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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마을, 지리산녀, 약수제, 지리산 온천
산수유 마을.
지리산 만복대 아래 상위마을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계곡과 돌담 사이에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긴 겨울 뒤끝 황량함을 단숨에 바꿔놓을 듯.
노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봄노래가 한창인 듯.
마을 돌담 길을 따라 피어난 산수유
열여덟 봄처녀 두근거리는 가슴처럼
수줍은 듯 살짝 미소 짓는 새색시인 듯.
산수유 꽃잎은 한 장씩만 보면 산뜻하고 청초한 느낌
수천 그루 산수유나무가 일제히 노란 꽃을 들이 내밀면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동양화 한 폭.
상위마을은 전국 산수유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산수유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산수유마을'.
위안리는 상위와 하위마을로 나뉜다.
6.25 전 만 하더라도 1백 30여 가구가
생활의 터전을 잡았을 만큼 규모가 컸다.
산수유 마을인
상위 마을 위치도
그러나 50여년전 여순반란사건 (1948년)으로
위안리 마을 주민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현재 40 가구.
.....산동애가(山東哀歌).....
1. 잘 있거라 山洞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대 사
"살기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2. 잘 있거라 山洞아
山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情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 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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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가 필때 주민들이 부르는 노래.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주인공은 백부전.
'빨치산 여전사 백부전이 불렀던 노래'.
산동면 상관 마을에서 나고 자라다가
열아홉살 여순 사건 당시 총살 당했다.
부전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고,
호적상 이름은 백순례(白順禮)였다.
그녀는 왜 그 노래를 남긴걸까?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산동면을 비롯
황전·토지면 일대는 좌익군인들의 무대였다.
당시 14연대 반란군이 이곳까지 이르렀기 때문.
'군경과 14연대 반란군이 대치한 비극의 현장.'
그당시 온 나라가 좌익과 우익으로 갈렸었다.
구례 지역도 마찬가지였고 산동도 좌익 회오리.
어떤 식으로든 좌익단체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혐의를 벗어나기도, 결백을 주장하기도 힘든 상황.
좌익 군인에게 협조했다는 구실로도 죽임을 당한 것.
- 백순례 조카의 진술 -.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와 고모(백순례)가
군인들에게 함께 끌려갈 처지였다고 합니다.
끌려가면 죽었으니 얼마나 절박 했겠습니까?
'제가 갈 테니 오빠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집안의 대를 이을 오빠 대신 희생한 고모였지요.
고모가 아니었다면 제가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백순례가 끌려가면서 스스로 지어 불렀다는 산동애가.
그후 산동 처녀들이 산수유열매를 따며 부른 이 노래다.
산동에 가면, 그 역사의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산동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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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에서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매년 3월초 지리산 온천에서.. 산수유 축제
산수유꽃 촬영대회, 궁도 대회. 전국 장기대회
관광객이 참여하는 고로쇠 약수 마시기,
오이 먹기 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
춘향골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밤재 터널을 지나서부터는 구례이다.
산수유마을 아래 길 건너면 지리산온천.
산수유마을에서 산위로 올라가면 양정마을.
벽소령 아래 삼정산 자락에 있는 삼정마을
양정(陽丁)은 고려시대에 양지정쟁(陽地停莊)
장(莊)은 고려시대에 특수한 행정구역인데,
주민이 사찰 전답을 소작하여 세미를 바쳤다.
양정 하정 음정 세 마을을 삼정마을이라 한다.
삼정마을 영원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부유한 사찰.
서산, 청매, 사명, 포광 등 대사들이 수도하던 사찰
삼정마을은 절의 혜택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여, 고려시대 그 집단촌이 양지정쟁(양정마을)'
고려 때 음지 집단촌인 음정(陰丁)마을은 음지정쟁
음정마을 서쪽 벽소령 계곡을 비린내골이라고 한다.
아랫 마을의 선유정 전설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고향.
아랫마을 하정(下丁)마을은 아래정쟁이라고도 부른다.
세 마을중 제일 아랫 쪽에 위치하는 장(莊)이라는 뜻.
마천 삼정은 고려 때 사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마을들.
'현재, 양정마을 길목 초입에 온천장(莊) 지역'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전설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이 돌로 변했다는 부자바위.
'현재, 벽소령 정상 길가에 있는 부자바위.'
선유정은 부자바위의 죽은 넋을 위로하려는 정자
선녀가 다시 돌아오길 바래는 그곳 쌍무지개 다리.
선유정(仙遊亭)은 하정마을 주민들 염원이 담긴 곳.
'현재, 하정마을 하천변 소나무 숲속 선유정.'
벽소령 부자바위 전설과 관련 깊은 정자..선유정.
선녀가 다시 돌아오길 염원하는 바램이 담긴 정자.
삼정마을 사람들이 아미선녀를 기다리는 '전설의 고향.'
'현재, 선유정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온천.'
지리산 온천에서 목욕 후 길건너 즐비한 식당들.
흙돼지 구이에 토속주 한잔을 겻들인 후 꽃구경.
산수유 꽃필 때 누구라도 시인이 되는 산수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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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 산수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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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처음 눈에 띄는 풍경은 노란 산수유 꽃
지리산 산마루에 쌓인 희끗희끗한 눈과 대조적인 화사한 꽃 세상.
삼정마을 전설 속 선녀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오지마을.
산동면 계천리, 대평리, 위안리 등지에는
산수유 고목들로 우거진 숲들이 널려있다.
만복대 서남쪽 위안리 상위마을.
대표적으로 산수유가 많은 마을.
만복대 산행 기점인 위안리 상위,
대평리 평촌, 대음, 신평 마을 일대.
수만 그루의 산수유가 꽃 필무렵엔 골짜기마다 노랗게 뒤덮인다.
산수유(山茱萸)나무는 층층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키가 7~10m
3월경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며, 8월경부터 길고 둥근 열매가 열린다.
산수유 열매는 약재나 차의 재료로 쓰인다.
