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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壯子)
(병)Zhangzi (웨)Changtzu.
(BC 365-290)
BC 4세기에 활동한 중국 도가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개요
<백과사전 / J. H. Ware, Jr. 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 신영복(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장자』莊子는 6만 5천여 자나 되는 대단히 방대한 책입니다. 『사기』에는 10만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망연합니다만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쿳)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
물론 당시의 제자백가도 적극적인 실천을 통하여 당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공동체의 문제 즉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문제의식에 있어서 제자백가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자가 추구하는 문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제도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장자』 독법입니다. 2천 년을 격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장자』를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과도기는 언제나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장자』 원문을 읽기 전에 장자 사상의 대강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逸民들의 경물중생輕物重生,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楊朱學派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 보존이나 생물학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장자』를 읽는 독법이 대체로 ‘소요유’와 ‘자유’의 측면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어두운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는 기인열전畸人列傳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익숙한 이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로서는 그분들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공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거명하기 어렵습니다만 기상천외의 기행奇行이나 주사酒邪까지도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치부되거나 불우한 예술가란 이름으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일제하에서부터 해방 전후의 격동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폭압적인 군사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는 실로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절망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장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탈의 논리로, 패배의 미학으로 읽혀졌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탈과 농세弄世라는 패배주의자들의 개인주의적 대응과는 달리 역사의 엄혹한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또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과 감옥에서 함께 살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해금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수용하기에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역사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패배의 미학이 훨씬 더 친근하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이러한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우리의 『장자』 독법이 부정의 철학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유가 단지 소요를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소요유는 장자의 고차원의 사회 철학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를 부정의 철학으로만 읽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미도중’曳尾塗中의 일화는 장자의 그러한 면모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초楚의 위왕威王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어 재상을 삼으려는 뜻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寧生曳尾塗中)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부정적이기는커녕 대단히 낙천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장자에게 끼친 노자의 영향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노자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견해와, 『장자』와 『노자』는 각각 달리 발전되었고 다른 경로를 통해 계승되어왔다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자』보다는 오히려 『장자』를 노장 철학의 주류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장자』에는 『노자』를 직접 인용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노자』와 『장자』가 다른 경로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은 특히 그 서술 형식이 판이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노자』의 서술 방식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한으로 하는 엄숙주의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과 전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읽었습니다만 『노자』에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이러한 차원의 정치학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자』의 정치학은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소요를 장자의 정치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궁극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노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쉰魯迅의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가 바로 장자의 그러한 면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장자』 「지락」至樂에서 소재를 취하여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을 풍자한 희곡 형식의 작품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만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500년 전에 친척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옷을 모두 빼앗기고 피살된 한 시골 사람이 다시 부활하여 장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간절하게 옷을 원하는 그 사람에게 장자는 그의 고답적인 철학을 펼칩니다.
“옷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법. 옷이 있다면 그 역시 옳지만 옷이 없어도 그 역시 옳은 것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고, 짐승은 털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이와 가지는 맨몸뚱이입니다. 이를 일러 ‘저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며, 이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위급해진 장자가 급히 호루라기를 꺼내어 미친 듯이 불어서 순경을 부릅니다. 현장에 도착한 순경은 옷이 없는 그 사람의 딱한 사정을 목격하고 장자가 옷을 하나 벗어 그 사람이 치부만이라도 가리고 친척을 찾아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러한 순경의 제안을 끝내 뿌리치고 순경의 도움을 받아 궁지를 벗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작품의 전편을 ‘발가벗겨진’ 분위기로 이끌고 가면서 그 사람의 절실한 현실인 ‘옷’과 장자의 고답적인 사상인 ‘무시비관’無是非觀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장자 철학의 관념성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정점은 장자가 미친 듯이 호루라기를 불어 순경을 부르고 순경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대목입니다. 장자가 호루라기를 불다니 여러분도 상상이 가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점에서 루쉰의 대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극적 대비를 통하여 장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의 무시비無是非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논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권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장자 사상이 권력에 봉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원용되었을 뿐이며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가 장자에 대한 일반적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묵儒墨의 천명天命 사상이나 천지론天志論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장자 사상은 반체제적인 부정 철학否定哲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 부정의 해방론이라는 평가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해방은 어디까지나 관념적 해방이며 주관적인 해방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장자 철학은 기본적으로 『노자』의 ‘상대주의’에서 입론立論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상대주의적 측면을 한층 심화하여 공간적, 시간적으로 확장해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사상적 영역이 새롭게 확장된 것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노자의 사회성과 실천성이 탈색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논어』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답습의 논리이며, 기득권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당 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내편內篇 「소요유」에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초월이 바로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常識人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局量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칭찬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초월하지 못한 단계에 있습니다. 세번째 단계로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유유소대자’猶有所待者,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단계가 장자가 절대 자유의 단계로 상정하고 있는,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입니다. 소요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신인神人·지인至人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가 장자의 이른바 ‘절대 자유’의 경지입니다.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 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기』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에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몽蒙(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동북부)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이며, 양혜왕梁惠王·제선왕齊宣王·맹자와 동시대인으로서 박학하였고, 근본은 『노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이란 곳은 장자 당시에는 송宋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송나라에 대해서는 앞선 『논어』 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은殷나라 유민들의 나라입니다. 송나라는 옛날부터 사전지지四戰之地라고 불릴 정도로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전화戰禍를 입었던 불행한 나라였습니다. 전국시대를 통하여 이 지역만큼 전란의 도가니에 휩싸인 곳도 달리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기아飢餓와 유망流茫 등 이 지역의 백성들이 겪은 모진 역사가 바로 장자 사상의 묘판苗板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칠원리漆園吏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生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反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construct) 질서를 해체(deconstruct)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기피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 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공자의 무리’ 즉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推察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읽는 『장자』는 4세기 서진西晉 때의 곽상郭象이 그때까지 전해오던 여러 『장자』본들을 정리하여 6만 5천여 자 33편으로 편집하고 주를 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 다른 『장자』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금본今本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雜篇 11편 모두 33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자 사상의 정수입니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일곱 편입니다. 이 일곱 편은 장자 자신의 저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편과 잡편은 내편에 대한 해석으로 후인들에 의한 2차 저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齊物論」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自彼)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自知)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혜시惠施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 사와 생 그리고 가可와 불가不可,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不由)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亦因是也).
본문은 이어집니다만 여기까지만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혜시惠施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상대주의적 한계를 깨달아 사물의 한 면만을 보지 말고 하늘에 비추어 보고, 도의 중심(道樞)에서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풀이한 내용은 몇 군데 일반적 해석과 다소 달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풀이에 덧붙여 원문을 괄호에 넣어두었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번역서와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문법이나 용례에 있어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장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번역상의 차이가 있는 부분은 원문을 괄호에 넣은 자피自彼, 자지自知 그리고 방方에 대한 해석과 불유不由, 역인시야亦因是也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이 예시문은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이 압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제물론」에 있는 ‘기분야성야其分也成也 기성야훼야其成也毁也 범물무성여훼凡物無成與毁 복통위일復通爲一 유달자지통위일唯達者知通爲一’과 같은 내용입니다.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쫻之未
嘗 而況大軱乎 ―「養生主」
첫번째 예시문이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이어서 좀 쉬운 것을 골랐습니다. 위의 예시문은 앞뒤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고 전체 문맥 속에서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란 “포정이 소를 잡다”라는 뜻으로, 유명한 예화입니다. 백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이지만 바로 그 비천하고 비근한 예로써 도道를 설명합니다. 장자 특유의 풍자와 해학이 잘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양梁나라 혜왕惠王)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그 손을 놀리는 것이나, 어깨로 받치는 것이나, 발로 딛는 것이나, 무릎을 굽히는 모양이나, 쓱쓱 칼질하는 품이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상림桑林의 춤에 맞고 경수經首의 장단에도 맞았다.”
