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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불, 권불의 시대에 심산, 고산지대로 간 이유가 무엇인가
종반에 들면서 해이해져 가고 있는가.
남아있는 여유로운 시간의 안배 차원인가.
너른 방의 나홀로 잠이 7시가 지나서 깼으니까.
그뿐 아니라 기상 후에도 매사에 굼떴으니까(be slow in motion)
츠야도에서 잔 사람은 단 1명(나)인데 고요하던 경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아루키헨로상이 도착할 시각은 한참 후일 것이고, 승용차 헨로상 역시 차량으로 주차장을
가득 채운다 해도 기십명에 불과할 텐데 무리지은 중년 이상의 남녀들.
로프웨이 효과다.
무리 중에 그 젊은이가 있다니?
그는 어데서 잤기에 이 아침에 움벤지에 있는가.
움벤지의 숙박자는 나 하나뿐이므로 로프웨이 아니면 도착할 수 없는 아침 시간인데.
10월 2일의 오셋타이 식사장 이후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했던 그.
3일 전의 마에카미지 재회가 마지막이었는데 만날 인연이 아직 남아있는가.
앞(35회)에서 인용한 우연과 기적을 거친 사기(詐欺) 단계가 아님만은 분명한데 거듭되는
이 재회의 결말은?
우리나라의 명찰과 대찰들이 심산에 자리하게 된 것은 변덕이 죽 끓듯 한 왕조(王朝)들의
찬불과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코쿠헨로의 88레이조가 창건된 8~9c의 일본 천황들은 칙령으로 불사를 권했을
땐데. 왜 심산과 고산에 건립했을까.
토목과 기공 기술의 발달로 도로와 삭도의 건설이 용이해졌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의 발길이 끊김으로서 황폐해졌을 사찰들 아닌가.
츠야도를 떠난 시각은 아침 9시 반.
산초역(山頂驛/로프웨이)에서 오는 경내의 길이 하쿠이(白衣)로 덮여 하얗게 보였다.
정북(正北) 전방 9.4km지점의 67번다이코지(大興寺)를 가리키는 이정표.
노변에 오백나한(五百羅漢)이 도열해 있는 600m가 움펜지를 떠나는 아루키 헨로미치다.
움벤지를 벗어나는 지점, 다이코지9.0km지점에 <讚岐の國香川縣(사누키의나라카가와현)
最後の一國涅槃の道場(최후의일국 열반의도량)>이라는 돌비가 서있다.
행정상으로는 아직 토쿠시마켄 땅이 분명한데도.
산길을 얼마쯤 더 내려가야 토쿠시마 켄(三好市)과 카가와 켄(觀音寺市)의 현계를 지나게
되는데도, 이같은 지역의 열망에 부응하지 않는 이 시대의 당국자들이 괴이쩍게 느껴졌다.
한국을 장악한 그들은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기네의 입맛대로 마구 난도질했다.
자국에 대해서도 대대적 개편을 자주 한 그들인데, 상대(德島県)가 있기는 해도 조정력을
발휘하면 지역(香川県)의 열망을 풀어줄 수 있으련만.
내리막 산길이 토쿠시마 켄에서 카가와 켄 칸온지시 아와이초(觀音寺市栗井町)로 바뀌는
지점을 통과할 때였다.
무리를 지어 뒤따라 오는 듯 하던 젊은이가 홀로 앞서 갔다.
이른 아침에 움벤지에서 본 한 무리도, 이들도 자기네 일행이 아님을 의미할 것이다.
포장도로에 내려서는 긴 계단의 한곳에는 지팡이들(私製)이 모여 있다.
헨로코로가시를 무사히 마무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잠정적으로 퇴역한 공신들일 것이다.
이 지팡이들은 이 지점에서 사카우치 헨로상들을 만나게 되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니까.
자연과 인간의 대화의 길과 헨로하우스
산길에는 "헨로미치는 자연과 인간의 대화의 길"이라고 강조하는 안내판도 있다.
원론에는 동의하지만 이 간판이 가리키는 현장에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인 산길이 끝
나는 노변(雲辺寺4.6km, 大興寺5.0km)에는 '遍路さん墓地' 안내판(200m側方)도 있다.
시코쿠헨로에서 3번째 보는데, 보고싶지 않은(사망하는 일이 없기 바라니까) 안내판이다.