1960년대 들어와서부터 일본과 홍콩에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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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면 내, 34개 마을(1,038 호 가구)에 총 28,000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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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성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 올때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산동.
'이 전설은 잊혀진 옛 역사를 풀 실마리.'
중국 산동반도는 한반도와 가까운 위치.
강화도에서 서해 뱃길로 멀지 않은 거리.
서울에서 산동은 비행기로 1시간 반 거리.
구례 산동(山洞)과 중국의 산동(山東)은 다르지만
모두 산수유 주산지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점.
구례 산동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산동과 관련이 깊다.
..........중국 산동 고구려 유민들............
통일신라 시대 당에 저항했던 옛 고구려 유민들
당 황제는 3만 8200호를 황무지에 옮겨 살게하고
이반하지 않은 자들만 요동 지방에 눌러살게 했다.
고구려 반골 유민들을 대대적으로 추방.
추방당한 고구려 유민들이 정착한 영주(營州)
지금의 열하성 조양(朝陽)지방이 그곳 황무지.
망국 전에도 당나라에 당당히 굴었기로 고구려.
거만하게 높을 고(高)자를 국호에 썼다하여
당나라는 아래 하(下)로 바꿔 하구려(下句麗)
한때 그렇게 부를 만큼 고구려를 경계한 당나라.
강제 이주 당한 고구려 유민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도독을 죽이고 옛 고구려 영토로 들어가서
당나라와 맞싸워 그의 아들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
잊혀진 왕국 제(齊)나라도 영주에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 이정기와 그의 아들 이납이 세운 나라.
원래 산동성 지방 제(齊)나라를 계승 국호를 삼았다.
산동성 고구려 유민들의 가세 없이는 불가능.
산해관에서 베이징 가는 구길 길목인 영주지방
조선성(朝鮮城)에 고려보(高麗堡)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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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시대에 해상왕국을 이룬 장보고.
그 족적을 통해 중국 산동에 관해 알아보자.
.........................장보고............................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 무역선단.
그 하나는 중국 산동 반도와 경항 대운하 일대
일찍 진출해 있던 고구려 백제 유랑민과 신라인
다른 한 집단은 완도 중심으로 남서해안 주민들
마지막 집단은 백제 유민과 산동반도 신라촌 사회.
산동반도 남안일대에서 해주(海州), 대운하변에 집중
신라와 당의 중심부를 잇는 자연 수로가 형성된 곳
그리고 운하 심장부는 초주(楚州)였음을 알 수 있다.
초주에서 35Km 떨어진 연수현은 내륙수운 중심지.
이곳에도 신라인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엔닌(圓仁)에 의하면 이곳에 총관과 ‘전지관(專知官)’
초주 신라방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되는 전지관.
신라인들은 주로 운수업 무역 조선업 상업에 종사
신라인 촌락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에 형성
모평현(牟平縣) 소촌포(邵村浦)와 도촌(陶村),
해양현(海陽縣) 동북의 유산포이 대표적인 곳.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기에
신라인들은 해운업 상업보다 농업에 종사한 듯.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文登縣 淸寧鄕 赤山村)
산동반도 일대 신라인들의 중심지였을 뿐아니라
신라와 당 및 일본 3국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장보고가 건립한 적산법화원.
신라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다.
법화원은 연간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을 소유
장보고 휘하 장영 등 3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난 강회
매일 40명 안팎의 사람들이 참석.
이 강연의 마지막 2일간은 250명과 200명이 각각 참여
법화원은 무역 관계 종사자들을 위한 숙박소로도 제공.
8세기 중엽 신라와 일본간의 국교는 사실상 단절.
공식 무역이 막히자 양국간 상인 간 무역량이 증가.
당시 일본은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었는데
이는 주로 신라상인들의 중개무역에 의해 충족되었다.
신라는 지리적 조건상 나·당·일 삼국 무역에 유리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은 당시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신라인 사회의 존재가 주목.
신라인들은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일본에 집단 거주했다.
즉 하모야국(下毛野國)·무장국(武藏國)·미농국(美濃國)·
근강국(近江國)·준하국(駿河國) 등에 이주해 신라촌 형성.
이들은 신라인 성(姓)을 갖고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 사회 지명은 신라군(新羅郡) 또는 도전군(度田郡)
신라인 사회를 주도란 사람은 신라의 승려나 관리들이었다.
재일 신라인 사회와 신라 본국 간의 연락은 빈번했다.
이런 사실은 견당 일본 사절사선에 동승한 신라 통역관
재당 신라인들과 긴밀히 협조해 중국과 외교 절충 하거나
일본사절 귀국을 위해 초주에서 배 9척과 선원 60명을 마련
재일 신라인도 재당 신라인처럼 무역에 관련된 일에 종사
재일신라인들은 일본정부가 필요로 하는 고급 인력을 제공
통역관 선원 승려 노젓는 사람 등은 대부분 재일 신라인들.
이외에도 귀국할 일본조공사선(日本朝貢使船)의 준비
항해 지휘, 재일 신라인 사회 일본인에 대한 기술지도
청해진이 설치된 후 장보고의 대일무역활동은 본격화.
그가 당시 일본에 보낸 무역사절단은 회역사(廻易使)
이들의 무역활동은 일본정부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생긴 신라와 일본 간의 분쟁
대일무역에서 장보고가 찾이하는 비중이 컸었다.
결국 장보고는 재일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및
재당신라인사회를 잇는 일련의 무역망을 구축
동아시아 해상교통 요충지 완도에 거점을 마련
항로를 열어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
해상왕국을 건설했고 지리산 사찰을 번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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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산동면에서 가장 산수유가 많은 상위마을.
산수유의 시목지로는 산동면 계천리 현천마을이다
상위 마을은 산동에서 유일한 지리산관광휴양지 민박촌.
상위마을에서 가장 수령이 오랜 산수유나무는 약 500 년생.
현재 호당 평균 약 100그루 씩 있고 마을 전체에 총 2,500 주.