상림의 춤은 은나라 탕왕湯王이 상림이라는 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춘 춤이며, 경수의 장단이란 요堯임금 때의 음악이라고 전해지는 함지곡咸池曲의 한 악장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최고의 춤과 최고의 음악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에 탄복하고 조금도 힘들이지 않는 솜씨에 문혜군은 감탄합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위의 예시문은 이 대목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우선 그 내용을 읽어보도록 하지요.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
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
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
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
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포정이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 동안이나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術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道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어』의 ‘지지자知之者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 호지자好之者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와 통하는 경지라 할 수 있지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是故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 意仁義其非人情乎 彼仁人何其多憂也 ―「騈拇」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로 제목을 붙인 『장자』 번역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변무」騈拇에서 따온 것입니다. 먼저 예시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
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입니다.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치는 것(騈於拇者 決之則泣 枝於手者 ?之則啼)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天이 무엇이며 인人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하백河伯의 질문과 북해약北海若의 대답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何謂天 何謂人 北海若曰 牛馬四足 是謂天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 ―「秋水」
소와 말의 발이 네 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원문은 소개하지 않습니다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장자의 천과 인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예시문에서 여러분이 느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장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그야말로 거리낌 없이 풀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서술 형식과 전개 방식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장자 사상과 가장 잘 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요와 자유와 자연을 본령으로 하는 장자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는 대단히 높은 문학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그 문학성을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노魯나라 교외에서 갈매기를 잡아 묘당廟堂에 모시고 구소九푑의 음악과 태뢰太牢의 요리로 대
접했더니 3일 만에 죽었다. 백락伯樂이 말을 잘 다루고, 도공陶工이 점토를 잘 다루고,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한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구간에 묶어두니 열에 둘 셋이 죽었다. 점토와 나무의 본성이 어찌 원圓과
곱자와 먹줄에 맞고자 하겠는가.
위 구절에서 우리는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人을 거부하고 천天과 합일해야한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遁天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天帝의 속박(縣解)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天地」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진晉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槹)라는 기계를 소개합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분연히 낯빛을 붉히고 이야기합니다. 위 예시문은 노인이 자공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소개하는 이유는 기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는 화두로 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내용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풀어서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
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신랄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자공에게 댁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노인이 묻습니다. 자공이 공구孔丘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공자를 신랄하게 욕합니다.
그자는 많이 아는 체하고,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이
노래하며,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닌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심신의 속박에
서 벗어나야 비로소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겠네.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
느 여가에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을 어리석다 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게. (子非
夫博學以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 无乏吾事)
이 예시문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장자의 속뜻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지요.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 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1810년대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입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 파괴에 나섰던 것이지요. 기계가 사람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어요. 기계로 인한 실업, 즉 상대적 과잉인구를 문제로 파악한 것이지요. 이러한 러다이트 운동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기계와 기계의 자본주의적 채용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잘못된 운동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추방한 것이 아니라 기계의 채용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입니다. 기계의 효율성은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것으로 승인됩니다. 다만 그것이 자본의 논리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기계의 효율성이 노동 시간의 단축과 노동 경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자의 해고 즉 실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물론 틀린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적 채용 형식이 아니라면 기계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기계는 그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를 가지게 하고 그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로 인한 실업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가와 소비의 증대가 인간성의 실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
장자가 제기하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도道의 문제입니다.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나한테 먹을 가는 기계가 있습니다. 먹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더러는 이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가끔씩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이 기계는 자기 식대로만 움직입니다. 물이 없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갈고 있습니다. 이 기계가 먹물의 농담濃淡을 알맞게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최근 여론조사 전화가 부쩍 많이 걸려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것은 기계와 기계가 서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옆에서 보자니 가관이었어요. 이미 녹음된 질문이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쪽도 응답기가 돌아가는 것이지요. 기계와 기계가 서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법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猶可致也 惑者少也 二人惑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以天下惑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 「天地」)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厲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唯恐其似己也 ―「天地」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이 구절은 방금 예를 든 ‘삼인행이일인혹三人行而一人惑……’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입니다만, 언뜻 보기에는 잘못 끼어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문맥상으로는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물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의미로 연결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불치병자의 자식이 불치병자인 것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늘의 뜻에 거역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읽을 수는 없지요. 저는 한참 만에야 이 구절의 진의를 알아냈어요. 다름 아닌 각성覺醒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까닭은 문명론도 문명론이지만 자기반성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迷惑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天道」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
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
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목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軸 즉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
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
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의 예시문을 읽으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당상에 환공이 앉아서 책을 읽고 당하의 마당에는 백발의 늙은 목수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사가 시작되는 그런 연극 무대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눈앞에 펼쳐 보이듯이 자기의 주장을 매우 쉽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장자의 역량이 돋보입니다. 사실은 우리 강의도 이처럼 쉽고 비근한 예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고 반성하게 하는 예시문입니다. 내용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한계에 관해서 이보다 더 명쾌한 비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본문은 「천도」天道 13절의 일부입니다만 그 앞부분에서 ‘책’의 한계에 대하여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만 소개하기로 하지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
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
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
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年
今主人之鴈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周笑曰 周將處夫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山木」
이 예시문도 일부만 취한 것입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베지 않고 있는 나무꾼에게 그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不材)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장자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은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道와 비슷
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여러분의 고민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졸업 후의 취업을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재材와 부재不材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와 부재의 논의는 이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중간 지점인 절충의 자리에 서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장자 사상은 사실 재, 부재의 차원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재는 무엇인가의 쓸모입니다. 그리고 쓸모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개념입니다. 다른 것을 만드는 데 유용한가 유용하지 않은가 하는 수준의 것이지요. 오늘날은 상품 생산에 유용한가 그리고 그것이 팔리는 상품인가 팔리지 않는 상품인가가 절대적 기준이 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이란 대단히 애매한 표현입니다만 절충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양쪽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道에 노닐게 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를 닦는다는 것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절간의 선방에 앉아 있는 스님들의 일이라고 치부하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재, 부재의 고민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장자의 논리에 따르면 도道는 재와 부재를 조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도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주류 담론이던 부국강병 논리를 반성하고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국강병의 구체적 사업에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원을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도는 상품 생산에 유용한가 아닌가 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나아가 근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경쟁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조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각성이 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으로서는 여전히 재, 부재의 중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장자의 도란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위의 예시문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고 하며 빙그레 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그 웃음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제4편 「인간세」人間世에 있습니다. 그 내용만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장자의 진의는 여러분들이 짐작해보기 바랍니다.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
볼 만하였다. …… 구경꾼들이 장터를 이루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말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했다.
“그런 말 말아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버
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
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빈 배
方舟而濟於河 有虛船 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有一人在其上 則呼張歙之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
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 ―「山木」
「산목」에서 예문을 하나 더 골랐습니다. 축자逐字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체의 뜻을 중심으로 읽어보기로 하지요.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
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
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
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국강병이라는 전국시대의 패권 논리가 장자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었던가를 우리는 상상해야 합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패권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가치인가를 장자는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가 이처럼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고 나아가 최대한의 자유 개념을 천명한 까닭은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패권 경쟁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이러한 근본주의적 비판 정신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빈 배의 예는 너무 비현실적입니까? 자기를 비운다는 표현을 자주 접하기도 하지만 빈 배라 하더라도 내가 타고 있으면 빈 배가 될 수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지요?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장자의 ‘나비 꿈’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우리가 화두로 삼고 있는 관계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비 꿈’은 제2편 「제물론」의 제일 마지막 장입니다. ‘제물론’이라는 편명篇名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함께 그 의미를 새겨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제물齊物이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물物이 관계되고(齊)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 배라고 할 경우 “나는 어느 배에 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불필요한 것이지요.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비 꿈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齊物論」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장자를 몽접주인夢蝶主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 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의 핵심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相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나비 꿈’이 들어 있는 제2편 「제물론」에 대하여는 그 ‘제물론’이란 편명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사물(物)을 고르게 하는(齊) 것에 관한 이론(論)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물物과 논論을 고르게 한다(齊)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물物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理論, 즉 ‘물론’物論을 통일한다(齊)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편명에 대한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수용하는 태도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齊란 ‘고르게 한다’, ‘하나로 한다’, ‘가지런히 한다’, ‘같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제齊는 하나의 체계 속으로 망라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齊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分別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과 통일에 관한 것이며 앞서 읽은 방생지설方生之說에서 이야기한 모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전 독법인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이 구절의 끝에 나옵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습니다. 장자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일관된 주제인 관계론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입니다.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齊物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靜態的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整體性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因과 과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 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분 중에 별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이 ‘별 부스러기 회’입니다. 이름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는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지요.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돌멩이 한 개,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대폭발 이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物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름에서 매우 무한한 관계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불이성不二性의 세계입니다.
