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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요약
성경에 의하면,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대홍수가 끝난 후, 아라랏산에 멈춘 방주에서 나온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함은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야벳은 일곱 아들을 낳았고, 거기서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서 오늘날에 인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아라랏 산에서부터 전 세계로 흩어져 나간 것이며, 모든 민족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라랏 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창조사학회 탐사대는 바로 이 근원을 찾기 위하여 대탐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라랏으로부터 시작하는 민족 이동을 단계별로 정리해 보면, 우선 아라랏에서 내려와 셈은 자그로스 산맥과 타우루스 산맥의 산지에, 그리고 함은 메소포타미아 평야에, 야벳은 에게해와 흑해의 바닷가로 나간 1차 이동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셈이 산지에서 평야로 내려오면서 함의 아들들, 즉 구스는 에디오피아, 미스라임은 애급, 붓은 리비아, 가나안은 가나안지역으로 밀려 간 이동이다.
이때에 밀려난 함의 자손들 가운데 새로운 신들이 나타나 급속히 전파되었고, 수메르 족속이 먼저 이 신들에 미혹되자, 악갓과 앗수르가 수메르 징벌에 나섰으며, 수메르는 유부라데 하구의 라가스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 타락한 셈족은 인도의 남부로 흘러들어가 인더스 문명의 주체가 되었다.
셈 내부의 갈등을 틈타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남아있던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악갓과 앗수르와 나머지 셈의 모든 민족들을 제압하고 바벨탑 건설에 시작했다. 이 때 셈의 일부는 아라랏 산을 넘어 북상했고, 야벳의 고멜, 마곡, 마대, 두발 메섹 등 다섯 족속이 셈을 따라 북상했다.
일단 러시아 평원에 정착한 이들 중 고멜은 서쪽으로 이동했고, 마곡 두발 메섹은그 자리에 남았으며, 셈과 마대 및 야벳의 일부 족속은 우랄 산맥을 넘어 동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랄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던 중 일부는 알타이산맥 남쪽 경로로 이동하고, 야벳의 일부인 아리안족은 인도 북부로 들어가 드라비다 족을 제압하였고, 나머지 주류는 시베리아를 거치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만주의 하얼빈, 즉 아사달 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들 중 야벳의 자손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서쪽으로 들어가 항하 상류의 지역으로 들어갔으며, 셈의 일부는 이들을 지도하려고 중국 대륙의 동부지역으로 이동했고, 다른 일부는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홍수 이후 민족의 이동이 시작된 아라랏산에서 극동지역까지의 문화 분포는 셈의 수메르와 앗수르에서 시작해서, 북유럽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고, 만주의 한반도,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하나님 신앙의 회색토기 문화권과 가나안, 바벨론에서 시작하여 인도 남부, 인도지나, 중국 서남부까지 이르는 다신교 경향의 채색토기 문화권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창조사학회 탐사대는 이 회색토기 문화권을 추적한 것이다.
제 3 부 나그네길
제3부|나그네길
새로운 출발
많은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남거나 앗수르와 니느웨에 주저 앉거나 인도로 떠나가고 또 함께 유브라데강을 거슬러 온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밧단아람에 정착하기로 했는데 끝까지 유브라데의 최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홍수 이후에 인류가 새 역사를 시작했던 그 아라랏산에서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우라르투의 비밀
BC 1300년 경의 앗수르 문헌 자료에는 '우르아트리'라는 이름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아라리루투'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이것에서 창세기의 '아라랏'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 성경에 보면 BC 701년 앗수르왕 산헤립의 두 아들이 그 아비를 살해하고 아라랏땅으로 도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아라랏땅'은 바로 '우라르투'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라랏이라는 산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고 터키어로 '아그리 다기', 쿠르드어로 '글리딕'이라고 한다. BC 1300년 경의 앗수르 문헌 자료에는 '우루아트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라라르투'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이것에서 창세기의 '아라랏'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 성경(왕하 19:36~37 사37:37~38)에 보면 BC 701년 예루살렘 공격에 실패하고 돌아간 앗수르왕 산헤립의 두 아들이 그 아비를 살해하고 아라랏땅으로 도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아라랏땅'은 바로 '우라르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기사가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바벨론 연대기'는 두 모반자 '아랏말릭'과 '샤루술'이 산헤립의 후계자 에살핫돈에게 패하여 '우라르투'로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헤립왕이 죽은 것은 BC 681년이었음으로 구약 성경이 거룩한 아라랏땅은 바로 바벨론 연대기의 우라르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 사용한 아라랏이라는 이름이 우라르투 또는 우루아트라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면 BC 13세기로부터 BC 6세기 사이에 앗수르와 잦은 접촉이 있었던 우라르투 왕국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아라랏 지역에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시날 땅으로부터 유브라데강 또는 티그리스강을 끼고 올라와 우리의 선조들처럼 북방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아라랏 지역에 주저 앉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도 셈족의 특징대로 활을 잘 사용했으며 BC 832년 앗수르 살만에셀Ⅲ세의 대군을 물리친 살둘왕이 스스로 '왕 중의 왕'이라 칭했을 정도로 그들은 강하고 사나운 족속이었다. 또 이들의 지역에 속해 있었던 우르미야호수라든가 수메르의 우르 또는 우룩이라는 이름도 우라루트라는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러시아 지역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이름지은 우랄산맥도 이 우라루트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랄대학의 드미트리예바 타티야나 교수(언어학)의 말이다.
