍하게 보여지는 놀부의 마음이 -우리들 자신의 모습 같아서 안쓰럽기까지하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심리를 돌출시킨다. 이 여유로움의 해학은 바로 인간 심연의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는 바 인간의 욕심을 바라보며 용서의 불길이 일어나게 한다. 욕심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의 눈길에서 욕심을 가진 자는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 해학적향기의 깊이는 우리들의 원초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추악하고 욕심 사나운 한 순간일 수도 있는 실상을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그 리얼함이 드러나는 점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가지는 향기는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우리의 삶을 제공해 준다.
살이 긔엇더터냐 등그더냐 모지더냐
길드냐 자르더냐 밟고 남아 재일너냐
굿하여 긴줄은 모르되 긋간듸를 모를네라
-무명씨-
往十里라蹈十里 외너츌수박너출얽어지고틀어져셔골이버더간 사랑
-무명씨-
사랑은 모든 문학에서 주제를 파악하는 방법이 된다. 그러므로 일차적인 작업으로 주제를 다루는 점이 된다. 이 사랑의 주제는 상징들과 인물들을 면밀히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마침내 문학의 정서적인 지수에 도달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사랑의 구성 단위가 되고 있는 모티브를 통하여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어떠한 제목으로 어떠한 모티브로 구성되든 간에 그것의 부분적인 것을 제하고 나면 결국은 주관적인 작가의 사랑의 견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자 하는 사랑의 갈구는 삶의 주요한 원초적 고향이며 따라서 문학의 원초적 본질이된다. 특히 구체적인 시의 소재로서의 인간의 사랑은 고금을 통하여 인간의 끊임없이 작품화되어 온 것이다. 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조들도 결국은 인간의 삶의 전부임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하는 아이러니한 해학성을 지닌다. 끝간데를 모르고 뻗어가는 사랑의 길이는 알수 없는 깊이면서도 사랑의 영원한 현재를 지적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밤낮이 없으며 어떠한 논리의 정연성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깊이는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초적인 깊이로까지 발전하여 한 인간의 깊은 사랑이나 나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하여 가는 춘향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김상용-
밤에도 잠을 자지 아니하고 님을 생각하는 양상은 바로 영원한 현재를 만드는 자의 모습이 된다. 이러한 사랑의 상징성은 실제 인간의 마음대로도 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지정하고 있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려고 하여도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 묘령의 여인 춘향은 문학이라는 달콤함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해학성이 드러난다. 오히려 인간은 잠을 아니자고 살 수 없으면서도 그 잠을 자는 님이라는 독특한 어휘를 통하여 자신이 잠을 자지 않음을 강조하여 대상보다 화자가 더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컷이라는 기독교적인 관념론까지 이끌어 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받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아이러니를 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서화담-
끝없이 확대되어 가는 사랑의 모습은 드디어는 이 지상을 벗어나서 실재가 아닌 신비스러움이 그의 마음 속에 영원을 포착하는 순간을 가진다.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드지 마로소서
-이양원-
松林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곳지로다
님계셔 보오신 후에 녹아진들 어이리(晉化葉)
누은들 잠이 오머 기다린를 님이 오려
이제 누이신를 어디 잠이 하마 오리
이 비상의 순간들은 그의 전 생애를 걸고 영원의 현재를 가지는 향기를 지닌다.
① 멋의 향기
우리나라의 산세는 외국의 산새와 비교하여 산세는 부드럽고 평야는 옥토이며 온화한 기후는 삼한사온의 사계성에서 원초적 고향을 가진다. 따라서 이 속에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온후함을 근본으로 한다. 이속에서 대국적 기질이 탄생한다. 이 뜻의 한 청성은 부드럽고 온화한 것이 가장 대국적이라는 의미로 한정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가장 부드럽고 온순함으로서 그의 거대한 생애를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집방석 내지마라 낙엽옌를 못 안즈랴
-한석봉-
자연 속에서 그 멋을 즐길 줄 아는 우리들의 여유는 바로 하늘이 첩첩 푸르고 명랑한 우리 금수강산에서 우러나온다. 이 좋은 자연 속에서 사람과 자연은 하나가 되어 선과 색이 함께 수려한 청자상아의 멋을 지닌 고려자기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기후 풍토에서 받은 멋은 바로 鮮明性, 純眞性. 優長性 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이 원초적 고향은 자연의 영향에서 비롯되는 멋에서 출발하며 적기에 비 내려 오곡이 무르익는 것, 산과 평야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는 미를 통하여 나타나는 멋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생활의 멋을 가슴 속 깊이 가지고 깊이 즐기며 부드럽게 여유 있고 조화와 홍청거리는 가운데서 우리 민족은 살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사상성에서 멋의 속성인 초탈성, 부드러움이 살아 인생을 값있게 하는 해학성을 표출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생애나 나라가 신 보다 클 수 없으면서도 바로 대한민국의 이름이 지적하듯이 큰 나라의 뜻이라는 해학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곧 고려니 코리아니 하는 이름들이 이와 연관되었다고 여겨지며 크다는 의미가 바로 이 부드러운 자연 속에서 자생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장사훈도 말하기를 우리 음악이 대국적 리듬에 익음을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점들은 바로 우연으로 명명된 이름이 아니라 충분한 원인과 이유가 있을것으로 사려된다. 바로 여유와 온화함 속에서 그리고 부드러움 속에서 대국적 기개가 살아 움직인다는 의미로 보고 싶고 또 인간의 유한성과 일회성에 비추어 보면 해학성이 되는 것이다.