까미노와 달리 인적사항이 전혀 없다.
사인(死因)은 물론 신원(身元)을 알 수 없다면 명복을 비는 것도 막연하지 않은가.
움벤지에서 4.6km, 다이코지 5.0km 지점(里程 木柱) 이후는 논(畓) 농사 위주의 농촌이라
농수용 대소 저수지가 도처에 있으며 헨로미치가 된 240번현도 역시 농로에 다름아니다.
노변의 민슈쿠 아오소라야(民宿靑空屋) 앞에는 '오헨로산노 덴곤반'(おへんろさんの伝言
板/헨로상의 게시판)이 있다.
효과에 관계없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좋은 오셋타이(接待),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다.
민슈쿠를 지나 아와이천(栗井川/谷口橋)을 건넘으로서 현도(240번)에 합류한 헨로미치는
왼쪽의 이와나베이케(岩鍋池)를 지난 후 현도를 떠나 우측(북동쪽) 농로를 따른다.
2km 안팎의 다이코지로 가는 헨로길인데 가끔 지조도(地藏堂)를 지나고 시코쿠헨로 방향
표지와 석주의 안내를 따르면 되는 길이다.
'민나노오야스미도코로'(みんなのお休み所/모두의 휴게소).
표방(간판글)에 비해서는 초라하지만 잠시 쉴 수 있고 조금 더 가면 신덴초 오하라(觀音寺
市新田町大原)에 헨로하우스(Ohenro house Shikoku88 OHARA66-67)가 있다.
26번(金剛頂寺)과 27번(神峯寺) 사이에서 1박한 '헨로하우스'(美園/安藝郡田野町)와 동일
유형(類型)인 듯.
훗날, 시코쿠 전지역(4개현)에 있는 헨로하우스들이 단체를 형성해 '헨로하우스 프로젝트'
를 걸고 공동영업망을 구축한 것 같다.
"The HENRO HOUSE SHIKOKU88"프로젝트는 헨로(시코쿠88성지순례자)를 위한 외국인
수용 시설과 청소년들에게 헨로시대의 헨로문화를 통해 삶을 살피기 원하는 '따뜻한 프로
젝트'(heartwarming project)란다.
<1.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HENRO HOUSE는 세계 평화 운동의 기반.
2. HENRO HOUSE Project는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라해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사용하기
쉬운 안전한 숙박시설의 제공을 목표로 한다>는데 일본판 Camino의 Albergue?
터무니없는 고비용만 아니라면....
헨로하우스는 여기가 움벤지에서 9km, 다이코지가 0.7km 남은 지점이라고 한다.
(현장의 안내 木柱와는 100m, 안내지도와는 300m의 차)
비용과 무관하게 머물 수 없는(이른시각이기때문에) 집을 왼쪽에 끼고 오르면 간온지시를
벗어나 미토요시 야마모토초츠지(三豊市山本町辻) 마을이다.
다이코지는 진언종과 천태종이 공존하고 한국의 늙은이는 일본의 젊은이와 공생?
민슈쿠 오히라(大平)의 북동쪽 지근인 67번다이코지에 당도한 시각은 13시 30분쯤.
현지에서는 다이코지 보다 산호(山號)에 연관된 '코마츠오지'(小松尾寺)라는 호칭이 친숙
한데, 그 까닭은 근방 일대의 마을을 코마츠오'(小松尾)로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란다.
해발911m에서 75m까지 하강함으로서 시코쿠헨로 88레이조 중에서 고저 차가 유일하게
800m대가 되는 두사찰의 관계다.
사카우치의 경우 역시 유일하게 800m대를 올라야 하고.
텐표14년(天平/742)에 토다이지(東大寺) 말사로 건립된 것이 최초란다.
현 위치보다 약 1km 북서쪽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고 코닌13년(823)에 사가천황(嵯峨)
의 칙령에 따라 코보대사가 현 위치에 재건했다는데, 다이코지에는 이채로운 점이 있다.
진언종에 속해 있는데도 천태종(天台宗)과 공존하고 있는 것.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最澄 :767~822/천태종의 開祖)의 영향으로 천태종에 속한 때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한 경내에 진언종 24방, 천태종12방의 승당이 연해 있다.
본당 좌측의 코보대사당과 함께 우측에 천태종대사당(天台宗第三祖 智顗)이 있으니까.