"우랄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쪽에서… 이를테면 터키같은 나라에서 온 이름일 수도 있고 그들의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어떤 산 이름이나 강 이름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셈과 함과 야벳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2)
바벨탑 사건이후 이들은 셈을 따라 유브라데의 상류로 올라가다 주로 흑해와 에게해 연안으로 흩어져 나갔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바벨탑 사건 이후에 어떤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 그대로 남고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와 가나안으로 남하하였는데 야벳의 자손들은 왜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의 자손을 따라 함께 올라갔던 것일까? 성경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아라랏산에서 내려와 농사를 지어 놓은 노아는 마음이 느긋해져서인지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로 그의 장막에서 잠이 들었다. 그 때 무슨 용무가 있어서인지 노아의 둘 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왔다가 그 아버지가 벌거벗은 채 잠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 형인 셈과 아우인 야벳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즉시 덮을 것을 둘러메고 뒷걸음으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덮어 주고 나왔다. 나중에 깨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그의 세 아들과 그 자손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을 남겼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6-27)
노아가 왜? 함의 네 아들 중에서 유독 그 넷째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는지는 별도로 하더라도 우선 야벳에 대한 축복에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즉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기를 원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벳의 자손들은 셈의 자손들이 유브라데와 티그리스강을 따라 올라갈 때에 함께 올라갔던 것이다.
고대의 민족 분포도를 보면 고멜의 아들 도갈마와 메셀은 흑해 연안에 살았고 두발은 밧단아람 지역에 있었고 야완은 그리스에, 디라스는 이탈리아쪽으로 들어갔으며 메대는 동쪽의 카스피해 연안에 분포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BC 7세기경의 우라르투 역사를 살펴보면 우라르투는 타발(두발), 무스키(메섹) 등과 동맹 관계에 있었고 킴멜(고멜) 그리고 메디아(마대) 등과는 동맹 관계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야벳의 둘째 아들인 마곡 족속은 고대 민족의 분포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우라르투와 접촉을 가졌던 민족들의 명단에도 빠져 있다. 이들은 아마도 가장 먼저 북쪽을 향해 올라간 민족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는 마곡 족속이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오는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겔 38:2)
어쨌든 BC 7세기의 우라르투 역사에 이러한 야벳 자손들의 명단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카서스산맥의 북쪽에서 서쪽으로는 유럽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야벳의 혈통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러시아에는 고멜과 메섹과 두발의 흔적이 나타나고 마대 족속도 일단 코카서스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볼가강을 따라 남하했다고 볼 수 있으며 중앙아시아 쪽에서 남하했다는 인도의 아리아 족속도 일단 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로 들어가 인더스 문명을 이루있던 드라비다 족을 남쪽을 몰아 붙였다. 그렇다면 야벳 족속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셈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노아는 야벳에게 이르기를 셈의 장막에 거하라고 했는데 그 셈의 자손들이 일부는 남고 일부는 동쪽으로 가고 일부는 북쪽으로 갔으므로 야벳은 그 행동을 결정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논란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일부는 에벨의 무리와 함께 밧단아람 지역에 남았다가 바닷가로 밀려났고 또 일부는 코카서스산맥을 넘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아의 자손들은 결국 시날 평지에서 시작하여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 이들은 서로 다투며 싸우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점점 홍수의 심판을 내렸던 하나님을 다시 잊어버리고 제각기 자기들의 신을 만들어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먼 나그네 글을 선택하여 나섰던 것이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침묵하는 산
아라랏산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산이었다.
아마 멀리서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줄 곧 그 산은 우리를 압도했고 주변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그 위엄 있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해발 3200m부터는 만년설로 덮여 있으며 정상에는 깊은 구멍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방주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하는 탐험가들이 살펴보고 싶어하는 표적이다.