대붕을 손으로 잠아 번갯불에 구워 먹고
곤륜산 옆에 끼고 북해를 건너뛰니
태산이 발끝에 채어 왜각데각 하더라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대붕새를 맨손으로 잡아서 번갯불에다 구워서 먹고 산의 조종이라는 곤륜산을 옆구리에다가 끼고 북해 바다를 단숨에 껑충 건너 뛰니 태산이 발끝에 채여서 왈가닥 덜거덕 요란한 소리가 난다는 이 호탕한 남아의 기개는 바로 한국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대국적 기개이다.
화랑들은 심신 수련을 위하여 경치좋은 산천을 찾아 다녔다. 김유신은 신라에 침입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中岳을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빌어 신성한 힘을 얻는다. 그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천관녀와의 사랑도 과감히 물러설 줄 알았던 지혜는 바로 한국인의 멋이다. 이것은 상당한 시사를 주는 것으로 비단 이러한 현상은 김유신에게만 있는 일이 아닌 한국인들의 일이다. 그것은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이 개인의 영달을 의해서가 아니라는데 그 의의가 주어진다. 신성하고 경의스러운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향기가 살아 힘을 행사한 것이다. 또한 고운의 시에서 고운이 가지고 있는 자연관은 자신과 자연 혹은 자연물을 통해서 동일시 하는데 있다. 이러한 자연은 그만큼 인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고운시에서 동일시되고 있는 대상은 자연물이다. 산수시는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모습이 상호 침투하면서 문자로 결합된 것이다. 자연은 물질성을 갖고 있는 형상을 띤 존재이다. 그러기에 오천년 역사의 지속성은 단군할아버지의 뜻이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해학성은 김유신이나 고운의 개개인의 일이 아닌 오늘날 우리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통일이라는 명제와도 깊은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고운의 시에서 고운이 가지고 있는 자연관이 자신과 자연 흑은 자연물이 통해서 동일시되듯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대다수도 우리들의 자연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자연과 신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산수시는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모습이 상호 침투하면서 문자로 결합된 것이다. 자연은 물질성을 갖고 있는 형상을 띤 존재이다. 인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다가 그가 사랑하는 것들의 감미로움. 즉 살맛이 나는 인간사랑을 넣어 합작을 한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자연의 물질성을 통해 형상화되어 이미지로 남게 되면서 해학성이 탄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도 아니고 물질 특히 자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보다 더 유한한 인생의 길이를 가지지만 그 객관적사물을 통하여 나타낸다. 비록 그것이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가치보다는 그 자연을 대국적인 기개로 사용하여 그 해학성을 시 혹은 작품 속에 넣어 해학성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은 낙천적이고 해학성이 짙은 민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긴밀히 자연에 접근하여 자신의 사랑을 절대화하고 영원한 현재를 그 속에 개입시켜 이지상을 초월하면서 신이 되는 작가의 특별한 창조적 기질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의 특별한 예는 고운과 같은 자연관과 연계시킬 수 있다.2)
기호의 의미에서 수신자가 다시 만든다는 말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그래서 언어는 의미의 기호로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신뢰한다. 언어 생활 배후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법칙, 약속된 룰은 바로 어떤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하리라는 기대위에 인간의 좀더 멋스러운 낭만을 부여한다. 언어적 의미 위에 한 사람의 의미를 덧붙여 불확실성이 되는 인간의 의미를 보다 낭만적으로 얽어 놓는 것이 해학성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최대의 첨단적인 첨예 문학에서조차 다시 조명되는 인간의 몸부림이 되고 있다. 인간의 실망이나 회의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까지도 하나의 넝쿨처럼 다가와서 인생을 살찌우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을 접하는 많은 독자들조차 진실하고 영원한 사랑을 문학을 통하여 마치 인간 개개인이 그들이 접하는 찰나적이고 달콤한 사랑의 경험 대지 사랑을 문학 속에 투입하되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덤비는 문학의 과제가 된다. 그것은 사실 커다란 사랑의 해학성이다 왜냐하면 실재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문학은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이면 커다란 즐거움이 되는 대국성을 띤다. 문학은 그러기에 보다 멋있는 것이 되고 살만한 세상으로 바꾸어 놓는 해학성이 되는 것이다.