산수유 열매는 오줌싸게 어린이에게 효험이 있는 한약재.
옛날부터 집집마다 빨래줄에 얼룩 지도가 그려진 이부자리.
오줌싸게는 알몸에 키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했던 풍습.
한밤중 잠 자다가 이불에 오줌 눈 어린이 버릇 고치기 수단.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습이지만 예전엔 흔히 볼 수 있었다.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벨기에 브뤼셀 시내 한복판 광장에 오줌싸개 동상.
발가 벗은 사내아이가 고추를 내놓고 힘차게 소변
고추를 통해 물을 분출하게 만든 일종의 분수(噴水).
옛날 이곳은 프랑스 침입군과 벨기에 방어군 격전지.
양대 진영 기마대가 맞붙는 순간에 뛰어든 어린 소년.
겁에 질려 오줌을 눌때 소년의 엄마가 품에 감싸안는다.
"제발! 이 아이가 오줌눌 동안만 전쟁을 멈춰주세요.
당신들도 고향에 돌아가면 이런 자식이 있지 않나요?"
고향의 자식을 생각하며 접전을 멈춘 양측 군사들.
모성애가 그 소년을 말발굽 아래에서 구해내는 순간.
그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군은 성공적 평화협상.
결국 오줌싸개 소년 덕분에 평화를 찾았던 이 마을.
그 오줌싸개 소년의 공을 떠받들기 위해 동상 건립.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 오줌싸개 동상.'
원래 14세기에 돌로 만들어졌던 오줌싸개 소년.
1691년에 동으로 다시 재건된 55 cm 키의 동상.
오줌싸개 동상은 브뤼셀을 먹여 살리는 관광명소,
브르셀에 평화를 가져다 준 오줌싸개 소년
지금껏 브르셀을 잘살게 해준 오줌싸개 동상.
브르셀을 세계적 관광명소로 만든 위대한 소년.
오줌싸개 동상은 585벌의 의상이 있다.
국빈이 방문하면 그 나라 전통의상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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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에 오줌을 누면 지도를 그린 듯 얼룩진다.
그것을 마당에 널어놓는 것만도 낯뜨거운 소년.
키를 머리에 쓰고 알몸으로 소금 얻으러 다니기.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는 옛 풍습이기도 하다.
이불 적시는 과정부터 혼쭐나는 과정까지 묘사.
산수유를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해도 좋을 듯.
산수유 마을에 오줌싸개 동상 건립을 하면 어떨까?
지리산녀
<남도 여인 정절의 규범> 지리산녀.
구례현의 부인이었고 아름다운 자색.
집안 가난하지만 부녀자 도리를 다함.
백제왕이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한 그녀.
죽음으로서 정절 지킨 아름답고 슬픈 전설.
삼국시대 '지리산가'는 지리산녀가 죽기 전에 남긴 가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지리산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기름을 사려고 마을에 내려간 사이
백제왕이 사냥 중 화살 맞은 꽃사슴을 쫓다가 그녀를 만났다.
왕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 반해 궁궐에 같이 들어갈 것을 권한다.
그녀에게 거절당한 후 왕은 잠을 못 이룰 만큼 그녀가 그리웠다.
왕이 다시 그녀를 찾아 가자 그녀는 이미 집을 떠나 몸을 숨겼다.
백제 왕은 그리움에 지쳐 병들자 신하들이 대신 그녀를 찾았다.
왕은 신하에게 붙잡혀 온 그녀가 냉담하자 죽이라고 명령한다.
절개를 지키려고 죽음을 택하며 그녀가 남긴 가요.. 지리산가.
아쉽게 역사책에 백제의 부전가요라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당시 백제의 왕은 개루왕 일 것이라는 추측.
<동국여지승람>에 열녀로 기록 되어진 지리산녀.
왕의 권한이 막강한 전제 군주주의 사회에서
부도 지키려고 목숨마저 끊은 지리산녀의 정절
이혼율 세계 2위인 우리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그녀의 굳은 정절을 기리기 위한 <약수제> 하일라이트.
해마다 매년 4월 20일에 지리산녀 선발대회.
화엄사 집단 시설지구 야외 특설무대에서 개최.
이 대회에서는 진.선.미.인.의.예.지. 7선녀를 선발.
각종 행사에서 구례를 대표하는 관광 사절단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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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가(智異山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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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가는 지리산녀 전설을 뒷받침하는 노래.
백제와 일본의 연계된 고대사를 알려주는 노래.
지리산녀는 지리산가 노래 속의 여자 주인공이다.
지리산녀는 자색이 아름답고 부도(婦道)를 다한 정절의 여인.
백제 왕이 그 미모를 탐하자 그 노래를 지어 부르며 한사코 거절.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편 고려사, 악지 등등 기록에 의함>.
같은 백제가요인 정읍사(井邑詞), 무등산곡(無等山曲), 방등산곡 등등.
도적떼들에게 욕 당하는 아낙이 구하러 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한 노래.
'선운사가'..정역(征役)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는 노래.
백제 여인의 정절을 읊은 '지리산가'는 애석하게도 명맥이 끊겼다.
백제 개루왕의 집요한 수청 요구를 재치 있게 극복하지만
고문 당해 눈먼 남편과 고구려로 가서 살았던, 도미의 처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지리산녀'라는 구전.
춘향전 속 여주인공의 모델은 지리산녀라는 학설도 있다.
(성춘향은 지리산녀이고 남원 원님 변학도는 백제 개루왕)
그러나, 지리산녀는 도미 부인이고 그 유적지도 충남 보령.
.................아내의 정절을 기린 ‘도미사당’........................................
빼어난 미모와 드높은 절개로 이름을 떨친 ‘도미부인’의 전설이 깃든 곳.
삼국사기 도미 설화의 무대는 오천. “도미부인의 미모를 탐낸 백제 개로왕.