지금도 재미있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별 부스러기 회’의 나이 많은 분들이 회의 이름을 따로 만들어 ‘성진회’星塵會로 하였다고 했어요. 기성세대는 이름이 한자로 되어야, 권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한 실체감을 느끼는가 보다고 했어요. 그런 낡은 정서를 우습다고 했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진회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실체감이 사실은 불이성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 정서에 있어서도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나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별 부스러기 회’보다는 ‘별똥회’가 낫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농촌 정서가 없는 젊은 사람들은 똥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별 부스러기 회’의 정서도 이해는 가지요. 이를테면 별똥회라고 했을 경우 자칫 혜성 관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부스러기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달관의 정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을 것입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크게 보면 관계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예시문은 이 ‘나비 꿈’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혼돈칠규’渾沌七竅입니다.
혼돈과 일곱 구멍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儵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應帝王」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와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참다운 지식
雖然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 特未定也
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 ―「大宗師」
위의 예시문은 생략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늦게라도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함께 읽으려고 합니다.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
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물론 이 구절에서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나누고, 결국 하늘에 비추어보아야 한다(照之於天)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결론은 물론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이 구절을 읽으려고 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서 ‘지식’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는 ‘조지어천’照之於天의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의 체계에서는 진인眞人의 입장입니다만 이것은 객관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장자가 관념론자로 비판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가치 중립성과 지식의 당파성 문제로 논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소대 이후 당’所待而後當 즉 지식의 진리성은 소대所待 이후에 검증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소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소대는 다음 구절에서 반복됩니다. ‘소대자所待者 특미정特未定’이 그것입니다. 소대가 아직 미정이라는 것입니다. 특特은 ‘다만’ 또는 ‘아직’이란 의미로 읽습니다. 소대는 글자 그대로 ‘기다려야 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 유소대 이후 당’知有所待而後當이란 의미는 지식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란 한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所待者는 실實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소대자 특미정’이란 이 실實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 그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변증법에서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장자는 물론 이러한 논의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강의에서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지식과 진리성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 변동기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변화를 포용할 수 있는 구조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장자의 천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천은 진리가 수많은 진리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진리가 재材, 부재不材의 차원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人이며, 어느 것이 천天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장자의 고민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너무 딱딱한 이야기로 끝내는 것 같습니다. 지식론이 아닌 장자의 지혜론(?)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
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도척盜跖은 도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실은 공자 당시의 노나라 현인 유하계柳下季의 동생으로 무리 9천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대도大盜였습니다.
장자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도척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장자』에는 노자의 죽음과 장자 아내의 죽음 그리고 장자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물론 사실이라기보다는 장자 사상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지만 간단히 소개하지요.
노자가 죽었을 때 진일秦佚이 조상弔喪을 하는데 세 번 곡하고는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이를 본 진일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분은 선생님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조상을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네. 늙은이는 자식을 잃은 듯 곡을 하고, 젊은이는 어머니를 잃은 듯 곡을 하고 있구먼. 그가 사람의 정을 이렇듯 모은 까닭은 비록 그가 칭찬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하였을망정 그렇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비록 곡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하였을망정 그렇게 하도록 작용했기 때문일세. 이것은 천도天道에 벗어나고 자연의 정을 배반하는 것이며 타고난 본분을 망각하는 것일세. 예부터 이러한 것을 둔천遁天(천을 피함)의 형벌이라고 한다네. 자연에 순응하면 슬픔이든 기쁨이든 스며들지 못하네. 옛날에는 이를 천제天帝의 현해縣解(속박으로부터 벗어남)라 하였네. 손으로 땔나무를 계속 밀어넣으면 불길이 꺼질 줄을 모르는 법이라네.”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棺)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玉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으로 『노자』와 『장자』를 끝내자니 어쩐지 너무 소홀하게 대접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계속 공부하기를 물론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노자』와 『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묶어서 하나의 사회 변동 과정으로 이해하듯이, 『노자』와 『장자』도 하나로 통합하여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완성하게끔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레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서로 보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끝으로 잡편 「외물」外物의 끝 구절을 소개하고 마치기로 하지요.
이 구절은 여러분도 잘 아는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得兎忘蹄’의 출전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이지요.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노자』나 『장자』의 원전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노장’老莊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노장 사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득어망전’으로 끝내려는 것이지요. ‘득어망전’으로 끝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론의 관점에서 부언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의 전筌은 통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통발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이 통발(筌)을 그물(網)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전筌을 망網으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관계망關係網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한 천망(天網恢恢 疎而不淚)이나 제석천帝釋天에 있다는 인드라망網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든 ‘득어망망’得魚忘網이든 고기를 잡고 나면 그 고기를 잡는 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忘魚得網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시가 그리는 세상>
장자 해석의 오류
/ 노 중 평
<장자>를 해석하는 데에 필수로 갖추어야 할 학문은 금문金文이다. 금문을 이해한 다음에 금문을 이해하는 눈으로 <산해경>을 이해하고 나서 해석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기로 한다.
<소요유>에서 “북명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몇 천 리인지 헤아릴 수 없다. 그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붕이라고 한다. 붕의 등의 크기가 또 몇 천리나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고 이후에 풍이족에서 갈라져 나온 시조계통도
이 문장을 해석자들은 우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화로 해석하는 사람은 금문과 신화와 역사 공부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실수임을 모르고 있다. <장석주>선생의 해석 역시 이 오류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계시대에 붕을 탄 마고
곤鯤은 곤鯀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곤은 어족魚族 출신으로 중여곤衆艅鯀을 의미한다. 중여곤은 전욱고양顓頊高陽의 아들로 제곡고신帝嚳高辛의 뒤를 이어 유웅有熊의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 유웅의 유有는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에 있었던 웅熊으로 불리던 소국을 의미한다. 당시에 소국을 여러 음으로 호칭했는데,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다스렸던 청구靑邱의 구邱나 유가 소국(邑)이라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금문이 풍이족의 문자임을 증명해 준다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다’(魚化而鳥) 했는데, 어는魚는 우화에 등장하는 물고기가 아니라 어족魚族의 족표族表에 나타나는 물고기를 의미한다. 이 물고기를 곤鯤이라고 했는데, 실은 북명北冥에 사는 물고기라고 하여 북어北魚로 불렀다. 북어는 우리민족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고기이다.
검은 물동이(儉之東夷)를 탄 무당
이 물고기가 조선朝鮮의 선鮮자에 들어가 있다.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에 따르면 조선이라는 문자가 중여곤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이는 중여곤이 어족을 이끌고 조선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어를 큰 물고기인 곤鯤으로 불렀던 것이다.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려면 먼저 “뱀이 변하여 물고기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뱀이 변하여 물고기가 되는 것을 사화이어巳化而魚라고 한다. 이는 사족巳族이 분화하여 어족이 생겼다는 말이다.
사족의 조상은 풍이족風夷族이다. 풍風자는 궤几자 안에 충虫자가 들어 있는데, 충虫은 작은 뱀이나 살모사殺母蛇를 의미한다. 결국 사족巳族을 의미하는 것이다. 풍이족에서 바람이라는 문자가 나왔는데 모계시대에 힘이 센 여자들이 여러 남자들과 관계하는 것을 바람이라고 하였다.
고구려벽화 풍이족의 수호신과 시조 한인과 항영
풍이족은 1만 년 전에 한국桓國을 세우는데 주축이 되었던 종족이다. 풍이족을 이끌고 한국을 세운 분이 한인천제桓因天帝이다. 그러므로 사화이어巳化而魚가 먼저 있었고 어화이조魚化而鳥가 나중에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鳥는 붕鵬이다. 붕은 밤에는 붕이라고 하고 낮에는 봉황鳳凰이라고 하고, 남쪽에 있으면 주작朱雀이라고 한다. 임금과 함께 있어도 봉황이라고 하는데, 붕은 조선을 상징하는 새이다. 새정부가 들어서서 대통령의 휘장 봉황을 없앤 것은 나라의 부적을 없앤 것과 같아서 계속해서 나라에 불길한 조짐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熙는 단군왕검의 직계조상이 된다.
살모사를 들고 있는 아스타르여신상
장자가 <소요유>의 머리글에서 곤과 붕을 이야기한 것은 중여곤과 조선을 이야기한 것이다. 중여곤이 세운 조선의 크기에 대하여 말했다고 볼 수 있다.