쿠카이(空海/眞言宗)와 사이초(最澄/天台宗)의 가르침을 동시에 수행하는 도량으로 번성
하는 특이한 사찰.
매번, 달아나듯 앞서 갔던 젊은이를 다이코지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나와의 동행(同行)을 바라는 듯 내 동정을 살피며 머뭇거리고 있는 그.
내가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도 그는 떠나려 하지 않았으니까.
잠시지만, 나를 고민에 빠뜨린 것은 내가 소지한 지도(へんろみち保存協力會編)다.
나를 위해 며느리의 일본 친구가 선물한 이 지도에는 67번(大興寺) ~ 68번(神惠院), 69번
(觀音寺) ~70번(本山寺) ~71번(弥谷寺) 코스와 67번 ~ 70번 ~ 68번. 69번 ~71번 순으로
순서가 엉망인 코스 중 택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토요시(三豊市)와 칸온지시(觀音寺市)를 넘나들어야 하는 지리적 조건때문인데, 후자가
전자 보다 거리의 단축 효과라는 이점은 있으나 순서가 바뀌어 약간 혼란스럽게 한다.
게다가 하기모리의 권고도 전자쪽이라 결국 순리(전자)를 택했다.
내가 68번 레이조를 향해서 떠날 때에 맞춰 그도 떠났다.
13시 49분에.
시코쿠헨로에서 나도 이인동행(二人同行)을 며칠 한 적이 있다.
일본인 청년 니시오(西尾)와의 동행이다.
초기의 적응 과정에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동행으로 인한 손해도 적지 않았다.
관심을 집중하지 못한 점과 지연으로 인해 여러 날 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점 등.
2회에 걸친, 7개월 반의 까미노에서는 홀로 걷는 것이 당연했지만 동행이인(同行二人)을
기본 매너(manner)로 못박고 있는 시코쿠헨로에서도 내게 상책은 홀로 걷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와도 동행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걸으려는 사람을 표나게 기피할 만큼 단호하지 못한 나.
이것이 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손해가 적지 않은 길이 바야흐로 시작되었슴을 의미한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누차 했지만 스스로 자기 길을 갔으며 아침에도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왜 말을 걸고 묻기를 거듭하며 홀로 걷도록 놔두지 않는지.
그에게 말 대꾸하느라 카메라에 뭘 담을 겨를을 갖지 못했으니 이것만도 큰 손해 아닌가.
다이코지 ~ 진네인(神惠院), 칸온지(觀音寺) 헨로미치가 대부분인 6번현도와 기타 포장
로로 되어 있기 망정이지 낭패한 하루로 끝날 뻔 했다.
헨로는 다이코지에서 북상하는 복수(複數)의 포장로 중 하나를 따라 377번국도에 진입한
후 국도의 서(左)쪽 길를 잠시 따른다.
미토요시에서 칸온지시로 넘어가며, 그 지점 우측노변에 자리한 민슈쿠 시코쿠로(四國路)
를 지나 신호등5거리에서 북상(北上) 길을 택한다.
길가에 지조도(地藏堂)가 거푸 있고 석주들이 헨로미치를 안내하고 있다.
하라초(觀音寺市原町) 지역이며 북상하는 헨로미치는 잠시 후, 코다치(小立) 마을에서 왼
쪽 마을길을 택한다.
큰 길을 계속 따르다가 좌회전하면 이마미야진자(今宮神社)를 지나 두 길이 합치지만.
카나가미진자(金神神社)를 지나서 서진을 계속하고 농수로(農水路)를 건너면 칸온지시립
토요타소학교(豊田/左側)와 다이츠지(大通寺/右側) 사거리에 이른다.
건너면 왼쪽에 지조도가 있고, 북서로 직진하는 너른 농로를 따르면 좌우에 니이케(仁池)
와 신코인(心光院/寺刹)이 자리한 이케노시리초(池之尻町) 지역에 진입한다.
그 길을 따라서 전진하면 우측에 이케노시리 우편국이 있는 현도6번에 들어선다.