그 남편의 두 눈을 멀게한 뒤 추방시킨다. 하지만 부인은 남편을 따라 탈출,
서해안의 섬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산다”. <1990년 충남 보령이 그 유적지>
도미부인이 태어났다는 미인도는 지금의 ‘빙도’, 살았던 곳이 ‘도미항’
청소~오천 방향으로 3㎞ 지점, 부인이 남편을 사모한.. ‘상사봉’의 정상
오천은 백제의 유서깊은 항구. 큰 자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통일 신라시대,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 이용된 국제항구였다.
고려 때 왜구 침략이 잦지 이 일대에 수군이 해안 방어망 설치.
1466년 이조 세조 12년 오천에 충청도 <수군 절도사영>을 설치,
오천(포항)에 1650m 해안 석성은 중종 때 축성했다.
천수만이 열리는 지점부터 먼바다까지 한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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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현재 포항시는 구룡포읍·연일읍·오천읍·
흥해읍·기계면·기북면·대보면·대송면·
동해면·송라면·신광면·죽장면·장기면·
청하면 등 4개읍 10개면 196개 동리가 있다.
옛날 영일현·장기현·흥해군·청하현
4개 고을이 합해 이루어진 곳이 영일만.
옛 영일현은 신라 근오지현 또는 오량지현.
고려초 940년(태조 23) 영일현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
1732년(영조 8) 통양포 아래 포항창을 설치
함경도와 경상도를 잇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1942년 창주면이 구룡포읍으로 승격,
1949년 포항읍이 시로서 승격·분리.
1956년 흥해면·곡강면을 의창면으로 통합
1980년 연일면·오천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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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은 128년부터 16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던 제 4대 왕.
132년 북한산성 축성, 155년 신라를 모반한 아찬의 망명 수용.
신라왕에게 돌려보내지 않자 백제를 침공했지만 잘 막아낸 왕.
166-346년 백제는 초고계열과 고이 계열이 교대로 왕위 계승.
근초고왕(346-75)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
초고는 개로왕의 큰 아들이고, 고이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렇다면, 백제에서 사라진 고이계열은 어디로 간걸까?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첫째 부인에게서 유리를 낳았고,
둘째 부인이 비류와 온조를 낳았지만 유리가 왕위 계승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마한 지역에 새왕국 건설."
이 기록은 사라진 고이 계열이 비류 계열일 것이라는 추측
즉, 비류 계열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를 떠나 왜 왕국 건설.
390년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호무다라.
백제의 왕위는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초고 계열로 왕위 정착.
166-346년 동안, 두 계열은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364년에 왜 항로를 알기 위해
가야국 연맹인 탁순에 정찰대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탁순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했던 부족국가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지금의 부산을 거치는 왜항로가 최단 지름길.
당시 백제는 호무다 원정대로 일본열도를 정복하려 했다.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서부 마한도 같은 해인 364년에 정복.
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
호무다의 모친으로 알려진 여황제가 바로 신공왕후이다.
야마도 군대는 신라를 공격하며, 탁순 이외 6개국 평정.
그들은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남부의 야만족들을 평정하고,
그 땅을 백제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에게 하사했다는 기록.
백제왕과 태자는 목라근자 일행 전공을 축하하면서 배웅한다.
작별전 백제왕과 야마도 장수들은 피지산에 올라 엄숙히 선서.
"동맹관계는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공물을 보내 줄 것이다.”
근초고왕은 구저(久氐) 등을 시켜 야마도 군사를 환송하게 한다.
근초고왕 치세 이후 고이 계열은 한반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고이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 호무다가 왜 왕국의 시조.
<지리산가>에 등장하는 백제의 개로왕은 실존인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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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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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도미부인 사당이 모셔진 정절사.
백제시대 열녀의 표상인 도미부인
그 정신과 정절을 기리는.. 경모제
보령시장을 비롯해 각급 기관 단체장
여성 단체회원, 도씨종중, 주민, 학생
200 여명이 참석해 부인의 정절을 추모.
백제 제4대 개루왕(128∼166)때 보령시 미인도 출생
도미부인 부부가 수난겪기 전까지 도미항에서 살았다.
개루왕의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도미부인.
그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삼강행실에 기록되어 전해온다.
약수제(남악제)
지리산(방장산)은 삼신산 중 하나로 민족 성지로 여긴 영산.
옛날 군주들은 명산대천에서의 제사 의식을 덕목으로 여겼다.
중국 요순 시대부터 봉선(封禪) 또는 망제(望祭)라 한 제사의식.
사마천 史記 - '천명을 받은 왕 치고 봉선을 거행 안한 예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5악에 <대사 중사 소사> 제사의식
구례에서는 매년 4월 20일 경 곡우절 전후로 약수제 행사를 갖는다.
이 행사는 지리산신에 대한 제사 의식으로 그 기원은 삼국시대이다.
지리산 노고단은 신라 5악(五岳) 중 남악(南岳)으로 중사에 포함된다.
천왕봉에 모셨던 천왕성모 석상의 실제 주인공은 고려시대의 위숙왕후.
'가락국 시대에는 마야부인..고대 사회에서는 천왕성모.'
통일신라는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노고단에 모셨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황후가 지리산신이라고 불렀다.
이조는 신라의 제도를 이어 받아 5악 중 남악으로 제사를 지냈다.
지리산은 항상 그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여신의 성지.
성모는 나라를 수호하는 여신이자, 민족의 상징이었다.
노고단 남악사에서 종석대로 바뀌었던 제사터,
광의면 온당리 당동을 거쳐 화엄사에 안치했다.
지리산과 더불어 살아왔던 조상들이 지낸 남악제.
노고단의 남악제는 구례 화엄사로 옮겨서 지낸다.
노고단에서 하늘과 사에 제사를 올리고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했던 남악제.
제사 지내는 신단을 신라시대에는 산신사,
고려 때는 남악사라 부르고 곡우절에 제사.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 제례를 받들어 왔었다.