아라랏산 근처의 지형은 아주 기묘했다. 만년설로 덮여 있는 해발 5165미터의 대(大) 아라랏산은 거기서 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해발 3158미터의 소(小) 아라랏을 끼고 있다. 또 남쪽의 좌우에는 마치 공룡의 등처럼 거칠고 사나운 모습이 카야부룬산과 칼루스산을 거느리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텐두레크산의 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얼른 보아 노아의 방주가 물에 잠긴 이 지역 위에 떠 있었다면 그 모든 산들은 방주를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 역할을 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산들로 둘러싸인 들판에 우리가 찾아간 마을 도그베아지트가 있었던 것이다.
아라랏산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산이었다.
아마 멀리서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줄 곧 그 산은 우리를 압도했고 주변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그 위엄 있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라랏산은 만년설에 뒤덮여 있었으며 군데 군데 검은 색으로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 무늬가 마치 八자를 네개 겹쳐 놓은 엘릴신의 문양 연상케 했다. 1829년 파로트(J.J. Parrot)가 처음 등정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아라랏산 등정을 꿈꾸어 왔으나 터키 군대가 산을 둘러 싸고 있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그베아지트에서 아라랏을 여러 번 등반한 경험이 있는 아흐메 에르툴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라랏에 매혹되어 도그베아지트에 살고 있는 에르툴 씨는 주로 군대가 혹한 때문에 철수하는 한 겨울에 아라랏을 등반했다고 하는데 해발 3200m부터는 만년설로 덮여 있으며 정상에는 깊은 구멍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방주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하는 탐험가들이 살펴보고 싶어하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미국의 탐험가 데이빗 파숄드(David Fashold)가 방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라고 발표했던 장소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뜻 밖에도 대(大) 아라랏이 아니고 그 남쪽 24킬로 지점에 있는 해발 3,700미터의 쥬디 산이었다.
1976년 쥬디산에 지진이 일어나 주변의 흙들이 다 무너져 내릴 때 그 중의 한 부분만 무너져 내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 남은 부분이 이상하게도 꼭 배의 밑바닥 모양처럼 되어 있었다. 1984년 탐험가 데이빗 퍄숄드(당시 46세)는 이 장소에 와서 실제 측량까지 해 가며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이듬해 1985년 12월 10일자『위클리 월드 뉴스』지에 방주를 찾아냈다고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성경에 나와 있는 치수로 보면 방주의 모양은 성냥갑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자리는 너무 유선형입니다."
창조과학회를 대표하여 우리 탐사대에 참가한 권영헌 박사(한양대)의 말에 이벤허 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탄화된 목재 흔적이 없는 것은 이상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의 제작치수를 지시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6:15-16 )
1규빗은 44.45센티미터이니 배의 크기를 환산하면 길이가 약 133미터 넓이는 22미터 그리고 높이는 13미터가 된다. 데이빗 파숄드의 측량 결과로는 길이 125미터 넓이 36미터 정도가 되어 길이는 어느 정도 비슷하나 폭이 좀 넓은 편이었다.
어쨌든 방주가 아라랏산에 멈춘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다시 찾아 보았다.
"7월 곧 그 달 17 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창8:4-5 )
그러나 영문성경에 보면 여기 나오는 '아라랏산'에는 'upon the mountains of Ararat; 즉 '아라랏의 산들 위에'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요세푸스의『유대고대사』를 찾아보았다.
"이후에 방주는 아르메니아의 어떤 산 꼭대기에 머물렀으며…"(1권 3장 5절)
본래 쥬디산은 아르메니아 영토였는데 터키에게 빼앗긴 산이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다시『유대고대사』에 그 당시까지도 방주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명기해 놓고 있다.
"모노바수스왕은 이사테스에게 아모둠이 많이 자라는 땅인 카래(Carrae)를 하사해 주었다. 카래에는 노아의 홍수 때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방주의 잔해가 남아 있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 곳에 가면 방주의 잔해를 볼 수 있다."(『유대고대사』20권 2장 2절)
여기서 라틴어 아모뭄(Amomum)이라는 것은 영어의 발삼(Balsam)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강장제로 사용되는 신비의 약초를 말한다. 라틴어 '아모'(Amo)가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로마에서 이 아모뭄은 '사랑의 묘약'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는 알타이 공화국에서 이 아모뭄 즉 '발삼'과 만나게 된다. 쥬디산에 있던 발삼이 알타이공화국에서 신비의 영약으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쥬디산의 방주자리에서 아흐멧 에르툴 씨는 약초 하나를 뜯어서 우리에게 권했다. 신비한 향내가 나는 '나네'라는 풀이었는데 건강에 좋은 풀이며 특히 심장병에 특효라고 했다. 아마도 그 나네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아모뭄 즉 발삼인지도 모른다.