② 손잡음의 해학적 향기
그래서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서구형의 풍자에 비해, 동양적인 화해형의 해학은 자신을 낮추어 웃음을 이끌어 내는 의미로 좁혀진다.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 어울리면서 그 진가를 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손잡는 대상은 아주 신적인 존재이다. 그 사람이 낮고 천하고 모양이 없더라고 그는 나의 신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손을 잡아야 한다. 이런 공존의 아주 뜻깊은 해학은 현실에서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끈끈한 인간의 정을 유발한다. 이것은 인간이 주위의 이웃뿐만 아니라 사물. 특히 자연과 하나됨으로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곧 나무로 표현되고, 나무는 새로 인해 인식되며, 그 새는 인간의 소망을 보여주는 과정이 되어 그 전체적 대상 속에서 둥글디 둥근 멋이 스며나오게 된다. 이 둥근 멋은 모난 곳이 없고 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된다. 따라서 마음이 정성으로 있는 곳이 바로 해학이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이고 심리적인 가치가 된다.
꽃아 색을 믿고 오는 나비 금치 마라
춘광이 덧 없은 줄 너들 아니 짐작하랴
녹염이 성음자만지면 어느 나비 오리오
난초가 그 향기와 그윽함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냘프고 한들거리는 즉 곧 시들어 버릴 것 같은 가녀림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해학성을 띤다. 인간이 가까이 하고 싶은 심리적인 면에서 존재가 영원하고 굳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내가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쓰러질 것 같은 그 나약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인간이 자기 본위의 생각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인 동물인가를 알 수 있다. 꽃이 아름다워서 좋기 보다는 그 꽃이 곧 시들어 버릴 거라는 안타까운 심층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유한성에 대한 인간의 연민이 곧 해학성을 돌출된다. 곧 자기에게로 이어지는 자기의 유한한 인간 삶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출발한다면 아이러니한 해학성이 된다. 사랑놀음도 이미 자기에게 짝 지어진 사랑의 대상자 보다는 남의 연인. 남의 꽃을 향해서 절절한 그리움이니 하는 문학적인 폭력어를 감히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에게서 떠날 것 같은 행복의 두려움을 찾아서 인간을 끊임없이 그 속성을 발하는 해학성을 지닌다. 꽃아! 아름다운 네 모습을 보고 날아오는 나비를 오지 말라고 거절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한 시절인 봄이 영원한 것인줄 아느냐. 머지 않아 지나가 버리는 덧없는 꽃인 줄을 너도 짐작하지 못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여름이 와서 녹음이 우거지고 나뭇가지에 열매가 열게 되면 어느 나비가 찾아오겠느냐 그때는 오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꽃은 물론 아름다운 아가씨를 비유한 것이다. 녹음도 아름다울 수 있고 새파란 하늘도 녹엽도 아름다울 수 있는데 비단 빠알간 꽃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유한성과 인간의 분별없는 무한성에의 그리움일 것이다. 너의 아름다움도 한때요 너를 보고 모여드는 총각들도 지금이지 때가 지나가 버리면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없을 것이 아니냐는 그 촉박한 유한성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해학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라보며 모순으로 인한 불쾌감도 포용과 융화의 부드러운 감성을 가지고 해소시키려 한다. 해학이 풍자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속에 자신까지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서 해학은 출발한다. 결과적으로 문학 속에서의 해학은 이처럼 미적 범주로서의 하나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찍이 백제의 바보 온달이 정말로 바보가 아님은 바로 후일 그가 위대한 장군이 됨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해학이 갖는 자신의 낮춤이 속성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모색이 된다.
③ 달관성의 해학적 향기
흘러가는 시간속에서의 방황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다. 인간의 나서 죽고 살아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이 세계 내에 시간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생각 중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다. 이 개념 속에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하여 시간속에서 사라진 것과 현재와 과거의 일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시간은 보편적인 개념으로 경험의 세계에서 논의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가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망상과 잘못과 사고를 저지른다. 사랑을 자기의 것인 양 영원으로 착각하기에 질투와 시기와 미움을 동반한 갖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이 속에서 해학성은 탄생한다. 그것은 훨씬 시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가버린 사랑을 기다릴 줄 아는 해학성이 있게 된다. 그것은 훨씬 자유롭고 사랑에서 놓여난 일들의 해학성이다.
-조식-
이 시조에서는 비록 임금님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그 임금이 돌아가셨음을 듣고 백성으로서 갖는 여유와 낭만을 가진 해학성을 보인다. 이에 다시 더 바보가 되어 시간을 붙들어 매어 놓은 시간은 영원성을 믿는 사람인 양 그곳에서 울고 웃는 자의 모습으로 다시 어우러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양 오히려 시간의 개념을 잊어 버린 양, 바보스럽게 현재를 붙들어 매는 사람인 양, 어울리는 모습의 해학성이 된다. 현재를 무한히 확대하는 자의 모습으로 있어서 남보기에는 바보스럽지만 그것은 방황자의 모습이 아닌 주체가 가득찬 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점은 봄 향기가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