이조 세조3년(1457) 노고단 남쪽에서 남악제
광의면 당촌리 갈미봉이 바로 제사 지내던 터.
그후 구한말 외세에 의해 우리 고유의 풍속이 쇄퇘
융희 2년(1908)에 폐지했다가 광복후에 옛터에 제사
1969년에 현재 위치에 남악사를 재건하여 약수제 행사.
1982년부터는 군민의 날을 약수제로 제정,
구례의 군민들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축제일.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
곡우절에 구례에서 개최
4월 19일 헌관행차, 축등 띄우기, 불꽃놀이
전야제로 4일 간 제례행사 및 지리산녀 선발,
전국 궁도대회 등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친다.
피아골 단풍제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말
피아골 삼홍소에서 개최.
지리산녀 선발대회는
남악제 축제의 일환으로서
구례를 대표하는 7 선녀 선발.
향토 음식 대축제는
남악제 축제의 일환으로서
전통 음식을 장려하는 축제.
지리산 전국 등산 대회는
피아골 단풍축제의 일환이다.
피아골 - 노고단 - 지리산 온천
산수유 축제는
산수유 아름다움
지리산 봄소식 축제
남악제는 신라 때 노고단 남악사에서
국가 차원에서 매년 곡우절에 올린 제사.
그후 고려, 이조까지 전통이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에는 천왕봉과 휴천면 남호리 방향으로 이전.
이조시대 세조 2년 노고단 남악사 = 구례 산동면 내산리
1969년 화엄사 경내로 옮겨 남악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왕조마다 제사터를 옮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관의 노고를 덜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천왕봉이나 노고단까지 오르기가 힘들고 벅찬 탓.
고대사회에 천왕봉의 천왕성모에서 비롯된 제사풍습.
천왕성모 민속신앙은 우리 민족에게 그만큼 뿌리가 깊다.
왕조마다 제사터를 정권 유지를 위한 성지로 이용할 만큼.
그것은 모계사회에서 비롯된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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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매년 4월 20일 곡우절에 지리산녀 선발대회
1969년 화엄사 경내로 옮긴 이후 남악제 전통의 맥.
지리산녀의 정절을 기리는 축제는 불교의 영향인 듯.
아니면, 여성의 정절 고취를 위한 유교관 탓일까?
천왕성모 마야부인 위숙왕후 선도성모.
이미 시대적 숭배의 대상은 아닌 여성들.
남악제 지리산녀는 그 빈자리를 메꾸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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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사(南岳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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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남악은 신라시대 지리산을 일컫는 것으로
남악사는 삼국시대 지리산 신제를 모신 곳.
삼국시대에는 천왕봉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 시대에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옮겼다.
조선 세조 2년에는 갈뫼봉 북쪽 내산면 좌사리 당동
해마다 봄과 가을, 설날에 왕명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재난이 있을 경우 별도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다.
원래는 3칸 뿐이었으나 영조 13년(1737)에 증축
폐사되었다가 1969년 화엄사 자장암 옆 10평 규모
현재 ‘구례군민의 날’에 약수제로 변형되어 제사.
지리산 남악사는 삼국시대부터 국태민안을 기원
당시 제사는 천왕봉에서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며
고려 때에 이르러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옮겨졌다.
남악사에는 ‘지리산지신’」이란 위패가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 설날에 왕명으로 제를 올렸는데
재난이 있을 때마다 별도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헌관(獻官)은 당상관, 대축은 수령,
집사는 생원 진사 유생들이 맡았고
제물은 관에서 마련하여 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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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이 단군 신단이면
노고단은 박혁거세를 탄생시킨., 선도성모 제단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신단의 남악사(南岳祠)
'국모신' 선도성모(仙桃聖母)는 나라의 수호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올렸던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는 것은
전설 속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높여 부르는 명칭이다.
방장산의 노고단(老姑壇)은 선도성모의 높임말
노고(老姑)와 제사 모시는 신단(神壇)이 합친 말
박혁거세 제단의 이름이 봉우리 이름으로 남은 것.
신라때 선도성모 신단은 지리산(남악사) 외에도
팔공산(중악사), 토함산(동악사), 계룡산(서악사),
태백산(북악)에 5악산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삼악사
(묘향산 北岳祠, 계룡산 中岳祠, 지리산南岳祠)
3 사당에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제사를 올렸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박혁거세 후손 박언수가
박혁거세 시조의 위패를 모시고 성모사에 피란
박씨 가문에서는 성모에 관한 믿음이 두터운 편.
마복자 제도는 박혁거세 난생신화에서 유래.
알이 날개달린 신의 말이 있는 곳에 옮겨져
다시 마복자 의식을 통해 출생했다는 믿음.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 은거지., 노고단.
하여, 그곳 제단 흔적들이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그후 제단은 88년 성삼재 도로 등의 개발로 황폐화
노고단의 제단 흔적들은 광복 이후에 파괴되었다
박혁거세 신궁은 일본천황 신궁 역사의 뿌리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국모신을 제사해 온 제단
노고단(老姑壇)의 ‘老姑’= '오래된 시어머니'
'사소'라는 이름을 가진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
필사본 화랑세기에 모계혈통체제(母系血統體制) 기록.
모계혈통 32명의 화랑도 풍월주의 최상단에는 여성상선
고려 중기에도 개경에 있었던 박혁거세 신사
박혁거세 신사는 일본에만 수천개가 존재한다.
19세기까지 일본에 2천7백여개의 박혁거세 신사
예를 들면 가고시마현 다루미즈(垂水)시 居世신사,
니가타현 사도섬에 시라기(白木, 新羅의 음차)신사,
시마네(島根)현 오다(大田)시 오우라(大浦)항구에 있는
카라카미시라기(韓神新羅) 신사들이 박혁거세를 섬기는 곳.