방주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과『유대고대사』외에 쿨람에서 나온 사해문서 중의 하나인『요벨서』에도 나오고 있다.
방주는 더욱 나아가서 아라랏산맥 중에 있는 산의 하나인 루발(산)의 정상에 멈추었다."(요벨서 5:28)
요벨서가 말하는 루발산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대 아라랏산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방주의 행방에 관한 기록으로는 또 한 군데가 남아있는데 바로 이슬람교의 경전으로 사용되는『코란』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방주가 알 쥬디에서 멈추었으며"(제 11장 45절)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면 알 쥬디산은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산맥 중에 있으며 이 때문에 그 산은 '카르두'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헬라 사람들은 이 산을 '고르드요에이'라 불렀으며 요세푸스는 이 지역을 '카래'라고 했다.
과연 이 자리가 정말 방주가 멈추었던 자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경의 '아라랏산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고 코란은 쥬디산이라고 명기해 놓았으니 일단 우리는 그 장소를 상당히 유력한 장소의 하나로 기억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또 뿐만 아니라 쥬디산의 그 자리에 신기하게도 배의 밑 바닥과 비슷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에서도 유사성이 있었다. 대 아라랏산에서 방주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탐험가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으나 일단 상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노아의 대홍수와 방주터
창세기 6~8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기 위해 노아에게 만들도록 명한 사각형의 배로 위에서 약 50cm 아래에 천창(天窓)이 1개 있었다. 여호와게서는 이 방주에 노아와 그 가족 및 각종 동물 1쌍씩 실을 것을 명령하시고, 대지를 150일 동안 홍수로 잠기게 하신 후,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과 동물만이 방주의 도움으로 살아 남게 하셨다. 그런데 20세기 무렵 L. 올리에 의한 우르의 발굴결과, 선사시대에 이러한 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뒷받침해주는 대홍수가 실제하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산술적으로 계보를 계산하면 노아는 아담으로부터 직계로 10세 손이며, 족장 셈, 함, 야벳의 아버지로, 이 세 아들은 각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창 10장)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기 위하여 그에게 방주를 만들어 재앙을 피하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방주를 지었으며, 가족과 동물 1쌍씩을 태우고 1년 10일 동안 방주 속에서 홍수를 피하였다.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하신 것은 그가 부정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르고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따.
노아의 홍수를 역사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은 홍수사건을 하나의 설화로 취급한다. 특히 스메르인 도시국가 우르(우륵)의 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시왕의 서사시가 발굔됨으로써 성경의 기록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소아시아 시리아 지방에 널리 유포되었던 홍수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설화들이 전세계적으로 많은 민족들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노아의 대홍수는 오히려 대홍수를 경험했던 노아의 후손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여 전해지고 전셰계적으로 흩어지면서 이러한 홍수 이야기가 그들 나름대로 각색을 거쳐 설화로 남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기억 속에는 대홍수에 대한 심판이 있었음을 암시되어 있기 때문에 대홍수 사건은 역사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방주가 머물렀다고 증언하는 기록은 성경에서 '아라랏산들'(복수)로 되어 있고, 히브리 외경인 요벨서에서는 '루발산' 정상으로, 아울러 코란에서는 '쥬디산'으로 되어 있다. 루발산은 현재 명으로 위치가 확인이 안 되고, 쥬디산에 대해서는 미국의 파숄드가 정밀 지질탐사와 측량을 하여 틀림없는 방주라고 천명하였던 바가 있다.
작별의 고개
어느 쪽으로 가도 보이는 장엄한 아라랏산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이 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이 곳에서 남기로 한 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학 아라랏산을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놓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쉽지만 이 곳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여기서 형제들과 작별할 때의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노아의 가족들이 쥬디산에서 내려와 처음 살았던 곳을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니키드예우안' 즉 '혈통의 장소'라고 불렀는데 그 자리는 모두 지진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쥬디산에서 돌아오면서 카야부룬산의 기슭에 살고 있는 옘리한 탄 씨의 집을 찾았다. 산골짝 외딴 집에 살고 있는 탄 씨와 그 아내는 불쑥 찾아간 낯선 나그네들에게 칼푸스(수박)와 도마텟(도마토)과 치이즈 그리고 챠이와 밀가루 떡을 내놓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요르단에서는 코세반, 이라크에서는 허브스라고 하는 밀가루 떡이 여기서는 또 '에키메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마리 안 되는 양과 소를 기르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탄 씨는 4남 3녀의 아이들을 다 기르기가 어렵다고 푸념했지만 둘째 아들이 도그메아지트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대견스러워하고 있었다. 모두들 산을 떠나 있었지만, 탄 씨는 바로 마지막 우라루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시 대 아라랏산을 서쪽으로 돌아 노아의 가족이 정착해서 살았다는 '유젱겔리'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빠지면 바로 이그딜을 지니 칼스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옛날 아라랏을 떠난 사람들은 바로 이 길을 지났을 것 같았다. 아르메니아의 역사학자인 모세 코레넨시스는 아르메니아 전승에 '세론' 즉 '분단의 장소'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유젱겔리 마을이 바로 그 세론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유젱겔리 마을을 향해 들어서려고 할 때 멀리 아라랏산 쪽에서 말을 달려 오는 소년 하나를 만났다. 열 세살이라는 메메트 누리 소년 역시 이 아라랏 지역에 남은 셈족의 후예일 것 같았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듯이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셈족의 후예들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것이다.