무당들은 대감거리에서 대감을 상징하는 북어를 가지고 춤을 춘다. 대감大監은 단군왕검이 왕검이 되기 전의 벼슬 이름이다. 또한 무당이 무가사설에서 조선과 조선 백성을 “거므나 따에 희나백성”이라고 한다. ‘거므나 따’는 ‘儉之地’이고, 희나백성은 熙那百姓이다. 즉 ‘단군왕검의 땅에 희씨나라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희씨나라의 희熙는 황제와 싸워서 멸망한 유백국楡伯國의 유망楡罔의 3자 희熙를 의미한다. 희熙의 신臣은 유망의 신하이라는 뜻이고, 사巳는 사족, 즉 풍이족의 후예라는 뜻이고, 화灬는 웅족熊族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조선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말하면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장자해석서>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말장난에 불과한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문협부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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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 <장자> 송지영 역해, 동서문화사, pp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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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篇 소요유(逍遙遊) 제1
큰 것과 작은 것
1. 대붕도남(大鵬圖南)
북명(北冥)의 곤(鯤)이라는 고기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를 만큼 큰 것이었다.
곤은 변신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는데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조차 없는 그 몸뚱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면 하늘마저도 검은 구름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친 철이 되면 붕새는 남명(南冥)을 향해 난다. 남명은 곧 천지(天池)이다.
온갖 이상하고 기이한 것들이 실려 있는 <제해(齊諧)>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남명으로 떠날 때의 붕새는 바다 위 3천 리를 날개로 치고 날아오른 다음, 바람을 타고 9만 리
높이에까지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남명에까지 여섯 달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다.'
땅 위에는 아지랭이가 끼고 먼지가 날며 생물들의 숨결이 차 있다. 그런데도 하늘은 그저
새파랗게만 보인다.
그것은 하늘빛이 원래 푸르르서가 아니다. 다만 끝없이 먼 거리가 하늘을 파란 빛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9만 리 상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에는 이 땅 위가 다만 파란 빛으로
보일 것이다.
또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마루 파인 곳에 쏟은 한 잔 물에도 겨자씨 따위는 떠 있지만, 거기에 잔을 띄우면 그만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그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커다란 날개를 펴기에는 많은 양의 바람을 필요로
한다. 9만 리 높이로까지 날아오르면 붕새의 날개는 강한 바람의 힘에 의지하게 된다. 바람을 탄
채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나는 붕새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없다. 그리하여 붕새는 줄곧 남명을
향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매미와 발의새(작은 비둘기)는 그런 붕새를 비웃게 마련이다.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날아오르는 것마저도 힘에 겨워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떨어지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멀리 남쪽으로 9만 리나 날아가려고 하는 저놈의 기분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여행을 하는 것도 그렇다. 교외로 나가는 정도라면 먹을 것을 하루 분량만 준비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백 리쯤 되는 거리로 떠나는 사람은 하루 전에 쌀을 찧어 놓아야 한다. 만일 천 리 길을
떠날 사람이라면 석 달 전부터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매미나 발의새 따위가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세계에 사는 것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짧은 세월(小年)을 사는 것은 오랜 세월(大年)을 알 길이
없다.
아침에 돋아났다가 저녁이면 시들고 마는 조균(하루살이 버섯)으로서는 하루가 얼마나 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철을 사는 매미 또한 1년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짧은 세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이라는 나무는 천 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한다. 또 상고에
있었다는 대춘이라는 나무는 1만 6천 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해 갔다고도 한다. 이런 것들에
비한다면 수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가 부러운 나머지 그렇게 오래 살아 보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
2. 지인(至人).신인(神人).성인(聖人)
은나라 탕왕(湯王)과 그의 신하 극(棘)과의 문답에도 붕새가 언급되어 있다.
땅의 북쪽 끝에 어두운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것을 천지(天池)라 한다. 거기에 고기가 사는데,
그 등 너비가 몇천 리나 되며, 그 길이는 얼마인지 알 수조차 없다. 그것이 곤이다.
또 거기에는 붕이란 새가 있다. 크기는 태산 만하다고나 할까? 날개를 펴면 하늘은 검은 구름에
덮인 듯하다. 붕새는 바람을 타고, 빙빙 돌면서 9만 리 높이로 날아 오른다. 앞길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붕새는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남쪽을 향한다. 목적지는 남명이다.
참새가 비웃으며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우리는 기껏 날아 봐야 몇 길도 못올라가서 내려오고
만다. 그래서 이렇게 쑥대 사이를 푸드덕거리며 뛰놀고 있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저런 힘든 일을 하다니 정말 세상엔 별놈이 다 있는 모양이다"라고 한다.
크고 작은 것의 차이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지식을 길러 관리가 된 사람, 공을 세워 한 고을의 원이 된 사람, 재능을 인정받아 대신이 된
사람, 덕이 높다 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 그들 역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따지고
보면 이 참새와 별다를 것이 없다.
송나라 영자(榮子)는 그들을 속된 무리라고 비웃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방 같은
것에는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자신과 남, 안과 밖을 분명히 구분해서, 영예로운 것과 욕된
것이 자기에게 본질적인 것이 못됨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세속에 초연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참다운 자유를 얻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하늘에서 놀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표연히 또 땅 위로 돌아온다.
그렇듯 땅 위의 세상에 속박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바람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참다운 자유를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천지 자연에 몸을 맡기고 만물의 육기(六氣)에 따라 무궁한 세계에서 소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참다운 자유의 존재인 것이다.
"지인(至人)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神人)은 공적을 생각지 않고, 성인(聖人)은 명성에
관심이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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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유명한 대목.
"연작(燕雀)이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라고 말할 때 흔히 인용하는 부분.
<출처: smartmoya>
장자(壯子) 철학 고찰
중국(中國)에는 두줄기의 큰 사상의 흐름이 있다.하나는 공자(孔子),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儒敎)사상이고,다른 하나는 노자,장자를 비조(鼻祖)로 하는 도교(道敎)사상이다. 장자는 유교에서 주장하는 예의(禮儀)나 도덕(道德)이니 하는 것을 천지 자연 을 지배하는 어떤 위대한 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소꼽장난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았다.천지 자연은 그 보든 것을 포용한 채,아무 탈 없이 잘 운행되어 가고 있다.그런데,그 천지속에 있는 인간 사회만이 무엇 때문에 애써 이거다,저거다를 따지려 하느냐. 우리 인간들도 천지 자연의 일원으로서 너무 따지지 말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자고 했다 장자는 전구시대(戰國時代) 양혜왕(梁惠王),제선왕(劑宣王)과 동시대 인물이며 이름은 주(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몽(蒙)지방사람이다.노사광(勞思光)은 그의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에서 장자는 도가(道家)학설의 완성자이지,노자의 학설을 계승한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그가 저술했다는 ‘장자’에서는 숱한 우언(寓言)과 비유를 통해 그의 심오한 사상을 빛내고 있으며,우언에서는 특히 불구자들을 많이 등장시키고 있다.그들은 한결 같이 겉모습은 추하지만 그 마음은 매우 곱고 평안하다.외모는 번듯하지만 그 마음 속에 온갖 추악한 심정을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항상 불안한,불구자가 아닌 사람과 앞에서 말한 불구자와 비교해서 과연 누가 더 행복하냐?그러므로 미추(美醜)를 따질 것도 없고 따라서 시비(是非),선악(善惡)울 가릴 필요도 없다. 이는 모든 인위적인 잔재주를 농(弄)하지 말고 자연의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길이요,또 사실 인간은 그렇게 밖에 달리 할 도리가 없는 것이 라고 여러 가지 우화를 통해서 되풀이해서 역설하였다. ‘장자(壯者)는 총33편으로.크게 ’내편(內篇)과‘외편(外篇)’,‘잡편(雜篇)’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서 장자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내편(內篇) 7편으로,여기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 부연된 것이 ’외편‘15편과 ’잡편‘11편이다.각 편의 제목은 각각의 내용을 나타내 주 는 것도 있으나, (外篇) 15편과 (雜篇) 11편 이다. 각 편의제목은 각각의 내용을 나타내 주는 것도 있으나, (外篇) 과 (雜篇) 의 경우에는 각 편의 첫 구절에서 몇 글자를 취해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면 여기서 장자의 자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소요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읍니다.소요유란 정처없이 헤매며 노닌다는 뜻이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유교와 도교의 차이 중의 하나인 소박함이 잘 드러나있다.유가들이 어떤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획득하는 데 노심초사하는 모습과 보기 좋게 대조되어 있다.