일본 천황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이세신궁(伊勢神宮) 내궁(內宮)에 신락전(神樂殿)
'天照皇大神宮'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석굴암의 동짓날 해돋는 방향에 감은사와 수중능
그 일출 방향을 따라가면 일본 이세신궁이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도인 신라화랑들이
애초에는 신궁(神宮)에서 제관 역할을 맡아
산꼭대기 또는 산중에서 천신(天神)에게 제사
이세신궁에는 천황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계(神鷄)라는 특별한 신령한 닭을 키운다.
박혁거세 부인 알영, 김알지의 계림이., 신계
고려시대 박혁거세 신사
중국(宋)의 박혁거세 신사
경주 선도산 박혁거세 성모사
지리산 노고단의 선도성모 신단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지리산 온천.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서쪽에 위치한 지리산 온천.
수백년 전부터 방장산 약천으로 유명했다는 약수터.
신비한 약수가 솟아나는 약수터 자리에 온천을 개발
선유정 선녀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게르마늄 온천수와 광천수를 이용한 온천 랜드.
년건평 2만평 규모로 1995년 7월에 탄생한 온천.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온천 관광지 일원.
전국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우리나라에서 최대 수용인원 규모의 온천.
산동은 중국 산동 반도에서 유래된 지명.
강화도에서 제일 가까운 중국의 산동반도.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
중국의 산동반도에는 고구려촌이 있다.
물론, 신라촌(방)도 있는 조선족 집단촌.
구례 지명은 산동반도 고구려촌에서 유래.
'구례는 고구려 유민들이 명명한 지명인듯.'
구례군 산동면은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촌.
나당 연합군으로 삼국을 통일한 통일 신라.
당나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
당시,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와 고구려 포로.
산동반도 일대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다.
당나라에서 그 비참함을 보고 귀국한 장보고.
통일신라 시대였기에 동족 신라인이라 여겼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고구려와 백제.
당나라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보살폈던 장보고.
동아시아 해상무역 수입원으로 그들을 도왔다.
하여, 장보고는 신라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
신라 왕실과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
통일신라 귀족 세력들과 알력이 생긴 듯.
결국, 신라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신라 패망 후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은 고려.
개성상인들과 손잡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
산동반도 유민들은 옛 고구려 재건이 희망.
왕건을 중심으로 뭉쳐 고구려 맥을 이은 고려.
잃어버린 고향으로 돌아온 산동반도 유민들.
옛 고구려 유민 후손들 집단촌락이 구례인 듯.
아직도 베일 속에 파묻혀 있는 수수께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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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는 매년 3월 산수유 축제(10일간).
중국 산동반도 역시 산수유로 유명한 고장.
구례 산동도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 집단촌.
'당나라의 패망 고구려 유민들 분산정책.'
당나라가 패망 고구려의 부활을 경계했던 정책이다.
하여, 아시아 각지에 뿔뿔히 흩어진 고구려 유민들.
대부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현지인으로 동화.
일부 세력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다 죽어갔다.
일부 세력은 패망 고구려 부활을 꿈꾸며 재기의 노력.
일부 세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무역을 통해 교류.
장보고 때 무역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
지리산 일대 사찰도 장보고의 지원으로 부흥.
그 사실은 오늘날까지 구전으로 전해내려온다.
'구례군 산동면' 지명이 품고 있는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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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온천은 국내 유일의 게르마늄 온천
그 길 건너편 산비탈에 보이는 산수유 마을.
온천 목욕 후 그곳을 찾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지리산 온천은 남탕 3천명, 여탕 3천명 동시 수용.
남녀 탈의실 번호는 각각 오천 숫자를 넘어설 규모.
남녀 탕 사이에 온천 수영장이 있고 노천 온천도 특색.
온천을 이용하면 수영장까지 무료로 이용 가능.
수영복은 그곳에서 사용료를 내고 빌려 입는다.
가끔 수영장에 건망증 알몸 입장객도 있다 한다.
'온천과 수영장을 왕래하다 보면..건망증.'
수영복을 입었다 여기고 당당하게 수영장 입장.
주변의 기겁하는 눈총을 받고나서야 실수를 자각.
'어마 뜨거라.' 기겁하며 수영장을 빠져나가는 알몸.
'때로는 삼정마을 전설 속의 선녀인듯.'
함양에서 삼정마을까지 하루에 서너 차례 버스.
마천에서 택시로 삼정산 양정마을까지 갈 수 있다.
양정마을은 민박 간판이 전혀 없고 구멍가게도 없다.
'시외버스 정류소 앞 벽소령 상회에서 민박 가능.'
삼정산 7암자 순례산행 후 찾는 지리산온천.
따듯한 온천물로 가득 채운 수영장에서 온천욕.
지리산 온천에서 헤엄을 치다보면 색다른 즐거움.
관산리 중동 마을 일대 55 만평 부지에 지리산 온천 랜드
쑥찜탕, 원적외선실, 온천 수영장 등등 모두 이용료 6,000원
지리산 온천은 시설 면에서 우리나라 최대 규모.
운동장 같은 실내 시설과 숲속의 빈터같은 노천탕.
구례에 우리나라 최대 온천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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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까지도 목욕탕이 귀했던 우리나라.
강원도 평창 일대에는 대중 목욕탕이 단 하나 뿐.
그것도 겨울동안에만 3~4개월 영업하는 정도였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개울이 목욕탕이었던 탓.'
밤이면 동네 처녀들이 목욕 나온다는 빨래터.
달밝은 밤 몰래 구경하려던 떡거머리 총각들.
모기에게 뜯기면서도 숲속에 몸 숨기고 엿보기.
'남녀 간에 목욕 엿보기는 전통적인 옛 풍습.'
1960년대 신혼여행 명소로는 온양 또는 동래온천.
중매 결혼 첫날밤이 나무꾼과 선녀의 첫만남인 듯.
1950년대 가족탕은 가족이 함께 목욕하는 장소였다.
불과 30년 만에 놀랄만큼 발전한 대중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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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 목욕 풍습에 관해 알아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 설립은 1924년 평양
서울에 공중 목욕탕이 생긴 시기는 1925년이다.