유젱겔리 마을에는 노아의 방주에서 닻으로 사용했다는 큰 돌이 있었다. 방주가 아라랏 남쪽의 쥬디산에 정박했다면서 왜 그 닻으로 사용했다는 돌이 아라랏 서쪽에 있는 유젱겔리 마을에 와 있는지는 안내하던 아흐멧 에르툴 씨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있었다. 유젱겔리도 본래 아르메니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교회 교인들의 무덤들과 그 비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 노아의 마을에 사는 것을 큰 복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쥬디산 근처에 뒹굴고 있는 이 구멍 뚫린 돌을 자기네 마을로 운반에 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유젱겔리 마을의 뒤쪽에 있는 광천수의 샘으로 갔다. 땅 속에서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는 그 물은 철분이 많아서 붉은 색이었다. 솟아 나온 물은 흘러서 아라랏산의 남쪽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었다. 민족들의 이동 통로가 된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아라스강 등 많은 물줄기가 이렇게 아라랏산 주위에서 발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라랏산은 이렇게 물들의 근원이 되고 동시에 생활의 도구가 되는 흑요석의 중요한 산지이기도 했다. 우리 중의 한 대원이 부근 길바닥에 깔려 있는 돌들 가운데서 흑요석을 주웠다. 세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 흑요석이 이 곳에서 길 바닥에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흑요석이 나는 곳은 이 곳 밖에 없는 데도 앞으로 우리는 가는 곳 마다 박물관에서라면 얼마든지 보게 될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보이는 장엄한 아라랏산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이 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이 곳에서 남기로 한 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학 아라랏산을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놓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쉽지만 이 곳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여기서 형제들과 작별할 때의 장면을 생각해 보았다. 셈의 자손도 야벳의 자손도 모두 함께 이 곳을 떠난 것도 아니고 그들 중에 또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이 곳에 남기로 했으니 이 '분단의 장소' 즉 '세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배웅하러 나왔을 것이었다.『삼국유사』는 하나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무리 삼천을 이끌고 세상에 내려올 때 하나님이 그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서 내려 보냈다고 되어 있다. 이 천부인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학자들은 이것이 환웅의 참모였던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신을 의미하고 비는 농사와 관계가 있으며 구름은 하늘에서 내려온 지휘권과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세 개의 천부인은 제사 때에 희생 제물을 자르는 검(劍), 농사에 필수적인 씨앗(種子) 그리고 지휘권을 상징하는 거울(鏡)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 탐사대는 선조들이 이동했을 통로로 여겨지는 지역들을 지나면서 그 곳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사용 동검(銅劍)과 왕권 또는 지휘권을 상징하는 동경(銅鏡)들을 보았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라랏을 거쳐 러시아와 시베리아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 선조들은 아라랏산을 떠날 때 밀과 보리와 씨앗을 가지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떠난 또 하나의 씨앗은 바로 '무궁화' 이 씨앗이었을 것이다. 이 무궁화의 학명은 "Hibiscus Syriacus'이니까 수리아(시리아)가 그 원산지라는 뜻이다. 이 수리아가 유브라데강 상류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는 티그리스강변의 앗수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꽃씨를 우리 선조들이 가져온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한영사전에 보면 무궁화를 '사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라고 번역하는데 이 '사론'도 바로 분단의 장소 '세론'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 무궁화의 꽃씨는 그 분단 장소에서 형제들과 작별할 때에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의 징표로 지니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탐사기간 동안 이 무궁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나곤 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해주었다.
청동기 문화와 청동기술
청동은 인류 역사상 처음 본격적인 도구재료로 쓰인 금속이다. 청동기 사용은 고대오리엔트나 중국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시 성립과 고대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BC 5000년 대말 할리프기(期)에 구리로 만든 손칼, 칼, 못, 인장 등이 보이는데 청동기의 출현은 우바이드기 (BC 4000~BC 3400)에 들어와서이다.