좌측현도(6번)를 따라서 신호등사거리(池之尻)를 건넌 후 고가다카마츠(高架高松)자동차
도로를 통과하면(지상터널) 헨로미치는 진네인, 칸온지 한하고 정서향 6번현도가 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젊은이와 절로 헤어지게 될 것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는 자기 핸드폰(navigation)의 헨로미치 안내에 충실히 따르는데, 내가 걷는 이 구간의
헨로미치가 핸드폰의 안내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핸드폰의 안내와 일치했기 때문인지 나와 동행하기 위해서 다른 안내를 무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오히려 더 내게 매료되어 가는 듯 했는데, 까닭은 그도 예외 아닌 경제동물이라는 것.
자기는 1주일 미만에 5만y 이상 날아갔는데 동일한 길에서 37박하는 동안에 내 지갑에서
나간 돈이 5만y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 비법(?)을 배우려 하는가.
이 밤을 칸온지의 츠야도에서 보낼 것이라는 나를 추종하겠다는 자세였으니까.
문득 암스테르담(Amsterdam/Netherlands) 공항에서 만난 60대 여행객이 떠올랐다.
2.5개월의 비용이 1.500€ 남짓 소요된 나와 부부가 1개월 미만에 10.000€ 이상 날렸다는
자기를 비교하던 대구 영감이다.
교통편이 원활한 곳만 주마간산(走馬看山)한 결과가 허무한 느낌뿐이라며 같은 이베리아
반도를 2.100km 이상 두발로 누비고 다닌 77살(당시) 늙은이를 부러워한 그 였는데.
어이없는 헨로코야(第30號)와 까미노와 헨로미치의 다른 정서도 짚고 가야겠다.
(당시에는 젊은이의 질문 공세에 대꾸하느라 확인하지 못한 것을 훗날 도상에서 확인)
6번현도에 진입하는 사거리에 '헨로코야제니가타'(小屋錢形) 안내판이 서있다.
일대를 아무리 뒤져도 코야는 없고 또 하나의 안내판만 있다.
<직진 200m 앞(先) 좌회전(左折) 약1km>지점에 있다는 것.
그래서 포기했었는데, 좌회전하여 다카마츠자동차도로와 11번국도를 거푸 건너, 토키와
(常盤)소학교 앞(植田町), 시코쿠헨로와 전혀 무관한 위치에 있다.
이처럼 가당찮은 위치에 세우게 된 이유가 헨로미치에는 마땅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었다
는데 없느니만 못한 코야다.
단지 이 코야에서 잠시 쉬기 위해 2km(왕복) 이상을 더 걸을 헨로상이 있을까.
와케마치 처럼 도보헨로상들에게 접대 행사를 하고 있다는데(이곳에서는 매월21일) 접대
받기 위해서 2km를 더 걷는다?
또 하나의 헨로미치의 개설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닌지.
온통 헷갈렸다
극동의 한국과 일본은 유럽 이베리아반도와는 문화적 상이점이 적지 않다.
서울의 둘레길 지역 인가의 담벼락에 나붙은 호소문과 판박이 글이 시코쿠헨로에도 있다.
<壁に落書きやいたずらなどしないで下さい> (카베니 라쿠가키야이다즈라나도 시나이데
쿠다사이/벽에 낙서나 장난을 치지 마십시요)
이베리아반도의 사정은 어떠한가.
담장과 터널, 기타 빈 공간이라면 권장은 하지 않는다 해도 온갖 상상력이 동원된 그림과
글씨로 채워진다.(지방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피카소도 이같은 벽화로 그림을 시작하였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사실 여부를 떠나서) 빈
공간은 난해한 그림과 글씨의 캔버스(canvas)다.
까미노에서는 여백이 있다면 순례자를 격려하는 단어 'Animo'(힘내세요)로 채우고.
그래도 수수방관이며 '하지 말라'거나 겁 주는 경고판은 어디에도 없다.
헨로는 다카마츠자동차도로의 고가 밑을 통과하고, 소규모 헨로상휴게소(お遍路さんの休
憩所)를 지나 긴 농수용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가며 11번국도를 건넌다.
신호등사거리, 슈츠사쿠초(出作町) 교차로다.
불안이 고개를 들만 하면 시코쿠석주 또는 붉은 화살표지가 나타나고 너른 직선 현도지만
좌우로 농촌 정경이 온존되어 있으므로 걸을만한 길이다.
다이코지에서 여기까지 5km쯤 되는 길은 변화가 잦은데다 젊은이에게 대꾸하느라 마음
편할 겨를이 없었지만 4km 미만의 남은 길에서는 편히 대화하며 걸어도 될 길이다.