유가의 모든 것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이니,거기에 진실이 있을 리 없고,따라서 쉽사리 깨진다고 본 것이다.유가는 결국 장자에게는 오도된 인생의 한 길이라고만 보여졌던 것이다. <소요유>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편이나,장자의 근본사상인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설은 아직 제기 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지뢰(地賴)를 설명한 것으로 지뢰란 지상에 생기는 온갖 소리의 총칭이다.그 소리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람인데 도구나 바람자체에 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모양을 가진 구멍과 마주침으로써 소리가 생기는 것이다.- -큰 나무의 그 모양에 따라 성난 목소리나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듯이,사람의 마음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의 반응을 나타낸다.장자는 먼저 인간 번뇌(煩惱)의 온갖 모습을 묘사한다.하나 구멍도 바람이 없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고,여탄변접(廬歎變熱)이 있고,요일계태(姚佚啓態)가 있다.악(樂)은 허에서 나오고 습함이 버섯을 이루어지게 하듯이 인간의 감정 변화는 밤낮으로 앞서의 것과 서로 바뀌어 그 싹트는 바를 모른다.아서라,아서라,아침 저녁 이같은 변화가 생기는 것은 그 연유하는 바가 있어서 생기는 것 일까. -천뢰의 바람이 숱한 구멍에 각각 소리를 내게 하듯이,인간의 감정의 발생 배후에도 무엇인가의 존재가 예상된다.그것을 우주(宇宙)의 주재자라고 불러도 좋으리라.허나 그 주재자는 형체가 없는 것이고 인간의 눈으로서는 포착되지 않는 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그러나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한 번 그 이루어진 형체를 받게되면 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생명의 다하기를 기다린다.그런데 그 형체가 사물과 서로 거슬리거나 서로 마찰하면 그 생명이 다함이 달리는 말과 같아 이를 능히 막지 못한다.어찌 슬프지 않겠는가.평생을 고생하여도 그 성공을 보지 못하고,고달프고 피곤하게 일해도 그 돌아갈 바를 모르니 참으로 가엾지 않은가. -장자의 시대에는 유묵(儒墨)을 비롯한 제가 백가들이 다툼을 벌여 진리가 있는 곳을 흔히 잃곤 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물론이 “물론(物論)을 동일하게 한다”고 해석하는 것도 전혀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하나 장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제동의 이치를 명백히 하는 데 있다.- -여기서 만물제동의 이치가 제시된다.그 논릴가 난해한 것은 그 내용의 성질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의 이유는 장자가 혜시 등 궤변학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이 절의 ‘방생의 길’이 그 한가지 보기이다. 다만 궤변학자는 흥미 본위로 논리를 농(弄)했을 뿐인데 장자는 이것을 진리 발전에 이용하려 했다.- -대립과 차별로 가득한 세계는 사실인즉 인간의 작위(作爲)가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세계는 대립도 차별도 없는 ‘하나의 경지’라고 강조한다.더구나 그 하나인 자연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위 -꾸밈을 버리고 오직 자연의 운행(運行)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도에 대한 견해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도는 무(無)이고 일체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사물은 존재하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없으며 따라서 물과 물을 구별하는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쩨,사물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물과 물의 경계는 있지만 가치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하나의 기능, 특정의 도를 확립하고 스스로 높은 경지라고 자랑하는 것은 무한의 도(道)를 훼손하는 것이다. 모든 걸 가능의 상태인 체로 남겨 두어 하나의 작은 도로 만들지 않는 게 성인의 도이다.- -도가 하나라는 것은, 도가 쪼갬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사물을 쪼갠다는 숙명을 갖고 있으므로 ‘도가 하나이다.’할 경우에 그 하나는 一 二 三의 一, 다수에 대한 일을 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말로써 도의 본질을 표현하려 하면 불가불도를 ‘많음’인 무한의 세계로 끌어들일 염려가 있다.- -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분석을 허락하지 않는다.이것에 비해 말은 분석을 사명으로 하는 것이며, 대립 차별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만물제동의 입장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이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은 인간의 눈에만 미인으로 비치는 것이며, 인간이외의 동물에게는 아름다움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시비선악 등의 가치도 인간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상대적인 것이다. -만물을 남김없이 옳다 하고서 이것을 따뜻하니 감싸는 태도, 즉 만물의 가치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일체를 긍정하는 것은 만물제동의 경지 바로 그것이다.- -무릇 어떠한 미덕(美德)이라도 이것을 의식하고서 행할 때에는 오히려 악덕(惡德)으로 바뀔 위험성이 다른다.다만 인위를 그만 두고 자연 그대로 내맡길 때, 그것은 무한의 미덕으로 태어날 근원이 된다.
그런데,이 두 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유교(儒敎)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서 먼저 개인적인 인격을 수양한 후,이것을 확충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千下)를 하여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인 데 반해,도교는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오직 천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 모든 일을 운명이 명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진정 행복한 생활이 된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두 사상이 주장의 결과도 또한 대조적으로 나타났다.유교는 중국 사회의 상류계급에 침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만들었고,도교는 일반 서민 사이에서 신봉되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 해 주었다.다시 말해서 유교는 귀족적이 되었고 도교는 훨씬 서민적이 되었다.유교는 다분히 정치적인데 반해 도교는 상당히 종교적인 경향을 띄었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老莊)사상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지만 같은 계열의 사상이면서도 두 사람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노자는 보다 정치적이고 장자는 보다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리하여 장자의 사상은 그가 죽은 후 후대(後代)에 도입된 불교사상(佛敎思想)을 수용(收容)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쳤고 또 불교를 중국식으로 소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있다.
여기에서 각 편의 내용을 미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내편> 7 편을 보면,다음과 같다.
제 1편 <소요유>(逍요유) 여기에서 속된 세상을 초월해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지인(지인) 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제 2편 <제물론>(祭物論) 초월적인 입장에서 만물은 제일(第一)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제 3편<양생주>(養生主)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한갓 부수물일뿐, 생명의 근본, 곧 주인은 될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양생주한 생명이 근본이 되는 자연의 본성을 기르는 것이라 풀이된다.
제 4편 <인간세>(人間世)인간세란 사람이 살아가는 해상을 가리키며 , 장자는 이 속세에서 처신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보았다.
지 5편 <덕충부> (德充符) 이 편에서는 덕이 마음속에 충만하면 외부의 사물에 부응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려면, 자신의 형구아(形軀我) 를 잊고 자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제 6편 <대종사>(大宗師) 대종사란 크게 받들어야 한 스승을 말하며, 이것은 곧 자연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제 7편<응제왕>(應帝王) 응제왕이란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기고 자기의 형세를 잊을 수 있으면, 제왕(帝王) 조차도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외편> 15 편은 모두 첫 구절의 몇 글자를 취하여 제목으로 삼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8편 <변무> (辯拇) 아름다움과 추함 등이 존재하는 속세를 부정하고, 시비의 개념이 없는 도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제 9편 <마제>(馬蹄) 천하의 정치에 대한 무위(무위)의 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제 10편 <거협>(거협) 자연의 본성에 거스른 이의(仁義)는 세상에 해로움을 줄 뿐 이라는 내용으로 , 제목의 의미는 상자를 열고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는 뜻이다.
제11 편 <재유>(在宥) 노자의 설을 부연 설명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 다음의 <천도>(天道), <천운>(天運) 으로 이어진다.
제 13편 <천도>(天道) 이 편은 특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먼 내용이 많아 후세의 학자가 다시 쓴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제 14편 <천운>(天運)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없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제 15편 <각의>(刻意)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으며, 장자의 후대에 쓰여졌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 16편 <선성>(繕性) <刻意>편과 마찬가지로 장자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후세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 내용 역시 보잘 것이 없다.
제 17편 <추수>(秋水) 모두 일곱 개의 우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자] 가운데에서도 명편으로 알려져 있다.
제 18편 <지락>(至樂) 인생에 있어서의 지극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그 해답을 무위(무위)에서 갖고 있다.
제 19편 <달생>(撻生) <내편>의 <양생주>를 부연 설명한 것으로 <양생 (양생) 에 통달한다> 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 20편 <산목>(山木) <내편> 가운데 ,인간세>의 내용을 재미있는 우화로 바꾼 것이다.
제 21편 <전자방>(田子方) <내편>의 <덕충부>의 내용을 확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잡편>11편 역시 본문의첫째 구절에서 제목을 따 왔으며,그내용은 <외편>과 마찬가지로 <내편>의 내용을 부연한 것이다.