고조선 때 우리 민족은 백색 피부에 대한 숭배
다른 민족에 비해 유난히 백색 피부를 동경했다.
단군신화 문헌을 보면 우리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향나무 박달나무 근처이고 향유, 향료를 애용했다.
이는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숭배했음을 대변해준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목욕문화가 더욱 발달되어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불교의 전래로 향의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목욕재계를 중시하여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시대이다.
절간에는 대형 공중 욕조시설이 구비되고,
귀족 계층 가정은 목욕시설이 구비되었으며,
목욕은 마음의 죄를 씻어내는 신성한 의식 수단
사찰 행사, 엄숙한 행사에는 반드시 목욕하는 관습.
고구려인들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이상 목욕을 즐겼고
남녀의 혼욕과 향 목욕이 발달하였고 성문화가 개방적
고려 시대에는 여자와 남자가 난탕, 또는 복숭아 꽃물
목욕을 같이 즐겼으며 온천에서의 목욕도 성행했던 시기.
이조 때에는 고려의 개방적 성문화를 퇴폐로 여겼다.
유교사상 영향으로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일시
청결을 중히 여겨 세면 않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수치
신분에 관계없이 아침에 맨 먼저 하는 행위가 세수였다.
목욕을 하더라도 양반은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씻었다.
이조 서민들은 개울가에서 자유롭게 목욕을 하였으나
양반들은 목욕통을 준비해 헛간 또는 부엌에서 씻었고
양반 사대부는 정방이라는 목욕소를 실내에 설치하였다.
일본의 혼욕문화는 고려 때 한반도에서 유래된 듯.
고구려 유민이 일본에 전파한 혼욕 문화로도 보인다.
고려에서 도화 꽃을 띄운 혼욕이 일본에 건너가 벚꽃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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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탕은 신석기시대 화산지대 온천에서 비롯된 듯.
전 세계 온천지대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혼욕 풍습.
빙하기 혹한에서 극소수 인류가 살아남았던 온천지대.
혼욕 풍습은 인류가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비상 돌파구.
아직도 지구촌의 온천지대 곳곳은 성풍속이 개방적인 편.
고대국가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란 고정관념도 작용한 듯.
일본은 혼탕이 아니라도 온천마다 노천 혼욕탕 시설.
우리나라 관광객은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뒤늦게 당황.
그곳이 혼탕인줄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아연실색 헤프닝.
독일 프랑크 푸르트 혼탕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인기.
부부단체 관광객이 이곳에서 우연히 상봉하는 경우도 빈번.
남녀 탈의실은 각각 따로 있지만, 가운데 하나 뿐인.. 혼탕.
외국 혼탕에서는 땀을 닦을 때만 수건을 사용한다..
타올로 때를 밀거나 치부를 가리는 문화는 우리나라뿐.
지금부터 지구촌의 전통적인 목욕풍습에 관해 알아보자.
..................지구촌의 목욕풍습............................
<고조선>은 청결사상과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심이 높았다.
단군신화를 보면, 한민족 첫주거지는 향나무 박달나무 근처
고조선에서는 향유, 향료를 썼고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숭배.
고조선 옛조상이 살던 바이칼호 주변은 백색 설원.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연방국가
고조선 영역은 요하(遼河)와 대동강 유역.
한의 침입으로 BC 108년 무렵 멸망하였다.
<삼국 시대>에 목욕문화가 가장 발달한 신라.
불교문화 영향으로 목욕재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찰에 대형 공중탕이 있었고, 가정에도 목욕시설.
특히, 목욕은 청결 개념보다 마음의 죄를 씻는 의식.
'사찰행사 뿐 아니라 엄숙한 의식에 앞서 목욕재개.'
<고려>에서는 하루에 몇차례 목욕하는 고구려 풍습을 계승.
향료 목욕이 발달했고 성문화가 개방적이어서 남녀혼욕 풍습.
복숭아 꽃을 띄워놓고 목욕을 즐겼으며 온천욕의 대중화 시대.
<이조>에서는 고려 성문화를 퇴폐시 여긴 유교관념.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
청결을 중시해 세수 않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수치
아침에 일어나면 양반일수록 제일 먼저 세수를 했다.
중인 천민은 냇가에서 자유롭게 목욕
양반은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목욕.
양반들은 헛간 부엌 또는 실내의 정방 목욕소에서 목욕.
양반은 남녀유별 유교관 때문에 혼욕을 상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조 말 성풍습이 문란해져 개울에서 혼욕이 성행.
우리나라 최초 공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 서울에는 1925년.
원시 사회 가족은 혼욕했고 추운 겨울에는 목욕하지 않았다.
찬물로 목욕했고, 물을 덮히는 목욕문화는 발달되지 않았다.
전통 한옥 가옥구조를 보면 목욕할만한 곳은 부엌뿐.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엔 대부분 개울에서 목욕.
1970년대 중반까지 농촌에서 4계절 공중목욕탕은 희귀.
예를 들면 강원도 평창에 겨울에만 문을 여는 공중탕
그것도 1970년대 중반까지 평창군 일대에서 오직 하나.
대도시를 제외한 농촌 지역은 거의 비슷한 실정이었다.
<일본> 혼욕풍습은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고,
혼욕 금지령은 에도 시대인 1791년에 선포했다.
그러나, 시행이 안되 메이지 2년인 1869년 재선포.
메이지 33년(1900)에 혼욕금지 연령은 12세 이상 남녀
현재 각 자치제 조례에 따라 일본은 대부분 혼욕 금지.
동경은 1964년 조례 184 호에 따라 10세 이상 혼욕 금지.
일본의 목욕 방식은 따뜻한 물에 몸담그는 정도.
목욕 시간이 짧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안는다.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차례로 욕조에서 목욕한다.
목욕한 물은 세탁 청소 용도로 쓰이고
그물을 다시 화장실 변기 용도로 사용.
관광지 온천지대에는 혼탕이 더러 있지만,
일본인에게 혼탕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다.
