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과거 젊은 시절의 그에게 산은 오로지 경쟁의 무대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악우회 이야기다.
경기대 산악부 출신인 큰형의 로프를 몰래 꺼내 들고가 친구들과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던 고교 3년생 유한규는
악우회 창립 멤버인 이종건씨 눈에 띄었다.
이미 악우회엔 윤대표, 허욱, 한윤근 등 당시 쟁쟁한 클라이머로 이름 날리던 선배가 여럿이었다.
악우회는 한국 첨단 등반모임을 자처하며 볼트를 잡지 않고 오로지 바위만을 이용해 오르는
클린 클라이밍도 주창하던 첨단 등반모임이었다.
일부러 배낭을 묵직하게 메고 둔중한 빙설용 등산화를 신고 하루에 인수봉 암벽루트를 세 개씩 오르거나
벽 중간에 매달려 자기도 하는 등, 남달리 열정적인 등반 열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악우회에서는 자연스레 경쟁적 분위기가 싹텄다.
누군가 어느 루트의 어떤 고빗사위를 자유등반으로 꺾어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젊은 회원들은
너도나도 그 한계를 넘고자 애썼다.
‘먼저, 빨리, 잘’ 이 세 어휘로 당시 악우회의 분위기를 요약할 수 있다고 유한규는 말한다.
그때까지의 자신을 그는 ‘고래 춤의 시기’로 정의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 있죠?
그렇게 그때까지는 선배, 동료들의 칭찬에 고무되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올랐던 시기였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받는 대상이었던 당시 20대 회원들은 경쟁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동료와 함께 하는 등반의 가치를 깨닫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클라이머로 성장한 그의 자만심은
유럽 알프스 그랑드조라스와 마터호른 북벽 등정으로 훈장을 받았을 때 극에 다다랐다.
그러나 81년 바인타브락2봉 사고를 겪고, 자신만의 창조적 등반을 하다가 사라진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를
접하며 그의 등반관은 성취가 아니라 등반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00년 케이투 등반에서 그는 후배에게 결정적 감화를 받는다.
2000년 케이투 등반은 엄홍길의 14좌 완등 행보에서 마지막 마무리 등반이었다.
제4캠프에서 자고 나서 엄홍길, 한왕용 등과 그까지 6명 대원은 산소통을 하나씩 나누어 마시며 등정길에 나섰다.
그런데 유독 그의 레귤레이터만이 고장이었다.
산소를 쓰며 걷는 다른 대원들은 해발 8,200m 지점인 보틀넥에서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고,
그는 혼자 보틀넥 밑에서 지쳐 멈추었다
.
“그 때 랜턴 불빛 한 점이 되내려오는 거예요. 한왕용이었어요.
내가 안 올라오니까 걱정이 돼서 내려온 거죠.
그 친구가 산소 레귤레이터를 입에 대주는 순간, 뭐랄까, 정말 마약 마시는 순간이 그럴까요.
가슴부터 온 전신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어요.
한왕용이는 그렇게 나한테 레귤레이터 주더니 자기는 그냥 올라가겠다는 겁니다.
그 친구도 14좌 완등이 목표였는데 말이죠.
한왕용이는 비록 후배지만 같이 올라가는 등정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죠.
후배한테 존경심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진정한 동료애, 진정한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그는 그때 확연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 후 2003년부터 그가 OBK(Outward Bound Korea)를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1915년 영국의 새클턴 일화를 아십니까.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부빙에 갇혀 조난당했을 때
새클턴은 선장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금장 파이프부터 바닷속에 던져버리면서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챙기자고 호소했죠.
그런 식으로 선원들 28명을 이끌면서 1년 반 동안 남극에서 생존 투쟁을 한 끝에 결국 전원이 살아 귀국합니다.
감동적 동료애, 진정한 리더십의 표본이죠. 제가 등반을 통해 궁극적으로 느낀 것도 그것이고....
그것을, 제가 감동과 더불어 체득한 것을 사회에 전파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고자 한 것이죠.”
그가 진심으로 느낀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업이니만큼,
아직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대세인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한 개념인데도 그런대로 잘 되고 있다고 한다.
대한산악연맹 청소년오지탐사대 일에 그가 적극적인 것도 물론 이런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것이겠다.
유한규, 그는...
- 글 안중국 / 월간 <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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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안중국(安重局)씨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연세대 산악부 OB다,
-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에 '떠도는 산'으로 당선한 작가이기도 하다.
- 1984년부터 조선일보 월간 '山'기자로 일해왔으며 지금은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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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유한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