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권은 각 문화권에서 사용한 동검을 기준으로 크게 ①오르도식 단검이 제작 · 사용되었던 북방문화권 ②동주식(東周式) 동검의 중국문화권 ③비파형(琵琶形) 동검의 예맥문화권 등 3문화권으로 구분된다. 한반도는 이 가운데 예맥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동경(銅鏡)은 왕권을 상징하는 귀중품이었다.
이러한 소형 청동기들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남부 시베리아 북방 오르도스지방 청동기 영향으로 보급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즉 BC 13세기 무렵 남부 시베리아 미누신스크지방의 카라수크문화 담당자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내 청동기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늘의 안내자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 놓은 것은 11월 10일이었고 땅이 말라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은 이듬해 2월 27일이었으니 까마귀는 1백일 이상을 물 위로 날아다니며 노아의 가족들에게 바깥 세상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를 배웅하듯 요란하게 울며 날아오른 그 까마귀 떼는 바로 노아가 방주에서 내어 보냈던 그 까마귀의 자손들일 것이다.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듯이 까마귀는 인간에게 중요한 정보 제공자이며 나그네의 길의 안내자가 되어 주는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까마귀는 하나님의 뜻 즉 신탁을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 왔다.
우리가 아라랏산을 한번 더 바라보고 유젱겔리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밀밭 사이에서 요란한 까마귀 소리가 들리더니 까마귀 떼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만년 설에 덮인 아라랏산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홍수가 끝난 후 나오는 까마귀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창 8:6-7)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 놓은 것은 11월 10일이었고 땅이 말라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은 이듬해 2월 27일이었으니 까마귀는 1백일 이상을 물 위로 날아다니며 노아의 가족들에게 바깥 세상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를 배웅하듯 요란하게 울며 날아오른 그 까마귀 떼는 바로 노아가 방주에서 내어 보냈던 그 까마귀의 자손들일 것이다.
"까마귀를 찍어야 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까마귀야!"
갑자기 나타난 까마귀 떼를 찍느라고 우리 촬영팀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듯이 까마귀는 인간에게 중요한 정보 제공자이며 나그네의 길의 안내자가 되어 주는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까마귀는 하나님의 뜻 즉 신탁을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 왔다. 성경에는 또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의 추격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시켜서 음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왕상 17:6)
이렇게 까마귀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사람이 어려울 때에 도와주며 사람이 나그네 길을 인도해주는 안내자였음으로 성경은 이 까마귀를 하나님의 양육받은 귀한 새로 기록하고 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 12:24)
이 까마귀는 바빌론 신화에서는 홍수 중의 안내자로 나오고 이란에서는 미트라신의 안내자였으며 북유럽과 아이스랜드 신화에서는 정보를 알려 주는 새로 등장했다. 특히 우리 민족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타타르 신화에도 까마귀의 설화가 등장한다.
"태초에 이 세상이 물바다였다. 하나님 울건과 최초의 사람 얼릭이 검은 기러기 형상으로 날아다니다가 얼릭이 바다 밑의 흙을 건져내오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땅을 만들었다."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살고 있는 부리야트족에도 비슷한 유형의 설화가 있다.
"처음에는 세상이 물바다였는데 하나님 불칸이 날아다니다가 오리에게 명하여 바다 밑의 흙을 건져 내게 하여 땅을 만들었다."
타타르 지역에서 '검은 기러기'가 나오는 것은 '까마귀'의 변형이며 부리야트 족의 설화에서는 아예 ;오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한국의 강이름 아리수(鴨綠江)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 설화는 캄차카 반도를 거쳐 알래스카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 까마귀는 해 속에 있으며 창조에 참여한 안내자이다."(캄챠카의 Koryak족)
이 해 속에 있는 까마귀는 고구려의 벽화에도 나타나고 있다. 집안(集安) 5호분 4호묘의 벽화에는 태양 속에 들어 있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우리 선조들이 태양을 향해서 동쪽으로 올 때 언제나 그 앞에 안내자인 까마귀가 있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 발을 세 개로 그린 것은 까마귀를 길조로 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라랏산에서 발견되는 삼족기(三足器)의 세 발은 신성과 안정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탐사한 모든 지역에서는 새 모양으로 만든 토기 또는 삼족기가 잇달아 발견되었다.
이러한 고마운 까마귀의 이야기는 신라에서도 있었다.『삼국유사』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즉 AD 488년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가 와서 울므로 따라갔더니 한 노인이 봉서 한 장을 주고 사라졌다. 그 겉봉에는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때에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한 사람은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떼어 보는 것이 가하다고 했다.