앞에서 지적한 헨로코야30호(錢形)가 이 사거리에서 11번국도를 따르면 1km쯤 되겠다.
굳이, 그곳에 들른다 해도 1km쯤 더 걷는 것이므로 큰 부담은 아닐 듯.
그보다, 길의 운명은 이용자 수와 빈도에 따라 좌우된다.
이 코야의 선호도가 높아지면 그 길이 자연스럽게 새 헨로미치가 될 것이며, 이같은 길의
속성을 간파한 그 지역민들이 당장에는 적소가 아닌데도 그 위치에 건립을 강행했으리라.
그 길이 현재의 헨로미치보다 각광 받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가.
슈츠사쿠초(出作町)와 우에다초(植田町)를 가르는 6번현도가 사카모토초(坂本町)에 들어
서면 237번현도와 교차한다.
이어서 요산선(予讚線) 철로를 횡단하여(건널목) 메이치교(明治橋)를 건넌다.
농촌의 정서는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잘려나간 듯 여유로움이 사라져버린 분위기다.
다리를 건넌 후 'V'자 길 모서리의 헨로 안내표지(汐入地藏尊앞)를 확인, 카가와켄미토요
합동청사(香川縣三豊合同廳舍) 앞을 지나 첫 신호등사거리에서 멈칫했다.
벤치가 있는 미니지장존 앞의 안내판 글 때문에.
<この道を直進して3番目の信號を右折, 橋を渡って下さい>
이 길을 직진하여 3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 다리를 건너라는데 '이 길'이 어느 쪽인가.
두 길 새에 있는 이 안내판에 방향표시가 없고, 공교롭게도 2길 모두 3번째 신호등 앞에서
우회전하면 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을 택해도 만나는 길이므로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안내의 허점인 것 만은 분명하다.
세토나이카이의 하구(河口)가 되는 사이타강(財田川)을 건너(三架橋) 68번진네인(神惠院)
69번 칸논지(觀音寺)에 당도한 시각은 10월 9일 16시를 조금 넘어서 였다.
칸온지시 야하타초(觀音寺市 八幡町)에 자리한 두 레이조다.
시코쿠88레이조 중에 한 경내에 두 곳이 있기는 여기가 유일하며 칸논지는 토쿠시마켄의
16번칸논지와 동명이사(同名異寺)다.
주목할 것은 소재지의 행정당국과 사찰이 동명이음(同名異音)한다는 점이다.
시(市)측에서는 觀音寺市의 공식발음을 '칸-온-지-시'(かんおんじし/kan'onji-shi)라고
하는데 반해 사찰측은 觀音寺를 칸-논-지(かんのんじ/kannon-ji)로 쓰고 발음한다는 것.
한자(漢字) 표기가 없다면 별개의 이름이므로 이상할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자와 한자의 일부를 따서 만든 일본 특유의 음절 문자인 카나(仮名·仮字/
片かな와 平がな)를 법적 공용어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한자가 같으면 카나와 발음도 동일해야 하는데 따로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데, 나와 무관한 이름을 시비할 처지가 아닌, 결정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아루키 헨로 야숙 리스트(四國靈場八八ケ所巡拜 徒き遍路一夜宿 一覽)에 분명하게 올라
있는 칸논지츠야도(觀音寺通夜堂)가 현지에는 없단다.
있던 것이 어떤 사정으로 폐쇄된 것이 아니라 아예(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리스트(list)의 오류를 수시로 개정했으며 내가 소지한 것은 헤이세이(平成)26년(1914)8월
20일자 개정판이므로 내가 헨로에 들어서기 13일 전인데 무엇을 개정했다는 것인가.
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통한다
내가, 어이없게도 엄청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젊은이에게 강조한 것은
"비용은 목적을 위한 부수적 수단일 뿐 그것이 목적을 좌우해서는 안된다".
품위 있는 여행이 목적이라면 그 여행에 걸맞는 수단, 즉 많은 비용이 들 것이지만 비용을
많이 지불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면 많이 지불했다고 성취도가 높은 것이 아니다.
헨로상은 보이는 길에서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 나선 순례자(pilgrim/구도자)다.
"길을 찾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이지만 그 자체가 형극의 길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꽃길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직면하는 가시밭 길이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해서 꽃길이나 카핏길이 되지 않거니와 그런 지불이 필요 없는 길이 순례길이다.