다만, 목욕탕 주인 혼자 남녀 탈의실 서비스.
남탕 탈의실에 들어온 젊은 여성의 친절봉사
자칫, 잘못 해석하면, 망신 당하기 십상이다.
일본에서 손님을 초대하면, 목욕 최우선권.
욕조 물에 제일 먼저 몸담그는 특권을 준다.
가장→노부모→자식→가장 부인→며느리 순서
'노부모보다 가장이 먼저 목욕하는 일본 풍습.'
현재 일본은 북알프스 동북지방, 규슈 만 혼탕이 산재.
혼탕은 짙은 증기 때문에 남녀 간 노출의 염려도 없다.
혼탕 탈의실은 남녀 별도이고 노천탕은 각별한 예절법.
19세기 이후 엄격한 법적 규제로 사라진 퇴폐 혼탕.
현재는 한적한 온천지역에서만 관광객 유치용 혼탕.
일부 귀족층에서 동녀에게 목욕 시중 들게 한 일본.
'고객이 왕' 상술로 2차대전 후 관광객 유치용 혼탕.
달러 획득을 위해 동녀 대신 기모노 여성이 목욕시중.
원래, 속옷을 입지 않는 일본 고유 전통 여성복 기모노
현재 일본의 목욕 풍습은 세계가 본받을 선진 수준.
<고대 이집트>는 기원 전 2000년 ∼1501년에 나일강에서 목욕.
초대형 목욕탕은 종교수단의 하나로 이용되고 청결개념은 미약.
<로마시대> 목욕탕은 씻는 개념보다 사교장 문화공간.
144개 공중 야외 화장실과 다양한 사치스러운 목욕탕
카라카라 ,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대형 목욕장.
수천 명 남녀가 혼욕을 즐긴 풍습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가 전성기.
고대 로마는 사치한 퇴폐 성풍속 문화
<사해> 일대에는 피부 미용에 효험있는 진흙(머드) 목욕.
소금물 부력으로 헤엄을 치지 못해도 몸이 물위에 뜨는 곳.
구약성서(창세기(19:1∼38))에 나오는 퇴폐 도시 '소돔과 고모라'.
유황과 불에 의한 멸망은 신이 내렸던 형벌.
위치는 이스라엘 사해 남단 알리산 남부 지역
현재 사해 속에 수몰되어 있는 소돔과 고모라.
고고학 증거에 의하면, 청동기시대(BC 2000∼1500)
비옥한 농경지대 아드마 스보임 소알(벨라) 평원도시.
BC 1900년 무렵 그레이트리프트 밸리 사해지역 지각 변동
지진으로 대지가 함몰하고 유황 불 석유 천연가스 분출.
현재 사해 남단 하르세돔(아랍어 : 야발우스둠)과 소돔.
죄악 세계의 대명사인 두 도시는 문학소설과 예술의 주제
르네상스 미술에서 다루어졌고 수간 남색을 의미하는 sodomy.
'남색은 퇴폐가 극심했던 '소돔'에서 유래.'
<터어키>는 목욕, 휴식, 식사 장소인 목욕탕 문화.
사치스러운 욕조와 목욕탕은 터어키가 세계에서 최고.
수증기 터키탕은 일본에서 색다른 퇴폐 문화로서 정착
<핀란드>는 청결 개념에서 병을 치료하는 장소로 생각.
출산도 사우나에서 했고 장례 시신도 사우나에 넣는다.
악귀가 떠나도록 자작나무 빗자루로 때리는 사우나 풍습.
<프랑스 민족>은 목욕을 잘 안하기로 유명한 민족.
물에 석회질이 많아 목욕할수록 피부 노화의 현상.
석회질 물에 이가 녹을까봐 양치질도 꺼린 프랑스인
입안의 구취와 몸의 악취를 감추기 위해 향수가 발달.
왕족은 개인 욕실에서 우유 향료로 호화스러운 목욕문화
지금도 프랑스의 상류층 부부 침실에는 욕실이 2개 이상
프라이버시 공간이므로 부부 사이라도 서로 침범하기 금물.
프랑스의 화장실 및 목욕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이다.
<독일> 프랑크프루트 바덴바덴은 혼탕 문화의 도시.
수건은 땀을 닦거나 사우나 의자에 깔고 앉는 용도.
하여, 사우나 의자를 땀으로 적시지 않는 것이 예의.
<중국>은 옛부터 공동탕의 구조가 혼탕
반드시 수영복이나 가운을 착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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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라는 문화적인 수준으로는 이미 첨단 선진국.
혼탕이 개방되어도 슬기롭게 충격을 흡수할 우수 민족.
동해안에 여성을 위한 시범 누드 비치를 개방할 움직임.
우리민족 정서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귀추가 주목.
일본 독일 네델란드 중국 등지로 몰리는 혼탕 관광객.
우리나라로 유치하는 것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을 듯.
지리산 온천 주변에 볼만한 명소.
화엄사. 천은사. 섬진강. 노고단. 피아골. 광한루.
청학동. 달궁. 연곡사. 쌍계사. 심원계곡. 산수유 마을.
지리산 종주를 하다 보면, 경유하게 되는 <남원. 진주. 구례>.
한번 쯤 그 곳에 들러 역사의 숨결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지리산 곳곳의 유래 및 전설을 떠올리는 산행도 의미가 있을 듯.
<네스 호 괴물> 및 <오줌싸게 동상>으로 인한 관광수입.
영화의 한 장면으로 알려져 세계적 명소가 된 유럽 관광지.
다분히 날조된 듯 베일에 가려진 수수께끼 자체가 관광자원.
그로 인해 후손들이 잘 살수 있어 애국심 긍지도 자라나는 듯.
반만년 역사의 숨결이 담긴 우리나라 전설보다 가치가 있을까?
이제는 우리나라도 사라져가는 전설을 지키고 개발 할 시기.
지리산은 무형문화제로도 무한 잠재가치가 있는 전설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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