결국 봉서를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고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돌아가 활로 금갑을 쏘니 내전에 잠입한 중이 왕비와 통간하고 있음으로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다. 이렇게 까마귀는 왕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어 왕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 까마귀가 등장한다. 고대의 중국에는 서쪽에 하화족(夏華族)이 그리고 동쪽에는 동이족(東夷族)이 살고 있었다. 이 동이족의 대표적인 왕조가 BC 1800년에서 BC 1100년까지 지속된 은(殷) 왕조인데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 중 은본기(殷本記)에서 은 왕조의 시조인 설(楔)의 모친은 검은새(玄鳥)의 알을 삼키고 그를 낳았다고 했으며 회남자(淮南子)의 추형훈(墜刑訓)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은 왕조의 왕들 30명 중에서 5명의 이름에 새 을(乙)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까마귀의 이야기는 성경의 아라랏산에서 시작하여 러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 중국, 한국과 일본을 지나 캄챠카 반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뿐만 아니라 베링 해협을 건너 북부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신화에도 까마귀가 등장하며 이것은 또 북미 인디언의 선더버드(Thunder Bird, 雷鳥)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늘에서 까마귀 모양의 사람이 내려와 물 밑의 흙을 올려서 땅을 만들었다."(앨라스카 북부의 에스키모)
이렇게 까마귀의 이야기는 성경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미주 북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까마귀는 길조로 여긴다. 그런데 왜 한국은 고구려의 벽화에까지 그려지고 신라의 위기에서 구한 까마귀가 불길한 새로 여기고 있을까?
요란하게 울며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전송을 받으며 우리는 아라랏산의 서쪽 어깨를 지나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조들이 형제들과 헤어져 이 길을 따라 떠날 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놓으며 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함께 불렀던 석별의 노래가 바로 '아리랑'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많은 학자들이 아리랑의 어원을 찾는다고 연구를 해 보았으나 찾지를 못했는데 그 아리랑과 아라랏의 발음에 상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그의 저서『고대사의 비교 언어학적 연구』에서 아리랑의 어원이 만주어의 '아라라메'(산을 넘어) 또는 '아라라메'(고개를 넘어)에서 온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끝없이 이어지는 아리랑 노래는 시날 평지에서, 밧단아람에서, 유브라데 상류에서 그리고 아라랏과 러시아 평원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수 없이 겪어온 이별의 아픔들을 노래한 것인지 모른다.
아라랏을 넘어 흑해변의 호파에 이르기까지 안내를 자칭한 아흐멧 에르툴씨와 함께 포드의 빨간색 벤 트랜지트를 타고 우리는 아라랏을 떠났다. 아라랏에서 흑해로 내려가는 길도 유명한 폭력조직 페카카의 구역이기 때문에 후리는 쿠르드족의 운전사를 선택했고 역시 쿠르드족인 에르툴 씨의 안내를 받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가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 한 대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라랏이 따라오고 있군요!"
우리는 일제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직도 거대한 아라랏산이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라랏은 어디까지 우리를 따라올 것인가?"
우리는 5분마다 10분마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달려도 아라랏은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울퉁불퉁한 화산석이 끝없이 깔려 있어서 우리는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화산석은 특히 오른편에 많았기 때문에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아라랏을 떠날 때에는 그 것을 넘어 아르메니아로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길을 따라서 아라랏을 떠났을 것이었다. 그들이 걸어서 아라랏을 떠나면서 몇 번이나 아라랏을 돌아다 보았을 것인가? 우리가 벌서 차로 한 시간을 달렸는데도 아직 아라랏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단'의 장소를 출발하여 약 한 시간을 달린 우리는 '이그디르'에 내려서 점심을 먹었다. 이 곳 이그디르에서도 아라랏의 거대한 모습은 보이고 있었다. 아라랏은 마치 우리의 점심 먹는 모습까지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그디르를 떠나서도 길이 계속해서 평탄했기 때문에 아라랏의 모습은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소금산 투즐릭카를 지날 아라랏이 보이지 않아 이제는 사라졌는가 했더니 험한 바위산들을 지나 고개를 넘자 아라랏은 아직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라랏은 우리가 두 시간을 더 달려 '디고르'를 지날 때에도 여전히 보였고 까마귀 떼도 여전히 극성스럽게 날았다. 우리가 디고르를 지나 '칼스'로 다가가고 있을 때 비로소 아라랏은 슬그머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가 '분단의 장소'를 떠난 지 무려 4시간, 200킬로미터 넘게 달릴 때까지 아라랏은 우리를 그렇게 추격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 시간을 더 달려 아르다한을 지났을 대 길가의 언덕 위에 돌담들과 소와 양들 그리고 말리고 있는 양의 똥더미들이 보였다. 유목민들의 거처였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가질 겸 유목민들의 거처를 찾았다.