자명한 것은 헨로상이라면 많은 돈이 필요없다는 것인데 바야흐로 그 실증의 실현이 목전
에서 깨지고 말 것인가.
궁하면 변하게 되고(窮即變), 변하면(변해야) 통한다(變即通/周易).
즉, 궁하면 통한다(窮即通).
"나갈 길이 없다"는 그 시지점(時地点)에 "나갈 길이 있다".(No way out, some way out)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은가.
칸논지 경내를 둘러본 후 납경소 직원의 허락을 구했다.
경내에 있지만 본당에서 거리가 있는 지점의 지붕이 있고 그 아래에 긴 탁자들과 몇 개의
의자가 있는 빈 공간의 이용을.
오류가 있는 야숙리스트를 보고 자기에게 귀책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미안한 마음을
내보였던 직원은 흔쾌히 응낙했다.
탁자들로 두 개의 침대를 만들어 한쪽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10월에 들면서,특히 한로(어제)가 지났기 때문인지 싸늘한 밤공기를 대비, 내 침낭도 함께.
나는 잘 적응되어 있는 통비닐 속의 밤이면 되니까.
32번젠지부지(禪師峰寺)와 37번이와모토지(岩本寺)의 츠야도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숙소가 됨으로서 그의 스도마리(素泊/잠만자는것) 3.000~5.000y이 줄지 않았다.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각자 필요한 저녁거리를 사들고 돌아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저녁시간에는 유효기간에 걸려있는 반값벤토(弁當/도시락)가 인기 품목이라 그의 식비도
반값으로 줄었을 것이다.
일본땅에서 일본 젊은이를 위해서 내가 이리 한 것은 같은 헨로상이라는 것이 이유다.
그의 재력을 나는 모르지만 경제적 풍요와 무관하게 그가 진지한 헨로상이라면 기꺼이 내
방식을 따를 것이거니와 그의 일회적 체험에 불과하다 해도 내가 괘념할 일이 아니다.
내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과 달리 나는 여전히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그가 대대적 성형수술이라도 하여 쿠로타(黑田/일제때의 내담임선생)의 이미지에서 벗어
난다면 달라질까?
그러므로 좋지 않은 이미지인 그에게 준 나의 최선은 어떤 기대를 가진 조건부일 수 없다.
그럼에도 내게 그의 이미지는 더욱 쿠로타화(化) 되어갔다.
식사문화 또는 음주문화는 극동의 두 나라가 대동소이한데 주취(酒臭)가 심하도록 여러캔
can)의 맥주를 다 마시면서도 단 한번의 권언(勸言)이 없는 그였으니까.
일본의 청년으로는 니시오(西尾)에 이어 2번째인 이 사람.
단 2명의 청년이 전혀 양극이라면 내가 이해하는 일본 청년의 인성은 반반인가.
니시오는 나 몰래 나가서 사온 맥주로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으며 이별 전야에도 그랬다.
2인분의 식사거리를 사오면 늘 오지이상(할아버지) 먼저라며 선택권을 내게 주었다.
까미노에서는 흔하지만 헨로에서는 드문 일로, 마시고 가라는 한 영감의 캔 음료셋타이를
즐기고 담배가 바닥났을 때 내 비상용을 갑채로 받아 피면서도 줄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의 성명 또는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음을 넘어 내게 알려 줄까 겁이 났다 할까.
이런 사람과의 합숙 장소가 좁은 방이 아닌 것이 되레 다행인 밤.
보름 다음날이라 중천의 달이 휘황한 밤.
우리 글과 말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 말,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든 학생을 상호 감시자
로 만든 일본인들의 나라에서 맞은 한글날이라 더욱 감회가 깊은 밤이다.
밤마다 1알씩 먹는 프로폴리스(Propolis) 병이 달랑거린다.
인천공항에서 산 용량 50알의 병에 몇알 남지 않았으므로 귀국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던 나날이었건만 종점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고개를 드는 것은
바다속 깊이 잠겨있는 세월호의 근황이다.
팽목항을 드나들다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려니...
단념해 가던 시코쿠헨로를 걷게 된 까닭이며, 걷는 사이에 비통한 아픔들이 극복되기만을
바라며 걸고 있는데, 답보상태에 있으면 어쩌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통비닐의 안과 밖을 들낙거리는 밤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