북명에 물고기가 있다.그 이름은 곤이라 한다.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 지 모른다.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그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모른다.힘찬 기세로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곧 남명으로 날으려고 한다.남명이란 천지를 말한다.제해란 괴(怪)를 아는 자이다.해가 이르기를 ‘붕이 남명으로 옮길 때 물이 삼천 리를 치고,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구만 리,여섯 달을 난 뒤에야 쉬는 자’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상상력을 펼치는 이야기이며,우리 인간이 생각지 못한 넓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여기서 제해란 세상에서도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적고 있는 사람이다.
야먀며,티끌이며,생물의 숨결로서 뒤섞여 있는데도 하늘이 창창함은 바로 제 빛일까.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그 아래를 굽어보아도 또한 그러할 뿐이다.또 무릇 물이 얕으면 큰배를 띄울 수 없다.물 한 잔을 봉당의 움푹한 곳에 쏟으면 티끌이 바로 배가 되지만 잔을 놓으면 곧 땅에 닿는다.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바람이 약하면 그것이 큰 날개를 띄울 수 없다.그러므로 하늘로 구만 리나 올라가야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있게 된다.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지게 되어 붕(鵬)의 진로를 가로막는 자가 없다.그리하여 남명을 향하여 나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먀(野馬)라는 것은 아지랑이를 뜻하며,들을 달리는 말을 닮았기 때문이라 한다.구만 리의 높은 하늘에 있는 대붕의 눈으로 본다면,지상의 온갖 빛의 차이는 사라지고 다만 청 일색이 있을 뿐이다.
장자는 근본적 사상인 만물제동(萬物齊同),절대 무차별의 경지를 암시하고있다.이는 기존의 유교사상에 반하는 것으로 유교에서 군과 신하 그리고 백성의 행동을 구분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조와 학구가 이것을 비웃으며 가로되,
‘나는 결심하고 날아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가 닿는다. 때로는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다.그런 형편인데,어찌 구만 리나 남쪽으로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교외에 가는 사람은 세 끼만 먹고 돌아와도 매가 아직 부르다.백 리를 가는 사람은 저녁에 양식을 마련하고 천리를 가는 사람은 석 달 전부터 양식을 모은다.하지만 이 두 벌레야 그런 것을 어찌 알겠는가?
조와 학구는 매미와 산비둘기를 말하며,이는 더 큰 세상을 모르고 현실에 얶매어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가리킨다.고로 미추(美醜),시비(是非)는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결코 어떤 일정한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 한다면 우리는 매미나 비둘기수준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앎은 한 벼슬을 감당할 뿐이고,행실이라야 한 고을에 뛰어날 정도이고 덕이 한 임금과 합하여 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시야(視野)는 이 메추라기정도이다.
그러나 송나라의 영자는 이것을 비웃었다.세상이 칭찬을 한다 해도 더 애쓰는 일도 없고,그르다 해도 기가 죽지 않는다.안팎의 구별을 정하고 영욕의 경계를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그로서도 아직 정립(定立)되지 못한 게 있다.저 바람은 다스리면서 나들이하는데 그 기분이 가뿐한 것이 자뭇 좋았다.보름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그는 복을 가져오는 것(바람)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이는 걷는 것을 면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기대 하는 바가 있는 자 이다.그런데 천지의 바른 것을 타고 육기의 분별을 다스리며,이리하여 무궁 속에 유유자적하는 자는 또한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에게는 자기가 없고 신인에게는 공이 없고 성인에게는 명(名)이 없다’고 한다.
-이 글은 세속의 가치평가에 대해 얶매어 진정한 가치를 지나쳐버리면 않된 다는 교훈을 가리키며,<지인><선인><성인>은 모두 도를 깨친 사람으로 반드시 단계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큰 나무가 있는데,사람들이 이것을 가죽나무라고 부르네. 그 큰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 가 없고,가지는 비비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네. 길에 세워 두어도 목수는 거들떠 보지도 않네.
지금 선생의 말은 이와 같이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는 지라,뭇사람들이 모두 외면하던데...’
장자가 가로되 ‘선생만이 너구리나 삵쾡이를 보지 못하셨구료.몸을 낮추어 엎드렸다가 놀러 나오는 자를 엿봅니다.동서로 날뛰고 높고 낮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기벽에 걸리거나 망고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 저 검은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습니다. 이는 큰 일을 능히 할 수 있지만 쥐를 잡지는 못합니다. 지금 선생은 큰 나무를 가지고서도 그 쓸모 없음을 근심합니다.
어째서 이것을 무하유의 고을,광막한 들에 심어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대로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잠을 자려하지 않습니까?
도끼에 일찍 찍히는 일도 없고,만물의 해를 입지 않는 자는,쓰일 만한 곳이 없다 해도 조금도 괴롭거나 곤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은 우애로 벗을 삼아야 할 존재이다.에베레스트 산에 사람이 끝내 올 갔을 때 서방에서 흔히 쓰는 말은 ‘에베레스트의 정복’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장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를 가지지 못한다.좋게 말한다 해도 ‘에베레스트와 벗 삼았다’했을 것이다.
도교의 사원(寺院)은 풍경을 꿰뚫고 하늘 높이 솟아나 있지 않으며,언덕을 에뒤에 새집처럼 자리 잡고 있으며,나무들의 행렬 뒤에 서서 환경 속에 침잠해 있다.
사람 역시 자연 속에 그 맥이 이어져 있다.사람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길은 자연의 도와 하나가 되고,거기를 통해서 도가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이 도교의 자연관이 중국말에 산수화(山水畵)에 큰 영향을 미쳤고,자연의 그 장대함과 그 도도함,계속성과 끝없는 운동을 인간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미미한 존재로 인간을 생각했던 것이다.
제 2편인 제물론(齊物論)은 장자의 생명이라 할 수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제물론이란 모든 사물이 제일(齊一)하다는 이야기인데,만물제동(萬物齊同),절대무차별의 논리가 전개된다.
남곽 자기가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크게 숨을 쉰다.멍청하게 일체의 다른 존재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안성 자유가 앞에 서서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어찌된 일이옵니까? 육체는 본디 고목처럼 될 수가 있고 마음은 본디 불꺼진 재처럼 될 수가 있는 겁니까? 지금 책상에 의지하고 계신 모습은 지난 날에 기대어 계셨던 모습과는 다릅니다.’ 자기는 말하기를 ‘언아,너도 기특한 데가 있구나, 그와 같은 물음을 하는 것을 보니.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너는 이것을 아느냐? 너는 인뢰(人賴)를 들었겠지만 아직 지뢰(地賴)를 듣지 못했어.혹 네가 지뢰를 들었다 해도 아직 천뢰(天賴)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 가로되,‘감히 그 방법을 묻겠읍니다.
’자기 가로되 ‘무릇 대지(大地)의 숨결을 이름하여 바람이라 한다.이는 일어나지 않으면 그 뿐이지만 일단 일게 되면 곧 만 가지 구멍이 사납게 울린다.너는 이 윙윙거림을 듣지 못했느냐?
산림이 흔들리자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코를 닮고 입을 닮고 귀를 닮고 옥로를 닮고 술잔을 닮고 절구를 닮고 깊은 웅덩이를 닮는 것,얕은 웅덩이를 닮은 것 같은 것이 있느니라.거칠은 소리, 화살 소리같은 소리,꾸짖는 듯한 소리,숨쉬듯 가냘픈 소리,외치는 듯한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듯한 소리, 소곤거리는 것같은 소리가 있느니라.
앞선 것이 윙하고 울리면 뒤따르는 것이 웅하고 울린다. 산들바람에는 작게 응하고 거친 바람에는 크게 응한다.
여풍이 그치면 곧 모든 구멍이 비게된다.그런데 너만이 홀로 나무가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이기도 하는 것을 보지 못햇느냐?‘
그래서 자유는 ‘부디 그 세 가지 음악 소리에 관한 이치를 들려주십시오.’ 말했다.
자기는 이것에 대답했다.
‘대지가 내뿜는 숨결을 이름하여 바람이라 한다.이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지만 일단 일어나면 지상의 모든 구멍이 소리를 발한다.너도 저 큰 바람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을 게다.
바람으로 술렁대는 산림(山林)속,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에는 수없는 구멍이 있다.그 구멍의 모양도 코를 닮은 것,입과 같은 것,귀 비슷한 것,옥로같은 것,술잔 모양의 것,절구처럼 생긴 것,움푹한 것,도랑 비슷한 것등 가지각색이다.
그 발하는 소리도 격류의 울림과 같은 것,활시위소리를 내는 것,꾸짖는 소리를 닮은 것,숨을 들이쉬는 듯한 것,외침소리를 연상시키는 것,울부짖는 것,깊고 희미한 것,애처로운 울림을 가진 것 등 여러 가지이다.앞선 자가‘윙’하고 부르면 이에 따르는 자가‘웅’하고 대답한다.