이 곳의 주인 셀키 아흐타시(60) 씨도 역시 셈의 후예답게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그들이 만든 요구르트, 버터, 치즈와 함께 양똥에 구운 밀가루 떡 '러버쉬'를 내놓았다. 그의 집은 아르다한에 있고 여름에는 그의 양 130마리와 소 9마리를 이끌고 이 곳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는 3남 1녀를 낳았고 여덟 살 된 손자 아란과 열 살 된 손녀 벨진이 있었다.
하흐타시 씨의 손녀이고 아르다한의 학교에 다닌다는 벨진 양은 우리를 위해서 민속 노래를 들려주었다. 애인을 기다리는 사랑의 노래라고 했다.
"장래 희망이 뭐지요?"
우리의 물음에 벨진 양은 야무진 대답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을 할 것이며 공부를 계속해서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르다한의 처녀들은 결혼을 빨리 하는 편이어서 대개 18~20세가 되면 결혼을 하는데 벨진 양은 그런 전통도 살리고 자신의 꿈도 이루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흐타시 씨 가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그들의 거처를 떠났다.
검은 바다를 건너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밤 열시가 넘었을 때에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그 이름도 음산한 "검은 바다" 흑해 변에 있는 호파 항에도 도착한 것이었다. 호파는 러시아 쪽에서 넘어오는 장사꾼들과 이상한 옷차림에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여자들 때문에 벌써 야릇한 항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목민의부락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우리는 고개 마루인 '참 게치디'에 도착했다. 해발 2,465미터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터 흑해 연안의 호파까지 가파른 비탈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커브를 돌 때마다 차는 비틀거렸고 백향목의 숲이 빙글빙글 돌며 지나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비탈길을 한없이 내려가면서 우리는 또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많은 커브길을 내려가느라고 아리랑 노래가 그렇게 길어졌는지도 몰랐다. 아르다한에서 흑해 변의 호파까지는 15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도 차가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한지 벌써 네 시간도 넘었지만 아직 계속해서 어둠에 잠겨 있는 비탈길을 곡예하듯 내려가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밤 열시가 넘었을 때에야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그 이름도 음산한 "검은 바다" 흑해 변에 있는 호파 항에도 도착한 것이었다. 호파는 러시아 쪽에서 넘어오는 장사꾼들과 이상한 옷차림에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여자들 때문에 벌써 야릇한 항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리의 분위기로 보아 아무래도 우리가 안심하고 묵을 만한 곳은 못 되는 것 같았음으로 우리는 불안한 가운데 얼른 식사를 끝낸 후 다시 차를 타고 해안을 달려 좀 더 큰 항구인 트라브존으로 들어갔다. 우선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해안 도로를 따라 러시아의 소치(Sochi) 항구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것이었다. 우리가 해안도로를 따라 가려고 했던 이유는 우리의 선조들이 화산석으로 막혀 있는 아르메니아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 왔다면 가로막혀 있는 코카서스산맥을 넘지 않고 해안을 따라 올라갔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을 듣고 호텔의 지배인이 펄쩍 뛰었다.
"해안 도로로 가려면 그루지아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그건 위험합니다."
그루지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림한 후 치안이 매우 허술해져 경찰이 강도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며 해안도로를 통행하는 버스 노선까지 위험하여 모두 폐쇄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할 수없이 트라브존 항에서 배를 타고 흑해를 건너기로 했다. 저녁에 트라브존을 출발, 밤새 11시간을 건너야 소치항구에 도착한다는 지루한 뱃길이었다. [출처] 제 3 부 나그네길-검은바다를 건너서 | (일보전진 격동의 역사) |작성자 요쉬야후
소치로 가는 배는 역시 러시아로 들어가는 장사꾼들과 여자들로 초만원이었고 배안의 무도장은 밤새 디스코 춤을 추는 남녀로 붐비고 있었다. 배가 트라브존 항구를 떠나자 날은 어두워지고 배는 밤새 '검은바다'를 건넜다. 이제 우리는 아라랏을 떠나 검은 바다로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성경이라는 택스터가 우리에게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우리가 선조들이 이동했던 그 루트를 맨손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우리는 선실에 들어갈 생각도 않은 채 뱃전에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벽 다섯시에 일출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두운 밤을 뚫고 멀미에 시달려 가며 검은 바다를 건너오느라 우리는 부산스러웠지만 그러나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