그러다가 심한 바람이 멎으면 모든 구멍은 호젓하니 조용해진다.그 뒤에는 다만 나무들의 가지가 소리없이 흐늘거리고 살랑거리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자유가 이르기를
‘지뢰는 모든 구멍의 그 소리이고 인뢰는 곧 비죽의 그것이군요.그렇다면 천뢰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이르기를
‘무릇 만 가지의 것이 바람이 불어대어 각기 같지 않은 소리를 내게 하는 데 그러므로 저마다가 스스로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스스로가 모두 그 소리를 내는 것이지,성난 소리를 내게 하는 게 따로 누구이겠느냐?
자유가 말했다.
‘가르침에 의해 지뢰란 숱한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인뢰란 피리 따위 악기의 서리임을 알았읍니다.그렇다면 천뢰는 무엇인지 묻고 십습니다.’
그러자 자기는 대답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람이 온갖 다른 것에 불어 그 온갖 물건이 저마다의 특유한 소리를 자신의 내부로부터 일으키게 하는 것,그것이 천뢰이다.만물이 발하는 오갖 소리는 만물이 스스로 골라 잡은 것임이 틀림없다.그렇다고 한다면,참된 노호의 소리를 발하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이겠느냐?’
-전절(前節)에서 흔히 바람소리라고 하는 것은 실인 즉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바람 그 자체에는 소리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특히 성난 외침이나 비명과도 같은 온갖 바람소리는 사실인즉구멍 그 자체의 모양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구멍 스스로가 골라잡은 것이라는 뜻으로 된다.하나 돌이켜 생각한다면,바람이 없는 곳에선 구멍도 없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
즉 지상의 소란은 소리 없는 바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소리도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람,그런 의미에서는 무(無)와도 같은 바람이 필요한 것이다.바꿔 말한다면,만물의 근원에는 無의 활동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물의 근원에 있는 無,잡다(雜多)한 현상의 근본에 있는 하나의 것,진재(眞宰),조물주(造物主)와 같은 사을 엿볼 수 있다.-
대지에는 여유가 있고 소지는 소심하다.대언은 활달하고 소언은 수다스럽다.사람이 잠을 잘 때에는 혼백이 뒤섞이고 깸에 있어서는 육체가 활동을 한다.더물어 접촉하여 소란을 이루고 나날이 마음으로서 싸우게 된다.
우유부단한 게 있고 음흉한 게 있고 세밀한 게 있다.조그만 두려움에는 조바심을 내기도 하나 큰 두려움에는 될어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그 발함이 기괄과 같다함은 범인이 시비를 다스리는 걸 말한다. 그 머무르기를 조맹과 같다 함은 범인(凡人)이 쟁취한 것을 지키는 걸 말한다.그 죽어가는 것이 추동과 같다 함은 모든 투쟁에서 날로 소멸(消滅)하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의 수렁에 빠져들기만 하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게 된다.또 상자 속에 틀어박힌 듯하다는 것은 늙어감에 따라 죽어가면서 도리어 도리에서 벗어나고 있는 인간을 형용한 것이다.이미 죽어가는 마음을 두 번 다시 회복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그 배후에 무엇인가 숨어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그것이 아니면 내가 없고,내가 아니면 喜怒哀樂을 취할 데가 없다.그렇다면 감정과 나자신은 서로 가깝다 하리라.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 지를 모른다.
진재(眞宰)가 있는 듯하지만 그 자취를 볼 수 없다.그 행하는 바는 믿을 수 있지만 그 모양을 보지를 봇한다.실체는 있지만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인체(人體) 중에는 백 개의 뼈마디,아홉 개의 구멍,여섯 개의 내장이 닜다.나는 어느 것과 더불어 치해야지만 할까? 그대는 이것을 모두 좋아 할 것인가? 아무래도 언 하나를 좋아한는 사사로움이 있게 되리라.만일 그렇다면 모두를 한결같이 종으로 여기란 말인가.모두가 종이라면 서로 다스릴 수가 없지 않을까.
반면,번갈아 가며 주인이 되고 신하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사실인즉 참된 주인이 있는 것이다.그 사실을 찾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그 참됨을 이롭게 하지도 손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몸의 각 기관(器官)은 저마다 독립의 기능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진재(眞宰)라고 할만한 것에 통일되어 있다. 그 전체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그렇다면 인간을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주재자의 존재도 역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죽지 않는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 형체가 바뀌면 그 마음도 또한 이것과 같을 것이다.어찌 큰 슬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사람의 삶이란 본디 이렇듯이 어리석은 것일까.아니면 나 혼자만 어리석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일까.
-만물제동(萬物薺同)의 논리를 풀이하려는 장자는 먼저 인생의 현실을 우리들 앞에 제시한다.인새은 엄격히 반성하면 반성할 수록 그것은 참으로 슬픈 것이다.-
무릇 말이란 뱉어 냄으로써 되는 게 아니다.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과연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아니면 안한거나 마찬가지일까.그래도 그것이 새 소리와 다르다고 하면 거기에는 어떤 구별이 있는 걸까.없는 걸까.
도(道)는 무엇에 가려져 있길래 참과 거짓이 있을까.말은 무엇에 가려져 있길래 옳고 그름이 있을까,참된 도는 어디에나 다 있고 소박한 말은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도는 소성(小成)에 가려지고 말은 영화(榮華)가려진다.때문에 유묵의 시비가 있다.이리하여 이 편이 그르다는 것을 저 편은 옳다 하고, 저 편은 옳다는 것을 이 편은 그르다고 한다.그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데,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밝은 앎에 따르니만 같지 못하다.
만물은 저것이 아닌 게 없고 이것이 아닌 게 없다.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으나 자기가 보면 보인다.따라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에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을 발생하는 설이라 한다.
그렇기는 하나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죽는 것은 또한 태어나게 된다.가능한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된다.옳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른 것이 있고,그른 것이 원인이 되어 옳은 것이 있다.그러므로 성인은 그같은 상대적인 설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 이치에 마추어 보는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옳음이다.
선인의 경지에서는 이것도 또한 저것이고 저것도 또한 저것이다.젃도 또한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도 또한 하나의 시비이다.그런데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아니면 또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대립을 지양한 경지를 ‘도추(道窮)’라고 한다.지도리는 고리의 한가운데에 걸려 무한히 회전하게 된다.옳은 것도 무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른 것도 또한 무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비로 대립하는 것은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도추(道樞)라는 것은 도의 요체(要締)란 뜻으로 추(樞)는 문짝을 열리고 닫히는데 중오한 역활을 하는 지도리이다 환중(環中)에 두어진 지도리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데,환중은 만물제동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가(可)를 가하다 하고 불가(不可)를 불가능하다고 한다.길은 이것을 지나 다니므로 이루어지고, 만물은 이것을 그렇게 일컬어서 그렇다고 한다.무엇을 그렇다고 하느냐? 그러한 것을 그렇다고 한다.무엇을 그렇지 않다고 하느냐?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만물은 본디 그렇다 하는 게 있고,만물은 본디 가하다 하는 게 있다.만물로서 그렇지 않은 것은 없고, 만물로서 가하지 않은 것도 없다.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정과 영,여와 서시,회궤와 휼괴를 거론하지만 그러나 도는 오직 하나로 되어 통할 뿐이다. 그 나뉨은 다른 한편에서의 이루어짐이고 그 이루어짐은 다른 한 편에서의 허물어짐이다.무릇 만물은 이루어짐도 허물어짐도 없이 통틀어 하나가 된다. 오직 달관한 자만이 통틀어 하나임을 안다.
이리하여 분별하는 법을 쓰지 않고 자연의 작용에 의지한다.자연의 작용이 즉 용(用)은 곧 통이다.통이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통하면 도(道)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를 체득하는 순간, 도의 극치에 도달한다.
도의 극치란 무엇인가.자연 본래의 길에 순종할 뿐 아니라,자기가 순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경지이다.
옛 사람들은 그 지혜에 있어 지극한 데가 있었다. 어디까지 이르렀느냐. 처음부터 사물은 있지 않다고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지진(至盡)이라 더 덧붙일 것도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붕’이 없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다음은 붕이 있기는 하나 처음 부터 붕이 없다는 데 까지 이르렀다. 시비가 나타나는 것은 도가 이지러졌기 때문이다. 도가 이지러지는 것은 애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과연 또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은 있는 것일까. 과연 또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은 없는 것인가.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있는 것은 소씨(昭氏)가 금(琴)을 탄주했을 때이고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없는 것은 소씨가 금을 탄주하지 않으므로서이다.
도에 대한 이 세 가지 견해에 따라 萬物薺同의 내용도 3단계로 나뉜다. 첫째, 모든 것이 무(無)이므로 일체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물은 존재하지만 물과 물을 구별하는 경계가 없으므로 만물은 일체(一體)이다. 셋째,물의 존재 그것에는 구별이 있지만,그러나 물의 가치는 모두 똑 같다.가치 상으로 보아 만물은 같다.소씨의 거문고에 관한 논의는 첫번 째에 의한 것이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 사광이 지팡이로 가락을 맞추는 것과, 혜자가 책상에 기대고 변설하는 것, 이 세 사람은 모두 그 재능을 다한 자로서 아주 극치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이것을 서책에 까지 기록되었다. 다만 그것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이로써 그것이 남보다 뛰어나게 다르다 하였으며,또한 그것을 좋아하여 그것이 남보다 뛰어나게 다르다 하였으며,또한 그 것을 좋아하여 이로써 그것을 남에게 밝히려고 하였다. 그것은 밝힐 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이것을 밝혔다.
때문에 혜자는 견백(堅白)의 어둠으로서 끝났다. 그리고 소문은 그 아들이 소문을 능가하지 못하고 평생을 두고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같이 하여 어떤 것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한다면,나라도 또한 이룰 수가 있겠다. 이 와 같이 하여 어떤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사물이나 나라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골의지요(滑疑之耀)는 성인이 원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이것을 자연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밝음에 의거함이라고 말한다.
천하는 추호의 끝보다 크지 않고 따라서 태산이 작다고 한다.상자보다 장수인 것은 없다고 하고, 팽조를 요절했다고 한다.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이미 하나인데, 또 달리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이것을 하나라고 말한 이상 또한 말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일(一)과 말로써 이(二)가 되고 일과 이로써 삼(三)이 된다. 그리고 나서 부터는 계산의 명수라도 계산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일반 범인은 말할 나위도 없다.그러므로 무에서 유로 나아갈 때에도 삼이 되었으니 하물며 유에서 유로 나아갈 때에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너무 많아 혼돈에 빠질 것이다. 차별의 세계로 나아가지 말고 도에 의지해야 한다.
무릇 도에는 처음부터 ‘봉(封)이 없었다. 말에는 처음부터 ’상(常)‘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畛)‘이 있는 것이다. 청컨대 그 진을 말하리라. 좌가 있고 우가 있고 논이 있고 의가 있고 나눔이 있고 구별이 있고 경쟁이 있고 다툼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래 논하지는 않는다.
육합의 안은 성인이 이를 논하기는 하지만 상세히 말하려 하지 않는다. 춘추는 세상을 다스리려는 선왕의 기록이다.성인은 상세히 말하지만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누려는 자는 실제로는 나누려하지 않는 것이고, 구별하는 자는 시제로는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가.
성인은 이것을 가슴 속에 품어버리지만 범인은 구별하고 남에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구별에는 나타내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선결이 왕에게 물어 가로되.
‘선생은 만물이 한 가지로 옳다고 하는 것을 아시오?’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면 즉 만물을 알지 못한다는 거요?’
‘내 어찌 그것을 알겠소. 하지만 시험삼아 그것에 대해 말하리라. 내가 일컫는 바 앎이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오,내가 일컫는 바 모름이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또 시험삼아 그대에게 물으리라. 백성이 습하게 자면 곧 허리병이 나서 편사한다. 그렇다면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에 살게 되면 곧 췌율순구한다. 그렇다면 윈후도 그러한가.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처인지를 그대는 아는가?
백성은 추환을 먹고, 미록은 천을 뜯고, 즉저는 뱀을 달다하고, 치아는 쥐를 즐겨 먹는다.넷중에서 어느 족이 바른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원숭이는 편저로서 짝을 삼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이다. 그런데 물고기는 이를 보고 깊이 들어가고 새는 이를 보고 높이 날으고 고라니나 사슴은 이를 보고 급히 달아난다.넷 중에서 어느 것이 천하의 올바른 색을 안다고 하겠는가? 나로서는 이를 보면 인의의 단(端)이나 시비의 도는 어수선하고 어지럽기만 하다. 어찌 능히 그 구별을 알겠는가?’
만일 인간이라는 한정된 입장을 떠난다면 이것들의 가치의 차별은 곧 소실(消失)되고 거기에는 미추(美醜)도 선악(善惡)도 없는 절대(絶對)의 세계가 나타난다.이것이 바로 만물제동(萬物薺同)의 경지이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어 가로되,
“제가 다른 선생께 들었읍니다만 ‘성인은 속된 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해를 좇지 않고, 해를 피하지 않고, 부름 받음을 기뻐하지 않고, 정해진 도를 좇지도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는 게 있고 말을 하면서도 말하려는 바가 없으며 진구의 밖에서 논다’라고 했습니다.선생은 그것을 맹랑한 말이라고 하셨읍니다만, 저로선 훌륭한 도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선생께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가 가로되,
‘이는 황제가 들어도 어리둥절할 것이다. 더구나 구(丘)가 어찌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대도 또한 역시 너무 성급하다. 달걀을 보고서 시야를 구하고 탄궁(彈弓)을 보고서 효자를 구하다니, 내 시험삼아 그대를 위해 망언하리라.그러니 그대도 한 귀로 흘려 주기 바란다.어떠한가?
일월과 이웃하고 우주를 옆구리에 끼고 만물과 문합하여 그것을 골혼에 드고 천한 자끼리 귀하게 여겨 서로 존중한다. 뭇사람은 속된 일에 고달프지만 성인은 그런 일에 우둔하다.만년에 걸쳐 한결같이 순수함을 이룬다.
만물은 모두 있는 그대로 있게 되고 성인은 그러한 만물 속에 감싸인다.
가령, 여기 말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것과 비슷한가. 혹은 그것이 어것과 비슷하지 않은가를 모르겠다.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 것은 사실인즉 서로가 더물어 비슷한 것이 된다.즉 이것은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시험삼아 이것을 말해 보기로 하자.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 또 아직 시작 이전의 시작이란 것이 있다. 그리고 아직 시작의 시작 이전의 시작이란 것이 있다.
유가 있고 무가 있다. 아직 시작 이전의 무란 것이 있다. 아직 시작의 시작 이전의 무란 것이 있다.
우리는 유무의 근원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유무를 논한다.그러면서도 유무의 과연 어느 것이 유이고 어느 것이 무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여기서 말했지만, 내가 한 말이 정말 말한 것인지, 말하지 않은 것인지도 또한 모른다.
무릇 대도에는 칭이 없고, 대변(大辯)은 말하지 않는다.대인(大仁)은 어질지도 않고 대렴은 겸(兼)하지 않고 대용은 남을 해치지도 않는다.
도는 드러나면 도리어 도가 아니다.말도 늘어 놓으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은 고정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염은 깨끗하면 도리어 참이 안 된다.용도 남을 해치면 참 용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위의 다섯 가지는 둥글게 되려는 것이지만 지나치면 네 모진 것에 가까와진다.
그러므로 지헤는 그 알지 못하는 곳에 머무르면 지극한 지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누가 말하지 않는 변과 도가 아닌 도를 알겠는가.만일 능히 이를 아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천부(天俯)라 할 것이다.이것은 딸아도 넘치지 않고 떠내어도 마르지 않는다.그러나 그 유래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보광(保光)이라 한다.
-변화란 하나의 물체가 다른 물체로 바뀌는 것이고, 거기에는 일(一)과 타(他)와의 차별이 있다.그러나 그것은 상식적인 입장에서의 것이고, 일체를 똑같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자기와 남과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변화가 찾아 오더라도 자기를 잃는 일이란 없다.살아 있는 자기가 있음에 동시에 죽어 있는 자기가 있다.인생만을 현실로 보는 것은 차별의 입장이고,
인생도 또한 꿈이라고 보는 게 무차별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만물제동의 이치로선 구별은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장자의 사상중에 핵심이 되는 만물제동(萬物薺同)의 내용을 소개했다.
자유라는 것은 만물제동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는 무위(無爲)라는 도교의 핵심사상을 행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경북대 철학과 동양자료실>